나는 허정승의 따님으로 총각머리 등에 진 처녀이건만
광청고을 안 처녀의 몸으로써 장차 부모의 명령대로 혼인을 하여야 할 몸이고
이러하니 앞으로 혼인을 하자 하면 내가 그 행동을 한번 하고 싶으오니
서로 반대로 나의 입성은 영감이 입고 영감의 입성은 내가 입어
남도 자는 야밤에 단둘이서 이날이 새도록이라도 새각시놀이를 하기가 어찌하오리까
- 광청아기본풀이에서
신화는 신(神)에 대한 이야기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말이 아니다.
신화는 신성(神聖)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성이 어디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전하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문득 신성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신화다.
우리가 거듭 보아왔거니와, 그 신성은 능력보다는 사연에 있다. 사연으로부터 능력이 나온다. 주인공들의 몸짓 하나 하나, 숨결 하나 하나에서 배어 나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몸을 적시는, 그리하여 혹은 겨자씨만큼 혹은 태산만큼 우리를 바꾸어놓는 그 무엇이 신성이다.
저 먼 곳에서 고고하고 위대하게 내려다보면서 명을 내리는 식의 신성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성이 아니라 억압일 뿐이므로. 내가 믿는 것은, 피부로 와 닿고 가슴으로 스며드는 구체적인 삶의 사연뿐이다.
신성은, 한도 끝도 없다. 신성을 발현하는 사연들은 참으로 많기도 하다.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사연에서라도 신성을 찾을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 사연들이 모두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당겨서 그들로 하여금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 거울로 삼고 등불로 삼게끔 하는 힘을 가진 그런 사연이 신화가 된다. 그렇게 백년 천년 살아 숨쉬어 온 사연이 진정한 신화가 된다.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그러한 사연들이다.
여기 또 다른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신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를 돌이켜 곱씹어 보도록 하는 이야기들이다. 과연 신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성조씨 안심국이 신이 된 내력
성조(成造)의 본은 어디인가. 서천국이 본이었다.
부친은 천궁대왕 모친은 옥진부인, 조부는 국반왕씨 조모는 월명부인,
외조부는 정반왕씨 외조모는 마야부인이고 배필은 계화부인이었다.
성조 부친 천궁대왕이 옥진부인과 부부를 이루어 사는데 대왕 나이 서른 일곱 부인 나이 서른 아홉이 되도록 무릎 아래에 자식이 없었다.
부인이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다니며 갖은 공을 들이고 세상에 갖은 덕을 베푸니 공든 탑이 무너지고 심은 나무가 꺾어질까.
하루는 초경에 꿈을 꾸니 검은 새 두 마리가 푸른 벌레를 문 채 베개 양쪽에 앉아 있고
국화꽃 세 송이가 베개 위에 피어났다.
이경에 꿈을 꾸니 자미성(紫微星)이 부인한테 내려와 금쟁반에 붉은 구슬 세 개를 굴렸다.
삼경에 꿈을 꾸니 방안에 오색 구름이 모여들고 선관이 노란 학을 탄 채 구름에 싸여 다가와 말했다.
“나는 도솔천의 왕인데 부인의 정성과 공덕이 지극하니 하늘이 감동하고 부처님이 지시하여 자식을 점지하러 왔습니다. 아이 이름은 안심국이라 하고 별호는 성조씨라 하옵소서.”
부인이 그 달부터 잉태를 해서 열 달 만에 아기를 낳으니 옥 같은 귀동자였다.
꿈에서 가르쳐준 대로 아기 이름을 안심국이라 하고 별호를 성조씨라 하였다.
성조가 자라나는데 세상 재주를 한데 모아놓은 듯 총명함과 재주가 비할 데 없었다.
하루는 그가 인간세상을 두루 살펴보니 옷나무에 옷이 걸리고 밥나무에는 밥이 열고 국수나무에는 국수가 열려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는데,
사람들이 집이 없이 수풀을 의지하며 유월 염천 더운 날과 백설 한풍 추운 시절을 어렵게 피하고 있었다. 성조는 인간세상에 집을 지어 이름을 오래도록 전하리라 생각하고 집 지을 나무를 찾아서 지하국으로 내려갔다. 지하국에 내려가서 사방을 바라보니 온갖 나무가 다 있는데, 한 나무는 산신이 좌정하여 못 쓰겠고, 또 한 나무는 당산(堂山) 지킨 나무라서 못 쓰겠고, 어떤 나무는 까막까치 집을 지어 못 쓰겠고 한 그루도 쓸 나무가 없었다.
성조가 나무 없는 사정을 역력히 기록해서 천상에 높이 올라 옥황 전에 상소하니 상제가 기특히 여겨 제석궁에 명하여 솔씨 서말 닷되 칠홉을 내려주었다.
성조는 솔씨를 받아 인간세상 내려와서 무주공산에 다다라 여기저기 심어놓고 제 나라로 돌아왔다.
어느덧 삼년이 흘러 성조 나이 열여덟이 되자 천궁대왕 옥진부인이 신하들을 모아놓고 나랏일을 의논한 후 성조의 신부를 간택하도록 했다.
이때 좌정승이 엎드려 아뢰기를 황휘궁에 한 공주가 있는데 자질이 아름답고 숙녀 기상이 되니 그곳에 청혼하라 했다.
