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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면, 맛의 차이와 다양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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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날, 4·27 판문점 선언이 보여준 분단 드라마의 급진전 파장 속에 하루를 시작한다.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정착 의지에 대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관한 신뢰도가 14.7%에서 64.7%로 급변했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이름 그대로 평화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불어온 봄바람 속에 냉면 기호가 시원하게 파동치고 있다. 어머니의 대동강 추억담과 함께했던 냉면 평소 냉면집 탐사를 인생길 즐거움으로 누려온 나 같은 냉면 마니아에게 이런 돌발 뉴스는 온갖 상념을 솟구치게 만든다. 19세기 중반,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보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드리죠.”라고 말한 미식평론의 원조 격인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의 말처럼, 내게 냉면은 분단의 상처와 치유를 상징하는 대체물이다. 고달픈 인생길을 달래주는 음식 목록에 파스타와 피자도 있고, 전주영화제를 통해 알게 된 콩나물국밥도 있지만 유독 냉면만은 가족계보 연결 코드로 작동해 왔다. 나는 서울이 고향이지만, 외가 고향은 평양이다. 외가 모임하면, 냉면을 같이 만들어 먹거나 냉면집에 모여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풍경이 곧 떠오른다. 어린 시절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스케이트를 탔던 어머니의 추억담도 늘상 곁들어진다. 70여 년 분단 세월이 흘러 미국에 이민을 가거나 타향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도 계신다. 그래도 서울이 고향인 우리 세대는 “같이 냉면 한번 먹어요”란 말로 미식 유전자를 공유한다. 다행히 내가 일하는 학교 근처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식당이 몇 군데 있다. 외국 여행에서도 종종 냉면집을 찾는다. 출신 지역과 무관하게 동행한 분들이 냉면을 별미로 꼽는 음식문화 코드가 분단을 넘어 작동한 덕이다. 2007년 8월, 여성평화운동 프로젝트로 통일부 방문증(비자와 유사한)을 받고 찾아간 개성공단에서도 북한 여성 노동자들과 냉면을 먹었다. 중국은 물론 베트남, 캄보디아, 유럽과 미국의 여러 도시들... 한국인이 사는 곳엔 어디나 냉면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냉면을 먹으며, 맛의 차이와 다양성을 체감하면서 내 미각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쨍하게 시원하면서도 깊은 육수의 맛, 찬물에 씻어낸 면발의 매끈함, 새콤달콤 맛의 조화를 전해주는 무와 오이 꾸미, 배와 삶은 계란, 국물 우려낸 양지머리로 올린 조화로운 색채미학까지 챙기며 진짜 냉면을 가려내려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냉면 맛을 잘 안다는 나 자신의 고정관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여 나의 미감을 열어두기로 한 것은 나누고 베푸는 음식 다양성의 맛을 일깨워 준 음식영화 덕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 1987, 가브리엘 악셀)에서 눈요기했던 음식 장면들이 그렇다. 춥고 궁핍한 덴마크 바닷가 작은 마을, 바닷바람과 태양에 생선을 말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잿빛 하늘이 드리워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청빈한 삶을 신앙심으로 버텨나가는 두 자매에게 아픈 사연을 가진 바베트가 도피해 오면서 사건이 벌어진다. 모든 게 일사천리로 잘 풀리지만은 않았던 프랑스 혁명기, 가족을 잃은 바베트는 파리 일류 식당 ‘카페 앙글레’ 요리사 신분을 감춘 채 가난한 두 자매의 무보수 가정부를 자청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면서 전복적 상황이 발생한다. 거금이 생긴 그녀가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바베트는 곧 다가올 목사님의 탄생 백 주년 만찬을 준비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간 그녀는 일주일 동안 온갖 먹거리들을 한 수레 실어온다. 고통을 기쁨으로 반전시키는 음식 예술의 묘미 이제 음식 만들기 풍경이 스크린을 채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 소스 끓는 소리와 불길이 확~ 퍼져나오는 프라이팬, 빛을 반사하는 유리잔 속에 담긴 와인, 캐비어를 얹은 블러디 드미로프, 여성용 축하주 뵈브 클리코 샴페인이 솟아오르는 거품 등등…. 신앙생활을 해도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못 참고 드러내던 사람들은 만찬을 통해 변화하기 시작한다. 달빛 아래 손에 손잡고 우물가에서 강강술래하며 만찬장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은 다시 봐도 명장면이다. 평생 먹고살 돈을 만찬으로 다 쓰고 마을에 남기로 한 바베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돈을 다 써도 가난하지 않아요. 진정한 예술가는 절대 가난하지 않으니까요”라며 사람들의 변화를 본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오늘 저녁, 저는 배웠습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죠.” 바로 이런 감흥, 고통을 기쁨으로 반전시키는 음식 예술의 묘미가 지구촌 평화음식 냉면 로드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 |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