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기원전 142년부터 63년까지 79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유대인의 마지막 독립왕조. 63년 로마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복속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게 된다.
2. 역사[편집]
2.1. 하스몬 왕조의 성립[편집]
마카베오 전쟁에서 사실상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받은 마카베오군의 지도자 시몬은 142년에 자신을 유다이아의 지도자이자 총사령관 겸 대사제장으로 칭하면서 독립 왕조를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마카베오는 유다이아에서 정통으로 여기던 사독 계열 사제 가문 태생이 아니었던 탓에 사독의 자손이 대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일반적 상식을 깨버린 데다가 왕이 대사제까지 겸임하면서 이 또한 유대교의 율법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아[1] 하스몬 왕조에 대한 비판 세력이 존재했다.[2] 그러나 시몬은 이런 비판들을 묵살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열중했다.
그러던 기원전 135년, 시몬은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예리코를 방문했다. 예리코에는 자신의 사위인 아부보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사령관으로 있었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장인을 대접하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갑자기 칼을 휘둘러 시몬을 살해했고 시몬의 아내와 두 아들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시몬의 남은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는 게셀의 군사령관으로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요한 힐카누스까지 죽이기 위해 가자라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미 소식을 듣고 요한은 피해있다가 자신을 죽이러 오는 자들을 잡아 처형했다. 이후 그는 프톨레마이오스까지 물리치고 기원전 134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 가운데 유데아의 통치자 겸 대사제가 되었다.
2.2. 요한 힐카누스 치세의 전성기[편집]
요한 힐카누스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목표는 전 세계를 정복해서 모든 사람을 유대교인으로 만드는 유대교 세계제국이었다.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대제국을 세우고 대제국의 종교를 유대교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에 따라 요한은 정력적으로 정복전쟁에 임했다. 왕위에 오르고 3년 동안 요한은 남쪽 에돔(이두매)를 공략해 과거 유대왕국의 남단 지역인 브엘세바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요한은 이두매인들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로 개종하게 했다.[3]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하스몬 왕조는 어디까지나 셀레우코스 왕조가 자치권을 허락한 가문이었을 뿐, 종주권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있던 상황이었다. 안티오코스 7세는 하스몬 왕조에게 준 자치권을 거두고 다시 팔레스타인을 직접통치할 요량으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안티오코스 7세에게 맞설 힘이 없던 요한은 결국 돈의 힘으로 해결을 보기로 하고 다윗왕의 능을 도굴해서(!) 은 3000달란트를 꺼내 안티오코스 7세에게 바치고 협상을 제안했다. 결국 양측에 합의가 성사되어 요한이 새로 정복한 이두매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유대의 자치권은 인정하기로 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요한은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 7세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다시 거침없이 정복전쟁에 나섰다. 유대의 접경지역을 평정한 다음 기원전 128년, 사마리아로 쳐들어가 복속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던 그리심 산의 신전을 파괴했다. 이어 요르단강 동편의 사해 북서부 지역과 이두매 남부지역까지 평정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시몬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요한의 치세에 하스몬 왕조는 대대적인 전성기를 누렸으나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갈등으로 왕조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율법주의자들인 하시딤들은 요한에게 대사제장직을 내놓고 율법에 맞는 대사제장을 세워야 함을 주장했다. 그런데 하시딤들이 하필이면 요한이 대사제장이 될 수 없는 근거로 제시한게 요한의 어머니가 안티오코스 4세 때 로마군에 끌려갔던 전적을 들어 율법상 이방인에게 더럽혀진 여인의 아들은 대사제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어머니를 욕하는 말에 요한은 격분하여 하시딤들을 모조리 내쳤고 하시딤 대신 기용된 자들이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사두카이파들이었다. 이로 인해 왕조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점차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2.3. 아리스토불로스와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치세[편집]
