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옥윤과 패티김의 애달픈 사랑 노래
두 음악 거장(巨匠) 길옥윤과 패티김은 1958년 일본에서 처음 만났다.
둘은 가수와 작곡가로서 사무적으로 만났지만, 길옥윤이 사업이 잘 안 돼 먼저 귀국한 뒤 어머니 병환 때문에 패티김도 귀국하자 두 사람 사이는 사랑으로 급전(急轉)했다.
어머니 병세가 안정되어 4월에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던 패티김은 봄비 내리던 어느 날 밤 호텔방에서 길옥윤의 전화를 받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오/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지면은 애절도 해라”
길옥윤은 전화에 대고 말 대신 자기가 만든 노래 ‘사월이 가면’을 속삭이듯 불러주었다.
그는 작곡가이자 섹스폰 주자이고 가수였기에 가능했다.
이 로맨틱한 프로포즈에 감동한 패티김은 출국을 단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민주공화당 김종필 의장의 주례와 3천 명이 넘는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워커힐 호텔에서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창작활동에만 혼신의 열정을 기울이며 동시에 술에 파묻혀 사는 길옥윤과, 구도자 같은 절제로 자기 관리를 잘 하는 패티김은 도저히 화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까지 있었으나 서로의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일단 약 1년 반 정도 떨어져 살아보자고 합의했다. 하지만 결론은 갈라설 수밖에, 달리 답이 안 나왔다. 그때 길옥윤은 미국에서 패티김을 생각하며 ‘이별’을 썼고, 패티김은 울면서 이 곡을 받아 불렀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이후 패티김은 이탈리아 사업가와 재혼을 하였고, 길옥윤은 이혼과 사업실패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였으나 얼마 안 가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병마와 싸우는 길옥윤을 안타깝게 여긴 후배 음악인들이 마련한 헌정(獻呈) 콘서트가 그 유명한 SBS의‘길옥윤의 이별 콘서트’였고, 연락을 받은 패티김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랑했던 사람을 위해 이탈리아에서 수천마일을 날아와 그 어느 때 보다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별’을 열창했다. 실로 두 사람이 결별한지 21년만의 일이었다. 이로서 길옥윤은 죽기 전에 아내가 자기 앞에서 ‘이별’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패티김은 거기서 처음으로 길옥윤에게 “그날 밤 호텔로 나에게 불러준 ‘사월이 가면’이 프로포즈였나요?”라고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길옥윤은 이미 언젠가 있을 이 물음을 예견하고 다른 가수(혜은이)의 입을 빌려 답을 해둔 상태였다.
“당신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 거야/ 마음이 서글플 때나 초라해 보일 때에는/ 이름을 불러주세요 나 거기 서있을게요/ 두 눈에 넘쳐흐르는 뜨거운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드릴게 음~/ 당신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뒤돌아봐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