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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 친구 이석범(맑은소리) 입니다.
아래글은 지난봄 동아마라톤(42.195km)을 완주하고 동아일보에 완주기를 공모한 내용으로
요즘같이 운동을 싫어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하여,
그때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여기에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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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엄니
평택엄니
평택엄니
동아마라톤 10여일 전,
연습부족을 실감하며 벼락공부와 비밀과외에 전전긍긍 조바심으로
저녁시간 짬을 내어 회사근처 한강 시민공원 달리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평택엄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3통이나 표시되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평소에 믿고 있던 그리고 그것이 늘 현실로 나타나던
시골 어머님과의 통화.
1분 이내의 짧은 통화로 시골집의 모든 정황을 감지해낼 정도로 일주일에 2번 이상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다를 떨곤 했던 어머님과의 통화는 항상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드렸었다.
‘무슨 일일까? 할머님 제사인 2월말 경 시골에 다녀왔는데, 한식은 아직 멀었고---’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통화 버튼을 누르자 땅으로 꺼질 것 같은
한숨 섞인 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바쁘니?”
“예, 좀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며칠 전에 아부지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넘어지면서 얼굴을 부딪쳤는데
아무래도 퉁퉁 붓는 게 이상해서~”
“에이, 조심하지 어쩌다가 넘어졌어요?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어쩌지.
작은형한테는 전화해봤어요?”
탁상달력에 적힌 메모를 보면서 마치 엄니가 밀어 넘어트리기라도 한 듯
공연히 짜증을 내었다.
“아니, 그럼 할 수 없지 뭐. 윗집 기갑이 아저씨한테 부탁해보지 뭐.
그 아저씨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그렇게 해요. 내일 말고 다른 날 한 번 들릴게요. 엄니”
평택엄니
나는 얼마 전부터 돌아가신 어머님을 엄마로, 지금 새 어머님을 엄니로 불렀다.
서해안 고속도로에 올라 불과 한 시간 남짓 지척인 거리,
맘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다녀올 수 있다.
하지만 뭔가 한가지일에 붙들리면 끝이 보일 때까지 다른 일에 맘 뺏기는 일을 질색하는
나의 성격 탓에 공연히 엄니에게 툴툴거렸다.
10년 전 고관절 수술(대퇴부 뼈 교체수술)로 거동이 불편하신
더구나 작년부터 점차 치매증상까지 보이는
금년 83세의 아버님이 화장실에서 넘어지면서 문고리에 턱 주변을 부딪쳤는데
며칠이 지나도 부기가 안 빠지고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살성이 좋기로 소문난 아버님이 며칠이 지나도 차도가 없음은
필경 속에서 무슨 사단이 난 것이 틀림없다는 엄니의 말씀에 공감하면서도
다음날 저녁모임이 있고 오후에 틈을 내어 한강시민공원에서
마라톤 연습을 하려던 계획이 전부였던 나는 큰 약속이라도 있는듯 난처해 했다.
승용차로도 간신히 부축하여 이동을 해야 하는 아버님.
하루에 4번씩 들락거리는 버스로 다녀오랄 수도 없는 실정이다.
다음날 전화를 드렸더니 그 아저씨도 바쁜 관계로 며칠 뒤에 가기로 했다면서
오늘은 좀 가라앉은 것 같다고 며칠 두고 보자고 하신다.
그리고 지난주 수요일인 10일 점심시간.
거래처 사장님과 함께 식사 중,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이 요동을 친다. 평택엄니였다.
‘엄니 좀 있다가 제가 할게요’ 급히 전화를 받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다른 부재중 전화를 체크하면서 생각이나 전화를 드렸다.
병원에 갔더니 속에서 염증이 심해 수술을 받았다고 하신다.
심하게 곪아 이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면서 의사의 꾸지람을
엄니가 고스란히 뒤집어썼다면서 속상해 하신다.
며칠간 통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내일은 그 아저씨가 서울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내일 시간을 어떻게 내서라도 내려오길 바라셨다.
다음날 출근길. 주차장으로 변한 자유로에 접어들어 바로 시골로 향했다.
시골에 도착한 나는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웃고있지만 우는 듯한 아버님 얼굴을 대하면서 죄송스런 마음에 앞서 짜증이 났다.
병원에 모시고 가니 자네가 아들인가 하는 듯한 눈치인 연세 지긋한 의원님은
노련한 솜씨로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째고 벌리는 기계를 밀어넣어 이리저리 휘저었다.
