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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대한 포옹 속에
송 병 수
산이 저기 있다. 그러기에 나는 거기 갈 뿐이다. 산 너머 또 산, 굽이 뻗은 장장유곡, 만고의 정적과 신비를 간직한 저 겹겹 산들은 말이 없다. 우리는 지금 거기를 가고 있다.
산은 유구하고 장엄하다. 우리는 지금 거기를 가고 있다. 단순히 비탈을 오르고 골짜기를 건넌 끝에 능선에 노니는 그러한 피크닉 행차가 아니다.
이른바 알피니스트,* 우리 4인조 자일* 파트너들은 한결같이 산을 존경한다. 또한 지극히 사랑한다. 이러한 외경의 염과 지극한 애정 말고도 우리 록 클라이머*들에게는 강인한 의지가 있고 확고한 신념이 있다. 용솟음치는 용기가 있고 드높은 기백과 절묘한 기량이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젊다. 젊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것은 절대의 신앙과 같다.
그토록 믿는 것이 있기에 우리는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암벽(岩壁)에 임할 수가 있다.
록 클라이밍, 그것을 목표한 산이 저기 있다. 그 화강암의 거봉이 산 너머 저 멀리 가물거린다. 우리는 지금 거기를 가고 있다.
자꾸만 ‘우리’라고 했는데 어쩐지 이 어휘가 좀 섬뜩하다. 아무튼 이 우리 속에 내가 있다. 우리 알피니스트들에게는 나 하나의 존재는 지극히 무력하다. 독단이나 독선 따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나는 철저히 응결된 우리 속에 일체(一體)되어야 한다. 규율과 통제로 강요된 그 지긋지긋한 우리와는 물론 성격이 다르다. 이를테면 군대사회의 그것과 같은 우리 말이다. 우리 알피니스트, 더욱이 록 클라이밍을 강행할 자일 파트너들은 어떤 규범이나 제약 이전에 이미 혼연일체된 우리를 스스로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항시 일체된 우리를 구사한다. 나보다 우리를……
미완성의 표어 같기도 한 이 말이 자꾸만 뇌어진다. 조례 때마다 입버릇처럼 되풀이 일러준 교장선생의 간곡한 훈화이다. 정년퇴직을 한 해인가 앞두고 있는 그 반백의 주름진 노안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중학교 때의 일이다.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라.
……더 사랑하라. ……더 소중히 여겨라. ……더 위하여라. ……더, 아무튼 이 우리에 대한 주문도 많았다.
이 말을 철없이 받아들였던 그때는 노스승의 상투적인 훈화이려니 여겼을 뿐이었으나 웬일인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의 하나가 그 말이다. 정년퇴직으로 평생을 몸 바쳐온 교단에 마지막으로 서던 날 어린애처럼 마구 눈물을 흘리던 그 주름지고 여윈 얼굴과 함께 말이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춥지 않은 겨울이다. 한겨울인데도 수은주는 영상 몇 도인가를 고수하고 있다.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이 이상난동(異常暖冬)이 지속되 리 라는 관상대의 예고이다.
“아마도 올해는 한강물이 얼어보지도 못한 채 겨울을 날 모양이지……”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불쑥 지껄였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가 없다. 아마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서라도 무슨 대꾸가 있어야 할 텐데 내 앞에 가는 현우나 내 뒤에 따라오는 창원이나 하나같이 말이 없다. 나는 두 녀석 중 누구인가가 ‘뭐라구?……’쯤 물어오리라고 기대했었다. 나뭇가지만 이상하게 얼기설기 뒤엉킨 나무숲 속에서는 멧새들조차 이 이상난동이 어리둥절한 듯 멋대로들 우짖어대고 있다.
이따금씩 골짜기에 회오리치는 바람소리가 한겨울의 체면을 혼자 떠맡은듯 사뭇 요란스럽다. 하지만 바위틈을 누벼 흐르는 골짜기의 물소리가 때로는 더 요란하다. 이토록 대자연의 불협화음이 충만한 속을 헤치면서 우리는 가고 있다.
나는 무슨 말인가 자꾸만 하고 싶다.
“나보다 우리들이라는 건 말야…….”
일껏 한마디 했으나 아무런 대꾸도 없다. 앞에 가는 현우도 그렇고, 뒤따라오는 창원이도 구렇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라도 지껄이고만 싶다.
“역시 명언(名言)은 명언이야…….”
역시 아무런 대꾸도 없다. 두 녀석 중 아무라도 대꾸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이를테면 영어로는 ‘위’가 되겠지. 하지만 이 명언에서는 반드시 그런 뜻만은 아니지…… 즉, 여기서 말하는 ‘우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아(大我)를 뜻하고 대의 (大義)를 뜻하지…….”
나는 강파른* 길을 오르기에 무척 숨이 가쁘면서도 애써 지껄였으나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다. 빌어먹을. 하지만 나는 이미 어떤 대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야, 이 ‘우리’에 하필이면 ‘를…….’이 붙어 있거든. 이 ‘를…….’ 하는 여운이 이 명언을 살려주고 있단 말이야. ‘를…….’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현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까 말야…… 하, 하.”
