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 문명(長江文明)은 초기 단계에서는 벼농사가 중심이며, 밭농사 중심의 황하 문명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모두 독자적인 농경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강 문명의 발견으로 벼(자포이카 쌀)의 원산이 장강 중류 지역으로 거의 확정되어 벼농사의 발상도 여기라고 볼 수 있다.
중류 지역의 추자링 문화(屈家嶺文化, 서기전 3,000~서기전 2,500년경), 하류 지역의 량주 문화(良渚文化, 기원 전 3300년? ~ 기원 전 2200년)의 시대를 최절정으로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며, 중류 지역에서는 황하 유역의 얼리터우문화(二里頭文化, 서기전 2,100년~서기전 1,500년경)가 이식되었다.
그 이유는 황하 유역의 사람들에 의해 정복된 결과라고 추측되며, 황제와 신농이나 치우의 대립 등의 전설은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의 세력 다툼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모도 문화(河姆渡文化, 서기전 6,000~서기전 5,000년경)에서는 구슬로 만들어진 옥기나 칠기 등이 발견되고 있고, 우청문화(呉城文化, 서기전 1,400~서기전 1,000년경)에서는 자기가 발견되고 있다.
중국 문화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는 이러한 문물의 원류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도 있다.
이러한 문화들은 이후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흐름으로 연결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지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발견된 유적의 물적량에 비해 연구가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다. 쓰촨 분지에서는 오랫동안 문명의 발견이 없었지만, 1986년에 쓰촨성 광한시의 삼성퇴 유적(三星堆遺跡)에서 대량의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어,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이곳 유적지에서는 특이한 특징을 가진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으며, 청동상의 얼굴에 썼던 황금가면도 발굴되었다. 고대에 존재하였던 촉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촉나라는 『사기』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아직 중화문명의 시야 밖의 지역이었다. 오직 서기전 316년에 진나라의 혜문왕 사마착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진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갔던 것만 기록되어있다.
또한 촉 지역의 지역 사서인 『화양국지』에서는 이 고대 촉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지만, 황하 문명 중심의 사관에서는 이러한 문헌이 상상의 산물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성퇴 유적의 발견으로 현실성을 띤 것으로 증명되었다.
2004년까지도, 장강 문명, 쓰촨 문명에서도 체계화된 문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문자모양의 기호는 발견되었으며, 그 연대는 서기전 2,000~서기전 600년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출토하고 있는 최고의 갑골문자가 서기전 1,300년 정도(무정기)의 것이므로, 이것이 문자라고 증명되면 갑골 문자에 앞선 문자가 된다.
[그림 2] 장강문명의 유적들
첫댓글 [중국 문명의 발상은 황하 유역이며, 그 후 점차 장강 유역 등의 주변지역으로 확대되었다라는 견해]에서 요하문명으로 이동이라는데. 그 요하문명은 동이족의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근거는 근거리니까 그런지요? 산동성주변도 동이족문화권이라고도 하는데...
맞아요. 산동성 밑으로 양자강 넘어까지로 보여요. 김교각 스님 등신불이 구화산에 있으니 거기까지 신라땅으로 봐야죠. 즉, 삼국시대 백성들이 모두 동이족이었고 고구려와 부여가 흉노, 북적이었음을 알 수 있지요.
요하문명은 산동성 동이족 이전 문명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옛날에 산동성 주변은 바다였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