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민교육의 근본은 '효孝’ (나의조국대한민국홍일식 p371-376)
예부터 우리 선인들은 인생의 최종 목표와 보람을 자식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生子非難이요 養子難이며 養子非難이요 敎子難이라 자식 낳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르기가 어렵고, 또 기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르치기가 더욱 어렵다고 해서 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 근본을 ‘孝’에다 두어 왔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 국민의 폭발적인 교육열도 어제 오늘 생겨 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새로운 민족중흥의 재도약 또한 국민교육에서 그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부모자식 사이에 첫 관계는 ‘내리사랑'입니다만 이것은 뭇 동물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받드는 '치사랑' 즉 '효孝’는 사람만이 타고 난 천성性입니다. 영민한 동물들도 훈련시키면 온갖 재주를 다 부리지만 '효도孝道'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짐승의 천성에는 '효심孝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본성 속에 내재하는 효심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효행孝行’인데 이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마다 상황에 맞게 새로운 효행의 전범典範을 창안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앞으로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70년대 초에, 경북 안동 의성지방에서 채록한 민속자료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양반이 여행 중에 상민의 집에 유숙하게 되어, 그 집 제사지내는 것을 보게 되었답니다. 대청마루에 제상祭床을 차려 놓았는데 무슨 음식인지 큰 그릇에 푸짐한 음식을 상 밑에다 놓고 지내더라는 것입니다.
제사가 파한 뒤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상민이 말하기를 "제 아비가 생전에 개고기를 무척 즐겼는데 돌아가셨다고 입맛이 변했을 리가 있습니까? 하지만 제가 아무리 무식한 상놈이지만 제사음식에 개고기를 올린다는 말은 못 들어서 상 밑에 놓고 지낸 것입니다. 귀신이야 상 위에 있으나 밑에 있으나 찾아 잡수셨을 것 아닙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같은 시기에, 다른 상민의 집 제사지내는 모습을 보았는 데, 온 식구가 초저녁부터 날이 새도록 계속 절만 하더랍니다. 하도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아! 유식한 양반님들이야 귀신이 언제 왔다가 언제 가는지 알아서 때맞춰 절을 하시겠지만, 저희 같이 무식한 놈은 그것을 모르니 밤새도록 절을 하다보면 그 중에 한두 번쯤은 우리 아버지가 받으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웃어만 넘길 수 없는 한국인의 토속적 관념의 실체가 번뜩이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지난날 배우지 못한 한국사람도 이 정도인데 오늘의 젊은이들처럼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무한한 창조력이 융통자재融通自在하고 종횡무진縱橫無盡하게 용솟음칠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오늘의 '효'는 자기 자신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효의 마지막孝之終也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나의 성공을 나보다 더 기뻐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부모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잘 돼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 이것이 곧 오늘의 ‘효행’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성공하는 것이 오늘의 효행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효에 대한 인문학적 人文學的 소양이 전혀 없이 세속적인 천박한 입신출세여서는 오히려 부모 조상을 욕보이는 불효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치고 옳은 효도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효의 본질은 봉양奉養에 앞서 경敬에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기르면 봉양은 스스로 하고 싶어지게 마련입니다.
요즘은 부모에게 생활비만 넉넉히 드리면 그것으로 효를 다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는지 모르겠지만 부모의 뜻을 받들고 자주 찾아뵙거나 문안드려서-전화 등으로 외롭지
않게 해 드리는 것이 진짜 현대인의 효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효'는 불교를 만나 그것으로 살을 더하고, 유교를 만나서는 그것으로 화려한 옷을 입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로 몸단장과 화장까지 해가면서 절묘하게 변신- 적응해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고독의 늪에 빠져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인류를 구원할 방안은 오직 ‘효’ 교육의 강화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가슴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500여 년 전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선생께서도 '어린 자제들에게 도덕〔禮]을 가르치면 나라가 평온해지지만, 법〔知識〕을 먼저 가르치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인문학의 최고 석학인 아놀드 조셉 토인비가 말년에 한국이 장차 인류 문명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효 문화일 것이라고 한 말이 새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에게서도 옮기기조차 민망한 패륜悖倫 행위가 빈발하는 것은 그 동안 기성세대가 가르치지 않았고 또 잘 못 가르친 탓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도록 가르치기보다 너만 잘해서 남보다 앞서라고, 일등만하라고 닦달하여 왔으니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금 옛 성인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효孝는 덕德의 근본이니 모든 가르침이 이것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孝德之本地 敎之所生也 -(孝經)
이제부터라도 잘만 가르치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이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21세기 중엽쯤에는 지금의 성장동력에 한층 더 가속이 붙어서 우리의 '민족·국가사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인류역사 창조의 지류가 아닌 주류로, 수동적 객체가 아닌 능동적 주체로, 따라만 가는 주변부가 아닌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중심부로 크게 떨치게 될 것을 나는 굳게 믿어 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