순간 피고름이 의사의 가운에 튀어 오르고 아버님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버님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흘러 내렸다.
움직이지 못하게 아버님 손을 양쪽 침대 모서리에서 잡고 있던 나는
지금까지 아버님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71세에 대형 수술을 받고도 마취가 풀리면 무척 아플 거라면서
진통제를 듬뿍 지어주셨지만 진통제를 복용하면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다는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퇴원하는 가방 안에 진통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만지지 말라는 엄니의 만류에도 두툼한 붕대로 밀봉된 상처부위를
연신 어루만지며 차창 밖만 초점 잃은 눈동자로 바라보셨다.
미리 준비해간 소주 한 박스와 음료수 한 박스를 이웃집에 전해드리라면서
며칠 통원을 부탁드리도록 엄니께 일러드렸다.
동아마라톤 이틀 전. 궁금하여 전화를 드렸던 나는 금방 후회했다.
내일 토요일은 그 아저씨가 또 서울에 가는 날이라서 억지로 부탁하기도 어렵고
우선 토요일은 지켜 본 후 월요일 정도에 다시 병원에 가시겠다고 하신다.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가급적이면 나더러 한 번 더 내려오기를 바라는 눈치다.
하지만 내일이 어떤 날인가. 동아마라톤 D-2일전.
아침에 동아마라톤 홈피를 방문하니 D- 1일 22시간 00분 00초전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골라 배불리 챙기는 시기.
하루 전.
집에 일찍 들어가 가방도 준비하고 며칠전 미리 사다놓은 건포도, 오렌지, 빵 등
군것질도 하면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동아마라톤 써브-포(4시간 이내 골인)의 전의를 다져야하는 시간 아닌가.
토요일 상황을 보고 전화를 드리겠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 동아마라톤이 지난 월요일 아침에서야 전화를 드렸다.
동아마라톤.
2002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을 끝으로 1년 만에 참가하는 공식대회이고 보니
완주 목표로 천천히 뛰겠다고 동료들에겐 선포했지만
내심 써브-포의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
행여 토요일 시골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전화만 울리면
발신지가 어딘지 확인부터 하였다.
동아마라톤 D-DAY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주변은 이미 축제의 무대였다.
전날 밤 늦게 까지 이어지는 탄핵반대 촛불시위로 동아마라톤이 제대로 열릴까
걱정하던 기우가 무색하리만큼 모든 준비가 완벽했다.
아직은 삼월초의 쌀쌀한 날씨였다.
얼마 전 성적이 좋은 참가자들일수록 날씨에 상관없이 마라톤복만 입는다는
어느 해설가의 말이 생각나 긴 옷을 입을까 고민하던 끝에 과감히 런닝복 만 챙겨 입었다.
옷을 맡기고 나자 제법 추위가 엄습했다.
마침 속에 긴 옷을 입은 한 선배의 겉옷을 빼앗다시피 챙겨 입으니
안온함이 온몸을 감싼다.
선수들이 출발하고 4시간대인 블루존 가장 후미에서 동료와 함께 출발하여
남대문을 돌아 5키로 지점에 도착하니 31분 07초가 흘렀다. 예상보다 1분 7초가 늦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동아대회 때도 5키로 구간을 31분에 10키로 구간을 30분에 뛰었어도
3시간 53분에 골인 하였던 경험으로 여유를 부렸다.
15키로 지점부터 속도를 높여 보기로 했다.
아직은 추운 날씨로 땀이 흐르지 않은 탓인지 소변 생각이났다.
여기저기 조금만 으슥한 구석이 보이면 여지없이 늘어서 소변을 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급하지 않았기에 예전 기억을 더듬어 15키로 지점까지 참아보기로 했다.
10키로 지점 29분 36초.
몸이 풀려 가볍게 느껴졌지만 이대로 속도를 유지했다.
15키로 지점에 도착했다. 29분 48초.
갈증은 없지만 두 모금을 마시고 반쯤 남은 물을 탁자에 놓으며
물을 조금씩만 부어놓도록 봉사자들에게 주문했다.
하프를 포함 여러 번 마라톤에 참가해보면 급수대에서 주는 물의 양이
너무 많음을 느낄 수 있었다.
15키로 지점 조금 벗어나 삼우주유소 화장실로 달려가니 예전처럼 역시 초만원이었다.