나는 내가 지껄이는 말에 나 자신이 도취되고 있었다. 아무런 대꾸가 없어도 좋았다. 지껄이지 않고는 못 배겼다.
“내가 철들어서부터이지. 나보다는 그야말로 우리가 더 소중하고 절실하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대학교 때부터일 거야…… 아무튼 우리를 구현하기 위해서 할 일이 너무나 많았지. 나는 많은 일을 제안했어. 모두들 공감하고 공명은 하더군. 그런데 말야, 막상 실천단계에 들어가서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더군. 반대자가 생겼지 뭐야. 수염을 기르면 멋있을 거라 해서 빌헬름 대제(大帝)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회장 후보생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그냥 반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방해공작을 하고 나섰지. 이유인
즉, 나는 학생회장 따위는 출마할 꿈도 꾸지 않고 있는데 이 친구 자기의 라이벌세력을 키워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지레 단정을 해버렸단 말야.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더군. 그러니 나도 약이 바짝 올랐지. 아무래도 내가 뜻한 바 그 우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방해자부터 타도해야겠다는 투혼이 왕성 하게 끓어오르더군. 그래 당초에는 염두에도 없던 학생회장에 일약 출마를 했지. 나는 ‘나보다 우리를…….’ 이라는 명언을 선거 구호이자 공약으로 내걸었지. 의외로 성과가 좋았어. 그러나 미리미리부터 돈과 주먹으로 득표공작을 해 온 그 녀석을 당할 수가 없었어. 결국은 압도적인 열세로 패배하는 쓴잔을 마시고야 말았지. 그런데 모두들 그 녀석을 선출해놓고는 곧 후회를 했지. 왜냐하면 그 녀석에게는 그야말로 빌헬름 대제와 같은 전횡과 독선밖에 기대할 게 없었거든. 다음번에 재대결을 한다면 승리는 나에게 보장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 그런데 그 녀석에게 설욕을 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단 말야. 그 녀석이나 나나 모두 그해에 졸업을 했거든, 하하하…….”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야, 왜 웃어?……”
그때서야 앞에 가던 현우가 뒤를 힐끗 돌아보면서 한마디 대꾸를 한다. 왜 웃다니, 이제까지 내가 지껄인 말은 영 귀에 담지도 않고 마지막 웃음소리만 겨우 들은 모양이다.
“하, 하하……”
그게 우스워서 나는 더욱 소리내어 웃어댔다.
“어이, 이거 뭐 야유회라도 가는 줄 알아? 오늘 중에 한 코스 해야지. 빨리 가자.”
맨 앞에 가던 철규가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 빽 소리친다. 그는 우리 4인조 알파인클럽의 리더이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한 코스를 답파하려는* 것이 그의 욕심이다.
해는 티없이 맑게 트인 하늘 한복판에 떠 있으나, 우리가 목표하고 있는 제1코스의 거대한 암봉(岩峰)은 아직도 저 멀리 산 너머에 가물거다.
우리는 지금 거기를 가고 있다. 숨이 턱에 차고 온 몸뚱이가 땀으로 흥건하다. 그래도 리더인 철규는 좀처럼 쉴 생각을 하지 않는다.그는 노련하고 책임 있는 리더답게 길도 없는 비탈을 잘도 헤치며 간다. 그의 뒤를 쎄컨드인 현우가 따라가고, 그 뒤를 서드인 내가 따라가고 있으며, 내 뒤에는 우리 클럽의 막내등이인 창원이가 따라오고 있다.
우리 이 4인조 알파인클럽의 이름은 예티이다. 예티, 그것은 히말라야 산속의 경이이자 영원한 불가사의이기도 한 설인(雪人)을 뜻한다. 리더인 철규가 택한 이름이다. 이상난동으로 산에 눈이나 얼음은 없지만 우리는 예티처럼 산에 가고 있다.
우리에게 어째서 산에 가느냐고 묻는다면, 산이 있기 때문에 갈 뿐이라고 우리는 예티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예티의 마음으로 그득 차 있다.
창천에 우뚝한 저 산이 우리에게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서어서 오라고 손짓해 부르는 소리가 예티의 마음속에는 들린다.
“야, 제1코스가 저거다. 어서 가자.”
철규가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소리친다. 우리에게 리더인 그는 절대의 명령권자이다. 우리는 그에게 절대복종한다. 그는 절대의 명령권과 함께 절대의 능력을 동시에 구사한다. 그는 예티처럼 산에 능숙하다. 우리는 그를 지극히 신뢰한다. 그는 항상 우리의 선두에 서서 진로를 개척하는 고난과 위험을 무릅쓴다. 우리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절대의 명령과 복종, 어쩐지 이 말도 좀 섬뜻하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절대의 명령권을 행사해본 적이 없다. 물론 절대복종을 해본 적도 없다.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 나는 소대장이었었다. 그 치열한 격전장에서도 지휘자의 명령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파병 이후 나에게 명령된 첫 임무는 이웃 마을에 준동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베트콩의 아지트를 수색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령대로 소대를 이끌고 울창한 정글 속을 헤쳐나갔다. 베트콩은 그림자도 없었다. 독침(毒針)을 박아놓은 교묘한 함정을 몇 개 적발했을 뿐이었다. 독침과 대낮에도 극성을 부리는 모기떼의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정글을 헤쳐나가자 강파르고 미끄러운 진흙의 비탈바지가 나왔다. 그 비탈바지 밑에는 그리 넓지는 않은 늪이 깔려 있었다.