요한 힐카누스가 31년의 통치를 마치고 기원전 104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이어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잔인한 데다가 유대교 전통보다는 헬레니즘을 더 좋아해서 백성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후계자로 지명될 뻔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는가 하면(!) 동생 안티고누스는 모함인 줄 알면서도 죽였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동생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로스는 불과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아들이 없어서 왕위는 그의 아내인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가장 먼저 감옥에 있던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를 석방시키고 14살 연하인 그와 결혼한다[4]. 그리고 그를 왕으로 세워 알렉산드로스 야나이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야나이는 갈릴리와 요르단강 동편 중부등을 점령해 하스몬 왕조 최대판도를 개척했으며 이때에 이르러 하스몬 왕조의 왕들은 왕으로 칭하고 왕관을 쓰는 등 명실상부한 독립왕조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요한에게 축출되었던 하시딤들이 바리사이파[5]가 되어서 야나이에게도 대사제장을 내놓을 것을 주장했고 결국 초막절 제사때 바리사이파가 주동이 되어 제사를 지내러 대신전으로 올라가는 야나이에게 열매를 던지면서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열이 뻗친 야나이는 자신에게 반발한 바리사이파 6000명을 학살했다. 또한 어떤 때에는 바리사이파들이 개최한 연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800명을 십자가로 처형했으며 8000명의 바리사이파들이 예루살렘에서 도피하여 유대광야로 나갔는데 이들이 나중에 엣세네파가 된다.
이렇게 율법을 무시하고 독재를 일삼아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은 야나이는 27년간 통치하다가 일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뒤를 이어 다시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통치자가 되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야나이와는 달리 율법에 충실하고자 노력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추방된 바리사이파들과 화해하고 그들을 중용했으며, 이후 사두카이파들이 추방되고 바리사이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2.4.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치세[편집]
9년간 알렉산드라가 통치하는 동안 알렉산드라는 여성이 대사제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남인 힐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했고 나라는 그런 대로 잘 굴러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노쇠하면서 두 아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이틈을 놓치지 않고 둘째 아들인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아버지 야나이 시절 정권에 참여했던 사두카이파를 규합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힐카누스 2세는 바리사이파들을 규합하여 맞섰고 알렉산드라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내와 자식들을 붙잡아 안토니아 요새에 가두었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행동하기가 어렵던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형인 힐카누스 2세와 협상을 벌였고 결국 힐카누스 2세는 대사제장직을 유지하고 아리스토불로스 2세가 유대의 왕이 되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2.5. 하스몬 왕조의 붕괴와 멸망[편집]
그러나 이런 권력분점의 상황은 한 이두매인 때문에 파토가 나고 마는데 그는 다름아닌 안티파트로스였다. 이유인즉, 안티파트로스는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가 왕이 되어버렸으니 안티파트로스는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해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제거하려 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힐카누스 2세에게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2세에게 도움을 청해 아리스토불로스 2세를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하자고 부추겼고 아레타스 2세도 호응하여 나바테아군 5만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왔다.
한편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폼페이우스의 부장인 스카우루스에게도 은 300달란트를 주고 도움을 청해 그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온 상황이었다. 아레타스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병력을 철수해 돌아가버렸다.
이 일로 로마의 힘을 실감한 두 형제는 앞다투어 폼페이우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쟁투를 벌였고 로마에게 아부하면서 두 형제의 정통성은 갈수록 추락해갔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두 형제를 중재하겠다면서 친절하게 팔레스타인 정복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의 각 도시들을 점령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지만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힐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로스 2세는 분쟁을 멈출 줄 몰랐다. 결국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1만 2천 명을 학살했다.
