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핵인싸’ 스타일이었다. 말씀도 재미있게 하셔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불쑥,
“문재인이 이재명이. 아니, 왜 그런 범죄자들을 구속 안 하는지 화가 나서 요즘 잠이 안 와.”
아, 이건 뭐지? 그야말로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 기사님은 싸늘한 분위기를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거침이 없다.
“아니, 대통령이 된지 1년이 넘었는데 그거 하나를 못 하나?”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으로 대응했다. 말을 섞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혼자 말을 했지만 결국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얘기로 서로 언성이 높아졌다.
“아, 지금 여기서 손님이랑 저랑 이야기해봤자 소용이 없고, 다 왔습니다.”
그렇게 택시 기사님과 헤어지고 불쾌한 마음이 한동안 진정 되지 않았다. 세월호 단식 투쟁을 비웃는 폭식 투쟁과, 세월호 희생자를 ‘어묵’으로 모독했던 사건, 그 이전에 광주항쟁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언론사와 언론인들까지 오버랩되며 우리 사회에 대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준 책이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이다. 나 역시 듣는 능력이 있는가 돌아보게 했다. “나한테 리터러시 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깔볼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의미”라는 말에는 아......! 나를 돌아본다. 우리에겐 아직도 할 일이 많다, 할 일이 많다면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역설적인 희망이 생겼다고 할까?
리터러시, 타인에게 다리를 놓는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나는 택시 기사님들과 다양한 사회 이슈로 토론을 한 적이 많다. 기사님들은 학생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기도, 걱정을 하기도 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학생운동을 불온 세력으로 다루었다. 북한 정권의 사주를 받은 몇몇 골수 반정부 인사들에게 순진한 학생들이 철 모르고 이용 당한다는 식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관점이 어엿한 방송, 신문사, 라디오 온갖 매체에서 통용되었다. 그 때 나는 제대로 언론보도를 한다면, 시민들이 진실을 안다면 세상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빠르게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언론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순진한 것이었을까. 무식한 것이었을까.
30여년이 지나서 언론사들은 90년대와 비교하면 해체 수준이라고 할 만큼 영향력이 쇠퇴했다. 대신 유튜브와 SNS 등 다양하고 놀라운 언론의 장이 열렸다. 그래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더라도,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전쟁 시를 대비해 붕대 빨리 묶는 교련 시험을 보던 시절보다 지금이 나아졌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리터러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남과 소통하는 역량을 제대로 키우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회로 나가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이제는, 정치적 배후에 의해 조작되는 여론이 아니다. 스스로 외면하고 자생적으로 가짜뉴스를 만드는 시대가 되었으니 리터러시 능력이 한 사회의 명운을 좌우하는 절대반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그것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있다. 그 시작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삶에서 일어나야 한다. 물론, 학교교육의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