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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트 매거진-아띠마 원문보기 글쓴이: 아트 매거진
원종린 수필 문학상--대상 수상자 이재인 수필가
===이재인 선생 약력===
∙ 충남 예산 출신
∙ 월간문학에 71년도 「장서와 언더라인」을 발표하면서 문단 등단
∙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 조국문학상 수상 외 다수
∙ 저서 수필집 『마디마디 비친 그리움』 외 16권
소설집 장편 『악어새』 외 12권
∙ [오영수문학연구](2000년도 우수학술도서 선정)[우리소설 50선](문광부 추천도서)
∙ 경기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역임
∙ 현재 한국 박물관협회 이사
∙ 한국문학관협회 이사
∙ 한국 문인 인장박물관, [충남 문학관] 대표이사
===수상소감===
스물 하고도 두 살 때까지 나는 막노동자였다. 뜻한 바 있어 독학으로 명심보감과 중앙강의록 통신학교를 줄줄이 마쳤다. 그 후 고철수집자, 산소용접공, 좌판때기 장난감 장수 등을 했었고, 숨이 팍팍 막히는 삼십도를 웃도는 밭고랑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인을 만났다. 그분께 작가의 길을 물었는데 친절하게 답신을 주셨다. 소설가 난계 오영수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학교신문 취재와 편집 일을 하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근로 장학생쯤 되는 셈이었다.
나는 대학에 다니다가 군에 입대했다. 입대 전에 투고한 영남대학교 영대신문 제3회 전국대학생 공모전에 시가 당선되었다. 심사위원이 김춘수 시인, 박철희 교수, 윤혜승 시인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나는 대학시절 국문학과 재학생으로 시건방진 문학청년이 되었던 것 같다. 시인 한성기, 흰모래 이희철 아동문학가 그리고 시인 서창남 선생이 예산에 살고 계셨기에 그분들의 격려 속에 개 같던 내 인생이 빛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군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쟁에 자원입대했다. 전투 경험을 살려 소설을 쓰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귀국 후 순진한 여자를 구하여 결혼했다. 이후 복학 중에도 출판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대학 졸업장을 얻었다. 교사2급 자격증도 얻었다.
성실하게 살고 열심히 학생 가르치고 승진을 하여 교육계의 별이라는 문교부에 장학직, 연구직을 거쳤다. 월남전을 소재로 한 『악어새』가 10만부 가량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대학교수가 되었다.
대학교수를 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면서 지내다가 2010년에 정년퇴직을 했다. 오늘 이 상을 주신 것은 남은 시간 글에 더욱 정진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앞으로 남겨진 시간 동안 치열하게 글을 써 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원종린 문학상 운영위원회 측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선정 작품===
쓰레기더미에서 꽃씨를
충청도 산골,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대전 고향으로 전근가시는 담임 선생님의 이삿집을 꾸리는 일에 나는 호출을 당했다. 뻥대처럼 키가 멀쑥했고, 적령보다 2년이나 늦게 입학하여 덩치가 동급생들보다 훨씬 컸었다.
군계 일학년이라면 지나친 과장일 테고 아무튼 나는 가물치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선생님께서는 마당 채소밭이 넓은 집에서 자취를 하고 계신 총각이셨다. 수업이 끝나면 뒷동산 솔바람에 등을 식히면서 텅빈 교실에서 풍금을 치셨다. 신명들린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향생각, 따오기, 바위고개를 여윈 손마디로 신기하게도 곡을 짚어내셨다.
반장이었던 나는 부반장 애순이와 함께 박자에 머리를 끄덕이면서 따라서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면 선생님은 우리 둘을 이끌고 당신의 자취집으로 데리고 가셨다. 울밑에 무성한 패랭이풀도 뽑고 고양이밥도 쥐어뜯었다. 장마 뒤끝에는 나팔꽃, 맨드라미, 접시꽃이 울울하게 삽짝 울타리에 등을 기대고 환한 꽃불을 밝히곤 했다.
