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0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출16:9-12/ 마태복음 6:31-34
정의로운 일용할 양식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입을 것을 일컬어서 생필품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수렵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동물을 잡거나 혹은 나무 열매를 취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부터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기도 하고, 잡은 고기를 말려서 보관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먹는 걱정을 줄여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먹을 걱정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일의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니,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 겪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보니, 예수의 시대에도 먹고 사는 문제가 무척 심각 했던가 봅니다. 하루치 양식을 얻지 못해서 굶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염려하지 말라, 하늘 아버지께서는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예수는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같은 마태복음 6장 처음 부분에 나오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서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고 하면서, 또 하나님께 필요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서로 모순처럼 보입니다.
“필요한”이라는 말은 에피우시오(epiousios)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매일의” 또는 “일용할”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하루치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 출애굽기 16장을 보면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빵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지면에 하얀 가루들이 내리게 하였고,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에서 “만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져다가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꼭 하루 먹을 만큼만 가져가야지, 욕심내서 넉넉히 가져다가 보관해 두면 여지없이 썩어 버렸습니다. 매일 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얻어야 하는 것이 “만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살면서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굶주려본 적이 있습니까? 학창시절에 점심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친구들을 가끔 본 적이 있습니다. 급우들끼리 대강 나누어 먹기도 하고 빼앗아 먹기도 하는 그런 시절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 세대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공책 몇 권에 남겨놓으신 글을 발견했는데, 아버지가 그 것을 책으로 편집해서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펼쳐서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평생 고생한 내용입니다. 마지막에 할아버지의 기도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참 가슴이 아픕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인은 무지몽매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먹을 양식도 제대로 벌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공산치하의 북한에서 여기까지 나오게 하시고, 환난과 궁핍에서도 건져주시고, 전란 가운데에서도 살아남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 망극 하옵나이다. 나는 돈을 벌지 못하여 언제나 살림이 쪼들렸고, 여비도 없어서 쩔쩔매었습니다. 나에게 물질의 축복은 없었으나 나로 하여금 일찍이 장로의 직분을 맡겨주시고, 나의 자녀들 모두 자기 살림을 잘 꾸려나게 하시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직분으로 섬길 수 있게 하여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이다지도 원대하며 감추인 보화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항상 가난하여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편안히 먹고 살 수 있게 하여주셨으니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50세가 되기까지 항상 궁핍하여 매일 매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아온 한 그리스도인이 남긴 기도문>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도문을 쓸 때가 할아버지 나이 약 75-77세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문에서도 일용할 양식만 구하다가, 이제 편안히 먹고 사는 오늘을 감사하는 내용이 나오듯이, 오늘의 현대인들에 하루치의 양식만 매일 매일 구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일용할 양식 간구를 해설하였습니다. 이 간구는 첫째, 매일의 양식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도록 하게하는 간구이며, 둘째, “일용할”이라는 말은 육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음식, 의복, 가옥, 가정, 전답, 가축, 금전, 경건한 배우자, 자녀들, 일군들, 경건하고 신실한 지도자, 훌륭한 정부, 적절한 기후, 평화, 건강, 질서, 명예, 좋은 친구, 믿을 만한 이웃 등등 모든 것을 열거합니다. 그러니 500년 전에도 일용할 것이 그냥 하루치 빵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씀이 문자적으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깊이 묵상해보면,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감사하며, 욕심 부리며 살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루터는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은 악당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축복을 함께 받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을 받아 누리는 축복은, 이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버지다우신 선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 손에 있는 것들이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종교개혁자 칼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은 이미 넘치게 가지고도 여전히 걱정과 두려움으로 사는 인생을 염려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영혼보다는 육체에 더 관심을 갖고 살기에, 마음이 동요되고 고통을 자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용할” 또는 “그날의” 양식을 구하는 것은 만족을 모르는 욕망이나 사치, 그리고 낭비에 빠지지 말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고삐 풀린 욕망으로 무한정의 재물을 찾아 헐떡이는 자들이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스스로의 부요함에 흐뭇해하며 자기가 쌓아 놓은 재물을 믿고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칼뱅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소홀히 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분량에 만족하며 살고, 혹시라도 부정한 술수로 이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기도 원문을 직역하면, “오늘(매일) 우리에게 일용할 우리의 양식을 주시고”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주의 기도와 다른 점은 “일용할 우리의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주의 기도 처음부터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기도는 개인의 기도인 동시에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교회의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를 드릴 때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허덕이는 사람이 먹을 것을 얻게 해달라는 의미를 생각해야하고, 우리가 바치는 헌금이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는 이들에게 소용되어지게 해달라는 의미도 담아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 기도는 이런 기도를 매일 하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내일 먹을 것이 충분한데? 굳이 또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하나?”라고 생각하면 본뜻이 흐려집니다. 이 기도는 나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매일 매일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살전5:17)라는 말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세시대가 지나가면서 세상은 급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물자 생산이 급속도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자본과 금융의 시대가 도래 하였습니다. 농업경제가 상업경제로 그리고 기술경제와 금융경제로 바뀌면서 이제는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서 일 년치 양식, 아니, 평생양식을 꿈꾸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에 2000년 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와 “일용할 양식 간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현대의 신학자들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많은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말 그대로 그날 굶지 않을 양식을 의미하지만, 오늘처럼 풍요로운 세상에 주는 의미는 “만족”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처럼, 아무리 많은 소출을 창고에 저장하고 안심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비유말씀은 인간의 만족이 어디까지인가? 깊이 생각해보라는 뜻입니다. 만족해야하는데, 어디까지가 만족의 경계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정당한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량생산과 성장주의를 향한 부패한 무한정한 욕구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권력지향적인 욕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일용할”이라는 말과 “오늘”이라는 말을 중요하게 여겨야, 무한정한 권력지향적인 우상숭배의 욕구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간구”는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자신의 욕구가 머리 위까지 자라서 그 욕구에 잡혀먹지 않도록 물질적 욕구를 항상 검증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착취와 극단적 이윤추구로 고통당하는 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간구는 그런 고통을 못 본 척하고 침묵하는 우리가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세상의 배고픔과 탐욕 두 가지를 다 극복하는 기도이고, 정당한 노동과 임금을 위한 간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를 담은 남아메리카에서 만든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하나님, 굶주린 이들에게는 양식을 주옵시고, 빵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옵소서”.
평화목교우 여러분, 일용할 양식은 “공평한 양식”입니다. 그리고 식사는 “공동체의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 간구를 다시 번역하면 “우리의 날마다의 양식을 우리에게 오늘 주시라.”(The bread of us the daily give to us today)는 간구입니다. 동시에 “일용할 양식”이란 “족한”, 또는 “충분한” 양식입니다. 그런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자꾸 달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향은 필요한 것보다 넘치게 바라기에,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11절 말씀처럼, 정말로 만족할 줄 아는 은총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만족의 “정도(定度)”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잘 살펴야하고, 양식이라는 선물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야하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교우여러분, “우리의 날마다의 양식을 우리에게 오늘 주시라.”라고 기도하면서, 우리는 세상이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양식은 나에게만 필요한 것시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꼭 있어야 하는 것이고, 이 양식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양식이 되도록 우리는 무한정한 우리의 욕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힘써야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함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