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출어했던
오징어잡이 배가
새벽 공판장이 다 철시한 뒤
반기는 이 하나 없는
후포항에
늦게 귀항했다.
먼바다에서 따라온
늙은 갈매기 한마리가
후포항 선창가 위를
부질없이 선회하고
집어등이 백야처럼 밝혔던
먼바다로 돌아갔다.
어부들은
지쳐 있었고
마중 나온 선주도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선주 마누라도 지쳐 있었다.
물통에 갖힌
오징어들은
선창가에서
자기들 몰래
약식 경매가 순식간에 이루어져
바닷물과 함께
서울 횟집으로 팔려가는 줄도 모르고
먼 바다에서
헤엄치던 방식 고대로
똑 같은 영법으로
단조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이제
후포항
풍어제를
본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www.songhyun.com)
2.조박사님 어머니에게 상놈 인사를 하다
조박사께서 오징어 한 상자를 구해 왔다. 초등학교 뱃놈 동무한데 한 상자 꽁짜로 얻었는지, 내 몰래 값을 치뤘는지 모를 일이다. 윤보선생이 오징어 물회 타령을 하는 바람에 오징어 상자를 차에 싣고 조박사님 어머니가 계시는 댁으로 갔다. 조박사는 윤보선생을 위해서 물회도 하고, 오징어를 배를 따지 않고 통째로 삶은 "통이까 삶은 것" 별미를 대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계획에 없던 일이라서 윤보 선생과 나는 선창가에서 수퍼나 구멍가게를 한참동안 찾아나섰다. 선물용으로 살 만한 것이 없었다. 하이타이와 식용유를 샀다.
본의 아니게 조박사님 어머니께 상놈처럼 마당에 서서 상놈 인사를 했다. 아마 우리 어머니가 아시면 부지깽이로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야 이놈의 자슥아! 사람이 아무리 본배없이 커도 어른 한테 인사를 고따위로 해? 이 돌쌍놈 같은 자슥아! "
그 순간 우리 어머니를 보는 듯 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순간 내 눈시울이 시큰하고 목구녕에서 뜨거운 것이 뭉클 치솟았다. 꼭 우리 어머니 같았다. 조금만 더 오래 쳐다보면 내 불효와 내 설움에 겨워 금방 내 눈에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먼 산을 잠시 쳐다보았다.
조박사님 어머니께서 오징어 배를 가르고 창자와 똥을 빼고, 허 선생은 물회용에 알맞게 오징어를 노련한 솜씨로 채를 썰었다. 그 옆에서 조 박사님 조카가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한참 뒤에 아침 밥상 앞에 앉았다. 조박사님 어머니 때문에 물회의 맛과 통오징어 삶은 것에 대한 맛의 평가를 할수가 없었다. 마치 어제 동해 바다 앞에 서는 순간 투항하고 무장해제된 것과 같이 조박사님의 어머니 앞에서 역시 나는 투항하고 무장해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해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만나고 온 것 같았다. 밥을 한술 뜨면서도, 날오징어를 한점 초장에 찍으면서도, 통오징어를 한점 입에 넣으면서도 조박사님 어머니께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를 빌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식사는 내 불효를 참회하는 시간이었고,조박사님 어머니의 만수무강을 비는 기도시간이었다. 그리고 조박사님과 같은 자랑스런 아들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 앞에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경건한 예배와 헌신의 시간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박사님 어머니께 또 쌍놈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마음 속에는 우리 어머니를 갯가 한 구석에 방치해놓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 무거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도둑놈처럼 뒤 한번 안 돌아보지 않았다.
3.
{시}
태풍 속으로
--SBS TV 연속극 "태풍 속으로" 촬영 세트장에서
송 현(시인)
여기서
내혼자 죽어도 좋고
그대와 둘이 죽으면 더 좋다.
아니다
나만 죽고
그대는 살아서
우리 사랑을 증언해야 한다.
수평선에도
선착장에도
저 깎아지른 절벽에도
연인들이
최신형 디지탈 카메라로
필름 걱정 안하고
원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래
좋을 때다
사진 찍을 때
그때가 좋을 때다.
그 꿈같은 사랑이
몇년 안가서 증오가 되고
그 꿀 같은 연인이
몇년 안가서 웬수가 될 줄
아직은
모를 것이다.
너희가
몰라 그렇지
세월은 속절없이 간다.
순간
순간
사랑에
목숨 걸어야 한다.
나처럼
곤고한 육신으로
여기 와서 죽어도 좋다는
허튼 소리 하지 말고
지금
여기
사랑에 목숨 걸고
후회없이 살아라.(www.songhyun.com)
4.
{시}
피렌체에서
송현(시인)
안된다
거기 가면 안된다
사랑에 목마른 이들은
절대로 피렌체에 가지 마라.
거기 가면
멀쩡한 사람도
죽고 싶어진다.
피렌체에
창문을 열지 못하게 설계한
건축가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맞다,
피렌체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 설계한 건물이다.
피렌체에
가지 마라
겁도 없이
멋 모르고
피렌체에 가더라도
절대로
창가에는 앉지 말고
바다 보고 앉지도 마라.
거기서
바다를 보면
멀쩡한 사람은
사랑하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싶어진다.
안된다
거기 가면 안되고
바다를 쳐다보면
큰일 난다.(www.songhyun.com)
5.
{시}
울진 오징어
송현(시인)
이 세상에서
울진 사람들이
가장
선물할 줄 모른다.
설에도
울진 오징어
추석에도
울진 오징어
이 세상에서
울진 사람들이
가장
선물 할 줄 모른다.
서을 갈 때도
울진 오징어
부산 갈 때도
울진 오징어
이 세상에서
울진 사람들이
가장
선물할 줄 모른다.
선배한테도
울진 오징어
제자한테도
울진 오징어
이 세상에서
울진 오징어가
제일 착하고
제일 순하다.
울진 사람들이
날마다
달마다
울진오징어를 잡아도
불평 한마디 안하고 잡혀주는
울진 오징어가
오징어 중에서 제일 착하다.
그래도
울진 오징어는
대대손손 잡혀야 한다.
울진 앞바다
물이 다 말라도
울진 사람들이
울진을 떠나지 않는 한
울진 오징어는
울진 사람에게
무조건 잡혀줘야 한다.(www.songhyun.com)
6.
{시}
신세만 지고
--조 박사님께
송현(시인)
내가
어릴 때
동무 집에 자고 왔다고
어머니는
2대 독자인 나를
부지깽이로
종아리고
등짝이고
가리지 않고
개패듯이 팼다.
이번에
불쑥 울진 가서
신세를 많이졌다.
우리 엄마가
이를 알았으면
보나마나
부찌깽이로
나를 개패듯이 팼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울진에 가면 안된다.
아무 죄없는
조박사나 허 선생에게
신세 지면 안된다.
이 나이 되어도
우리 어머니
말 안 듣는 나는
부지깽이로 맞아도 싸다.(www.songhyun.com)
첫댓글 너무 황송한 글들에 몸둘 바를 모르면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에게 왔다 갔다고 부저깽이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