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수필방에서 문학 기행을 간다기에 설렘마저 들었다. 나는 문학 기행이라는 이름으로 어디를 가본 적이 없다. 의정부 돈현님께서 답십리 수선화님을 만나 수원으로 나를 태우러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고맙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럴 일이 아니었다. 편안히 앉아 기다리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며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 같아 나는 잠실 역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열시 이십분, 정확한 약속 시간에 도착해준 일행과의 만남은 더없이 기뻤다. 대화의 내용도 정지용 시인님에 맞춰졌고, 한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그동안 수필 마을에서의 우정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차는 경부 고속도로를 달렸고, 날씨 또한 흐린 듯 맑은 듯 길가에는 곳곳마다 벚꽃들이 만개하여 나들이하기에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유성에 들러 별님을 만나기로 했다며 운전해 가던 돈현님이 핸드프리로 통화를 했다. 가는 도중에도 몇 차례 이뤄졌는데 이럴 수가! 회덕 분기점을 지나 버리는 바람에 유턴을 하고, 또 빠꾸를 해야 하는 곡절도 겪어야 했다. 유성에 들어섰을 때는 열광하던 월드컵 경기장이 눈앞에 나타나 반겼다. 그때 별님과 또 통화하여 동학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동학사 들어 가는 길은 벚꽃나무들이 열병을 하듯 줄져, 꽃 터널을 이룬 가운데 축제가 한창이어서 차들로 만원이었다. 우리는 약속을 바꿔 계룡대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차를 돌려야했다.
별님은 누구에게라도 좋아 보일 것만 같은 미인이었다. 벚꽃 축제의 그곳 쌈 밥집에서 점심을 대접받은 우리는 그가 운영한다는 카페로 안내되었다. 소쿠리 안처럼 사위가 산에 둘러싸인 자연 속 풍광이었다. 마당에는 작은 분수 못이 있어 금붕어와 다른 물고기가 유유자적, 일층에는 카메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수많은 카메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층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가니 미쳐 치우지 못한 테이블들, 별님께서 우리를 맞기 위해 얼마나 바빴는지 알 것 같았다. 카페의 분위기 있는 음악과 차 대접까지 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문우의 정성에 감사하며 작별을 고해야 했다.
다시 호남고속도로 회덕분기점을 거쳐 경부 고속도로, 옥천으로 향했다. 일행 모두 초행길인지라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시인의 생가를 물어보니 잘못 왔다며 되돌아가란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길 양쪽에는 능수버들이 휘늘어지듯 활짝 핀 벚꽃 나무 가지들이 줄을 져 눈길을 끌었다. 히얀한 벚꽃나무도 다 있다며 우리는 입을 모았다. 그 길 왼쪽으로 들어가니 초가지붕을 한 시인의 생가가 보였다. 초입에는“향수”시비가 세워져있고, 생가 앞에는 작은 공원과 주차장이 있었는데 옆에서는 영상 기념관을 짓는다며 현대식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원과 주차장 한쪽에는 살림집 한 채가 독불장군처럼 버티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잘사는 사람인데도 값을 턱없이 많이 불러 그렇다는 설명이었다.
일을 하고 돌아가던 아저씨 한 분이 그렇게 친절하게, 넓은 들도 실개천도 다 없어져 버렸다며, 미안해하듯 했다. 생가에는 방문이 열려있었고, 그때 돈현님이 “계십니까?”하고 소리를 하자 안에서 개량 한복 차림의 나이든 아저씨 한 분이 나오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신을 벗고 마루로 올라서 방안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옆으로 통하는 넓은 들 같은 방이 또 있었다. 나란히 앉으며 서울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더욱 반기며 커피를 끓여주겠다고 했다. 안 먹는 커피였는데도 성의가 감사하였는지라 영광으로 알겠다며 흔쾌히 마셔 두었다. 군청에서 정년퇴직을 한 뒤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풍수 공부를 했다며 들창문을 열어 지붕 형상을 한 그곳 뒷산을 보여주는가 하면, 향토에 대한 자랑과 긍지가 여간 아니었다. 물론 시인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가 없었다. 열두 살에 장가들어 집안이 가난하여 처가에 가서 살아야했고, 일을 하며 뒤늦게 들어간 학교, 우수한 성적으로 교장선생님의 후원아래 동경유학까지 간 얘기 등등.... 안방에는 시인의 부친이 쓰던 약장과 반지고리 다듬이 돌 등 소품들이 있었고, 그런 것 하나까지도 예사롭지만 않게 보이는 것은 문학이라는 힘의 위대함만 같았다.