대왕이 옳게 여겨 황휘궁에 청혼하니 선남선녀간에 혼인이 맺어졌다. 성조는 금관 조복 정히 입고 사모 관대 높이 쓰고 옥가마에 오른 채 황휘궁에 들어가서 전안의 예를 행하고 금실로 인연을 맺어 황휘궁 공주 계화씨를 평생의 짝으로 맞이했다.
성조가 신방에 들어 서로 술잔을 나눈 후 화촉을 밝히고 첫날밤을 보낼 적에 천정(天定)이 불리하고 연분이 부족했던지 계화씨 소박을 시작하니 날이 갈수록 박대가 심했다.
성조가 주색에 방탕하여 나랏일을 팽개치자 그를 시기하던 신하들이 나서서 벌주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법전을 살펴본즉 부모 불효하는 자와 현처 소박하는 자, 이웃과 불화하고 친척과 불목하는 자는 낱낱이 살펴 산도 없고 사람도 없는 황토 섬에 삼년간 귀양을 보내라 씌어있다.
대왕이 성조를 불러 삼년 귀양을 명하니 성조가 하릴없이 부모를 이별하고 무인도 황토섬으로 귀양길을 나섰다.
그때에 무사들이 성조를 모셔내어 수레 위에 높이 싣고 행색 없이 떠나가 강변에 이르러 성조를 배 한 척에 실어놓고는 양식과 의복을 실은 다음 양돛을 갈라 달고 닻을 감아 배를 띄웠다. 성조가 고물에 높이 앉아 좌우 산천을 살펴보며 이리 지척 저리 지척 범범중류 떠가는데 서천국은 점점 멀어가고 황토섬이 가까워왔다.
몇날 며칠 만에 황토섬에 다다라 선인들을 떠나보내니 무인지경 황토섬에 속절없이 홀로 남은 신세였다.
성조가 눈물을 친구 삼고 새 짐승을 벗을 삼아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지내다 보니 어느 결에 한 해가 가고 이태가 가고 삼년이 다가왔다.
성조가 오늘이나 소식 올까 내일이나 소식 올까 목을 길게 빼고 고국 소식을 기다리니 일각이 삼추(三秋) 같았다.
답답하고 한스러운 속에 하루하루를 지내는데 삼년이 지나가고 사년이 다 되도록 소식이 전혀 없다. 의복이 부족하니 소슬한 찬바람과 휘날리는 백설에 추워서 살 수 없고, 양식이 떨어지니 한끼 굶고 두끼 굶어 배고픔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산으로 올라가서 소나무 껍질 벗겨 먹고 바다로 내려가서 해초 나물을 캐어 먹어 목숨은 이었으되 여러 날 여러 달을 날음식만 먹다 보니 온몸에 털이 나서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세월이 다시 흘러 춘삼월이 되니 온갖 화초가 만발한데 갖은 새가 날아들었다. 촉나라 두견새와 농산 앵무새, 까막 까치 원앙새 제비 백학이 다 날아들었다. 성조가 두견새를 보고 탄식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청조(靑鳥)가 날아와 앉아 있다.
“반갑다 청조 새야, 어디 갔다 이제 왔나. 인적도 없는 곳에 봄빛 따라 너 왔거든 편지 한 장 가져다가 서천국에 전해 다오. 명월각 계화부인이 나와 백년 임이로다.”
편지를 쓰자 하나 종이도 없고 붓도 없다. 성조는 해진 관대 자락을 뜯어서 앞에 놓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버님 어머님 옥체(玉體) 무양(無恙)하옵시며, 부인은 서로 이별 수년에 부모님 모시고 귀체(貴體) 안녕하십니까.
이 남편은 황토섬 귀양 뒤로 곤란이 막심한 가운데 삼년 먹을 양식과 의복이 앞뒤로 끊어지니 그 춥고 배고픈 일을 어찌 다 기록할까.......
갖은 곡절을 설움으로 적어서 쓰기를 마치고 청조한테 편지를 맡기자 청조가 편지를 덥석 물고 두 날개를 훨훨 치며 둥둥 떠 날아갔다.
청조가 서천국을 바라보고 높이 날아 만경창파 섭적 건너 장안 큰길로 날아들어 명월각에 훨훨 날아드니 그때 계화부인이 봉황루에 높이 올라 봄빛을 구경하다가 귀양간 남편 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지난 가을 이별하던 저 제비 봄빛 따라 다시 와서 옛 주인을 찾건마는, 슬프다 성조님은 황토섬 귀양간 지 몇년이 지나도록 명월각을 못 오시는가? 새야 청조 새야, 유정한 청조 새야. 세상 천하 다니다가 황토 섬 들어가서 나의 낭군 성조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라도 알아다가 나한테 전해주렴.”
탄식하며 슬피 울 제 청조새가 내려와서 입에 물고 있던 편지를 계화부인 무릎에 떨어뜨렸다. 부인이 이상히 여겨 열어 보니 낭군의 필적이 분명한데 눈물이 어지러이 흘러 글발을 살피기 어려웠다.
겨우 읽기를 마친 후에 편지를 들고 남별궁으로 달려가니 옥진부인이 아들 생각에 시름이 병이 되어 자리에 누운 채 며느리를 맞이했다.
