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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14(주일) 눅16:19~31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두 가지 교훈’ 예산수정교회
사람들은 종종 죽음에 대해서 “죽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죽은 후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천국과 지옥은 상징일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이에 대한 두 관점이 있는데 먼저 세속적·유물론적으로 죽음과 지옥을 보는 관점은 인간은 단지 물질적 존재이므로, 죽으면 의식도 함께 소멸된다고 주장하니 당연히 지옥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나 세상적 관점은 지옥을 단지 ‘심리적 고통’이나 ‘하나님과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관점이 존재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죽음 이후의 운명, 즉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단순히 “죽은 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1차적으로는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외식하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겨냥하여 직접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비유가 주는 두가지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보여주신 비유 (영원에 대한 교훈)
죽음 이후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22,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천사들에게 인도되어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사로가 죽은 후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학적으로는 천국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그 곳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는 위로와 안식의 자리요. 믿음의 조상과 함께 하는 영광의 자리이며, 잔치와 교제의 친밀한 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죽은 후 나사로가 있는 곳을 ‘천국’이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는 혈통적 특권이 있음을 의존하는 그런 믿음에 대한 연결선상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구원은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나사로처럼 세상에서 천대받는 자라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천국에서 안식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께서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 표현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친밀하고 위로가 있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자가 죽은 후 간 ‘음부’라는 표현은 나사로와 대조적으로 고통의 자리, 즉 영원한 형벌의 예비처임을 보여줍니다. ‘음부’라는 헬라어는 ‘하데스“로, 구약의 ’스올‘을 번역한 말로, 죽은 자들이 머무는 보이지 않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특히 악인의 임시 형벌 장소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가집니다. 즉 성경에서 최종 심판 이후의 악인은 ’불못‘(게헨나)에 던져지는데(계 20:14~15절), 음부는 그 전단계의 고통의 장소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부자가 간 ”음부”는 단순히 무덤이 아니라, 죽은 후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고통받는 불신자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왜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사로는 이름 자체가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은 단순히 이름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의 근거가 이름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름만 잘 지으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위험한 미신적인 사고가 됩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 비유에서 “나사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신 것은, 그 이름의 뜻을 통해 메시지를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은, 나사로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즉, 이름 자체가 그의 믿음의 방향과 삶의 태도를 상징하는 장치로 쓰인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쓰인 천국, 즉 구원과 이름의 관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나사로의 삶에는 세상적 성공이나 행위적 의로움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위로하셨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이름처럼, 자기 능력이나 세상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비유의 나사로를 통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은혜를 입은 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본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신 것입니다(시 121:1–2, 요 6:44). 그는 세상에서 버려졌으나,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 천국(아브라함의 품)에 갑니다.
시편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히브리서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반면 부자는 죽어서 지옥(음부)에 갑니다. 그는 단순히 “부자”라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태도와 믿음 없음이 지옥에 간 근본 원인이었음이 본문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가 지옥(음부)에 간 원인은
1) 이웃의 고통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눅 16:20–21). 20,21절을 함께 있겠습니다. 그의 대문 앞에는 헌데투성이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했지만, 부자는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그는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율법(신 15:7–11)을 받았음에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2)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눅 16:19)
19절에 그는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잔치하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자색 옷”은 사치와 자기 과시의 삶을 의미합니다. 당시 자색 옷은 왕족이나 귀족, 최고 부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습니다(막 15:17, 계 18:16). 값비싼 옷을 입는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 주신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또한 “고운 베옷”은 안일함과 자기 만족의 삶을 드러냅니다. 고운 베옷(세마포, fine linen)은 매우 부드럽고 비싼 고급 의류로, 일상복이 아닌 제사장 옷이나 귀족들의 사치품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고운 베옷을 입으며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추구했습니다. 즉, 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이웃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치장하고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라는 구절에서 그는 쾌락 중심적인 삶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특별한 날이 아니라 “날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는 기쁨과 나눔의 자리가 될 수 있지만, 이 경우는 나눔 없는 자기 쾌락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의 대문 앞에 나사로가 굶어 죽어가는데도 그는 매일 파티를 벌이며 외면했습니다. 이는 자기 배를 섬기는 삶(빌 3:19)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부자가 된 것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산 것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선물이자 청지기의 도구인데, 그는 그것을 이웃을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음부에서 “자기만을 위한 삶의 결과”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1).
부자의 보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재물에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3)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눅 16:27–31)
27~3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부자는 고통 가운데서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자기 형제들에게 가면 내 형제들이 회개할 것”(27,28, 30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라고 대답했습니다. 눅 16:27–31의 대화 속에서 부자가 보여주는 태도는 단순한 절규가 아니라, 평생 말씀을 무시해 온 그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그는 지옥에서조차 여전히 말씀(율법과 선지자)을 인정하지 않고, 기적을 통해서만 회개가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야 내 형제들이 회개할 것이다”(30절).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불신앙적인 태도입니다. 그는 살아생전에도 말씀을 듣지 않았고, 죽어서도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답, 즉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모세와 선지자들”은 곧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이미 구원에 충분한 계시와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것을 무시했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보다 다른 길 즉 기적을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와서 전도하면 믿을게 라고 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다름이 없습니다.
