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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역 주변 해장국 집에서 술친구로 만난 어떤 사람이 경주는 고려 태조가 신라를 얻은 기쁨으로 붙인 이름이니까,
사실은 슬픈 고을 애주(哀州)라고 하든지 경애왕이 술을 좋아하다가 망해 먹었으니까 술 주자 애주(愛酒)라고 하든지 해야 한다는 말을 그때는 그럴듯하게 들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웃음이 날 뿐 입니다.
경주라는 이름은 고려 태조 18년(935)에 개경 정부에서 붙인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라벌의 향가를 신라 가요라고 하여 연구한 양주동 선생에 따르면 서라벌도 ‘사내’를 어원으로 한 ‘밝은 나라’란 뜻이니까
전국 고을 이름을 한자로 정비하면서 서라벌의 뜻을 살려서 밝고 기쁜 고을, 경주라고 했을 가능성이 큼니다. 한반도를 대표하는 나라가 신라에서 고려로 바뀌었다지만,
경순왕의 귀순 덕분에 신라 왕가는 고려의 지배 계층으로 계속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경주 시민들도 백제나 고구려 유민처럼 큰 박해를 받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도 신라가 주권을 잃으면서 천 년 동안이나 서라벌로 부르던 이름을 경주라고 불러야 했으니까 신라 유민에게 결코 기쁜 이름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그런지 경주엔 다른 도시와 달리, 서라벌이란 이름을 앞세운 학교와 가게도 많고, 계림이란 상호를 단 가게들도 적지 않습니다.
경주역 앞 계림여인숙. 혹시나 해서 경주역 부근 황오동 골목을 돌아보니,
마음뿐. 속으로 이런 시구절을 읊조리는 걸로 대신하고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숙을 알고 있다.
해 지고 추워지기 전에 그 여인숙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두워지면 문을 꼭 닫고, 파란 슈미즈를 입은 여인숙 주인
밤새 손님을 뜨겁게 안아주지요, 아침 햇살이 찾아오면
주인이 손수 대문 열어 손님을 정중히 떠나 보내고
손님은 제 몸에 스민 꽃내음 감추지 못해 붕붕거립니다.
얼마냐고 묻지를 마세요.
숙박비도 하룻밤 꽃값도 무료입니다.
11월 찬 서리 내린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오래 오래 피었있는 은현리 용담꽃
길 잃은 벌들이 찾아와 하룻밤 자고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숙 -정일근 시 전문-
여행길에서 처음 만난 떠돌이들이 스스럼없이 어울려 해장김치에 막걸리를 푸지게 먹으며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떠들어대던 추억이나 되새김하려고 황오동 고분 방향 샛길로 접어 듭니다. 여기 쯤일텐데....
하며 몇 번이고 두리번거려보지만, 머릿속에선 환한 막걸리집도 그 옆에서 묵해장국이며 추어탕을 구수하게 끓이던 할매집도 보이지 않습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가 싶어 좌우를 둘러 보니, 황오동 고분이 빤히 보여 도리없이 고분 방향으로 걸어 나갑니다. 대로변으로 나가니
다행이 길건너로 몇몇 해장국집이 보이고, 길 따라서 팔우정 로타리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다보니 예전에 경주역 부근 골목에 박혀 있던 해장국집들이 그리로 다 집결하기라도 한 듯,
팔우정 삼거리는 과히 술꾼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팔도에서 몰려든 각양각색의 해장국집들로 북새통입니다. 집집마다 전국에서 이름난 해장국을 죄다 써붙인 야시장 메뉴판같은 것을 내걸고, 어서 오라고들 야단입니다.
잠깐 동안 어디를 들어가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지 망설였습니다. 하여 그냥 숙소에 일찍 들어가 정갈한 향토식 백반이나 한 상 먹고 잘까 하다가,
유행과 시류를 그 뉘라서 이기랴 싶어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님 몇 분께 물어 아직도 곰삭은 식해김치를 곁들여 낸다는 할매집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천하의 대본이라며 누천년 동안 고이 섬겨 온 논농사와 밭농사를 요 몇십 년 사이에
산업 근대화를 한다며 다 망쳐 먹은 나라에 살면서 토종 메밀묵맛을 고집하는 것도 염치없는 노릇이고, 거기서거기인 레시피(조리법)를 내세워 신문과 텔레비전 방송에 이름을 알렸다고 선전하는 것도 그다지 미덥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메밀묵맛이 그저그렇고, 국물맛이 그저그렇더라도 밥 한두 그릇쯤 뚝딱 먹어치울 수 있는 곰삭은 해장김치를 내는 집을 찾기로 했던 겁니다.
