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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부 19
페테르부르크에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은 훈장이 많으면서도 보통 때는 옷깃에 백십자 훈장 말고는 아무것도 달지 않는, 공로가 많은 독일계 남작 출신 노장군이었다. 세상에서는 그가 약간 망령이 들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는 캅카스에서 근무할 때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그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것은 당시 그가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고 총검으로 무장한 러시아 농민을 지휘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집과 가족을 지키려던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학살한 공로로 받은 훈장이었다. 그 후 그는 폴란드로 전근했는데, 거기서도 역시 러시아 농민들에게 숱한 악행을 저지르게 한 다음, 그 대가로 많은 훈장과 제복에 달 장식을 받았다. 그 후 다시 어디선가 근무했으나, 지금은 늙어서 훌륭한 저택과 수당과 명예직을 지닌 채 현재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엄격히 이행했고, 그 실행을 특히 소중하게 생각햇다. 그는 상부의 명령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이 세상의 일은 무엇이든 변경할 수 있지만 상부 명령만은 예외라고 생각햇다. 그의 직무는 남녀 정치범들을 요새 독방에 감옥에 감금한 다음 10년 동안 그들의 반수가 혹은 미치고, 혹은 폐병으로 쓰러지고, 혹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즉 어떤 자는 굶어 죽고, 어떤 자는 유리 조각으로 동맥을 끊고, 어떤 자는 목매고, 어떤 자는 불에 타 죽도록 대우하는 데 있었다.
노장군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사건은 조금도 그의 양심을 동요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벼락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그의 양심을 동요시키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사건은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상부 명령을 수행하는 데 따른 결과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 명령은 반드시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 만큼 명령 결과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전혀 무익한 일이었다. 노장군은 스스로 가장 중요한 직책이라고 생각하는 그 명령의 수행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군인으로서의 애국적 의무라고 여겼고, 그런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노장군은 직책상 의무에 따라 요새 감옥을 일일이 순시하면서 무슨 요구 사항이 없는지 죄수들에게 물었다. 죄수들은 그에게 가지가지 청을 다 했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묵묵히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곤 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들의 청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그들의 청은 모두가 규칙에서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네흘류도프가 노장군의 저택으로 다가갔을 때, 탑 위의 시계가 가냘픈 종소리로 신을 찬미하는 국가인 <하나님께 영광>을 울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2시를 쳤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서 네흘류도프는 저도 모르게 12월 당원(1825년 12월 14일 정치적 개혁을 목적으로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근위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한 혁명가들)의 수기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매시간 되풀이되는 이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영원히 감금된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에 대한 얘기였다.
네흘류도파가 저택 현관으로 다가갈 무렵 노장군은 어두운 객실에서 자개 박힌 조그만 탁자 앞에 앉아 부하의 동생이며 화가인 젊은이와 함께 접시를 가지고 점을 치고 있었다. 화가의 가늘고 축축하고 연약한 손가락이 노장군의 뻣뻣하고 주름 잡히고 뼈가 드러난 손가락하고 서로 깍지를 끼고 있었다. 이 깍지 낀 두 손은 알파벳이 적힌 종이 위에서 뒤집어놓은 접시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접시는 장군이 낸 질문, 즉 영혼은 죽은 후에도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중이었다.
하인의 일을 맡아보는 병사 하나가 네흘류도프의 명함을 가지고 들어왓을 때는 잔 다르크의 영혼이 접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잔 다르크의 영혼은 알파벳 문자를 한 자 한 자 이어서 '서로 인식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대답이 기록되었다. 병사가 들어왔을 때 접시는 한 번 'P'자에서 멎었다가 'O'자로 가더니, 다시 'S'자로 가서 멎으며 뒤뚱거렸다. 접시가 뒤뚱거린 이유는, 장군 생각으로 다음 문자는 'L'이라야만 했기 때문이다. 즉 그가 생각하기에 잔 다르크는 영혼이 모든 지상의 것 또는 그와 유사한 것에서 스스로를 정화시킨 뒤에야 비로소 서로 인식하게 된다고 말해야 했으므로 다음 문자는 반드시 'L'이어야만 했으나, 화가는 또 화가대로 다음 문자는 반드시 'V'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화가는 영혼이란 에테르 같은 몸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서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망령이 대답해주리라 생각했다. 장군은 굵은 흰 눈썹을 음울하게 찌푸리고 손에다 눈을 박은 채, 접시는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L'자 쪽으로 접시를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혈색이 나쁜 청년 화가는 그 핏기 없는 파란 눈으로 어두컴컴한 객실 한구석을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떨면서 접시를 'V'자 쪽으로 끌어당겼다. 장군은 놀이를 방해받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잠시 말이 없더니, 명함을 집어 들고 코안경을 썼다. 그러고는 머리가 아프다며 신음 소리를 내고 마비된 손가락을 문지르면서 불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재로 모시게."