“어 이, 1분대가 먼저 건너가라.”
소대장인 내가 이렇게 명령 했으나, 1분대장인 김하사는 무척 난색을 보이면서 머뭇거렸다. 나는 곧 그러한 명령을 후회했다. 물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물이 얕다 해도 늪바닥이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도 없는 진구렁텅이일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불가불 지휘자인 내가 앞장을 서야 하는 판에 때마침 늪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물소를 발견했다. 우리는 돌을 던져 물소를 쫓았다. 물소는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늪을 건너갔다. 물 깊이는 무릎에 겨우 찰 정도였고, 그 육중한 소가 무사히 건너가는 것을 보아 바닥도 진구렁은 아니었다.
“소대 전진.”
나는 자신 있게 소리치면서 서슴없이 앞장을 섰다. 모두들 나를 따라 그 강파르고 미끄러운 진흙의 비탈바지를 내려와 텀벙텀벙 늪에 발을 들였다.
그때 늪 건너쪽 기슭에서 굉장히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베트콩이 매설해놓은 지뢰를 먼저 건너간 물소가 밟은 것이다. 물론 그 물소의 육중한 거구는 형체도 없이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1분대장인 김하사가 내 얼굴을 힐끗 쳐다보며 입을 비쭉거렸다. 소대장인 나를 경멸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저런데도 먼저 건너가라고 했느냐는 원망의 눈초리들이 나에게 쏠렸다.
그런가 했더니 건너쪽에서 난데없이 총탄이 날아왔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엎드렸다. 바닥은 물이었다. 무릎까지 차는 물속에 몸뚱이를 담근 채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다행히도 큼직한 썩은 나무토막들이 앞에 가로놓여 있기에 망정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소대 30여 명은 옴짝 없이 베트콩의 총알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후덥지근한 물은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장구벌레와 거머리떼가 기승을 부렸다. 그런 곤욕 속에서 우리는 진퇴유곡이었다. 베트콩의 총탄은 여전히 거세었다. 우리는 제대로 응전할 수도 없었다. 전진을 하자니 앞에는 아무런 방패도 없었고 후퇴를 하자니 뒤에는 강파르고 미끄러운 비탈이었다.
이 진퇴유곡의 난경* 속에서 대원들은 모두 내 얼굴만 쳐다봤다. 물론 그들이 나를 신뢰하는 기색은 별로 없었다. 이런 곤경 속으로 몰아넣은 나를 원망하는 기색들이었다.
“중대에 지원을 요청 할까요?”
선임하사가 물었다. 연락병이 재빨리 무전기를 챙겼다.
“안돼.”
나는 버럭 소리쳤다. 중대에서 지원군이 오기 전에 베트콩이 박격포라도 동원하면 우리는 고스란히 떼죽음을 할 지경이었다.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ROTC 출신 장교인 나에게 전투경험이 있을 리 없었다. 대원들은 공포와 원망이 뒤얽힌 눈초리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겪는 전투가 그 지경이라 두렵고 난감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결코 두려운 기색을 띨 수가 없었다.
“모두들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떨리는 소리로나마 단호히 일러놓고는 혼자서 전진해나갔다. 방패하기 알맞은 나무토막을 띄워 밀면서 서서히 전진해나갔다. 후덥 지근한 물은 몹시도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 장구벌레와 거머리떼는 극성스럽게 목에 달라붙었다. 총탄은 거세게 날아와 나무토막에 박혔다. 대원들은 가슴 조이면서 필시 신망과 존경과 경악의 눈초리로 나를 주시하고 있으리라. 나는 뒤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씽끗 웃기까지 했다. 웃은 게 아니라 거머리에게 뜯기고 있는 목과 손등이 아파 견딜 수 없어서 몹시 찡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님, 왜 웃죠?”
뒤에 따라오던 창원이가 불쑥 묻는다. 아마도 내가 뒤를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씽끗 웃은 모양이다. 어쩌면 하도 숨이 가빠서 상을 찡그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무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창원이는 누구에게나 동생 뻘이다. 그는 누구나 다 형님이라 부른다.
“자아, 여기다 캠프를 친다.”
철규가 소리친다. 평퍼짐 한 둔덕바지에 이르러서였다. 우리가 오를 거대한 돌산이 바로 눈앞에 다가서 있다.