부자의 죄는 재물을 쌓은 것보다 말씀을 무시한 데에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기적을 보여주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심령을 찔러 회개와 구원으로 이끄는 능력입니다(히 4:12).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음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시편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반면에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의 성경 구절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잠언 13:13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여기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킴).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가야 할지니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라.”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말씀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은 자는 아무리 기적이 있어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양 쪽으로 갈라집니다. 천국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으로는 마 25:34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라는 말씀은, 천국이 인간의 공로나 업적에 따라 마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 시작 전부터 택하신 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하신 나라임을 뜻합니다(엡 1:4). “상속받으라”라는 표현은 천국이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자녀에게 주어지는 유산처럼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보여줍니다(롬 8:17). 이 나라는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임재가 충만한 영광의 나라입니다(계 21:3–4).
지옥(영벌)에 대한 말씀으로는 마25:41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비된”의 의미를 통해 지옥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영벌은 인간을 위해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마귀와 그 사자들(타락한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이라 말씀합니다. 즉, 지옥은 하나님께 반역한 사탄과 악한 영들을 심판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입니다. 또 이 본문에서 “영원한 불”이란 단어를 통해 ‘불’은 성경에서 ‘심판과 고통’을 상징합니다(막 9:48, 계 20:14–15). 더 나아가 “영원한 불”은 꺼지지 않는 형벌, 끝이 없는 고통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상징적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의 실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지옥,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는 본래 지옥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탄과 마귀를 위해 준비된 곳이지만, 하나님을 거부하고 불신앙 가운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결국 그 곳에 들어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 선택의 최종 결과가 지옥입니다. 동시에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는 말씀은 지옥의 본질이 곧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지금 이 땅에서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죽음 이후에는 그 운명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은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가로막혀 서로 옮길 수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인간의 운명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곧바로 이어집니다. 그때는 회개나 변화의 기회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믿음과 삶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가톨릭은 “연옥”이라는 중간 장소가 있어, 성도가 죽은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정화 과정을 거쳐 결국 천국에 간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과 지옥만 있을 뿐, 중간 상태에서 운명이 바뀐다는 교리를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흔히 장례식에서 “고인의 명복(冥福)을 빈다”라고 말합니다.
“명복”은 불교 용어로, 죽은 자가 저승에서 잘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가 회개하고 준비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그러므로 지금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믿어야 합니다. 죽은 뒤에는 이미 늦게 됩니다. 심판 후에는 돌이킬 기회가 없습니다(히 9:27).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오늘” 회개하고 믿음을 붙잡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적용) 나는 죽음 이후의 삶을 분명히 준비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 믿음이 천국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묶여 있습니까?
2. 현세의 삶에 대한 교훈(현재의 삶에 대한 메시지)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목적은 죽음 이후의 결과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현세의 삶은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이며, 이 땅에서의 태도와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오늘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며,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로, 재물 사용에 대한 경고입니다.
부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부와 재물을 자기만을 위해 쓰면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자기 집에 있던 거시 나사로의 배고픔과 육체적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본문에서 부자는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잔치하며 즐겼습니다(19절). 그러나 그의 대문 앞에는 헌데투성이 거지 나사로가 굶주린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20–21절). 재물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여야 합니다. 문제는 부자가 가진 재물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이웃을 섬기라고 하신 목적을 잊고, 자기 만족에만 소비했습니다. 재물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의 자원입니다.
둘째로, 말씀에 대한 반응이 중요합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 속에서 “나사로를 보내어 내 아버지 집에 가게 해 달라”(27,28절)고 요청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서 그 가족들에게 나타나는 기적을 행한다면, 내 가족이 회개할 것이다”(30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말씀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고 단호히 말합니다. 현세의 삶에서 구원의 기준은 재물이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묻는 메시지입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나만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기적만 바라고 말씀을 무시하고 있습니까?
결 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죽음 이후 운명은 바뀔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재물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 결국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돈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는가, 자기 뜻대로 살았는가에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맡기신 재물을 주님의 나라와 이웃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천국, 즉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참된 위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모아 대저택을 짓지만, 그 집에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작고 초라한 집에서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집이 준비되어 있습니다(요 14:2). 오늘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지만, 죽음 이후는 똑같지 않습니다.” “지금의 삶, 지금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지금의 재물 사용이 천국과 지옥을 가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앞에 오늘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만약 오늘 밤 내 생명이 끝난다면, 나는 아브라함의 품, 즉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이후의 운명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1)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2)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3)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십시오.
그분을 믿는 자는 결코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영리 영접기도문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저의 죄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심판받을 존재임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지금 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모셔드립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다스려 주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