어줍잖은 떠돌이 시절, 낮선 벗들과 마신 막걸리 맛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쉬 잊혀지지 않았던 것도 아마 그 곰삭은 갈치의 간이 듬북 벤 통무우지를 우적우적 씹어먹던 기억 때문일 겁니다.
팔우정 삼거리까지 갔다가 다시 황오동 고분 방향으로 내려가노라니, 이봉화 할매가 한다는 해장국집이 나옵니다. 쭈빗거리며 들어가, 묵해장국 둘에 소주 1병을 주십사 하고 기다리노라니, 사투리가 구수한 할매가 이것저것 놓아 상을 차려 줍니다.
밥과 뚝배기, 경상도 특유의 밑반찬 해장김치, 갈치식해 몇 토막과 콩잎장아치, 뜨거운 국밥을 먹는데 빠질 수 없는 시원한 물김치와 마늘장아치, 아무렇게나 잘라서 데쳐무친 애호박나물 등이 먹음직스럽습니다.
하지만, 세찬 가스불에 뚝배기째 끓여서 그런지 국물이 너무 뜨거워 보입니다. 다행이 밥은 바로 먹기에 알맞을 정도로 식어 있습니다. 국이 식은 다음에 밥을 말면 해장국 특유의 따끈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떨어지므로 밥 그릇에서 밥을 반쯤 덜어 미리 국에 말아 둡니다. 그리고 국밥이 적당하게 식기를 기다리며, 남은 밥을 해장김치며, 갈치식해를 곁들여 먹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뜨겁고 매운 것을 잘 먹는다고 하지만, 인체 온도보다 30도 이상 높으면 음식맛도 제대로 나지 않고, 입천정을 데기 십상입니다. 저도 뜨거운 국밥을 훌훌 불며 먹는 재미로 마구 입에 퍼넣다가 입천장이 훌렁 벗겨져서 여행 기간 내내 맛에 굶주린 경험이 있거든요.
매콤하게 삭은 갈치식해를 손으로 뚝 떼어 밥에 얹어 먹는 것도 좋았습니다만, 싱싱했을 갈치가 삭으며 김치에 남겨 준 감칠맛이 구수하고 알큰해서 참 좋습니다. 김치며 식해가 참 맛있다고 하니까, 주인 할매는 ‘더 줄까’하는 표정입니다. 늘 해오던 대로 하는 거니까 새삼스럴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식해가 있어 덤덤하되 간간한 음식인 이 묵해장국도 조만간 유명세를 타고 야시장 음식처럼 전국 먹거리촌으로 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깊은 감칠맛이 혓부리에서 맴도는 해장김치 맛을 잃어버린 채.
통상 해장김치라고 하는 이 식해김치가 없었다면, 아마 이 밍밍한 묵해장국은 해장국으로 먹을만한 음식이 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묵해장국은 멸치나 북어 무리로 국물을 내고, 묵채와 묵은 김치, 모자반과 콩나물을 넣어 한 소끔 끓인 다음 양념간을 쳐서 먹는 음식입니다. 이 정도의 국이라면,
그저 밥을 말아 한 끼 식사로 충당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로 또는 과음으로 입맛을 잃은 사람이 배불리 먹어서 숙취도 풀고 영양도 섭취하는 해장국이 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메밀묵이 식중독과 숙취 해소에 좋고 소화도 잘 된다지만 영양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콩나물을 넣는다지만 길쭉하고 뻣뻣하게 다 자라버린
경주의 콩나물은 양이 적어서 영양섭취나 숙취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전주식 콩나물해장국처럼 콩나물을 듬북 넣을 수도 없습니다. 막 기른 콩나물이 질기고 맛이 없기 때문에.
더구나 전주식 콩나물해장국은 맛좋은 어린 콩나물을 듬뿍 넣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상당한 양의 새우젓과 들깨가루,
김, 달걀을 곁들여 먹입니다. 그래서 전주식 해장국은 서울식처럼 뼈를 우러낸 진국이 아닌 맑은 장국이지만,
해장국으로서 진국 해장국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주식 해장국은 해장김치 하나로 전주식 해장국에 비해 부족한 점을 다 보상하는 듯 합니다.
