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대강절 둘째주간 목요일 –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꺼움
말씀제목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꺼움
성경말씀 누가복음 10장 36-37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묵상본문
“아휴, 특별한 일도, 별다른 일도 아니에요.”
시도 때도 없이 폭우가 쏟아지던 올 가을 초입에, 한 여성이 텅 빈 폐지용 수레를 끌고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어르신께 우산을 씌워드렸습니다. 마침 그 모습이 매체에 포착되어나 봅니다. 하여 인터뷰를 요청하자 한사코 거절하며 한 말이라네요.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는지, 그녀 손에 들린 파란색 비닐봉지는 제법 무겁게 늘어져 있었지요. 자신의 왼쪽 어깨와 비닐봉지가 다 젖는 줄도 모른채, 그녀의 우산은 온통 할아버지를 향해 쏠려 있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정겨움이라 기사를 읽는 사람들의 마음도 훈훈해졌을 겁니다.
저 역시 빙그레 감동의 웃음이 나다가, 문득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 여성은 어디쯤에서 할아버지와 헤어졌을까? 1km쯤 동행했다는데, 왜 그만큼이었을까?’
가던 길에 주는 도움에는 인색하지 않았지만, 길이 달라지는 순간 곤란했던 경험이 자주 있다보니 묻게 된 질문입니다.
한 번은 건널목에서 잔뜩 짐을 싣고 힘겨워하시는 할머니의 수레를 뒤에서 밀어드렸습니다. 저도 길을 건너는 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건넌 뒤에도 ‘저기 모퉁이까지만’, 거기 다다르자 ‘저기 큰 건물 앞까지만’, 그렇게 ‘저기까지만’을 반복하시는 할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출근길이 참 난감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넌지시 후회도 밀려왔죠.
예수께서는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를 기꺼이 도운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치료해주고, 여관에 데려가 쉴 곳을 마련해주고, 여관비를 내준 데다 이후 돌아와서는 밀린 삯이나 추가비용을 기꺼이 내겠다고 마음먹은 그였지만, 예상치 못하게 자꾸 더 도와달라는 요청을 마주해야 했다면 그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아니, 어찌 대처해야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이런 이웃이 되기는커녕, 오늘 나는 계속, 이미 충분히 나를 도운 상대방에게 더 나의 이웃되기를 강요하며 ‘상대방의 기꺼운 마음을 이용하고’ 거기에 더해 ‘저기까지만’, ‘저기까지만’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답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랜 묵상 가운데 제가 지금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내 마음이 기꺼운 만큼’입니다. 마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소유의 반을 나누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은, ‘내 마음이 기꺼이 허락한 만큼’말입니다. (이에서 지나면 우리도 어느 새 처음 마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니까요. 저 상대방을 돕던 마음이 욕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바뀔테니까요.) 왜 전부가 아니냐고 꾸짖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이 오늘 이 집에 이르렀다’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려야할 기도는 ‘내 마음의 기꺼움’이 더 깊어지고 커지게 해달라고 하는 간구이어야겠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사람이 되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기꺼움, 자기 생명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기꺼움, 이 기꺼움에 이르기까지,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예기적’으로 내 현재에 끌어오면서 말입니다.
묵상기도
하나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풀며 살게 하소서. 그 기꺼움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영성을 자라게 하소서. ‘저기까지만’을 반복하는 이들 앞에서 내 마음이 변하지 않게 지켜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