“어머님은 정신을 진정하시고 태자님 서간을 보옵소서.”
천만 뜻밖의 말에 옥진부인이 벌떡 일어나 앉아 편지를 읽는데 글자마다 시름이었다. 부인이 대성 통곡 울음을 울기 시작했다.
“대왕님도 무정하고 조정 신하도 무정하다. 우리 태자 성조 귀양간 수삼년에 어찌 풀 줄을 모르는고. 의복 없는 저 인생이 엄동설한 찬바람에 추워 어찌 살았으며 양식이 떨어지니 삼사월 긴긴 해에 배가 고파 어찌한고.”
부인이 설리 울자 계화부인과 궁녀들이 다 같이 울음을 울어 곡성이 분분했다. 그때 천궁대왕이 용상에 앉아 나랏일을 의논하다가 난데없는 울음소리를 듣고 사연을 알아보니 황토섬으로 귀양 간 태자의 편지 탓이었다.
대왕이 급히 편지를 받아서 사연을 읽어보는데 글자마다 설움이었다. 대왕은 눈물을 흘리며 금부도사를 불러 태자의 귀양을 풀어 입시하기를 명했다. 금부도사는 급히 일등 목수 불러들여 아홉 칸 배를 지어 스물네 명 선인들과 도사공을 호령해서 황토섬으로 향했다.
성조씨 안심국이 청조에게 편지를 전한 뒤로 답장이 오기를 아침저녁으로 바라더니 난데없는 배 하나가 바다에 둥둥 떠서 흘러오는 게 보였다.
성조가 상상봉에 높이 올라 배를 향해 소리쳤다.
“저기 가는 선인들아. 배고픔에 지쳐 죽게 된 이 사람을 구원하고 돌아가소.”
선인들이 바라보니 음성은 사람인데 모양은 짐승이었다.
“네가 짐승이냐 사람이냐?”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천국 태자 성조러니 화식(火食)을 못한 고로 온몸에 털이 났으나 어찌 사람이 아니리까.”
금부도사가 그 말을 듣고 황급히 배를 대어 예를 차리고 성조를 모셔 높은 자리에 앉게 하니 성조가 나라의 흥망과 부모의 존망과 여러 신하의 안부를 낱낱이 물었다.
일행이 인삼 녹용 고량진미로 성조를 봉양하니 온몸에 났던 털이 다 빠지고. 정화수에 목욕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으니 호걸 남아가 분명했다.
만경창파를 무사히 지나 서천국에 다다른 뒤 궁궐에 입시하여 부왕 앞에 절을 하자 대왕이 일희일비(一喜一悲) 기특히 여기어 나라의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다시 성조가 남별궁으로 향하니 어머니 옥진부인이 성조의 손을 잡고 수삼년 고생을 만 번이나 위로했다.
이날밤 삼경에 성조가 명월각을 찾아들어 계화부인 삼사 년 못 보던 정회를 낱낱이 풀어낼 제 그간 쌓인 애정이야 오죽했을까.
원앙베개 비취이불에 음양을 희롱하며 그 밤을 지낼 적에 도솔천궁 신령님이 성조씨 부부한테 열 명의 자식을 마련해 주었다. 아들 다섯 딸 다섯이 차례로 태어나서 일취월장 자라나니 그 복락이 비할 데 없었다.
세월이 훌훌 흘러 성조씨가 백발 노인이 되어 지난일을 생각하니 허무하고 슬픈 인생사였다. 문득 소년시절에 천상에 올라가 옥황상제를 뵙고 제석궁에서 솔씨를 얻어 심은 일을 생각하고 햇수를 헤아려본즉 사십구년이었다.
성조가 아들 다섯 딸 다섯 열 자식을 거느리고 길을 나서 나무를 살펴보니 그 사이 장성해서 숲을 이루고 있다.
성조가 열 자식을 거느리고 시냇가에 내려가 왼손에 함박 들고 오른손에 쪽박 들고 쇠를 일기 시작하는데 첫 철은 사철(絲鐵)이라 못쓰고 두 번째로 다시 일어 좋은 쇠 닷말, 중간 쇠 닷말, 거친 쇠 닷말을 얻어낸 다음 풀무 세 채 차려놓고 온갖 연장을 장만했다.
큰도끼 작은도끼, 큰 자귀 작은 자귀, 큰톱 작은 톱, 큰 집게 작은 집게, 큰 끌 작은 끌, 큰 칼 작은 칼, 큰 대패 작은 대패, 큰 송곳 작은 송곳, 큰 자 작은 자와 괭이, 호미, 낫과 큰 못 작은 못까지 온갖 연장을 마련한 후 서른 세명 목수를 골라서 집짓기를 마련하니, 비로소 인간세상 억조 창생들이 집을 얻어서 살기 시작했다.
경상도 동래지방에 전해온 「성조푸리」 신화의 사연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성조씨 안심국은 성주신 황우양씨와 마찬가지로 집을 지켜주는 가신(家神)이 된다.