우리는 모두 짐을 풀고 철규가 지시하는 대로 바람막이가 잘 되는 바위 밑에 텐트를 쳤다.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우선 30킬로그램이 넘는 짐들을 풀어놓으니까 날아갈 듯 몸이 가뿐하다.
우리는 빵 한 쪽과 사과 한 개씩을 씹으면서 장비를 점검 했다. 해머·하켄*·카라비너*·줄사다리·자일 등 우선 1차 등반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만을 몸에 챙기고, 라면·소시지·쌀·오일버너 등 거추장스러운 나머지 장비는 그대로 캠프 속에 남겨둔다. 산악인들이 쳐놓은 캠프는 다른 팀들이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라도 이용할 수는 있지만, 그 속에 보관된 식량이나 장비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산의 규범이다.
리더인 철규는 목전에 우뚝한 화강암의 거봉을 응시하면서 소요장비와 소요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한다. 그는 록 클라이밍 15년 경력의 노련하고 능숙한 베테랑이다. 그는 실수가 없다. 마침내 자신이 선 모양이다.
그는 오늘의 자일 파트너들에게 각기 필요장비를 분배하고 소요 임무를 분담시킨다.
“자아, 우리 한번 멋지게 해보자.”
바야흐로 우리가 결행할 자일 파티의 계획을 그는 상세히 지시한다. 이 스타트 자일 파티에는 우리 4인조 전원이 참가한다. 포지션은 당초부터의 예정대로 철규가 리더이고 현우가 쎄컨드., 내가 서드, 창원이가 라스트이다.
“자, 가자우.”
철규는 그 거대한 암벽을 향해 앞장서서 나갔다. 우리는 포지션 순서대로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일단 등반을 결정한 이상 해 지기 전에 정상에 이르렀다가 다시 하강하여 캠프로 귀환해야 한다. 철규는 매우 자신 있는 기미였으나, 우리가 챙긴 장비로 보아, 무척 험난한 코스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서드 포지션인 나에게는 해머나 하켄 따위 묵지룩한 쇠붙이장비 대신 기다란 자일이 배당되었다. 등반장비 중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자일이다. 그것은 천야만야(千耶萬耶)한* 절벽에 매달린 우리 록 클라이머들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나는 좀 두렵다. 그 거대한 암벽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은 가중되어갔다.
베트콩의 진지에 육박해 들어갈 때도 꼭 이러했었다. 제아무리 포탄을 퍼부어대도 베트콩의 천연동굴은 끄떡도 없었다. 베트콩의 기관총탄은 여전히 세차게 날아오기만 했다. 그래도 우리는 거기를 가야 했다. 그 동굴을 쳐부숴야 했다. 옛날 18세기의 철갑방패가 요긴하게 쓰여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용케도 그것을 생각해낼 수가 있었다. 이런 경우 역대의 명장들은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던 끝에 불쑥 어느 영화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두터운 철판으로 옛날 기사의 방패를 급조해가지고 동굴 입구로 육박해 들어갔다. 그 방패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동굴 속에 수류탄을 몇 개 까 던지자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극렬하던 베트콩의 기관총은 침묵하고 말았다.
마침내 우리는 거대한 암벽 바로 밑에 이르렀다. 우리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철규는 그 거대한 암벽을 포옹이라도 하듯 큰대(大)자로 양손을 벌려 바위를 쓰다듬는다. 나도 역시 그를 따라 그 차디찬 화강암의 절벽을 애무해본다.
해발 6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강암의 봉우리, 흑갈색으로 퇴색한 장엄한 절벽은 천고를 두고두고 지켜온 침묵과 무감각 그대로이다. 하지만 알피니스트들은 이 장엄한 침묵과 무감각 속에서 온후한 체온을 의식한다. 바위의 살아 있는 맥박을 의식하고 고요로운 숨소리를 듣는다.
알피니스트, 내가 이토록 지극히 애무하는 이 거대한 돌덩이는 정녕 살아 있다. 나는 이 생동하는 바위와 정겹고도 절실한 대화를 나눈다.
산, 네가 있기에 내 여기 왔노라고…… 이 대자연의 생동력과 인간의 애정과 의지가 상통하고 결합할 때, 화강암의 절벽은 결코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따뜻하게 포옹해준다.
“자아, 간다.”
철규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한마디 하고는 마침내 아티피셜 크램핑을 스타트한다.
거대한 암벽은 미소하듯 틈을 열어준다. 이른바 크랙, 여기에 쇠붙이 하켄을 꽂는다. 해머로 두들겨 크랙에 하켄을 박고 나면 거기에 카라비너라는 쇠붙이 고리를 건다. 이 카라비너에 줄사다리와 자일을 매단다.
이 줄사다리와 자일에 60킬로그램 이상의 체중과 10킬로그램가량의 장비가 매달린다. 그런 채로 그 아티피셜 크램핑을 되풀이하면서 한 걸음씩 절벽을 기어오른다. 철규는 노련하다. 그는 잘도 해내고 있다. 우리는 그를 지극히 신뢰한다. 우리는 그가 앵커*의 위치를 확보할 때까지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암벽에 뻐끔히 벌어진 그 틈새에 꽂은 조그마한 쇠붙이 고리에 70킬로그램이 넘는 중량이 거뜬히 매달리는 불가사의가 잘도 이루어지고 있다.