인심 좋은 주인의 배려로 주유소 뒤편 담벼락에 죽 늘어서서 소변을 보았다.
다음에 꼭 이 주유소를 들리겠다며 감사함을 표시하고 속도를 높였다.
20키로 지점 28분 30초.
준비해간 파워젤 하나를 먹었다.
잠실대교 위로 끝도 없는 행렬이 이어져 달려 나가고 있다.
별로 속도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추월당하고 있었다.
하프지점. 시계를 보니 2시간 5분이 지나고 있다.
써브-포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4시간 10분만은 넘기지 말자는 생각으로 일정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올림픽공원을 지나자 음악에 맞춰 포크댄스를 추는 한 무리의 군무를 보니
여유로운 이국적 분위기에 하프를 뛰어온 피로가 봄눈처럼 사라졌다.
천호동사거리를 향해 모자를 약간 눌러쓰고 모자챙에 시선을 고정 시킨 채
편안 레이스를 펼쳐나갔다. 문득 시골아버지가 생각났다.
토요일 어머님께 먼저 전화를 드릴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다친 상처가 더 심해지지는 않았을까.
마라톤이 뭔지 마라톤 연습 할 시간은 있어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임에도
무심한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25키로 지점 28분 34초.
급수대에서 두 모금의 물을 마셨다.
‘그래 어차피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속으로 아무 일 없을 거야를 되 뇌이며 달려 나갔다.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니겠지 그냥 달려 나가자.
또다시 큰소리로 “이석범”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뒤에서 일산호수마라톤 회원들이
사이좋게 도란도란 달려오고 있었다.
당연히 훨씬 앞에서 써브-포열차에 올랐던 것으로 믿었던 나는 의외의 장면에 의아해 했다.
어차피 써포도 못할 거 같이 가자고 서정삼님이 물귀신 작전을 펼친다.
옆에서 정규봉님이 잘하면 써포도 가능하다며 먼저가란 말만 없었어도
그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천호사거리-
언젠가 사무실에 놀러온 천호사거리 근처에 사는 방송작가인 친구가
동아마라톤 책자에 나온 코스를 보면서
뛰다가 힘들면 집에 들어와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가라는 농담이 떠올랐다.
그 친구 부인의 뛰어난 음식솜씨로 한동안 칼국수 집을 운영하였다.
문득 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국수-
어릴 적 여름방학이면 저녁식사는 항상 칼국수로 시작되었다.
대가족인 우리 집은 칼국수 한번을 준비하려고 해도 몇 시간씩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몸이 허약한 엄마는 사내인 내가 딸처럼 부엌일을 도와주는 일에
고추 떨어질라 놀리면서도 좋아하셨고
엄마의 좋아하는 모습에 더욱 부엌일을 도와드렸다.
칼국수는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만 해도 대충 해선 제 맛이 나질 않는다.
엄마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여러번 훔치고서야 물에
적신 모시 보자기로 덮어서 한쪽에 놓아두고
애호박과 조개를 삶아 물기를 뺀 후 따로따로 양념을 해서 간이 배이도록 한 후
둥근 나무쟁반에 밀가루 반죽을 다듬이 방망이로 곱게 일정한 힘을 가하면서
밀어내어 둥글고 얇게 펼쳐야 한다.
쟁반에 밀가루를 너무 많이 뿌리면 칼국수에서 밀가루 냄새가 나서 맛이 텁텁하고
너무 적게 뿌리면 서로 들러붙어 삶을 때 애를 먹게 된다.
행여 콩국수라도 하는 날이면 콩을 고르고 불리고 삶고 맷돌에 갈고
아침나절부터 엄마의 분주함이 이어진다.
삐~하는 기계음 소리에 문득 정신을 추스르니 30키로 지점에 설치된 매트가 발에 밟혔다.
28분 24초.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바나나 반개를 받아먹으면서 천천히 달려 나갔다.
여기저기 먹다버린 바나나와 껍질로 인해 자칫 넘어질 위험성이 보였다.
이리저리 마른땅을 골라 달려 나갔지만 많은 주자들이 바나나를 먹으며 걷는 통에
속도를 높히기 어려웠다.
35키로 지점 29분 04초.
아직 몸에 아무런 징후가 보이지 않았다. 속도를 조금 높였다.
하지만 1년의 공백기와 연습부족을 생각하며 조바심을 달랬다.