경주의 해장김치는 무우와 배추 등 야채에 싱싱한 생선과 고춧가루 등 양념을 듬뿍 넣어서 겨우내 서서히 발효시킨 다음, 봄부터 가을까지 생선은 식해로 쓰고, 김치는 해장국에 넣어서 내기도 하고 반찬으로 내기도 하는 게 특징입니다.
김치의 풍부한 무기질과 유산균에다 크고 싱싱한 생선에서 우러난 풍부한 영양분을 겸했으니, 곰삭은 해장김치 하나면 묵해장국에 모자라는 영양을 보충하기에 충분할 듯 합니다.
그런데 이 해장김치는 경상도 동해안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즐겨 먹어온 식해와 관련이 깊습니다. 식해(食醢)란 생선에 엿기름과 잡곡밥, 소금과 고춧가루와 생강 등을 넣어서 이레 가량 발효시켜 먹는 젓갈의 일종입니다. 크고 싱싱한 생선을 김치에 넣어서 서서히 삭히거나,
잡곡밥과 향신료를 넣어서 짧은 기간 안에 삭히는 식해는 작은 어패류에 소금을 넣어서 오랫동안 고릿하게 삭힌 젓갈과 달리,
산뜻하면서도 구수한 감칠맛이 깊어 깔깔한 입맛을 끌어올리는데 제격입니다.
이 식해에는 생선의 단백질에서 생기는 필수아미노산, 글루탐산, 리신, 트레오닌, 비타민A, 비타민D 와 같은 기능성 영양소, 순환기 질환 예방과 노화 예방에 좋은 EPA, 오메가-3, DHA, 셀레늄 등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장을 청소해주고 대장암 예방에 좋은 유산균이 많이 함유되어 있고, 위염과 위암을 예방하는 유산균주도 많아 완전 식품에 가깝습니다.
옛날 음식에 보이는 식해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음식책인 주방문(酒方文, 1600년대 말)과 요록(要錄, 1680) 등에 오늘날과 유사한 조리 방법이 있고, 비슷한 시대의 음식책인 음식보에는 생선이 잘 삭으라고 소금과 ‘밀가루와 누룩’도 넣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역주방문에는 생선 대신 소 내장이나 멧돼지 껍데기를 넣고 후추를 넣어 만드는 방법도 전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해하면 식혜(食醯, 감주)와 혼동하거나, 함경도 음식 또는 함경도에서 속초로 피난온 아바이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망향의 음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동해안 지방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식해와 식해김치를 즐겨 먹었습니다. 이 지역의 애경사 상차림에 없어서는 안되는 음식하면, 식해와 메밀묵을 손꼽을 정도이니까요.
그래서 식해와 식해김치는 어머니가 고달픈 타향살이에 입맛을 잃은 자식들을 위해 때맞춰 싸보내는 고향음식이었습니다. 어느 도회지 먹자골목 순대국이 고향 친구와 소주잔 기울이며 먹는 타향살이 음식이라면,
어머니가 보내주신 김치로 끓인 김치국 한 그릇은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독한 숙취를 풀어주는 고향같은 음식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식해와 해장김치와 잘 어울리는 경주의 묵해장국 한 그릇은 경주 사람들의 확실한 고향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묵해장국은 사찰 순부두와 시금장 쌈밥, 우리밀 칼국수 등과 더불어 경주를 대표하는 서민의 향토 음식으로 손꼽힐 정도로 이 유서깊은 신라의 고도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혹자는 묵해장국 따위가 어떻게 경주를 대표하는 음식에 낄 수 있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경주는 안강들을 비롯하여 건천들과 내남들에서 나는 기름진 곡식과, 가까운 동해안의 감포와 양포, 영일만에서 사철 끊이지 않고 건져올리는 해산물이 풍요로운 고장입니다. 게다가 경주가 천년의 고도의 풍모를 많이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양동 마을의 여강 이씨와 월성 손씨, 교동법주로 이름 높은 경주 최씨가에서는 신라 천년의 맛을 가늠케 할 정도로 훌륭한 가전 음식들을 지키고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어쩌다 경주를 찾는 떠돌이들이 그런 유서깊은 종가의 맛을 보기가 가당키나 합니까? 하여 그런 종가를 대신하여 오래 전부터 경주 시내에서는 전주 한정식에 뒤지지 않게 잘 차려내는 한정식집들이 여럿 경영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정식집은 비싼 밥값에 걸맞는 먹거리를 내놓기 위해서 그런지, 대부분 전국에서 이미 정평이 난 음식들로 상을 차리는 경향이 짙습니다.