성조씨 안심국은 황우양씨와 마찬가지로 ‘집을 잘 짓는 능력’을 갖춘 존재다. 황우양씨가 천하궁을 이룩한 데 비해 안심국은 인간세상 억조 창생에게 집을 지어주었으니 집의 신으로서 모셔질 만한 공덕이 더욱 뚜렷하다 할 수 있겠다. 위 이야기에서는 생략했지만 온갖 연장을 만든 다음 목수들을 이끌고 집을 지어 나가는 장면이 무척이나 활달하고 멋들어지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황우양씨가 그러했듯, 성조씨의 내력을 전하는 신화의 기본 서사는 ‘집짓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기본 줄기는 그가 결혼 첫날밤에 신부를 소박하고 밖으로 떠돌며 방탕하다가 벌을 받아 황토 섬으로 귀양을 간 후 기나긴 외로움과 배고픔의 날을 지내다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품에 안겼다는 것이다.
집의 신이라면 곧 ‘가정의 신’이 되는 셈인데, 그 내력을 보자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있다. 아내를 소박한 죄를 받았다가 겨우 풀려난 이가, 스스로 가정을 깨는 일에 나섰던 이가 가정의 신이 된다니 말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따라왔던 우리 신화의 논리상으로 보면 그것은 전혀 모순이 아니다. 신성(神聖)이 거기 있다.
안심국의 사연은 황우양씨 사연과 마찬가지로 가정 파괴의 위기를 서사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번의 위기는 특히 내부로부터의 위기다.
가정의 평화를 이루는 기본 축은 남편과 아내의 화합일 터인데, 안심국이 아내를 포용하지 못함으로써 불화를 낳은 것이다.
그러한 불화는 가족 전체의 불화로 이어지고 또한 나라의 불화로까지 이어지거니와, 이를 과장이라 할 수 없다.
가정의 평화가 없는 세상의 평화가 가능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결국 안심국은 무인지경 황토 섬으로 귀양을 가서 짐승과 같은 삶에까지 이르게 되거니와, 얼핏 의외일 정도의 가혹한 형벌로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찌 꼭 진짜 황토 섬이라야만 귀양이겠는가. 감싸 안아야 할 배필을 버리고 밖으로 나돈 순간, 사람들의 갖은 기대를 그렇게 저버린 순간, 그가 존재하는 곳은 이미 무인도 황토 섬이 된다. 그는 이미 온몸에 털이 나 방황하는 하나의 짐승이 된다.
황토 섬에서의 그의 외로움과 배고픔이란 황폐화된 그의 정신적 풍경의 신화적 대상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상황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벌판에 홀로 선 자신을 깨닫고, 어느 새 짐승과 같이 된 자신을 깨닫고, 인간을 향해 사랑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돌아옴은 시작이 된다.
청조를 통해 아내ꠏꠏꠏ부모가 아니라 아내다. 자신이 버렸던ꠏꠏꠏ에게 그리움과 사랑의 편지를 쓰는 행위가 곧 그것이다.
(그것은 왜 그리 힘들었던지! 입을 의복이 있고 먹을 양식이 있는 동안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통해 기나긴 유형은 비로소 마감이 되어 그는 아내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평화와 행복을 되찾는다. 바로 내 곁에 있음에도 애써 그것을 외면하기 일쑤인 그 사랑의 소중함! 거기 인간에게 전하는 신의 성스러운 뜻이 서려 있다. 안심국은 그 신탁을 몸으로 겪으며 깨달은 자가 되니 곧 가정의 신이 된다.
가족의 소중함을 그만큼 절실히 느끼면서 사람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굳이 부연하면, 그가 꼭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화의 신은 등불 같은 존재이고 거울 같은 존재라는 사실!)
생각해 보면 부부 가운데 특별히 남편에게 책임을 지우고 그를 귀양보낸 이 신화의 서사는 좀 각별한 데가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 부부간 화목의 열쇠를 쥔 것은 뭐니뭐니해도 남성이었다. 낯모르는 남녀의 결혼과 첫날밤, 거기 불화는 또 오죽이나 많았을까. 모르긴 해도 제 뜻에 맞는 짝을 만나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을 터이다.
그래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어우러져 사랑을 찾아내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여성은 어쩔 수 없이 그 숙명을 받아들이며 낯선 시집에서의 험난한 삶을 온몸으로 감수하는 것인데, 이와 달리 밖으로 겉돌 수 있는, 겉돌곤 하던 존재가 남성이었다.
그가 아내를 팽개치고 밖으로 나갈 때, 짐승이 되어 나돌 때, 가정이라는 배는 검은 안개 속에서 암초에 걸리게 된다. 아내를 박대하는 죄란 이렇게 무겁다는 것, 그것이 안심국 귀양에 얽힌 하나의 신성한 의미다.
툭하면 아내를 내치고 새 여자를 얻는 내용 일쑤인 가부장적․통속적 서사에 비하면 이 서사는 얼마나 신령한 것인지!
덧붙여 이 신화가 전해주는 신성에 대한 보편적인 깨달음 한 가지. 최악을 갈등과 고통을 겪어 본 자, 그가 신의 자격을 지닌다는 것.
더할 바 없이 존귀한 자리로부터 처절한 외로움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방황에 몸서리친 존재가 안심국이다. 세상사 생사고락의 섭리를 그만큼 깨우친 이가 또 있을까.
밝고도 밝은 거울이다.
