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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산문집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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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정영숙 산문집 / 한국학술정보(주)(2013.03.08) /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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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시를 쓴 지는 올해로 23년이 되었지만, 그림을 만난 지는 거의 50년이 다 되어간다. 대학 다닐 때부터 이젤을 메고 덕수궁이나 경복궁 등의 고궁을 찾아다녔으니, 그림은 시보다 나와 더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나 제대로 된 레슨은 거의 받지 못했었다. 이십 대에 명동 화실에서, 또 늦은 나이에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론과 함께 몇 년간 유화지도를 받았을 뿐, 나머지 시간은 혼자사 취미 삼아 붓을 들곤 했다. 그러다 90년 대 초에 시로 등단하자 시 창작에 몰두하느라 그림과 멀어졌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계간지 <애지(愛知)>와 계간지 <문학과 의식>으로부터 그림과 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게 되었다. 그 당시 “그림에 나타난 이야기와 색채를 어떻게 하면 시라는 언어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하고 있었던 터라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은 생각에 쾌히 승낙했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가, <애지>에서 꼭지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으로, 그리고 2003년부터 2009년 봄호까지 6년간, <문학과 의식>에서 꼭지 ‘정영숙의 시가 있는 아틀리에’로 연재한 것이다. 단, <문학과 의식>에서는 ‘에로티시즘’ 콘셉트에 맞춘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본의 아니게 그쪽으로 많이 기울여졌음을 독자들에게 밝히는 바이다. 그리고 잡지사의 요청에 따라 원고 매수가 달랐으므로 글의 내용이 길거나 짧아지기도 했다.
이 글의 성격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화가들의 그림을 본 후에, 쓴 시가 있는 기행문 형태의 산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먼저 시를 읽은 후, 그 시에 맞는 그림을 찾아서 쓴 산문이다. 시와 그림이라는 인접 예술이 만난 서로 보완하며 이룬다고 생각하면 일반 독자들은 쉽게 다가설 수 있으리라.
화가를 꿈꾸던 어린 시절부터 나는 세계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명화를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결혼 후 그 꿈이 이루어져 유럽여행에서는 피렌체 우피지 미술관, 로마의 바티칸 시국,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관 등을 돌아다니며 좋은 소재의 글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 글을 쓰는 10여 년 동안 아이들 셋이 모두 미국에 나가 있었기에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보스턴에 있는 미술관을 탐방할 기회가 많았다. 더구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현대미술관을 수십 차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림을 좋아하는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이 글들은 내 삶의 흔적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슴에 소용돌이치던 불꽃들이 고흐의 붓끝에서 묻어났다 다시 시로 승화하는가 하면, 아이들을 기르면서 어머니로서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이 고갱과 같은 화가의 고통과 맞물려 시로 승화되기도 한다. 김기창의 <태양을 먹은 새>나 샤갈의 <부활제> 속에서는 아이들이 밝은 미래를 염원하는 어머니의 기도가 들어 있기도 하다. 그림과 시와 산문의 세 장르가 한데 어우러져 마티스의 <원무>같이 춤을 추며 이 세계가, 이 우주가 하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삶에서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10년이라는 시간을 나는 이 글들과 함께 했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명화들과 나누었던 시간이 무척 행복하고 나에게는 보람된 일이었다. 2003년부터 시인으로서 그림에 대한 시와 산문을 써서 잡지에 오랫동안 연재했다는 것만으로도 문단에 획기적인 일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전까지 그림을 보고 시를 쓴 시인이 많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그 후, 많은 시인들이 그림을 보고 시를 써서 발표했던 걸로 기억한다. 잡지에 발표한 이 글들로 인해, 시와 그림과의 인접예술이 더한층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크나큰 보람을 느낀다.
10여 년간 명화들과 시가 함께 호흡하며 이루어낸, 아름다운 화음이 담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 기쁨과 감동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재의 기회를 준 계간지 <애지>와 <문학과 의식>, 이 책을 내주신 한국학술정보(주)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미진한 원고를 보고 쾌히 출판에 응해주신 김영권 이사님께 고개숙여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그 외 조현수 과장님과 편집에서 마무리까지 애써주신 조가연 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공부하느라 바쁘고 힘든 유학생활 중에 기꺼이 틈을 내어 미술관을 안내해준 두 아들과 며느리, 막내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이 책을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친다.