따라서 경주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일상 속에서 즐겨 먹은 음식, 타향살이 하다가 고향에 다녀가면서 꼭 한번쯤 먹고 가는 음식이 경주 음식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경주식 해장김치와 곁들여 먹는 묵해장국은 경주를 대표하는 음식 가운데 하나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해장국이 장거리의 국밥 내지 술국으로 시작되었듯이,
묵해장국도 경주 장돌뱅이들의 국밥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 경주 노동동 옛 시장에서 국밥집을 하던 노부부가 장꾼들에게 메밀묵을 국밥에 넣어 해장국으로 판 게 그 시초라는 거죠.
그러나 이런 유래설은 특정 해장국집 주인의 개인사적 경험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정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경주 노인분들에 따르면, 장거리 식당에서 묵해장국을 팔기 훨씬 이전부터 잔치에 쓰고 남은 메밀묵을 묵채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아침 속풀이 김칫국에 묵채를 넣어 먹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지금도 식해와 메밀묵이 빠지면 잔치상이 아니라는 경주 사람들이고보면, 묵채에 밥을 말아 식해를 양념간으로 쳐 먹거나 김치국에 묵채와 콩나물을 넣어 먹는 정도는 잔치 다음날이면 너남없이 즐기는 별식이었을 겁니다.
묵해장국이 불국토 경주의 전통 음식이자 향토 음식으로 적합한 또하나의 특징은 신라의 불교에서 강력하게 금지한 육고기와 그 부속물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해장김치와 식해에 필수적인 물고기에 대해서는 스님들조차 어느 정도 허용하는 분위기도 특기할만한 사실입니다.
신라의 음식 문화는 사냥과 어로가 활발한 육식 문화로 출발했지만, 법흥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되고, 그 이듬해에 살생이 금지되면서부터 신라의 육식 문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불교가 신라의 경주 지방 식생활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살생금지, 즉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이었습니다.
이 계율에 따라 법흥왕은 살생금지령을 내리고, 사냥이나 고기잡이 기구마져 모조리 불태워 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뿌리깊은 육식 문화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왕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진평왕(579-632)과 신문왕(681-692)이 매나 개를 놓아 멧돼지, 꿩, 토끼를 즐겨 잡았다는 기사가 있고, 풍년에는 소로 제사를 지내고 흉년에는 양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으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마소의 수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가축을 다투어 길렀다고 합니다.
하여 당시 불교계에서도 결국 육식 문화를 제한하는 선으로 후퇴합니다. 널리 알려진 원광법사(555-638)의 세속오계 가운데 살생유택 속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원광법사는 화랑들에게 매월 8, 14, 15, 23, 29, 30일과 동물의 번식기인 봄철과 여름철에 살생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특히 가축은 물론이고 곤충과 벌레마저 정당한 사유없이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승려의 정치 참여와 전쟁 참여를 반대하며, 중생구제라는 불교 본연의 임무를 중시한 원효와 혜숙과 같은 스님들은 대단히 극단적인 방법을 써 가면서까지 육식은 죄악임을 깨우치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삼국유사>에 진평왕 때(579-632) 혜숙 스님은 구참공이란 국선과 화랑들에게 사냥과 육식이 죄악임을 일깨우기 위해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주면서 이것도 고기니까 더 먹으라고 들이밀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스님들이 육식을 죄악시했으므로,
스님들이 주재하는 경주 서민들의 놀이상과 잔치상 역시 자연스럽게 육식을 멀리 하는 쪽으로 발달되었을 것입니다. 경주 지방 사람들의 세시풍속 음식이 시금장 쌈밥과 떡과 나물을 중심으로 발달한 것과 해장국에 메밀묵을 넣는 대신에 육고기와 그 부속물은 일절 들어가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혜숙 스님과 비슷한 시대를 산 원효와 혜공 스님은 물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 가면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대변을 누었는데, 원효의 것은 똥이었고, 혜공의 것은 물고기였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물론 이 전설은 스님들이 물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명한 원효보다 이름없는 혜공의 도력이 더 높다는 신라 백성들의 생각을 나타내는 기사입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 전설은 신라 서민들에게 물고기는 식생활에서 빠뜨릴 수 없는 먹거리였다는 사실, 스님들도 서민들이 물고기 먹는 것을 귀족들이 육고기를 먹는 일만큼 죄악시하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시사합니다. 신당서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부녀자들이 행상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열리는 시장에서 버드나무 고리를 들고 식료품 등을 사고 판다고 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소지왕 12년(490)에 첫시장을 열고, 지증왕10년(509)에 동쪽 시장, 효소왕 4년(695)에 서쪽 시장와 남쪽 시장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시장에서 거래된 식료품 가운데는 냇가와 동해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가 상당수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 물고기 중 일부는 식해와 식해김치를 담는데 쓰였을 터이고요.