인력 (引力)과 밸런스의 상식을 초월한 경이로운 조화, 그것은 초연한 대자연이 영원불가해한 신비의 베일을 벗고 한 인간의 강인한 투혼과 숭고한 의지를 포옹해준 자연 대 인간의 정겨운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경이로운 하모니야말로 경건하고도 엄숙한 창조의 순간이다. 적어도 알피니스트에게 있어서 이 정적과 몰아의 순간은 보람의 전부요, 신앙의 전부이다.
나는 달리 신앙을 가져본 적은 아직 없다. 베트콩의 저격으로 부하 몇 명이 쓰러졌을 때에도 나는 군목(軍牧)의 기도를 단연 거부했다. 군목의 기도나 승려의 염불소리로는 끓어오르는 나의 분노와 왕성한 투혼을 달랠 수가 없었다. 나는 베트콩의 거점으로 뛰어들어 종횡무진의 인간 도살행위를 감행했다. 물론 부하들이 내 뒤를 따랐다. 저격탄으로 잃은 전우 몇 명보다 몇 갑절이 넘는 대살육의 전과를 번번이 올릴 수가 있었다. 그 통에 나는 중위로 특진을 하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때는 정말 겁도 없었다.
“어이, 앵커다. 세컨과 서드, 시작해라.”
안전한 위치를 확보한 철규가 까마득한 밑을 내려다보며 소리친다.
“오우라잇.”
현우는 냉큼 소리쳐 대답하고는 철규가 가설해놓은 카라비너에 줄사다리를 걸면서 한 발 한 발 절벽을 기어오른다.
그의 뒤를 내가 따랐다. 이미 리더가 진로를 개척해놓은 터라 오르기는 한결 수월하다. 더구나 우리의 생명선인 자일 끝을 철규가 안전한 위치에서 잡고 있다. 실족을 한다 해도 떨어질 염려는 없다.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철규는 키가 작은 나나 현우를 위해 용의주도한 배려를 했다. 하켄은 우리가 손을 뻗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영락없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실로 오랜만에 절벽을 타는 나는 그리 능숙하지가 못했다.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으나 남 보기에 무척 어설프고 위태롭게 보였을 것이다.
어느새 8부 위치에 도달한 현우가 그 자신 줄사다리에 한 발을 걸친 불안한 자세이면서도 보조앵커로 나를 도왔다.
“창원이 올라와라.”
가장 서투른 내가 비교적 위험한 험로를 돌파하자 철규가 소리친다. 창원은 마지막으로 올라오면서 크랙에 박혀 있는 하켄과 카라비너를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 그러기에 선두에서 진로를 개척하는 리더 못지않게 그의 임무는 고되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잘도 해내고 있다.
어느새 그는 한 무더기의 하켄을 챙겨들고 있었다. 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철규가 보조자일을 내렸다. 보조자일이 현우와 나를 거쳐 창원에게 도달하자 그는 묵지룩한 쇠붙이뭉치를 그 끝에 매달아 끌어올리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다시 철수작업을 서둘렀다.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이른 나는 보조앵커로 그를 도왔다. 안전한 위치라 해도 위험은 항시 따른다. 불시의 사고를 예측할 수가 없다. 인간 능력 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가 믿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네 사람을 연결한 한 가닥의 자일뿐이다. 우리의 혼연일체한 호흡과 맥박이 이 자일에 교류한다. 완벽한 팀워크, 오직 정상에의 의지와 신념이 이 자일에 교류되는 한 우리가 행하는 이 장엄한 절벽의 절묘한 트래피즈*는 성 공을 거둔다.
마침내 리더가 확보한 안전지대에 우리는 모두 합류했다. 우리 네 사람이 겨우 다리를 뻗고 앉아 있을 만한 터거리*였다. 아직도 목표한 정상은 까마득하다. 어느새 해는 서산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는 체력을 쎄이브하기 위해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휴식을 취한다.
바람이 사뭇 차다. 흥건히 땀 배었던 몸뚱이가 썰렁 해온다.
“인수, 왜 그랬지?……”
철규가 불쑥 나에게 묻는다. 아까 너무나 서툴렀던 나를 은근히 책망하는 기색이었다.
“너무나 긴장한 탓이야.”
나는 나의 미숙함을 솔직히 자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다니, 도무지 자네답지가 않군. 자네의 그 옛날 솜씨는 다 어쨌어?”