선생님은 꽃을 좋아하셨다. 일찌기 화훼에 눈을 뜨셨던지 좋은 꽃 종자를 서울에서 주문하여 심으셨다. 그래서 선생님댁의 처마밑 화단과 우리반 화단은 봄, 여름을 지나서 늦가을까지 꽃으로 환했다. 이름 모를 꽃들은 저마다 영혼의 색깔로서 자라나는 우리의 마음에 물을 들여주곤 했다.
어느날 선생님이 대전으로 영전을 하시게 되었다. 나와 애순이는 선생님댁에 불려가 이삿짐을 꼼꼼하게 챙겨 새끼줄로 미제 씨레숀 박스를 몇번씩 묶어 도라꾸에 얹어 실었다.
이것들은 너희들이 마당 두엄 더미에 놓고 불을 질러 없애라. 불티가 날리면 큰일난다. …. 자 애순이… 가물치 니네들 공부 잘하고….
선생님은 먼지를 일으키는 화물차 꽁무니에서 손짓을 하면서 바람처럼 광시(光時)를 떠나셨다. 두엄더미에 쓰레기, 먼지, 종이, 세끼도막 등을 불지려던 나는 그만 그 쓰레기더미 속에서 쥐부랄만한 꽃씨 봉투를 발견해냈다.
이게 꽃씨아잉가?
누런 신문지에 약봉지처럼 쌓인 그 안에 먹빛 맨드라미씨가 초롱초롱 눈빛을 발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내가 가져다 심어야겠구나….
옆에서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던 애순이가 말했다.
귀신 붙어… 태워버리라구….
나는 귀신이 붙을까봐 퉤훼 침을 세번이나 뱉곤 그 꽃씨를 소중하게 주머니 속에다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듬해 봄에 나는 선생님이 버리고 가셨던 꽃씨를 잊지 않고 마당가에 뿌렸다. 그런데 그 꽃씨가 신기하게도 싹을 틔웠다. 세상을 향해 사알짝 고개를 들었을 때의 환희란 어찌 표현해야만 할는지….
나는 정성들여 물을 주고 가꾸었다. 여름 내내 마당가에 나비와 벌을 불러들였다. 어린 나이에 꽃을 가꾸는 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웃들은
이 아이는 착하게 될게야….
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했지만 나는 착하기는커녕 덤덤한 아이로 서울로 진학하여 어렵게 공부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작가가 된 것도 사실은 담임선생님이 읽고 버린 책들을 주워다 먼지를 털고, 책장을 말리면, 밥풀로 페이지를 때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50년대 후반, 전쟁을 겪고 난 다음은 책이 귀해서 혹은 빌려다 보거나 아니면 양잿물을 쌌던 책장에서 더러더러 시나 수필을 읽었다. 그것이 싹을 틔우고 상상으로 비약하여 내 주위에 친구들은 마른가지에 물을 끌어올려 지금은 잘들 살고 있다.
버려진 쓰레기더미에서 꽃씨를 찾아냈던 내 유년기….
지금은 풍요의 거리에서 남이 버리는 황금덩이도 들여다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쓰레기, 세상은 이제 쓸만한 가구, 의복, 책이 넝마로 전락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쓰레기 더미에서 꽃씨를 불러내고 생명의 환희를 구해냈던 나는 지금도 버리고 간 이삿짐 쓰레기 더미를 눈여겨 보는 짓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쓰레기일 뿐,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다던 옛 선현의 말씀이 새롭다.
꽃피는 팔월, 문득 날으는 벌떼를 보면서 선생님의 얼굴을 그려봄은 나이 탓이런가?