"각하, 나머지는 저 혼자 하게 해주십시오"하고 화가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전 지금 영혼의 출현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좋아요, 혼자 다 해버려요."
장군은 엄한 어조로 딱 잘라 이렇게 말하고는, 굽어지지 않는 다리로 알맞게 보조를 맞추면서 성큼성큼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잘 오셨습니다." 장군은 네흘류도프에게 사무용 책상 옆의 안락의자를 가리키면서 컬컬한 음성으로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페테르부르크에 오신 지 오래되었소?"
네흘류도프는 온 지 얼마 안 된다고 대답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건강하신가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참 안됐군요, 유감입니다. 내 아들 녀석이 당신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장군의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맡겨진 직무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간첩을 감독하는 일이었다.
"나는 당신 아버지와 같이 근무했었소,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근데 어디 근무하고 있소?"
"아무 데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장군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실은 장군께 부탁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만"하고 네흘류도프는 말했다.
"좋아요. 무슨 일이신지?"
"만일 제 청이 부당하다면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꼭 부탁드려야겠기에."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실은 이곳 감옥에 구르케비치라는 사람이 수감되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면회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게 안 되면 책이라도 차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네흘류도프의 청을 듣고 만족의 표정도, 불만의 표정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실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규칙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네흘류도프의 물음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그런 문제에는 흥미조차 없었다. 그는 지금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건 아시다시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잠시 쉬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면회에 관해서는 황제께서 정해놓으신 규칙이 있어 거기 어긋나지 않는 한 허가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에 대해서 말하자면, 거기에도 도서관이 있어서 허가된 책만은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필요로 한느 건 과학 서적이라서요.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 건 믿지 마시오." 장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공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썽을 피우기 위한 겁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괴로운 처지에 있으니까 뭔가 시간을 보낼 거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하고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들은 1년 내내 불평만 하니까요"하고 장군은 말했다. "우린 그들을 잘 알아요." 장군은 대체로 특수한 불량분자라도 대하는 듯한 어조로 그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기서 다른 감옥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편의를 제공받고 있습니다"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그는 변명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마치 죄수들을 살기 좋게 해주는 것이 이 감옥의 중요한 목적이기라도 한 듯이 이곳 죄수들이 받고 잇는 온갖 편의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사실 꽤 가혹한 면도 있었소만, 지금은 아주 좋은 대우를 받고 있지요. 그들은 하루 세끼 식사를 하는데, 그중 한 끼는 비프스테이크나 커틀릿 따위의 고기 요리를 먹는답니다. 그리고 일요일마다 맛있는 식사가 또 하나 제공되지요. 사실 말이지, 모든 러시아 사람들이 다 이정도로 식사를 한다면야."