시계를 보니 써포는 어려울 것 같았다.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고 점차 내게 추월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추월 할 때마다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마라톤 마의 벽이라 불리는 38키로 지점에 도착하자 서석호님이
자신보다 커다란 일산호수깃발을 휘날리며 “마티아 잘했어”를 외쳐준다.
서석호님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꿀물을 전해주는 초이스님께 괜찮다며
혹시나 하는 써포의 미련으로 치고 나갔다.
40키로 지점 27분 46초.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이제 2키로 남았습니다. 마라톤은 이제부터입니다” 파이팅을 외치며 달려 나갔다.
여기저기 바늘 자국과 핏자국으로 얼룩진 호수마라톤회원 이름을 보니 박영성님이다.
쥐를 만나 고생한 흔적이 역력하다. 파이팅을 외쳐드렸다.
종합운동장이 보이자 힘이 넘쳐났다.
계속 많은 사람들을 추월하여 남직문에 들어서자 절대로 군중심리에 운동장에서
오버페이스 하지 말라는 클럽회장님의 글이 생각나 다소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우측의 넓은 공간으로 치고나가 골인지점으로 내달렸다.
드디어 골인 11분 04초.
4시간 03분 53초.
써브-를 4분여 넘겼지만 너무나 행복한 레이스에 대 만족이었다.
골인지점에서 듬직한 한승기님이 넓은 가슴으로 반겨주었다.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오래 포옹을 하였다.
1년 만에 다시 시작한 마라톤.
그리고 2002년 처녀 출전하여 써브-포를 안겨준 동아마라톤.
광화문을 거쳐 그 넓은 차 없는 거리를 4시간 동안 맘껏 달렸다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이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봉사활동을 해주신
많은 분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인천에서 마라톤을 짝사랑 하던 끝에 일산으로 이사를 택한 것에 행복함을 느끼며
너무 빠지지만 말고 적당히 마라톤을 사랑하자는 마음으로 평정심을 되찾고자 한다.
그토록 조바심을 안겨준 동아마라톤.
일상으로 돌아온 월요일.
시골엄니께 전화를 드리니 다행히 아버님의 좋은 살성으로 상처가 아물어 간다는
소식에 마라톤 때문에 공연히 엄니에게 툴툴거렸던 지난주를 생각하며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동아마라톤. 목표했던 써브-포에서 3분 53초가 부족하지만
마라톤때문에 불효를 저질렀던 죄스런 마음으로 시골 엄니께 용서를 빌고
다시는 마라톤만 짝사랑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번 주 시골 엄니께 다녀와야겠다.
엄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버님 만수무강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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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공부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두 다 잃습니다.
자신에 맞는 운동을 한가지 선택하여 꾸준한 운동으로 문무(文武)겸비한
멋진 학생이 되길 빕니다.
운동도 공부와 마찬가지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아저씨도 너무 약골로 태어나 학창시절 개근상을 타지 못할 정도로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안되겠다" 스스로 극복하여 지금은
열심히 운동하여 검도공인2단, 검법도(진검)5단, 마라톤 풀코스 7회 완주,
하프코스 50여회 완주를 했고, 일주일에 2회이상 10키로를 뛰면서 한번씩 하프를 뛰고,
매일 스트레칭 20분, 스쿼트(앉았다 일어나기)100회, 팔굽혀펴기 200회,
줄넘기 1천회, PT체조 300회, 윗몸일으키기 50회등 거의 매일 운동을 빼먹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하지 않는것도 아니지요.
새벽5시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여 보통 밤8시에 퇴근합니다.
집에가면 식사후 1시간정도 지나서 밤에 운동을 합니다.
한시간에서 한시간반정도~완전히 땀으로 목욕을 하고 샤워를 하면 ~
그 기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는 것 모두 알지요?^^*
그럼 삼육고생들의 멋진 몸짱을 기대하면서
파이팅~~~~~~~~~~~~
첫댓글 잘 읽엇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겟습니다^0^
대단한 분의 그 친구, 역시 뒤지지 않는 대단한 분이시군요~ 바쁘신 중에도 꾸준히 저 많은 운동을 하시다니...강인한 체력은 역시 강인한 정신을 만드는것 같습니다. 마라톤의 매력에 빠진사람을 보니 것도 참 신기하던데...암튼 뭐든 너무 깊은 짝사랑은 위험하죠~? ㅎㅎ~감동의 글 감사 !!
이야...정말 대단해요~!!마라톤 하니까..누구신지 알것 같기도..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