甲寺에서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여기는 계룡갑사, 어제는 폭설인가 싶더니, 오늘 아침에 서설(瑞雪)로 내리고 있다. 우리 부자가 등산복 차림으로 사찰입구로 들어선 것은 오전 9시, 입구에서 경내까지는 8백여 미터. 누구 한 사람도 15센치 가량으로 눈덮인 길에 발자국을 내지 않은, 신비롭고도 상쾌한 길이었다. 차분하고 정결한 흰 카피트가 깔린, 수령 5백년쯤은 넉넉한 거목이 줄지어 선 숲길. 평화와 정적이 깃든 산사는 눈발 속에서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 큰 집 아이가 방학이 되자마자 동학사엘 가자고 졸라댔다. 그래서 콘크리트로 말끔하게 단장한 동학사보다는 낡고 퇴락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갑사가 교육적 효과가 클 것 같아 바야흐로 오늘 이곳을 찾아나선 길이다. 우리 부자는 계룡이니, 주막거리니 하는 동네 이름을 뒤로하고 지네 등솔기 같은 협로를 더듬어 오르면서 마치 유토피아의 원시림이라도 찾아온 듯 호젓하고도 넉넉한 즐거움에 흠씻 젖는다. 그래서 걷다가는 발을 멈추고 섰다가는 다시 걸었다.
갑사, 여기는 나의 짧은 생애이지만 뼈아픈 기억이 얼룩진 곳이다. 국민학교 6학년 전체 대의원회 회장 겸 급장인 나는 가정이 빈곤하여 수학여행을 가지 못할 안타까운 처지였다. 그때 담임이었던 H선생님이 여행비를 대납해 주셔서 마침내 갑사에 올 수 있었다. 그때는 진달래, 철쭉이 지나가는 행인의 옷자락에 불을 붙이던 봄, 대접만큼씩이나 큰 백목련이 요사채 앞에 피어 있었고, 팔상전 앞마당에도 햇살을 모으면서 속살거리던 산수유꽃이 만발했었다. 그래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던 여행이었다. 나는 오늘 아들과 함께 20여 년 전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있다. 그때 눈에 비치던 마을, 엎어 놓은 듯한, 바가지 같은 고만고만한 초가들이 흉허물없이 정겹게 느껴졌다. 아직은 시멘트 분장이 없는 고담한 모습이 귀하게 보였다. 다른 어느 사찰의 초스피디한 직선코스와는 달리 갑사로 오르는 길은 구불구불한 길, 장활한 나무의 풍치가 그윽했다.
와! 진짜 멋있는 절이네요! 단청빛도 바래고 고색창언한 요사와 절이…. 녀석의 말소리가 흥분에 잦어 고요하고 인적이 드문 뜰에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갑사답지?
절은 절 같네요. 절보다는 훌륭한 승려가 있기에 고색창연하게 존재하는 것이겠지요….
녀석은 나의 말에 장황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 말 속에는 오늘날 세속화 돼 가는 사찰이 옛정도 애정도 없음을 아쉬워하는 듯 했다.
우리 부자는 호젓하고 흔쾌한 감정에 젖어 경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쪽 건너 산속에 있다는 부도, 보물 275호를 보았다. 8각의 지대석(地臺石), 그리고 그 지대석 위에 상하 기단을 만들고 사자와 권문․반용문을 조각한 솜씨와 주악 첫인상을 새겨넣은, 그 돌을 떡주무르듯한 섬세하고 오묘한 솜씨가 백제의 얼을 지니고 살아 있음을 감탄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만(卍)자 기를 계양했던 철당간 지주를 보았다. 까마득히 높은 당간 위로 흰구름이 낮게 지나가니까 갑자기 당간이 흔들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묘한 축조법, 깊은 산중의 정적, 태고연한 모습에 우리 부자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공주 읍에 나가 무녀왕릉, 그리고 박물관을 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호아범 아니가?