장군은 죄수들의 요구하는 버릇이며 고마워할 줄 모르는 그들의 습성을 증명하려고 수없이 되풀이한 말들을 다시 되뇌기 시작했다. 장군도 다른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자기가 잘 아는 대목에 이르면 자꾸만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종교 서적과 낡은 잡지들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도서실에는 적당한 서적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습니다만, 거의 읽지를 않는단 말이에요.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고 읽는 듯하지만 곧 그대로 내버려둬서 새 책이 반나마 페이지가 붙은 채로 있기도 하고, 헌책은 페이지조차 뒤적이지 않은 것도 있거든요. 우린 때때로 시험도 해본답니다." 장군은 보통 웃음과는 거리가 먼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종잇조각을 끼워놓기도 합니다만, 언제나 그대로 남아 있단 말이오. 그리고 쓰는 게 금지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하고 장군은 말을 이었다. "석판, 석필도 주고 있으니까 그들은 무엇이든 써서 기분을 전환시킬 수가 있습니다. 지우고 또 쓰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것 역시 하지 않는군요. 그렇지만 그들은 무척 빨리 얌전해진답니다. 처음에는 수선을 떨지만 좀 있으면 살도 찌고 몹시 조용해지죠." 장군은 자기가 하는 이야기에 그 얼마나 무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를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네흘류도프는 그 늙은이의 쉬어빠진 목소리를 들으면서 뼈만 남은 팔다리와 흰 눈썹 밑의 생기 잃은 눈초리, 양쪽 깃 위에 축 늘어진 말쑥하게 면도한 두 볼, 살육의 대가로 받은 것을 유난히 자랑하고 있는 그 백십자 훈장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반박하거나 그 말에 내포된 뜻을 설명해준댔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다른 일에 대해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오늘 아침 석방 명령이 내려졌다는 통지를 받은 슈스토바란 여죄수의 일이었다.
"슈스토바? 슈스토바라.....죄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욀 수는 없거든요. 하도 많아서 말이오." 그는 죄수가 너무 많다고 비난이나 하듯이 이렇게 말햇다. 그는 벨을 눌러 서기를 불러오도록 일렀다.
서기를 부르러 간 사이에 그는 정직하고 출신이 좋은 사람들은(자기도 물론 그중 한 사람임을 암시하면서)특히 황제에게 필요하니까 네흘류도프도 근무를 하라고 설교했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도"하고 그는 덧붙였으나, 그 말은 명백히 음절 효과를 내려고 덧붙인 데 지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늙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껏 일하고 있소."
그때 마르고 여윈 몸집에 불안하고도 영리한 눈초리를 한 서기가 들어와서, 슈스토바는 어딘가 묘한 요새에 갇혀 있으며 그녀에 대한 서류는 아직 와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서류가 오면 그날로 돌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붙잡아두지 않아요. 남아 있어서 고마울 게 조금도 없으니까요." 장군은 이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어 보이려고 했으나, 그것은 다만 그의 늙은 얼굴을 찡그리게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네흘류도프는 이 무서운 노인에게 느낀 혐오와 연민이 뒤섞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노인은 또 노인대로 틀림없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이 경박한 청년, 옛 친구의 아들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룰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계 한마디 없이 그대로 보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잘 가시오. 제발 이 노인을 잊지 말아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여기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하고는 사귀지 말아야하오. 죄 없는 자라곤 없으니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불량자들뿐이란 말이오. 우린 그들을 잘 알아요." 그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사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사실이 그래서라기보다는 말일 그렇지 않다면 자기 자신이 마음껏 훌륭한 생활을 누려온 존경받을 만한 영웅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양심을 팔아왔고 지금도 역시 계속해서 팔고 있는 악덕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근무를 해야죠" 하고 그는 말을 계속했다. "황제께선 성실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있소.....또 조국을 위해서도"하고 그는 덧붙였다. "만일 나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처럼 근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도대체 누가 남겠느냐 말이오? 우리가 제도를 비판만 하고 정부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면....."
네흘류도프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푹숙이면서 너그럽게 내민 뼈만 남은 큼직한 손을 잡고 그 방을 나왔다.
장군은 불만스러운 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는, 허리를 문지르면서 다시 응접실로 갔다. 아까 그 화가가 잔 다르크의 영혼에게서 얻은 답을 써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코안경을 쓰고 읽었다. '몸에서 발산하는 에테르 같은 빛으로 서로 인식하게 되리라.'
"아아!" 장군은 눈을 감고 동감이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모든 빛이 다 같다면 어떻게 구별할 수 있지?" 그는 이렇게 묻고, 다시 화가와 손가락을 마주 끼고 탁자 앞에 앉았다.
네흘류도프의 마차는 문을 나섰다.
"나리, 어쩐지 기분 나쁜 곳이군요." 마부는 네흘류도프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기다리다 못해 가버릴까 했습죠."
