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많은 병자들이 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 와 있었습니까?(5장 2-4절)
답] “베데스다”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예루살렘 북쪽 모퉁이에 있는 것. 느 3장 1절. 32절) 곁에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데스다에는 행각이(사방이 뚤린 형태.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이 있음) 다섯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행각에 많은 병자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고통을 맛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4절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는데 가끔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는데 그때 먼저 들어가는 자가 낫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침을 받은 일이 과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땅 밑에서 물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물의 움직임과 치료에 대한 마지막 기대감 같은 것을 가지고 그 자리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어떻게 행하십니까?(5장 5-8절)
답] 병을 앓은 기간을 38년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누운 것을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물으십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의 삶에 친히 개입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물이 움직일 때 내려갈 수 없다고 답합니다. 그는 자신이 절망적인 삶의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밝힙니다.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병자는 혹시 예수님이 자신을 도와 물에 먼저 넣어줄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주시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7절에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정말에 처해 있다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그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하라고 하십니다.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효력이 있어서 그 사람은 일어나서 걷습니다.
[3] 유대인들이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을 가지고 왜 문제를 삼습니까?(5장 9-10절)
답] 9절에 그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10절에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구약 율법에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짐을 나르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안식일에 지켜야 하는 법 39개 조항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조항에 물건 나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을 노동 행위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금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로 하여금 안식일 법을 어기도록 하신 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고치시는 일을 행한 것 같습니다.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쳐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5장 14절)
답]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십니다. 명절(1절)이라 성전 안이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보라, 네가 나았으니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가 38년 동안 병을 앓게 된 것은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암시가 됩니다. 주님께서 이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함을 요구하십니다.
[5]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까?(5장 17-18절)
답] 17절에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는데 “더욱 죽이고자” 합니다. 안식일에 행한 일 때문에 박해가 일어납니다. 첫째,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자신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신성 모독입니다. 레위기 24장 15-16절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은 ‘사형’에 해당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신성 모독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6]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답] ① 5장 19-20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아들도 행하신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등하게 말씀하십니다.
②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듯이 아들도 자신이 원하는 자를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③ 22절.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 심판을 아들도 행하십니다. 27절에 인자는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④ 23절. 아버지를 공경하듯 동등하게 아들도 공경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경은 경외와 예배 모두를 함의합니다.
[7] 성경은 누구에 대한 증언이라고 합니까?(5장 39-40절. 46-47절)
답]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미쉬나에 보면 “율법에 대한 연구를 하면 할수록 생명 또한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을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40절).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영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46절에도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세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1장 45절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그분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입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는 지식이 풍성해지고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첫댓글 성경을 올바르게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