귀익은 목소리가 내 등을 쳤다. 돌아다보니 예산에 계신 삼촌 내외분이 어쩐 일이냐는 듯 웃고 서 계셨다. 방금 주차장에서 내린 모습이다.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으시던 국수주의자, 삼촌께서는 오늘따라 어울리지 않게 고동색 양복에 단장을 짚고 그리고 색안경을 쓰고 계셨다. 며칠 전, 사촌 여동생을 출가시키던 고향 예식장에서 뵈었는데, 오늘 또 우연히 만난 셈이었다.
어쩐 일로 눈속에 이 갑사를…?
그냥 바람처럼 왔어! 쌀 한짝 사갖고 왔어. 바람 좀 씔라구….
숙모님의 대답.
나는 그제서야 내외분이 이곳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삼촌의 막내 딸 그는 수재였고, 용모와 재질이 뛰어난 명석한 여자 아이였다. 그런 그가 예식을 마치고 먼 타국 땅, 캐나다로 훌쩍 떠났다. 그를 보낸 삼촌 내외분의 가슴을 찍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구경 다 했나?
예, 저흰 다 보구 가는 길이예요.
녀석의 말.
그럼 얼릉 가봐. 춘데 고생말구 언제 고향에 올테여?
숙모님은 손을 내 저으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섭섭하게 그냥 헤어질 수 없어 찻집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나는 삼촌의 그 강강한 모습을 보면서 아직은 늙지 않으시련듯한 노익장에 즐거웠다. 나는 선비의 명예를 평생 숙명처럼 지켜 온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박꽃 지붕에 환상의 꿈줄기를 끌어올리던 5월의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때가 5학년.
나와 동갑인 사촌과 함께 신비롭고 존엄하게만 느끼던 삼촌 글방엘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삼촌께서는 외출중이라서 빈 방이었다. 붓글씨를 쓰시다가 나가신 듯 먹물이 고인 벼루와 붓대는 물기가 흥건했다. 나와 사촌은 그 붓을 가지고 옆에 서 있는 병풍에 난초를 그렸고, 족보가 놓인 오동나무로 만든 백년이나 됨직한 퀘퀘묵은 누런 고태(古態)를 깨끗이 페파로 밀어 놓았다. 그런 후 우리는 삼촌의 방을 나왔다. 자랑스런 일을 하듯이. 그러나 저녁상을 눈 앞에 둔 나에게 삼촌께서 달려오시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영조대왕 행마도(英祖大王行馬圖)란 가보 병풍이 쓰지 못하게 됐고, 100년이나 족히 되는 연사이 새 것처럼 돼 조상의 체취가 사라졌다고 발을 동동 구르셨다. 삼촌의 말씀을 듣고서, 기름 때가 졸졸 흐르던 연상이 햇볕 속에서 유난히 반짝거리는 그 때의 그 모습을 생각하니 이제사 큰 죄를 지은 것 같았다.
그런지 이십 년, 내가 옛 것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은 그날의 최대의 실수에서 배운 바 크다. 그러니까 삼촌은 간접적으로 나를 호고파(好故派)로 만든 셈이었고 나는 삼촌댁의 병풍과 연상을 망친 것이었다.
자, 차가 식겠다. 어서 마셔, 그리고 눈길에 조심해서 가봐.
삼촌께서 재촉하셨다. 우리는 함께 일어섰다. 나는 다방에서 먼저 걸어 나왔다. 그리곤 작별 인사를 드리곤 경내로 들어서는 내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묘한 만남이 또 있구나 생각했다. 삼촌으로 인하여 내가 호고파가 되었고, 삼촌의 국수주의적이라고 할만큼 전통 숭상 주의자가 된 오늘, 더구나 건방진 현대화에 물들지 않은 이 갑사에서 삼촌을 다시 만남은 우연치곤 너무나 기이한 해후이다.
어서 가시지요! 날씨도 찬데….
나는 앞장서 걷는 녀석의 뒤를 따라 비탈길을 내려섰다. 아직도 계룡산곡에 흰 눈발이 시나브로 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