2013년 2월
정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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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프롤로그
Part1 봄날, 그대 치자빛 가슴에 안겨
제1장 마법사가 만든 봄
1.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2. 보티첼리 〈봄〉
제2장 환희의 극치
1. 클림트 〈다나에〉
2. 베르니니 〈무아지경의 성 테레사〉
3. 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
제3장 영원하고 말이 없는 사랑
1. 로댕 〈나는 아름답다〉
2. 로댕 〈저주 받은 여인들〉
3. 클림트 〈여자 친구들〉
4. 이중섭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제4장 에곤 실레의 눈빛
1.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2 에곤 실레 〈Deateh & Maiden〉
3. 마네 〈풀밭 위의 점심〉
4. 베르메르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Part 2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제5장 아비뇽의 편지
1. 피카소 〈아비뇽의 아가씨들〉
2. 모네 〈수련〉
3. 마티스 〈원무〉
제6장 유령 같은 사랑
1. 뭉크 〈흡혈귀〉와 〈마돈나〉
2. 오키프 〈밝은 붓꽃〉
3. 고갱 〈IA ORANA MARIA〉
4. 디에고 리베라 〈테완테팩의 목욕하는 사람〉
5. 고흐 〈싸이프러스〉와 〈해바라기〉
제7장 피츠버그의 불꽃나무
1.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2. 김기창 〈태양을 먹은 새〉
3. 프리다 칼로 〈두 명의 프리다〉
제8장 청색에 빠지다
1. 샤갈 〈부활에 빠지다〉
2. 김환기 〈하늘〉
3. 박노수 〈행려〉와 〈조춘〉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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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지음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김기창 <태양을 먹은 새>
피츠버그의 불꽃나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비를 뿌리는 피츠버그 날씨는 태풍 카트리나로 인해 연일 장대비를 쏟고 있다. 앰버슨 아파트에서 CMU1)로 가는 저택들이 늘어선 More Wood Avenue는 채송화, 단국화, 무궁화꽃들이 물기를 머금은 채 불꽃을 그리고 있다. 이제 나는 물속에서 어떻게 불꽃의 언어를 그릴 것인가.
카네기 멜론의 예술 대학교<Regina Gouger Miller Gallery>앞, 나방이 그려진 <Animal Nature>포스터에서 불꽃을 발견하고 빗줄기를 피해 안으로 들어갔다. 환등기가 비추고 있는 한쪽 벽면에 내 몸의 서너 배나 될 듯한 나방이 고치 속에서 기어나오고 있었고, 다른 쪽 벽면에는 나방이 관솔불 속에서 헤드폰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나무 등걸 타오르는 소리에 검은 숯덩어리가 되더니, 하얀 연기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불꽃 속에서의 죽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융은 불을 향해 날아가 불꽃 속에서 몸을 태우는 나방을, 태양을 향해 날아가 태양 속에서 죽기를 바라는 여인과 비유하고 있으며, 괴테 또한 『서동시집(West-Ostlicher Divan)』에 실린 시「거룩한 동경(Selige Sehnsucht)」에서 불에 타서 죽기를 바라는 나비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오직 현자에게만 말하라
보통 사람들은 당장 비웃을 테니까
불꽃에 타 죽기를 갈망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나는 찬양하려 하노라
그대가 태어난 곳이자, 그대를 태어나게도 했던
그 싸늘한 사랑의 밤이면
야릇한 기분이 그대를 엄습하리라
고요히 촛불이 빛날 때
그러면 그대는 더 이상
어둠의 그늘에 휩싸인 채 그대로 머물지 못하로
새로운 갈망에 이끌려
보다 고귀한 결합에 이르리라
길이 아무리 멀다한들, 무슨 문제이랴
무엇에 홀린 듯 날아가서
마침내, 빛을 갈구하다가
그대, 나비는 불에 타서 죽으리라
죽어서 태어나라!(Stirb und werde!)2)
그리하여 그대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대는 오직 이 어두운 지상의
음울한 나그네일 뿐
-요한 볼프강 폰 괴테(J.W.v.Goethe)의 시「거룩한 동경(Selige Sehnsucht)」전문
<그림 64> 김기창(金基昶)의 <태양을 먹은 새(The Bird That Ate the Sun)>.