성조씨 안심국이 인간에게 전해 준, 마흔 아홉 성상(星霜)을 건너뛰어 지어준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
한의 화신 광청아기
신의 종류는 신령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을 두루 돌보아주는 신이 있고, 나라를 보살피는 신이 있으며, 마을을 지켜주는 신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 집안을 돌보아주는 신이 있다. 집안을 보살피는 신은 곧 조상신인데, 그 사연이 꽤 독특한 것들이 있다. 여기 제주도 동김녕 마을 송씨 집안을 돌보아주는 신이 된 광청아기의 애틋한 사연을 본다. 「광청아기본풀이」가 전하는 내용이다.
제주 동김녕 마을에 송동지 송선주가 살고 있었다. 섣달 그믐이 이르자 송동지는 사또의 명을 받아 서울로 진상을 바치러 길을 떠났다.
산에서 나는 버섯과 바다에서 나는 우무 청각 미역 오징어 진상을 바쳐 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송동지는 광청고을 허정승 댁에 머물게 되었다.
저녁상을 받고 나니 날이 먹장같이 어두워져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상하게 초경 이경이 지나고 삼경이 가까워오도록 잠이 찾아오지를 않았다.
갑갑하게 앉았다가 마당에 나와 동서 사방을 둘레둘레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문밖 초당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송동지가 이상한 생각에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를 낮추어 문가에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보니 어여쁜 아기씨 하나가 총각머리를 풀어놓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송동지가 아기씨 모르게 뒤돌아서려 하는데 아기씨가 방문을 열면서 말을 했다.
“제주 송동지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안으로 들어오세요.”
송동지는 가슴이 뛰어 온몸을 달달 떨면서 가던 몸을 돌려 아기씨 방안으로 들어가 몸을 움츠려 앉았다.
“겁내지 말고 편히 앉으세요.”
올 줄을 미리 안 듯이 술상을 차려놨다가 내어놓고서 말을 한다.
“내가 이 밤중까지 혹시라도 손님이 나올까 하여 창문 밖을 살피던 차에 맞춘 듯이 손님이 나오셨습니다. 오죽 심심하면 이제까지 잠이 안 들어 여기를 오셨습니까? 잠도 안 오고 하니 이 술 한 잔을 드시고 내 뜻대로 심심풀이나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그리 합시다.”
술잔을 거푸 마셔 술이 족한 듯하자 아기씨가 말을 했다.
“나는 허정승 딸로서 총각머리를 등에 진 처녀이지만 장차 부모의 명대로 혼인을 해야 할 몸입니다. 장차 혼인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행동을 해보고 싶으니 내 옷은 손님이 입고 손님 옷은 내가 입어 야밤에 단 둘이서 날이 새도록 색시놀음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술에 취한 송동지가 끄덕끄덕 대답을 하니 어느새 놀음이 시작됐다.
송동지가 연분홍 저고리에 대홍대단 연분홍 치마 구슬족두리를 머리에 얹고서 앞을 보니 넓은 갓에 백도포를 입고 부채를 든 각시가 앞에 서 있다.
서로 눈을 바라보니 인연이 들어맞아 빛이 반짝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송동지도 정신이 없고 아기씨도 바른 정신이 간 곳 없어 서로 손을 마주 잡자 얼음 같은 손길이 구름 녹듯 녹아났다.
송동지 입은 연분홍 다홍치마가 벗어지고 아기씨 쓴 넓은 갓이 벗어지고 백도포가 꿈결처럼 훌훌 벗겨져 어느 새 두 몸이 한 몸이 되니 송동지도 온 세상이 제 세상이 되고 광청아기도 온 세상이 제 세상이 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먼동이 터올 때 송동지가 개도 모르고 쥐도 모르게 제 방 이불 속으로 돌아와 누우니 간밤의 일이 꿈만 같았다.
‘장차 이 일이 어찌 되려는가.’
아침 밥상이 들어오고 주인을 이별하여 문 밖을 나서서 영암 덕진다리 배진고달또 포구로 들어올 때까지 자꾸만 생각해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송동지는 배를 타고 고향에 돌아와 여러 달을 머물다가 다시 사또의 명을 받아 서울로 진상을 가게 되었다. 서울 진상을 마치고 돌아올 때 광청고을 허정승댁을 다시 찾아 유숙하는데 한시 바삐 날이 저물기만 기다려졌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송동지는 자기도 모르게 광청아기 사랑방으로 달려들고 말았다. 광청아기를 만나고 보니 아기씨가 옥 같은 얼굴에 서산에 비 내리듯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살펴보니 아기씨 흰 얼굴이 어느새 검은 얼굴이 되고 홀쭉하던 배가 큰 항아리같이 부풀어 있다. 아기씨가 송동지 베도포 자락을 붙잡아 놓을 줄을 모른 채 울음을 우는데 초경 이경이 지나고 삼경이 다가왔다.
그때 시절이 육지 여자는 제주에 못 가고 제주 여자는 육지에 못 갈 때인지라 송동지 영감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송동지는 아기씨가 울음 끝에 도포자락을 놓은 틈을 타서 얼른 문 밖으로 내달아 영암 배진고달또로 내려와 배 밑에 들어가 앉았다.