시인의 생가에서 오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도 이왕 둘러보기로 했다. 그 명산이 있는 아래로 길가에는 소슬 대문이 굳게 잠겨 있는 가운데 빙 둘러쳐진 담장을 볼 수 있었다. 한 눈에 육여사의 생가였다. 밖에는 궁궐을 떠올리게 하는 조감도가 그려져 있어 복원 공사 계획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셋은 각각 대문 틈 사이로 들여다보며“여봐라~ 서울에서 왔느니라~” 하고 소리지르며 불러봤지만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담장을 따라 골목길을 돌아가니 넓은 터 안에는 황소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폐허가 된 행랑채 하나만 쓸쓸했다.
세월 한 자락, 부귀도 영화도 인생의 부질없음을 더듬으며 다시 나왔다. 시인의 생가 뒷길에 있는 "구읍식당”이라는 곳에 들러 붕어 즙으로 끓인 국수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대청호에서 잡아온 붕어라고 했다. 얼큰 시원한 국물도 좋았지만 김치 맛이 더 좋은 것 같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밥 한 공기를 덤으로 내놓았고, 성의를 생각하여 깨끗이 나누어 비우고 나니 배가 터질 듯 불렀다. 그 식당 길 건너에는 “향수다방”이 있어 옛날 시골 풍경을 자아냈고, 사람들의 발길을 모아 생계의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음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옥천! 그리고 시인의 넓은 들, 실개천의 고향 답사는 이렇게 마쳐야 할 것 같았다.
다시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서 오는 길에 별님으로부터 잘 둘러서 가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의 정이 진하게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옥천 휴게소를 지났다며, 감사했다며 그렇게 달렸다. 행복한 길이었다. 오산으로 빠져들어 수원에 오니 저녁 여덟시 반이었다. 낮같으면 들어가서 쉬었다가라, 못 보고 온 옥천의 넓은 들도 우리 집에 가서 보고 가자했겠지만 의정부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그렇게 보내고 혼자 들어오는 길, 말이라도 해볼 걸! 미안하기가 그지없었다. 문학 기행! 내게는 더 없이 큰 기쁨과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다음 기회가 있다면 더 많은 분들과 우리 수필친구 문우님들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목감기가 심하게 들어 고통의 며칠을 보내고 들어왔습니다. 글은 이미 읽었지만 꼬리 글은 이제야 답니다. 저도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님의 여행이 부럽습니다. 기행문이란 대저 쓰기가 어려운 법인데 참 잘 쓰셨습니다. 왕늑대님의 왕성한 창작활동이 글쓰기에 게으런 저로선 부럽기만 합니다.
첫댓글 왕늑대님: 참으로 뜻깊은 좋은 여행을 하셨군요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더구나 문우들과 어울렸으니 더욱 보람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목감기가 심하게 들어 고통의 며칠을 보내고 들어왔습니다. 글은 이미 읽었지만 꼬리 글은 이제야 답니다. 저도 문학기행이란 이름으로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님의 여행이 부럽습니다. 기행문이란 대저 쓰기가 어려운 법인데 참 잘 쓰셨습니다. 왕늑대님의 왕성한 창작활동이 글쓰기에 게으런 저로선 부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