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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에는 우리 온교우들과 함께 시편 100편을 암송하고자 합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는 부흥의 나라 청년들이 암송을 했습니다.
시편 100편으르 성경에서 펴서 보면 그 표제가 작은 글씨로 ‘감사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전통적으로 감사를 드리는 예배 때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에 어떤 모습으로 마음으로 나아와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즐거운 찬송, 노래하면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1-2)
두번째는 감사함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그러니까 찬양과 감사가 예배의 내용이요 형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가 찬양과 감사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도 찬양과 감사가 가득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민자의 생활 가운데 하루 하루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어렵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비슷한 처지이지만 사람마다 보이는 반응은 각각 다릅니다.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잘못된 상황 때문에 망한 사람은 없으나 잘못된 반응 때문에 망하는 사람은 많다.”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반응은 평소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평소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 부정적인 반응은 원망과 불평, 염려, 근심,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반응은 평안과 감사가 될 것입니다.
인간은 긍정적 태도인 감사와 부정적인 불평 중 어느 쪽을 더 잘할까요?
바울은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보십시오. 하나님을 떠나면 생각은 허망하여 지며,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집니다.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신 일이 분명한데도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마음에는 불만은 더욱더 고조되어 있습니다.
한 달에 3천불을 벌던 사람이 6천불을 벌면 삶의 만족도가 100% 올라갑니까? 전혀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결핍을 더 많이 느끼고, 더 갈증은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란 내가 얼마나 가졌는가? 얼마나 풍요로운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나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죄를 짓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이후 인간은 결핍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에덴과 같은 완벽한 환경에서도 아담이 결핍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왜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해야 하는 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하나님을 떠난 우리 마음은 터진 웅덩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부어도 채워지지 않으며 만성적 허기짐에 시달립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늘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좀처럼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 만을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라 불만족의 영이 우리 내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문제는 윤리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특징은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삶이 뒤틀려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내면은 끝없는 탐욕으로 시달립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불평의 삶이 일상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내 속에 채워진 탐욕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조금만 더”입니다.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3절까지는 찬양이고, 4-5절은 감사입니다. 오늘은 감사와 찬양에 대해서 생각하고, 다음 주일에는 우리가 감사와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감사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찬양과 감사는 분리되고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가지로 모두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넘치면 자연히 감사가 따라옵니다. 감사가 넘치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넘칠 때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결핍, 갈증, 불만,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속에 죄가 들어오고, 죄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지므로 발생되는 예배의 상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과 감사로 넘치는 예배의 삶이 되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1)
여기서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루아)’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부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리를 질러서 귀가 먹게 하라’, ‘놀라거나 기뻐서 소리를 지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가수는 대개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가사와 흐름에 온 마음을 담은 호소력 있는 가수를 좋아합니다.
다른 하나는비슷한 의미인데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가수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수들은 대개 청중들의 감정을 북돋우고, 공연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소리 질러-- 오예” “함께 불러요”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청중들이 공연장이 떠나갈 듯이, 또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릅니다.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찬송을 하는데 바로 그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는 음악적인 재질이 없어서, 음치 박치에 가깝기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큰소리로 또 몸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는 첫째로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가사의 뜻을 의미하면서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내 몸이, 내 목소리가 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큰소리로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라는 말은 당시에 왕이 한 지역을 방문할 때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서 큰 소리를 지를 때에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凱旋)할 때에도 백성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사용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목이 터지라 외친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남해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우리 동네에 멀지 않는 곳에 낙동강 대교가 개통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지나간다고, 태극기를 주면서 도로에 서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왕을 맞이하는데, 개선장군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했겠습니까? 거기에 맞는 옷차림으로, 그리고 정확한 시간에 미리 준비하고 정렬을 맞추어서 환영하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양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본입니다.