광청아기는 그 밤이 지나면 아버지 손에 죽을 생각에 흰비단 홑저고리에 대홍대단 홑단치마를 둘러입고 대바구니를 옆에 차고 불룩 나온 배를 이끌어 영암 덕진다리 배진고달또로 내려왔다. 고생 끝에 송동지의 배를 찾은 광청아기가 이물사공에게 말을 했다.
“송동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발판 다리나 놓아주면 어떻습니까?”
이물사공이 얼른 발판을 놓자 아기씨가 조심조심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리에 오르는데 무정한 이물사공이 발판다리를 안으로 들어 당겨 버렸다. 광청아기는 대바구니를 옆에 낀 채로 감태 같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물에 풍덩 빠져 얼음산에 구름 녹듯 녹아 버리고 말았다.
물때가 좋아지고 바다에 실바람이 불어오자 숨어 있던 송동지가 나와서 말했다.
“이물사공 고물사공아, 닻줄을 걷어 배를 놓아라.”
이물 닻 고물 닻을 당겨 사수바다로 배를 놓았는데, 송동지가 문득 바라보니 총각머리를 등에 진 아기씨가 이물 끝에서 배 발판을 밟고 올라오다가 물에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곡절이 있는 일이로다.’
송동지가 제주 고향으로 돌아와 동김녕 포구에 배를 들여매는데 송동지 막내딸아기가 뱃머리에서 아버지를 마중해서 돌아가려고 기다리다가 갑자기 허파에 바람이 든 듯 감태 같은 머리를 풀어헤쳐 놓고 부모형제도 몰라보면서 포구 안의 살대 같은 물결로 달려들려고 했다.
송동지가 깜짝 놀라 달려들어 막내딸 아기 허리를 붙잡았다.
“아가, 이게 웬 일이냐!”
그러자 막내딸 아기가 다른 사람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광청고을 허정승 따님 광청아기로다. 어야디야. 닻 감는 소리로구나. 긴 바다 긴 소리로 어서 놀아보자.”
그제서야 송동지가 광청아기 혼령이 막내딸아기에 의탁했음을 알고 잘못을 뉘우쳐 말을 했다.
“청춘의 원혼이나 풀어주자. 심방을 불러 굿을 하자.”
심방을 불러 용왕국으로부터 광청아기의 혼을 초혼 이혼 삼혼을 건져낸 후 송동지 셋째 아들을 양자로 세워 축문을 올리고 아기씨 맺힌 간장 서린 간장 일천 간장을 낱낱이 풀어주었다. 그런 뒤로 송동지 집이 별안간 부자가 되고 셋째 아들이 나라에 벼슬을 하게 되니 광청아기가 돌보아준 덕이었다. 이후로 송동지 집안에서는 대대로 광청아기를 조상신으로 섬기게 되었다.
한 마을도 아닌 집안의 신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아주 독특한 사연의 신화임에 틀림없다.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여 아기를 잉태한 후 버림을 받고 죽은 신이라니 말이다. 특별히 신의 혈통을 지닌 것도 아닌 이 평범한, 아니 문제 많은 여인이 신이 되다니!
한편, 송동지의 일도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무책임하게 한 처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의 집안이 신령의 덕으로 크게 일어나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이 우리 신화의 논리다.
광청아기는 단순한 한 여인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 욕망을 떨치지 못하고 외간 남자를 품은 그녀는 마음 한 구석에 깊은 욕망을 내재하고 있는 이 세상 여성의 상징적 표상이다. 그 욕망이란 인간에 의해 금지된 불온한 것이었지만 인간 이전에 신이 내린 것이었다. 남자 옷 여자 옷을 바꿔 입고 벌이는 그 변태로운 사랑놀음마저 말이다. 그 신성(神聖)이 유난하기도 하여 마침내 제 마음의 타는 불꽃에 의해 자신을 불사르고 만 광청아기.
그 마음의 불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남아 모진 한(恨)이 되었다. 그 한(恨)이 신의 숨결임을 가슴으로 깨달은 송동지다.
숨기고만 싶었을 자신의 부끄러운 지난 일을 드러내고 그 신성한 한을 품어서 솜솜이 녹여 준 송동지다. 그에게 신의 가호가 내린다는 것이 어찌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나를 넘어서는 어떤 힘과 하나 되어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 신성이라 했다. 그 초월이란 맺힌 것의 풂을 통해 이루어진다. 딱히 광청아기의 맺힌 한의 풀어짊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광청아기 속에 자신을 투영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마음 한구석 불온하게 묻어둔 욕망의 질곡으로부터의 풀어짊이 있다.
또는, 여인의 욕망을 윤리의 덫에 가두어놓고 감시의 눈을 부릅뜨는 그 편견과 억압으로부터의 풀어짊이 있다.
욕망대로 살 수야 없는 일이겠지만, 그 욕망의 존재를 어찌 감추고 지울 수 있을까. 그 또한 신이 내린 것임을. 착잡하도록 알 수 없는 존재. 신(神), 그리고, 인간.
이 아이들, 거북이와 남생이
여기, 온몸으로 신성(神聖)을 풀쳐내고 있는 또 다른 신성의 화신이 있다. 이름도 천한 거북이와 남생이다. 함경도 무속신화 「숙영랑 앵연랑 신가」의 사연이다.