폼페이우스가 취한 조치는 사실상 하스몬 왕조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는 하스몬 왕조가 정복한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리, 데카폴리스 등을 모두 독립시키고 원주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유대와 예루살렘은 시리아 총독 휘하의 행정장관이 통치하게 했다. 아리스토불로스 2세와 그의 가족들은 포로로 로마에 끌려갔으며 폼페이우스는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2.6. 마지막 부활 시도와 실패[편집]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 편에서 권력을 확대해나가다가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집권하게 되자 재빨리 카이사르 편에 섰고 카이사르에게 막대한 뇌물을 갖다바치고 이집트에서 곤경에 처한 카이사르에게 병력을 보내 그를 도움으로써 카이사르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에 이른다. 힐카누스 2세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설득해 카이사르에게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통치자로 삼아줄 것을 호소해 결국 안티파트로스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기에 이른다.
한편 로마에 끌려간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대 통치자의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카이사르에게 나섰지만 이미 안티파트로스에게 구워삶아진 카이사르는 외면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힐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 아들중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롯을 갈릴래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로마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안티파트로스도 독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권좌를 놓고 파사엘과 헤롯이 분쟁을 벌였다. 헤롯은 신속하게 로마의 돌아가는 판국을 주시해 안토니우스에게 재빨리 붙어서 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스몬 왕조의 복권을 노렸다. 그는 사두카이파들을 규합하고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올랐다. 파사엘은 파르티아군에게 붙잡혀 죽었으나 헤롯은 겨우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자신을 왕으로 새긴 동전을 발행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으나 곧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헤롯을 구해줌으로써 안티고누스의 하스몬 왕조 부활 시도는 끝장나고 만다. 결국 기원전 37년, 안티고누스는 붙잡혀 처형되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유다이아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출처 : https://namu.wiki/w/%ED%95%98%EC%8A%A4%EB%AA%AC%20%EC%99%95%EC%A1%B0?from=%ED%95%98%EC%8A%A4%EB%AA%A8%EB%8B%88%EC%95%88%20%EC%99%95%EC%A1%B0
첫댓글 이 부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해스몬 왕조도 결국 내부 분열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적군에게 끌려간 여자가 그 후에 낳은 아들에 대해서는 의문시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적군에 의해 강간 당한 후에 나온 자식이 이스라엘을 잘못 인도할수 있는 외적의 자식일수 있다는 우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힐카누스는 그것을 무시했고 문제삼은 사람들을 대량 살육한 것입니다.
야나이 때에 800명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한 것이 십자가 형의 처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2천명을 두로 시돈지역에서 처형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위의 안티파트로스가 이두매인 이다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데, 이두매는 에돔족속을 말합니다. 헤롯은 에돔족이었지요.
밑의 주석에 안티파트로스와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헤롯(헤로데)이 유대교인으로 개종한 이두매인(에돔인)으로 나옵니다.
댓글 잘 읽었습니다 .
차라리 원자폭탄이 더 나을라나요?
800명.2.000명 십자가 처형을
생각하면...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내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볍다 하셨으니까요.
위에서 주목할 것은 시몬 마카베오가 딸을 이방인인 프톨레마이우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서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는 바입니다.(신 7:3) 그것의 결과는 일가족의 참혹한 몰살로 끝났습니다.
그런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딸을 주었는데 내가 너를 못 믿겠으니, 방문하지 않겠다고 할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무장도 충분히 갖추지 않은채 방문하여 칼에 휘둘렸습니다. 그에게 시집간 딸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이 살해된 다음에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때까지 하나의 인질로 있었을 뿐이지요.
예.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말씀대로 참혹한 결과입니다.
그랬군요.~
아 읽으셨네요. 저는 이 사건과 부산에서 작년말에 일가족 몰살 사건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때 동거남인지 사위인지가 장인에게 와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니, 문을 열어주니까 공구 도구들로 무자비하게 장인을 죽이고, 다음에는 그 가족들이 시차 간격으로 돌아와서 초인종을 누르니까 들어오게 한다음 하나 하나 모두 무자비하게 죽인 사건입니다. 그 가족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범인도 비기독교인, 그런 가족은 기독교인에 대해 반감을 가졌거나 종교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하찮게 생각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일가족 모두 5명이 죽은 사건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