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과 조선건국을 다루려면 공민왕을 빼놓고 갈 수는 없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도 공민왕은 많이 다루어 진다. 공민왕은 영화나 드라마만큼 극적인 생애를 살고 갔다.
우리 대부분에게 공민왕 이미지는 아주 퇴폐적이다 공민왕은 그의 부인이자 원나라 공주였던 노국공주를 너무 사랑해서 그녀가 죽은 뒤 큰 상심에 빠진다. 공민왕은 방황끝에 지금 시각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방탕한 생활을하다 그가 아꼈던 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한 왕으로만 기억한다.
최근에 상영된 조인성, 주진모가 주연한 ' 쌍화점 ' 에서도 공민왕의 그런 부분만 부각 시켜 놓았다.
영화에 나오는 공민왕 변태적인 사생활은 일부 사실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 상당부분은 고려말 혼란상을 부각시켜 조선건국을 정당화 하기 위해 조선건국 후 정도전등에 의해 쓰여진 고려사에 나온 내용이다.
공민왕을 변태적인 왕으로 묘사한 고려사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 이면을 잘 살펴보면 공민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왕이었다.
특히 신돈을 등용해 행했던 개혁은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이었다. 신돈의 개혁이 제대로 성공했다면 조선 건국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역사는 크게 변했을 것이다.
신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공민왕이 태어난 시절은 원의 고려 통치기였다.
공민왕은 1330년에 태어났는데 1341년 원나라 순제(드라마 기황후에서 지창욱이 맡았던 왕)의 입조 요구에 따라 12세때부터는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라 할 만큼 국권이 없었다. 고려의 왕자들은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살아야했다.)
사실, 우리는 일제 36년 일제에 의한 식민지시대만 생각하지 오래 된 세월 탓인지 원에 의한 고려 통치 100년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원은 일제처럼 고려 왕까지 제거하고 직접 통치하는 방법은 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고려역사를 살펴보면 원은 일제에 못지 않은 많은 만행을 고려에 저지른다.
우선 원은 맘만 먹으면 고려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이유때문에 공민왕도 왕이 될 수 있었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의 형이 희대의 강간왕으로 유명한 충혜왕이다.
얼마 전 절찬방영된 MBC TV드라마 '기황후'에서 왕유 역할을 한 주진모가 후에 고려 충혜왕이 된다.
기황후 드라마에서는 충혜왕이 꽤 괜찮은 인물로 나온다
고려사에는 충혜왕이 희대의 강간을 많이 행하다 원에서 온 사신들에게 구타 당한 후 원으로 납치 되어 갔다가 죽임을 당한 비운의 인물로 묘사된다.
충혜왕이 희대의 강간왕으로만 알려진 것은 실제 역사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충혜왕이야기는 따로 한 번 다루겠다
이 충혜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충목왕과 충정왕이 된다.
충목왕은 8살 나이로 즉위해서 12살 나이로 병사한다. 짧은 재위기간 이었지만 충목왕 시절은 나름 치적을 쌓았다.
충목왕 시절에 충혜왕 대의정치 폐단을 수정하는 데 힘썼고 주로 권문세족들의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권문세족들이 독점하던 녹과전의 폐단을 시정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 주었다. 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라에 기근이 들자 이를 구제하기도 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대 실록의 편찬을 시작했고 서연을 열어 학문 진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사실 충목왕이 8세에 즉위한 아이가 선정이고 뭐고 베풀 여지라도 있었을까?
그의 치세는 충목왕 본인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충목왕 어머니이고 섭정인 쿠빌라이 칸의 딸이었던 원나라 덕녕공주가 주도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을 가진다.
층목왕이 후사도 없이 12살 어린나이로 죽자 충혜왕의 서자인 충정왕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한다. 충정왕의 생모는 원 공주가 아닌 고려인 희비 윤씨였다.
이 점이 충정왕에게는 불행의 씨앗이 된다.
섭정자리를 놓고 충혜왕의 정비 덕녕공주와 희비 윤씨 사이에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덕녕공주는 충혜왕의 첫번째 부인이라는 명분으로 섭정을 이어간다.
하지만 실권은 희비윤씨가 가져 갔다.
전왕 충목왕에 이어 연달아 어린 왕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엽부터 생모 희비 윤씨 세력과 환관의 횡포가 심해졌고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다.
문제는 이 시기에 고려 내부만 난잡한 것이 아니라 원나라 내부사정과 대외정세도 어지러웠다.
원나라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주원장을 필두로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남북조시대의 혼란기가 와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되었다. 이 틈을 탄 왜구의 침입이 대단히 심했다.
1350년 무렵에는 왜구의 규모가 1백여척이 넘어 갈 정도로 정말 폭발적인 침략과 약탈을 벌였다. 아예 이 때의 왜구를 그 해의 간지를 따서 '경인왜구'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렇듯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충정왕 어머니 희비윤씨가 국정을 농단하자 고려 내부에서는 충혜왕의 동생이자 충정왕의 숙부였던 강릉대군 왕기(훗날의 공민왕)에게 민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고려의 중신들까지도 지금 왕으로는 안되겠으니 왕을 강릉대군으로 바꿔주라고 원나라에 요청한다.
아마 충정왕 친모가 원나라 공주출신이었다면 신하들이 왕을 바꿔주라는 요구는 못했을 것이다.
원은 고려의 간절한 요청에 결국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공민왕을 즉위시킨다. 그리고 충정왕은 바로 강화도에 유배 되고 그 이듬해 향년 16세의 나이로 독살당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원 통치시절 왕의 존재가 고려중기 무신정권시절보다 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공민왕 즉위는 색 달랐다. 공민왕 나이 22세때 였다. 원 간섭기가 아니었다면 공민왕 즉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민왕 친형의 아들 두 명이 왕위를 찾이하고 나서 다시 왕위를 물러 받은 것은 우리 역사상 공민왕이 유일무이 하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고려에서는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연경에 머물던 10년 동안 원나라 내외부의 끊임 없는 반란에 국력이 몰락해감을 미리 알았다. 공민왕우 그나마 남은 원의 국력도 홍건적 반란 이후 거의 힘을 잃었다고 판단하였다.
공민왕은 즉위를 함과 동시에 원나라가 강요한 변발을 풀어 헤치고 강력한 반원정책을 펼칠 것을 공표하였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정책에 원나라 공주출신인 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전폭 지지함으로써 공민왕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공민왕이 충정왕과 다른 점이기도 했다
이제, 본격적인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시작 된다.
다음 편은 공민왕 2ㅡ 공민왕의 개혁이 이어집니다.
사진순서
ㅡ 공민왕 어진 ㅡ 조선 후기에 그려진 공민왕 초상화 ㅡ 조선 종묘에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공주 ㅡ 기황후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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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