"그래, 적적한 곳이지." 네흘류도프는 가슴 가득히 숨을 들이쉬면서 그 말에 동의하고는, 하늘을 흐르는 연기 같은 구름이며 오가는 보트와 기선 뒤에서 일렁이는 네바 강의 반짝이는 잔물결을 바라보았다.
부활 2부 20
이튿날 마슬로바 사건의 심리가 열리게 되어 있었으므로 네흘류도프는 원로원으로 갔다. 그는 이미 마차가 여러 대 머무르고 있는 원로원 건물의 장엄한 주차장에서 변호사와 만났다. 호화롭고 장엄한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자, 구석구석까지 죄다 아는 변호사는 재판법 제정 연대가 적혀 있는 왼쪽 문으로 갔다. 문턱 맨 앞 긴 방에서 외투를 벗고 수위에게서 심의 위원 모두가 모였으며 마지막 한 사람이 방금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아낸 파나린은 하얀 셔츠의 가슴팍이 보이는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채 유쾌하고 자신 있는 태도로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옆방은 오른편에 무척 커다란 벽장과 잇닿아서 탁자가 있고, 왼편에 나선 계단이 있어 마침 서류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간략한 복장의 의젓한 관리가 내려오는 참이었다. 이 방에서 먼저 주의를 끈 것은 흰 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신사복에 회색 바지를 입은 장로같은 풍채의 노인이었다. 노인 곁에는 관리 두 명이 정중한 태도로 서 있었다.
백발노인이 벽장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이때 파나린은 자기와 똑같은 연미복에 흰 넥타이를 맨 한 친구 변호사를 찾아서 곧 활기 넘치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네흘류도프는 방에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방청인 열다섯 사람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은 여자였다. 하나는 코안경을 쓴 젊은 여자고, 또 하나는 백발의 부인이었다. 지금부터 심리되는 사건은 신문의 명예훼손 기사에 간한 것이라 어느 때보다 방청인이 많았으며, 그것도 주로 저널리즘 관계자들이었다.
멋진 제복을 입고 뺨이 붉은 호남아인 정리가 한 손에 서류를 들고 파나린에게로 걸어와 무슨 사건으로 왔느냐고 묻고, 마슬로바 사건임을 알자 뭔가 기입하고 사라졌다. 이때 벽장 문이 열리더니 장로같은 풍채의 노인이 그 안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미 신사복은 아니고, 반짝반짝 빛나는 기장을 가슴에 달고 금몰이 달린 예복 차림으로 새를 연상시켰다.
아마 노인 자신도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이 거북한 듯 평소 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허둥지둥 출구 맞은쪽 방문으로 들어갔다.
"저분이 베입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요." 파나린이 네흘류도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를 친구에게 소개한 다음, 이제부터 심리하게 될 매우 흥미진진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심리는 곧 시작되었다. 네흘류도프는 방청인들과 함께 왼쪽 법정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모두, 파나린도 함께 책(柵)으로 칸을 막은 방청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의 변호사만은 책 앞쪽에 있는 변호인석으로 걸어 나갔다.
원로원 법정은 지방재판소 법정보다 조그맣고 구조도 단순했는데, 다른 점이라곤 심의 위원들이 앉는 탁자에 걸려 있는 것이 녹색 나사가 아니고 금몰을 수놓은 새빨간 비로드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공정한 재판을 하는 장소에 따라다니는 부속품들은 똑같이 마련되어 있었다. 쌍두 독수리가 장식된 문진, 십자고상, 황제의 초상 등이 있고, 여기서도 역시 정리가 엄숙히 개정을 선포했다. 전원이 기립하여 법복을 입은 심의 위원들이 입정하고 높은 등받이가 달린 안락의자에 착석해 애써 자연스러운 태도를 가지려고 하면서 탁자에 팔꿈치를 괴는 데까지 지방재판소 때와 꼭 마찬가지였다.