옛적에 숙영이라는 선비와 앵연이라는 각시가 있었다. 숙영 선비가 열다섯 살 앵연 각시는 열네 살이 되자 숙영 선비 집에서 앵연 각시 집으로 혼사를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숙영의 집에서 다시 청혼을 넣어 거절당하고 또 다시 세 번째로 청혼을 넣으니 그제서야 반허락이 났다. 두 집 사이 언덕 이쪽에 핀 꽃이 저쪽으로 수그러지고 언덕 저쪽에 핀 꽃이 이쪽으로 수그러지자 비로소 온허락이 났다.
두 집이 날을 받으니 납채(納采)는 삼월 삼짇날, 장가는 사월 초여드렛날, 시집은 유월 유두 날로 정했다. 집안의 재물을 다 기울여 혼수를 차리니 밤에 짠 월광단과 낮에 짠 일광단에서 호랑이 눈썹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천생배필을 이루어서 아무 부족할 것이 없는데 석삼년이 흐르고 스무 해가 흘러 부부 나이 마흔 줄에 이르도록 자식이 없으니 그것이 걱정이었다.
하루는 숙영이 앞산으로 소풍을 떠나 사방 경개를 살펴보니 진달래 철쭉꽃과 봉선화가 만발했는데 강남 갔던 제비들이 앞뒤에 새끼들을 이끌고 날아와 지지배배 노래하면서 석양 숲으로 날아들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삼년 묵은 둥지 안에 새끼들을 앉혀놓고 벌레를 물어다가 이놈 저놈 먹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숙영은 처량하게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워 식음을 잊고 말았다.
“서방님, 꽃 구경 나비 구경 다녀오시더니 어찌 이리 하십니까?”
“우리는 어찌하여 남들이 다 낳는 자식을 못 낳아 어머니 아버지 소리 한번 못 듣는단 말입니까. 날아가는 새짐승도 새끼들을 앞세워 지지배배 날아가는데 그 부러움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
그러자 앵연이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말을 한다.
“서방님 들어보세요. 저 건너 아랫녘에 용한 점쟁이가 있다니 거기 가서 팔자나 물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그리 합시다.”
숙영이 생금 한 봉지를 들고서 말을 타고 아랫녘 점쟁이를 찾아가 팔자를 물으니 점쟁이가 말을 했다.
“덕을 쌓고 공을 들여야만 자식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분이서 윗논의 물은 아랫논에 대고 아랫논의 물은 윗논에 대어 그날로 벼를 심고 그날로 키워 그날로 베고 그날로 찧되 백미 서 말 서 되를 찧으십시오. 거기에 노란초 닷 근과 흰 초 닷 근, 큰 초 닷 근과 노란 종이 닷 근, 흰 종이 닷 근, 큰 종이 닷 근을 함께 갖추어 안애산 금상사를 찾아가 인간 점지하는 생불성인(生佛聖人)에게 석 달 열흘을 기도하십시오.”
숙영과 앵연이 어김없이 그 말대로 하여 정성껏 기도를 마치고 돌아와 인물 병풍 화초 병풍을 둘러놓고 비취이불에 원앙베개를 베고 동침을 하니 과연 그달부터 앵연의 몸에 태기가 있었다. 석 달 만에 밥에서 찌개 냄새가 나고 떡에서는 가루 냄새 장에서는 누룩 냄새가 나며 온갖 음식이 다 먹고 싶어졌다.
이윽고 열 달 만에 남자 아기가 태어났는데 어찌나 잘 생겼는지 한 옆에 해와 달이 돋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아기가 하루 이틀 사흘이 되어도 눈을 안 뜨고 첫 이레가 되어도 눈을 뜨지 않았다. 세 이레가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자 그제서야 숙영과 앵연이 손으로 땅을 치며 탄식을 했다.
“산천도 무정하고 성인도 무정하구나. 인간 영화를 보렸더니 앞 못 보는 소경 자식을 낳았으니 무엇에 쓸까.”
아기 이름을 거북이라고 하고 유모를 두어서 내맡겼다.
거북이 나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앵연의 몸에 또 다시 태기가 있었다. 첫 아기 때처럼 온갖 음식이 다 먹고 싶어 깊은 산 골짜기의 신 배 돌배까지 구하여 먹었다. 이윽고 열 달 만에 아기를 낳으니 그 또한 잘 생긴 남자아이였다.
숙영과 앵연이 아이 눈부터 살펴보는데, 샛별 같은 두 눈이 초랑초랑 빛이 났다. 하지만 사흘 만에 향물에 목욕을 시키려고 아기의 등을 만져보니 등 굽은 곱추요 다리를 만져보니 앉은뱅이였다. 숙영과 앵연이 깊이 탄식하고는 그 이름을 남생이라 짓고 유모에게 맡기었다.
그렇게 소경 아기와 곱추 앉은뱅이 아기를 얻은 숙영과 앵연은 깊은 시름에 빠져 한탄하다가 화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를 잃은 두 아이가 앉아서 재물을 쓰기만 하니 그 많던 재산이 어느새 다 사라지고 빈털터리 가난뱅이가 되고 말았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손을 잡고 밥을 빌러 나갔으나 사람들이 병신 둘을 어찌 그냥 먹이느냐며 다시는 오지 말라 박대를 했다.