대학의 같은 산악부원이었던 철규는 왕년의 내 솜씨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긴장한 탓이라니까…… 월남에 있을 때는 항상 긴장해 있었지. 한차례의 격전을 치르고 나서 쉬는 동안에도 긴장은 풀리지 않았어.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글쎄 늪 건너에서 우리를 저격하는 베트콩을 잡고 보니 이놈이 열렬한 따이한 팬을 자처하면서 우리 부대를 무상 출입하던 놈이지 뭐야. 우리는 놈을 믿고 먹을 거랑 입을 거랑 후하게 주면서 친절하게 대했지. 그런데 그놈이 바로 베트콩의 지방두목으로 둔갑하여 우리를 저격할 줄을 누가 알았어? 참으로 분통이 터지더군. 나는 놈을 사로잡았지만 홧김에 M16으로 갈겨 놈을 벌집으로 만들어버렸어. 그러고 나서부터는 월남사람을 보기만 해도 무섭더군. 모두가 베트콩 같아서 말야…….”
이미 철규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현우나 창원이도 흥미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듣든 말든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버릇이었다.
“나는 쉬는 것보다 격전장에 출동하는 것이 오히려 속 편했지. 적어도 그 치열한 총격전과 육박전 속에서는 고질화된 두려움을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 말야…….”
“자아, 가자.”
철규는 자일을 챙겨들고 벌떡 일어난다. 내 말을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목표한 정상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마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고 현란한 저 암봉, 그것이 저기 있기에 우리는 거기 간다. 가야 한다. 한데 이번의 암벽은 더욱 강파르고 거세다. 4인조의 트래피즈를 전개하기에는 위험하다.
“이번엔 듀옛 파티다.”
철규가 지시한다. 나와 그가 한 조의 자일 파트너가 되고, 현우와 창원이 다른 한 조의 파트너가 되었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장대한 절벽, 거기에 하켄을 꽂고 카라비너를 걸면서 철규는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기어올라갔다. 그가 지시하는 대로 나는 뒤따라 올라간다. 제2조의 후속을 위해 하켄을 철거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포지션은 비교적 수월하다. 나는 아까보다는 쉽게 해낼 수가 있었다. 그야말로 장쾌무비한 듀엣 트래피즈를 전개하면서 이 인적 미답의 절벽에 우리의 발자국을 남겨놓고 있었다.
알피니스트. 우리는 결코 곡예사는 아니다. 우리의 작업은 곧 창조적인 소산으로 직결된다. 우리는 중력과 균형의 상식을 초월하여 제 아무리 험난한 곳이라도 우리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갈 수 있는 지혜와 권리를 획득한다.
나는 지금 한 가닥 자일에 매달려 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까마득한 절벽이다. 나는 결코 위험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위험을 과시하는 것도 아니다. 중인환시(衆人環視)*리의 갈채, 그 속된 각광을 누리자는 것도 물론 아니다.
삶, 오로지 그것을 수행할 뿐이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좋다. 속된 갈채 따위는 애당초부터 염두에도 없다. 이 순간의 집요한 투혼과 완강한 집념과 혹독한 고독을 나는 애착한다. 적어도 이 순간의 나는 어느 누구보다도 담백하고 솔직하고 선량하다. 나는 이 순간의 나 스스로를 지극히 신뢰하고 지극히 경애하며 또한 찬미한다.
무엇인가 한 가지 일에 이토록 집념하고 전력투구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그것이 행복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월남전선에서 소정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대위로 진급한 나는 서해안 경비부대의 일선 중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때는 참으로 무료하기만 했다. 치열한 전투가 있을 리 없었고, 적의 간첩이 언제나 침투해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무료한 나날 속에 월남전에서 비롯된 공포증이 고질화돼가고 있었다. 공연히 불안하고 초조롭고 두려웠다.
나는 해안초소를 순찰할 때도 반드시 구명(救命) 재킷을 착용하고 완전무장을 한 호위병을 대동하곤 했다.
병사들은 나를 겁쟁이로 낙인찍고 있었다. 내가 월남전에서 용명을 떨친 그 무훈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내가 차고 있는 훈장조차 의심했다. 기실 나는 겁쟁이였다. 머리맡에다 장탄을 한 권총을 놓고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으며, 외출할 때도 반드시 무장을 하고 철모를 썼다.
어느 날, 서울의 번화가에서였다. 까만 지프차 한 대가 불시에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획 돌리며 권총을 뽑았다. 마치 서부활극과 같은 한 장면을 멋지게 해낸 것이었다. 다행히도 지프차의 유리창만 박살이 났을 뿐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나는 곧 관계기관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다.
간첩이 나타난 것만 같아서 쏘았노라고 나는 주장했다. 취조관 대신 군의관이 나를 맡았다. 결국은 무슨 무슨 쇠약증이라는 진단과 함께 장기간 심신의 휴양과 안정이 필요하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나는 핑겟김에 전역신청을 냈으나, 군당국은 월남 참전에서 쌓은 나의 전투경험이 아까워서인지 퇴역은 시키지 않고 무기한 휴가령을 내렸다.
어쨌든 나는 퇴역은 하지 않았지만 서울 집에 돌아와 홀가분하게 군복을 벗어던진 채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휴양과 안정이라는 군의관의 처방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무료한 나날, 그것은 나를 더욱 괴롭히기만 했다. 나의 크 무슨 쇠약증이라는 병이 치유될 리 없었다.