심의 의원은 네 사람이었다. 깨끗이 면도질한 갸름한 얼굴에 강철 가은 눈이 차갑게 빛나는 위원장 니키틴, 입술을 굳게 다물고 흰 손으로 사건 기록을 넘기며 보는 볼리프, 그다음이 곰보 얼굴에 뚱뚱하게 살찐 학자 출신의 법률가 스코보로드니코프, 네 번째가 아까 제일 늦게 온 장로 같은 풍채의 노인 베였다. 위원들과 함께 원로원 서기장 겸 검사국 차장이 들어왔다. 수염 하나 없고 야윈 중키의 젊은 사내로 얼굴빛이 무척 까맣고 수심 어린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네흘류도프는 이 사내가 이상한 제복 차림인 데다 벌써 6년째나 못만났지만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검사국 차장은 셀레닌이라고 하죠?" 그가 변호사에게 물었다.
"네, 왜요?"
"그 사내라면 잘 압니다. 훌륭한 사람이죠....."
"우수한 검사국 차장이죠. 재빠르고요. 그렇다면 그에게 부탁할 걸 그랬군요." 파나린이 말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죠." 네흘류도프는 셀레닌과의 우정과 친근했던 시간을 떠올리고는 순수하고 성실한, 그리고 가장 좋은 의미로 '완전한', 사랑스러운 성질을 상기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럴 시간도 없군요." 사건 보고가 시작된 데 귀를 기울이며 파나린은 속삭였다.
지방재판소의 판결을 아무런 수정도 없이 채용한 항소법원 판결에 대한 상고심이 시작되었다.
네흘류도프는 귀를 기울여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썼으나, 지방재판소 때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점에 변론이 이르지 않고 지엽적인 일만 문제 삼고 있어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가 된 것은 어느 주식회사 사장의 사기를 들춰낸 신문의 칼럼 기사였다. 그러므로 중대한 문제는 그 사장이 배임 행위를 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배임 행위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하는 점일 것으로 의당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런 점은 조금도 언급되지 않았다. 신문 발행자는 법적으로 그 칼럼 기사를 게재할 권리를 가졌는가, 또 그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발행자는 어떠한 죄를 범하게 되는가, 즉 명예훼손인가 아니면 중상인가, 그리고 명예훼손죄 가운데 중상죄가 포함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중상죄 가운데 명예훼손죄가 포함되는가 등이 다루어졌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조문이라든가 어디어디 판례라든가 하여 보통 사람으로서는 ㅗㅇ 알 수도 없는 일만 논의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네흘류도프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사건 보고를 하는 볼리프가 어제 자신에게 원로원은 사건의 본질적인 심의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그토록 엄숙히 설명하고도 이 사건에 관해서는 분명히 원판결 파기로 이끄는 치우친 보고를 하고 있다는 것과, 셀레닌이 그 특유의 신중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별안간 정색하며 반대 의견을 들이댔다는 것뿐이었다. 평소 얌전하던 셀레닌이 열을 올려서 네흘류도프는 깜짝 놀랐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는 이 주식회사 사장을 돈에 매우 치사스러운 인간으로 알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 사내의 사건 심리 전날 밤에 볼리프가 이 실업가한테서 굉장한 만찬을 대접받은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볼리프가 아주 신중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일방적인 사건 보고를 하는 것을 보자, 셀레닌은 화가 치밀어서 이런 흔한 사건에 신경질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태도로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이 반론은 분명히 볼리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듯싶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었으나, 말없이 놀란 듯한 몸짓을 하며 근엄하면서도 화난 얼굴로 다른 위원들과 함께 평의실로 물러갔다.
"당신은 무슨 사건이라고 하셨죠?" 위원들이 퇴정하자마자 정리가 또 파나린에게 물었다.
"아까 말했잖습니까, 마슬로바 사건이라고요."
파나린이 말했다.
"아, 그러셨죠. 그 사건은 오늘 심리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변호사는 말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사건이 저 정도로 되었으니 위원들이 판결 후 출정하실지 어떨지 알 수 없군요. 전달은 하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니, 전달은 하겠습니다. 말씀드리겠어요."
이렇게 말하고 정리는 무엇인지 서류에 표를 했다.
사실인즉 위원들은 중상에 관한 사건 판결을 선고한 다음에는 마슬로바 사건을 비롯해 나머지 사건 모두를 평의실에서 나오지 않고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처리해버리려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