1968. 수묵담채.35×45cm
스스로 날개를 태우려고 달려드는 존재,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즉 삶과 죽음의 본능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들 본능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불가항력의 리듬이며 운명이다. 천상을 향해 수직으로 타오르는 불꽃마냥 우리는 모두를 희생하고 모두를 던져버려도 좋을 가치를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사랑, 학문, 詩 어느 것이든 닿는 대로 열정을 쏟아부으리라.
CMU에서 5분 거리에 있는 <Canrgie Museum> 입구를 들어서자 분수가 불꽃을 뿜고 있었다. 수직으로 치솟는 분수는 불순물이 섞인 일상의 붉은빛에서 순수한 흰빛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다. 일상의 검은 것들, 불협화음의 음계, 뻐걱대는 계단과 헛돌아가는 나사와 같은 일상에서 탈출한다는 것, 여행은 詩를 쓰듯 흰빛의 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인지 모른다. 나는 흰색의 우주(cosmos)를 향해 타오르는 한그루 불꽃 나무이길 바라며, 관람객이 서너 명밖에 보이지 않는 <Bog People>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수십 구의 미라들이 누워 있는 전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는 A.D. 250년경 철기시대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두 남자의 시체를 보았다. 2000년 전 그 두 남자는 왜 수렁 속에 빠지려 했던 것일까. “그들은 종교적 의식 제물에 바쳐진 희생자였을까(Were the men victims of a ritul sacrifice)?" 아니면 ”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었을까(Could they have been social outcasts)?"
마른 나뭇등걸같이 앙상한 뼈를 맞대고 누워 있는 두 구의 미라에서 나는 뜨겁게 타올랐던 하나의 불꽃나무를 보았다. 시공간을 넘어선, 존재인 동시에 비존재인 미라. 묘비명처럼 무덤 앞에 쓰인 “당신은 영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이다(You are our keys to the gates of Etemity)."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현실에서 외면당해야 했던 그들의 고통이 내 몸에 전해오는 듯 가슴이 아팠다. 젊은 나이에 생을 포기해야 했던 그들이 한없이 가엾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둘만의 세계로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었던 그들이 행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우주를 여는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것, 나 자신이 바로 그 우주를 여는 주인이라는 것, 행복은 바로 내 손안에 있는 것임을.
전시관 안을 환하게 밝히며 뜨거운 화염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불꽃 나무에서 나는 언뜻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雲甫의 붉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태양은 아침에 떠올라
빛의 가지를 뻗는다
불우한 악기의 현을 건드린다
불협화음에 익숙한
불투명한 음계
떨리는 가슴 위로
태양은 투명한 빛살을 뜯어
물방울을 튕긴다
태양을 삼킨 새는
검은 토양
붉은 시간을 가르며
불우한 땅을 떠나
흰 꽃등을 달며 분수로 오른다
미세한 음표로
천상의 노래 부른다
지상의 시간은 없다
-정영숙 시 「雲甫의 그림」 전문,『지상의 한 잎 사랑』(1995)중에서
雲甫 김기창의 작품, 1968년 구미 여행 후 그린 <太陽을 먹은 새>,<나비의 꿈>은 고전적인 동양화를 현대화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환상적이면서도 표현적인 기법의 사용은 여행에서 얻은 자유로운 상상력 덕분이리라. 특히 <太陽을 먹은 새>는 뿌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동양화에 현대화를 추구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새를 그림의 중앙에 대범하게 배치하여 시원스럽고 강렬하게 주제를 부각시켰으며, 여백의 미와 낙관을 이용하여 균형 잡히고 안정감 있게 나타내고 있다. 적색과 황색의 과감한 색채은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태풍 카트리나에도 꿈쩍하지 않고 진리의 열매를 맺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CMU의 경영관으로 들어가는 딸아이의 모습에서 나는 또 하나의 작은 불꽃 나무를 발견한다. 가톨릭의 오랜 전통 속에서 죽어가는 철강의 도시, 그러나 CMU로 다시 살아나는 피츠버그에 동양의 환한 불꽃으로 타오르길 마음속으로 빌며 교문을 나서는데, 주황빛 날개를 지닌 아름다운 새 한 마리, 피츠버그의 흐린 날씨를 지우며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 Tip 김기창(金基昶, 1913~2001)
7세 때 장티푸스로 언어불능과 청력을 잃었다.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워 18세 때 조선술전람회에 첫 입선했다. 연4회 특선, 24세 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1970년 미국 뉴욕에서 개인전,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서훈, 1997년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 미공개 작품전’ 작품으로 <가을> <무당> <투우> <나비의 꿈> <탈춤> 등이 있다.♣.