2. 기쁨으로 섬기며 나아오라.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2)
시인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라’라고 말합니다. ‘섬기다’는 ‘예배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노예가 주인에게 봉사할 때에 쓰던 단어였습니다. 섬김의 삶은 표면적으로는 고달픕니다. 그것도 노예가 주인을 섬기는 것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기쁨으로 섬기라고 합니다.
여러분, 즐거움 없이 억지로 섬긴다고 해 보십시오. 참으로 고역입니다. 내가 무슨 전생에 죄가 지어서,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 그러면서 이마에 내천자(川)를 그리고서 인상을 팍팍 서 가면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교회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더러,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의 성화에, 혹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예배에 참석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서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난처한상황속에빠져서도움을받아너무너무고맙고감사해서인사를합니다. “대단히감사합니다”(Thank you, very much!)”
그런데 도움을 준 사람이 대답합니다. “It’s my pleasure(내 기쁨입니다. 또는 내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라고….
우리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로 도울 때, 우리 속에서 정말 기쁨이 생깁니다. 내가 도울 수 있음이 감사하게 생각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섬겨도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을 합니다. 섬기는 일 그 자체를 감사하고 즐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 같은 죄인은 불러 자녀 삼아 주심이 감사합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설걷이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찬양을 하고, 전도를 하고, 물질을 드리고 …
섬김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인해서 더욱 더 섬기고 싶어 지고, 주님을 섬길수록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또한 시인은 기쁜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것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면,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그(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나가라’입니다.
프로 축구 선수들이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선수마다 각자의 세레모니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기쁨의 그 순간을 최대한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선수는 두 손을 치켜세우고, 어떤 선수는 펄쩍 펄쩍 뜁니다. 손흥민 선수는 손으로 사각형 앵글을 만들어 기쁨을 표현합니다. 선수들은 최대한의 소리를 지르고 액션을 취하고 기쁨을 표현하며 나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찬양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는 기쁨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최고의 것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감사하므로 그의 문제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
‘그의 궁정에 들어간다’ 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왕이 계신 궁정에 들어갈 때 아무렇게 해서 들어갑니까? 최대한 예의와 품격을 갖추어서 들어갑니다. 왕의 초대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으로 들어가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올 때에 감사함으로 내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나아갈 때 왕이 계신 궁정의 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감사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들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게 좋든, 내가 생각하던 대로 되었든 안 되었든 상관없이 지금 허락하신 것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원망과 불평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와 메추라기에 감격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쉽게 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다는데 왜 그렇게 불평을 하지?”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살기 좋아졌습니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립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불평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터져나옵니다. 이것은 은밀하게 말하면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런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에 그들 뼛속 깊이 베여 있던 것은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노예로 있을 때는 애굽의 바로에게, 주인인 애굽 사람에게 하였던 원망과 불평이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로 대상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의 노예근성, 불평하고 원망하는 습관을 끊기 위해서 40년의 광야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 앞으로 감사함으로 나아오게 하는 훈련을 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과거의 습관, 생활 패턴을 끊고 이제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합니다. 이제 매달 한 달에 한 번은 믿음으로 감사를 실천해 보기로 하십시다. 지난 한 달을, 혹은 한 주를 감사하고, 새로운 한 달과 한 주간을 기대하면서 감사해 보십시다. 감사는 과거의 불평 습관을 끊고자 하는 훈련입니다. 감사는 더 많은 감사를 낳습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
이것은 상황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신앙의 절정이란 어떤 상황과 처지들에서 오락가락하며 불평불만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떤 처지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즐겁게 찬송하고, 감사하므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100:4)
오늘 나는 하나님께 어떤 마음으로, 자세로 나아왔습니까? 진지하게 돌아보십시오.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망가진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름답게 다듬어진 부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으뜸은 다름 아닌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바로메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자로 여기 있습니다. 예배자는 감사로 예배해야 합니다. 즐거운 찬송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로 공적인 예배에 성공하여 우리의 전 삶이 즐거운 찬송과 감사함이 넘치는 예배의 삶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438, 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