나는 육교가 없는 횡단로는 절대로 건너지 않았으며, 고층건물 밑을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리맡에 권총을 놓지는 않았으나 문을 이중 삼중으로 봉쇄해야만 잠들 수가 있었다.
안정과 정양으로도 효험을 못 본 나는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종합진단 결과 역시 무슨 쇠약증이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처방은 달랐다. 무엇이든 전념하고 골몰할 수 있는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산을 생각했다. 산에 심취하던 학생시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산이야말로 나를 부르는 곳이며, 내가 집념하고 몰두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곧 산악회를 찾아갔다. 거기에는 예전에 산에서 흔히 만났던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다.
“여, 인수, 이거 오래간만이군. 영영 산을 잊은 줄 알았더니 역시 찾아오는군. 잘 왔네 잘 왔어.”
누구보다도 반가이 나를 맞이해준 것이 바로 철규였다. 그는 나와 같은 대학의 1년 선배이며 산악부장을 역임한 산의 베테랑으로 산악부원이었던 나의 실력을 일찍이부터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현우와 창원이도 학교는 달랐으나 산에서 자주 만나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 그들의 예티클럽에 나는 쉽사리 참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산이 오래간만이어서 록 클라이밍 이 처음에는 좀 서툴렀으나 차츰 익숙해져 예전의 능숙한 솜씨를 쉽사리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 철규와의 듀엣 트래피즈를 멋지게 해내고 있다. 역시 산은 나에게 효험이 있다. 산은 결코 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한 가닥 자일에 생사를 맡기고 있다. 나에게는 의지가 있고 인내와 용기가 있다. 강인한 체력이 있다. 나는 따사롭고 순수한 애무와 애정을 이 암벽에 베풀고 있다. 이러한 나의 애정이 암심(岩心)에 미쳐 산은 천고의 베일을 벗고 나를 포옹해준다.
산을 즐기는 나의 이 집념과 이단의 행위를 구태여 어느 누가 이해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원하지 않는다. 망각과 몰아, 집요하고도 완강한 추구 속에 일체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다. 천야만야 까마득한 이 화강암의 단애*에 나 스스로의 발자국을 남겨놓는 이 혹독한 고난 속의 고독을 나는 어느 무엇하고도 바꿀 수가 없다.
행복,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조건과 비결은 따지자면 간단하다. 나는 거대한 암벽의 트래피즈에서 행복을 십분 음미 한다.
어느덧 정상은 그리 멀지 않다. 철규는 정상 바로 밑까지 육박해 올라가고 있다. 한참 밑에서는 현우와 창원의 듀엣이 올라오고 있다, 이 정도의 진척이라면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정상을 밟고 내려와 캠프로 돌아갈 수가 있다.
만약 암벽에 오르던 도중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 자리에서 오가도 못한다. 그럴 경우 각자가 자기 위치 사방에다 하켄을 박고 보조자일로 자신의 몸뚱이를 떠매어 고정시킨다. 그러고는 잠을 자며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은 없다. 하지만 군에 있을 때 산악교관(山岳敎官)이었던 나는 훈련병사들을 일부러 바위절벽에 그렇게 매달아 놓고 잠을 재워본 적은 있었다. 물론 그렇게 지독스레 훈련된 솜씨를 월남 전지에서도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이란 때로는 영웅을 낳기도 하지만 정글 속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타잔과 같은 초인적인 능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월남전에서는 적을 섬멸하는 일보다도 새로운 적을 만들지 않는 일이 더 중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온통 변덕스럽고 콧대 센 월남국민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알아야 했다. 참으로 화증머리* 나는 노릇이었다, 베트콩을 사로잡으면 그것도 월남인이라 해서 마음대로 다루지도 못했다. 때로는 누가 베트콩이고 누가 양민인지 가리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아무튼 그놈의 곳은 지긋지긋했다.
“어어이, 자아, 앵커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선 철규가 힘차게 자일을 끌어 잡아당긴다. 나는 한결 수월하게 정상에 오를 수가 있었다. 나는 정상에 오르고 나서 자일자락을 다시 밑으로 내렸다. 현우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다.
한 팀, 한 코스의 등반에 있어서 어디까지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을 행한 자, 그리하여 마침내 정상을 밟은 자라야만 알피니스트라는 영광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정상에 이르렀다. 우리는 모두 알피니스트의 영광을 만끽한다. 산은 참으로 장쾌하다.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
알피니스트. 우리는 결코 불가능이란 말을 쓰지 않으며, 정복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 정상에의 도달, 그것은 결코 어느 한 편의 승리가 아니요 패배도 아니다. 그것은 망각과 정적 속에 이루어진 인간과 자연의 엄숙한 결합일 뿐이다.