박노수 <태행려>와 <조춘>
여백과 비움의 미학
-그는 지워지고 사라진다. 몸에서 빠져나간 빈집이 된다. 풍경이 된다.
迷界에 빠지지 마시기를, 몸은 몸대로 두실 것 풍경만으로 있으실 것 풍경으로만 있으실 것 자체가 되어버리실 것 버려진 집 그것만으로만 있으실 것 섬길 주인이 없는 다만 집일 뿐이실 것 그러면 된다. 찬 바람일 뿐이면 된다 자체일 뿐이면 된다 드나들 생각을 마실 것 애당초 아주 밖에 있으시거나 들어가 아주 사실 것 참 깊다 迷界에 빠지지 마시기를
-정진규 시「찬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막는 방법」전문, 시집『本色』(2004)
문장들이 두 번씩 반복되고 있는 위의 시를 읽다 보면 눈앞에 풍경화 한 폭이 걸린다. 이 시를 다 읽고 날 때쯤에는 말하는 주체(화자)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그의 반복되는 소리만 무채색의 겨울 하늘에 여운을 남긴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화폭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실패한다. 내 몸이 무거운 탓이다.
사유하는 인간만이 손을 거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의 몸(사유)은 글을 쓰는 순간 집을 잃는다. 백지 위에 풍경 자체로서의 빈집만 동그마니 그려질 뿐이다. 거기에는 몸도 사유도 없는 빈집, 찬바람인 기호가 있다. 몸(기의)은 찬 바람(기표)인 시가 되었으니, 드나들 필요도 경계에 머무를 필요도 없다. 결국 바람도 풍경과 한몸이니 산이 되든 물이 되든 풍경 그 자체로 머물면 된다.
<그림 73> 박노수의 <행려(行旅)>, 1995. 한지에 수묵담채. 97×180cm
迷界에 빠지는 것은 시를 쓰기 직전, 붓을 들기 직전의 그 찰나의 순간뿐이다. 그는 캔버스 안의 悟界의 세계에 앉아 캔버스 밖의 사물들을 유유자적 관조하며 자기만의 깊은 색깔 속에 묻혀 ‘참 깊다’라는 감탄사를 내뿜는다. “한 몸이 되는 순간 속의 그 적막이 곧 玄府의 세계라 할 수 있다”3)라는 그 ‘玄府’의 세계를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참 깊다’라는 말을 할 수 있으리라.
남정(藍丁)박노수의 산수화에서 보이는 여백의 공간에는 정진규의 시 ‘비인 집’의 쓸쓸함과 적막감이 감돈다. 앞의 그림 <行旅>를 보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4)라는 詩句에서 묻어나는 哀想이 배어 있다.
그러나 상실과 비애에 젖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울던 빗줄기”는 시집 『本色』에 이르면, 이제 하늘에서 내려와 눈 덮인 산이 되기도, 흰 구름 서늘한 바람이 되어 깊은 청색빛 강물로 흐른다. 그의 몸은 산과 물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早春>의 풍경을 낳는다.