남생이와 거북이는 대문 밖에 나앉아서 껴안고서 울음을 울 뿐이었다.
그때 앉은뱅이 남생이가 거북이한테 말을 했다.
“형님, 안애산 금상사를 찾아가서 인왕불 금강불 생불성인에게 빌어나 봅시다.”
“나는 앞이 보이지를 않으니 어찌 거기를 갈까?”
“나는 또 앉은뱅이니 어찌 가겠소.”
그렇게 울다가 남생이가 말을 했다.
“형님이 나를 업으면 되겠습니다. 내가 형의 막대기를 쥐고 앞길을 짚으며 똑똑 소리를 낼테니 그리로만 가면 됩니다.”
소경이 곱추 앉은뱅이를 업고서 하염없는 길을 나서니 그 정상이 오죽할까. 산 넘고 물 건너서 이리 비척 저리 비척 길을 가다가 세 갈래 길에 이르니 하늘에서 무지개가 뻗쳤는데 동쪽은 푸른 길, 남쪽은 붉은 길, 서쪽은 하얀 길이었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하얀 길로 접어들어 금상사 입구에 당도한즉 연꽃이 피어난 연못이 있는데 남생이가 살펴보니 그 속에 솥뚜껑 같은 생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형님, 이 연못에 솥뚜껑 같은 생금이 떠다니니 건집시다.”
“우리한테 어찌 그런 복이 있을까. 본 체 말고 그냥 들어가자꾸나.”
거북이와 남생이가 절에 들어가자 불목하니가 부처님께 그 일을 아뢰었다.
“그 아이들이 생기느라 우리 절이 많은 공덕을 입었으니 남쪽 초당에 맞아들이고 공부를 시켜라. 밥은 하루에 세 번씩 흰 쌀밥을 지어 먹여라.”
부처님이 이렇게 계시하니 불목하니가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맞아들였다. 하지만 두 아이 때문에 하던 일이 늘어나 성화가 난 불목하니는 부처님 몰래 아이들을 두들겨주곤 했다. 맞다 못한 두 아이가 어느 날 스님들한테 말을 했다.
“우리가 들어올 때 보니 연못에 생금이 떠있었습니다. 건져오도록 하세요.”
그 말을 들은 삼천 스님이 달려가 연못을 살펴보는데 생금이 어느 새 금구렁이로 변하여 한쪽은 하늘에 붙고 한쪽은 땅에 붙어 있었다. 삼천 스님은 절로 돌아와서 앞 못 보고 등 굽은 두 아이를 두들겨 주었다. 맞다 못한 거북이와 남생이가 절을 나와 연못을 살펴보니 틀림없는 생금이 솥뚜껑처럼 떠있었다. 둘이 생금을 꺼내어 품에 안고 법당으로 들어와 부처님 앞에 내려놓자 절이 저절로 움찔움찔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거북이와 남생이가 스님들한테 청하여 그 금으로 부처님을 감싸 달라고 청하니 부처님의 말소리가 울려퍼졌다.
“거북아 남생아, 내가 너희 눈을 띄어주마. 너희 발을 펴주마.”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감겼던 거북이의 눈이 환히 밝아졌다. 남생이 굽은 등이 곧게 펴지고 웅크렸던 다리가 활짝 펴졌다.
거북이와 남생이는 그 후 여든 한 살까지 장수를 누리고 성인이 되어 사람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한테도 거둠을 얻지 못하고 그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몬 존재. 스스로 자신의 복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거북이와 남생이 형제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모진 매질을 하는 세상! 너무나 참혹하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신성에 대한 거역인 줄을, 감은 눈과 굽은 다리로 광명을 찾아 떼어 온 그들의 걸음걸음이 신성의 발자국임이었음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찌 알았으랴.
살펴보면 고통과 방황은 누구에게든 있다. 눈이 멀고 등이 굽은 자 세상 천지 많고도 많다. 때로는 가혹하여 자신을 팽개치고 싶기까지 한 그 업보는, 신의 뜻이다.
신이 아니면 누가 그리 했을까. 그것을 받아들여 감내하기를 시작할 때, 내 한 몸으로 맞이하여 싸우기를 시작할 때, 신성의 빛은 피어난다. 그렇게 신성과 하나 되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나갈 때, 징그러운 뱀이 생금으로 화하여 다가오는 그 날은, 온다. 아니, 꼭 오지 않아도 좋다.
신성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선택받은 고귀한 존재들한테서 오지 않는다. 버림받은 이들한테서, 박해받는 이들한테서 온다. 화려한 영광이 아니라, 뼈아픈 시련과 고통에서 온다. 그것은 저만큼 높은 곳이 아니라 이만큼 낮은 곳에 있다. 여기 아프게 서 있는 너와 나, 우리가 바로 신성의 주인공이다. -- 한겨레의 민간 신화가, 민중 신화가 구현해낸 신성에 대한 반역이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앗, 이 글이 여기 올라와 있다니! ^^; (제자 한결이는 책내용 가운데 이 장이 제일 약하다고 했지만, 전 광청아기 송동지 거북이 남생이 무지 사랑합니다~)
선생님, 다른 글로 열심히 푸겠습니다.
와~~ 이걸 모니터 상으로 다 읽었단 말이에요? 눈 아팠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