산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산의 포옹은 더없이 따사롭다. 이 산꼭대기에 몇 떨기 에델바이스라도 피어 있다면 우리는、더없이 흡족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다. 아무래도 겨울바람은 무시할 수가 없다. 더구나 여기는 해발 몇백 미터인가 되는 산정 이다. 바람이 쌩쌩 몰아친다. 땀 배었던 몸뚱이가 으스스 떨려온다.
“자아, 하강이다. 그리고 내일은 저 산이다.”
철규는 자일을 챙기면서 맞은쪽 우뚝 솟은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얼마라도 우뚝 치솟은 산들이 산 너머에 그득하다. 우리는 거기에 또 갈 것이다. 저 천고의 침묵 속에 때로는 미소하는 저 거대한 포옹 속으로 우리는 또 갈 것이다.
산 너머 또 산, 이 화강암의 능선이 알프스의 피츠·파티레 북벽(北壁)과 같은 그러한 장대함에야 어디 비견할 수 있으랴만 그런대로 우리에게는 적격의 등반코스이다.
어쨌든 우리 알피니스트의 행도는 마냥 험난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이란 어휘가 없다. 저기 산이 있기에 또 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의이다. 우리는 아무리 험난한 암벽이라도 당황하거나 그것을 기피하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내일 또 저 산에 갈 것이다.
창원이가 단단히 고정시켜놓은 카라비너에 철규는 자일을 걸었다.
마침내 하강작업. 리더인 철규가 먼저 자일을 타고 내려간다. 이 하강작업은 암벽의 트래피즈보다도 더욱 델리키트하고 때로는 더욱 위험하다.
그러기에 인적미답의 처녀지를 개척하는 데에 의의를 둔 등반작업과는 달리 하강의 경우는 가급적이면 미지의 코스를 택하지 않는다.
중학교 때부터 록 클라이밍을 시작하여 꾸준히도 15년 이상의 경력과 관록을 쌓은 철규는 전국 각지의 산치고 안 가본 곳이 별로 없다. 제아무리 험난한 절벽이라 해도 그의 발자국이 미치지 않은 곳은 별로 없다. 그러기에 그는 어디를 가나 마치 자신의 손금을 들여다보듯 오르내릴 길이 환하다.
“어이, 내려와.”
깎아지른 절벽 한복판의 터거리에 도달한 철규가 버럭 소리치며 내려와도 좋다는 신호를 보낸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그렇게 한 사람씩 차례차례로 터거리에 내려가서, 거기에 또 카라비너를 고정시켜 자일을 걸고 또 그렇게 한 사람씩 자일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그러기에 하강하는 시간도 생각보다는 꽤 걸린다.
"어어이, 뭘 하는 거야?”
내가 머뭇거리자 철규가 또 버럭 소리친다. 심한 바람소리에 묻혀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그저 그렇게 재촉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아무튼 당황하거나 성급해서도 안되지만 주저와 비겁은 알피니스트의 터부이다.
마침내 나는 자일을 탔다. 물론 두 가닥의 자일을 궁둥이에 걸쳐 미그그러지는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은 할 수가 있지만 쉴 새 없이 훑이는 손바닥이 얼얼하다. 여기서 자일을 놓치면 끝장이다. 내 몸뚱이는 천야만야한 저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져 박살이 난다.
하지만 나는 이 아슬아슬한 작업을 잘도 해내고 있다.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늦췄다 하면서 한 치 한 치 절묘한 하강작업을 해내고 있다.
이 얼마나 장쾌한 율동인가. 대자연의 거대한 포옹 속에 불굴의 인간 의지와 생동력 이 리드미컬하게 하모니를 연주한다. 산의 소리, 산의 체온 그것은 참으로 따사롭고 황홀하다.
나는 평생을 두고두고 산을 잊지 못할 것이다. 꿈과 낭만과 희로애락을 나눌 수 있는 저 장엄한 산들이 나에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ROTC 출신 장교인 내가 월남전에 참전할 수 있었던 것도 산악교관이었던 덕이었다. 하지만 나는 산을 오를 줄 아는 기능을 실전에서 한 번도 구사해본 적이 없었다. 도무지 그럴 만한 기회가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하강작업을 무사히 끝냈다. 몸뚱이는 나른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후련하다.
“자아, 가자. 오늘 밤은 불고기 파티다.”
철규가 소리쳤다. 텐트로 돌아가 또 내일의 등반을 위해서 그 장엄하고 절묘한 암벽의 트래피즈를 위해서 체력을 축적해두어야 한다.
철규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현우, 그리고 나, 창원의 순으로 따랐다. 무척 배가 고프다. 텐트에는 불고기를 할 수 있는 쇠고기랑 며칠 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어서 먹고 싶다.
어느덧 석양노을이 저쪽 산등성이에 현란하다. 이제 곧 밤이 될 것이다. 밤이 되면 그 크고 작은 별들이 우리를 위무해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면 저쪽의 저 거대한 암벽의 침묵 속에 우리는 또 안겨들 것이다. 그 거대한 포옹 속에서 나는 그 지긋지긋했던 월남 참전의 악몽을 다시는 되살리지 않을 것이다.
『월간중앙』 49호(197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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