<그림74> 박노수의 <조춘(조춘)>. 1979.한지에수묵담채. 120×180cm
남정의 그림에서 느끼는 특유의 청색과 빠른 선묘가 자아내는 靜中動 動中靜은 화면 가득 정적감을 감돌게 하며, 그의 여백의 공간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빔(虛)과 참(實)의 의미를 일깨운다. 텅 비움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생성의 공간을 만든다. 그의 여백의 공간은 정진규의 시, 소멸하고 지워진 텅 빈 공간(빈집)과 조우한다. 이 때 빈집은 풍경 자체가 되어, 우주와 한몸을 이루는 충일된 순간을 맛보게 된다. 나는 정진규 시인의 ‘玄府’의 세계를 잘 알지 못한다. 그건 주체인 내가 지워지고 사라지는 초월의 순간에 얻는 한 점의 빛일지도, 무한대의 에너지일지오, 아니면 먹빛의 막막한 공간, 또한 칠흑의 어둠이 존재하는 적막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예술가는 몸(욕심)을 버리고 그 적막을 밥으로 삼으며 외로움을 견디어야 자기만의 고유한 빛깔을 창출할 수 있지 않겠는가.
동양적인 자연관에 입각한 화풍, 서예에 밑바탕을 둔 고고하면서 기개 높은 남정의 그림은 線을 그림의 생명으로 삼는다. 선이 살아 움직일 때 화면(畵面)은 우주와 통하는 공간이 되고 생명력을 갖는다고 했던가. 고고하고 기개 높은 線은 탈속의 경지에서만 그려지는 것이리라. 시 쓰는 일도 마찬가지일진대, 살아 있는 언어를 만나기 위해 몸을 버리고 ‘빈집’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진정한 예술가란 탈속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거늘. 한 폭의 풍경처럼 무심히 앉아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일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迷界에 빠지지 마시기를” 이 또한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 Tip 박노수(朴魯壽, 1927~2013)
충남 연기 출생 . 동양화가.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제1회로 들어가 이상범, 장우성에게 배웠다. 1953~55년에 걸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국무총리상, 특선,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다. 대한민국예술원상, 5․ 16민족상, 은관문화훈장, 3․ 1문화상 수상했다.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 그의 작품들은 북화적 준열함과 남화적 색채의 감각적 정서를 절충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그림으로, 간결하고 직관적인 운필과 채색으로 이끈 격조의 세계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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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정영숙 시인의
『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
샤를 보들레이 이래 시인은 언제나 화가의 암호를 풀어내는 해독자였고, 화사 역시 시인의 정신을 형상화하는 재현자였다. 시인은 시 안에 그림을 넣어두고, 화자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겨둔다. 마치 암수한몸과 같다. 황홀하기 그지없는 정신의 축제, 온몸을 불태우는 고뇌와 태양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을 시인은 시로 읽어내고 화가는 그림으로 풀어낸다. 시를 쓴지 23년, 그리;a을 만난 지 50년, 화가를 꿈꾸던 시인이 10여년에 걸쳐 세계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그림 속의 시와 시 속의 그림에서 찾아낸 것은 결국 예술가의 삶이자 그 흔적이자 마음속에서 훨훨 타오르는 불꽃의 정신이었다. 정영숙 시인의 글은 그림과 시가 호흡하며 이루어낸 아름다운 화음이자 기쁨과 감동으로 영혼의 자화상을 완성시킨 고백미사라 할 수 있다.
- 박제천(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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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 시인∥
∙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 상주에서 성장했으며, 김천여자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다닐 때부터 유화를 그렸으며, 졸업 후 10년간 서울 시내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유화 습작에 전념했다.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인사동에서 유화 그룹전을 열기도 했다. 세계 여러 나라 a;술관을 돌아다니며 명화를 보고 쓴 시와 산문을 이 책에 실었다.
∙ 1993년 시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황금 서랍 읽는 법(2012)』『하늘새(2007)』『옹딘느의 집(2001)』『물 속의 사원(1999)』『지상의 한 잎 사랑(1995)』『숲은 그대를 부르리(1993)』등 6권이 있다.
∙ 2001년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을 받았으며, 2012년에 목포문학상을 수상했다.
∙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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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MU: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Canegie Mellon University
2) 나비가 불에 타서 죽음으로써, 새로운 보다 고귀한 결합에 이르듯 “죽어서 태어나라(Stirb und werde!)"는 이 시의 주제가 들어 있는 시행이다
3) 정진규의 시론 『질문과 과녁』에서 인용
4) 정진규의 시「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