실제로 물고기는 신라뿐 아니라 고대 국가 사회에서 풍요의 상징으로 통했습니다. 포항 반구대 암각화에는 풍어를 기원하는 물고기 그림이 많고, 천마총에서 발굴된 신라의 유물 가운데 금허리띠(金腰佩)에도 나라의 풍요를 기원하는 물고기 장식이 있습니다.
이웃 나라인 가야와 마한과 백제와 일본의 금관에서도 물고기는 풍요의 상징이었고, 그리스 문화권에서 스키타이 알타이 문화권에 이르기까지 물고기는 전 세계적으로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라의 초창기에 물고기가 신라인의 식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사건은 동해안 영일만 하서지촌의 어부였던 석탈해가 신라 왕이 된 일입니다.
바다 건너 멀리 용성국에서 왔다는 석탈해를 발견한 사람도 신라 왕실에 물고기를 공급하는 아진의선이란 여자 어부였습니다. 중앙 아시아 연해주 인근에서 쿠릴-리만 한류를 타고 동해안을 건너 왔을 석탈해가 타고 온 배는 붉은 용을 연상시킬 정도로 상당히 큰 돛배였던 것 같습니다.
석탈해와 그 수행원들이 들어있던 나무 상자가 가로 6미터에 세로 4미터나 된다고 했으니까요. 석탈해는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였으므로, 그물을 만드는 바늘이며 낚시며 작살과 같은 신라의 어로 기구까지도 혁신했을 것입니다.
육이오 전쟁 직후에 함경도 어부들이 강원도 동해안 지방으로 배를 가지고 피난와서 어로를 시작하기 전까지 속초 사람들이 농사만 짓고 있었음을 기억하면,
당시 경주의 동해안 주민들이 어로에 유능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시 어부가 건장한 남성으로 나오지 않고, 아진의선이란 할머니로 나오는 것도 당시의 토착 어로 세력이 상당히 영세했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먼 바다를 자유자재로 항해한 경험이 있는 석탈해 집단이 경주 인근의 냇가와 영일만 근해를 벗어나지 못했을 당시 어로 수준을 혁신시켰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석탈해가 아진의선을 어머니로 모셨다는 것도 이전의 어로 집단과 새로 이주한 어로 집단의 연대를 시사합니다. 따라서 기존의 어로 집단이 석탈해 집단에게 동해안의 물길을 알려 주는 방식으로 연합이 가능했을 것이고,
동해 바닷길과 어장의 실상을 익힌 석탈해 집단은 근해는 물론 먼 바다에까지 나가서 많은 물고기를 잡았을 겁니다. 석탈해에 대한 아진의선과 신라 사회의 평판을 고려하면, 석탈해는 늙고 병든 아진의선을 대신하여 신라의 왕실과 서라벌 사람들에게 예전보다 더 많은 물고기를 바쳤을 것이 분명 합니다.
따라서 석탈해가 후일 호공의 집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도,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풍어를 통한 인심의 획득과 관련지어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또 유목과 해양의 이동 생활에서 유래되었을 듯 싶은 냄비 모양의 노구솥(鐺)과 철제 농기구 같은 생활 도구를 기존의 세력보다 좋은 조건으로 서라벌 백성들에게 제공해준 덕분일 수 있습니다.
석탈해의 신라 정착 이후, 신라는 서서히 정복 국가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석탈해의 해양 기술과 철기 기술은 신라 백성들의 생활보다는 군사적 용도로 우선시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석탈해가 왕이기 이전에 성실한 어부였다는 기록이 뚜렷하고, 자신을 신라로 인도한 최초의 여성 어부를 어머니로 봉양하여 신라 사회의 높은 평판을 얻은 기록이 있고보면,
석탈해가 바닷 물고기라는 새로운 식료품과 노구솥 등의 철제 살림도구 등을 통해 우리 식생활 문화사에 반짝이는 한줄기 빛을 드리웠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아진의선같은 할매가 제게 차려준 해장국 한 그릇이 아주 맛있게 기억될테니까요.
-계속
첫댓글 아이구 너무 길어서 .....
성의 만 읽음....늙어서 새벽 잠없을 때나 읽어야 하나......ㅎㅎㅎㅎ
아 진짜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