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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은 정말 한민족인가 ?
렙틸리언에서
이젠 한민족까지 꼬리물기를?
어디까지 가는지 우리 다같이 풀어 봅시다.
직접 쓰고 정리해서 자료 붙이려고 했는데 다 거기서 거긴거 같아서
이곳 저곳 자료들 살펴보아 적당히 무난하게 쓸만한 자료들 붙였다오.
언제나 진실은 좁은문으로 갈때만 존재 하는 것...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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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은 정말 한민족인가?
[네티즌 초대칼럼] 훈족에 대한 역사서의 서술과 유물비교 -이문규
유럽인들은 전 세계를 주름잡는다.
그들은 일찍이 16세기 미개척지를 개척하여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그들이 개척한 식민지를 바탕으로 19세기 지구를 지배하였다.
오늘날 유럽하면 사람들은 잘 사는 나라,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개척 식민지배 했다는 오만함에 빠져
아시아인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오만한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크게 깨졌다면 믿겠는가?
오만한 유럽인들을 벌벌 떨게한 아시아인의 정체는?
그 아시아인들의 정체는 바로 미지의 종족 훈(Hun)족이다.
서기 375년 훈족의 서진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고,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결국 서로마제국은 멸망당하고 중세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가히 훈족은 유럽의 중세를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부색은 어둡고, 눈 대신 어두운 구멍이 두 개 있고,
코는 납작하고,
뺨에 상처가 난 얼굴은 형태 없는 덩어리였다.”
- 그리스의 역사가 조시모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은 혐오감을 준다.
그들의 코는 모양이 없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두 개의 눈에는 눈꺼풀이 조그맣게 열려 있어 광선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이지만,
꿰뚫어보는 이 눈은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네들 갓난아이의 얼굴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두 콧구멍은 투구의 면갑에 맞추기 위해 끈 하나로 휘감겨 있었다.
엄마는 전쟁을 위해 이런 방법으로 아들을 기형으로 만들었다.……”
- 클레르몽의 주교 시도니우스 아포리나리스
“신체는 작지만 땅땅한 편이고,
머리는 아주 크고 둥글며,
안면은 넓고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머리카락은 전부 잘라 겨우 정수리에만 남아 있다.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불타듯이 강렬하며 눈은 째진 모양이다.”
- 사마천(흉노에 대한 묘사 중)
“그들의 가슴에는 야생동물의 심장이 고동치고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들은 인류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중국의 한 궁정 관리의 기록 중
이는 훈족(흉노족)에 대한 다른 나라들의 기록이다.
훈족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훈족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훈족의 침략을 받은 쪽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공평하고 객관적인 기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잔뜩 겁먹은 사람의 움츠린 시각으로 훈족에 대해 기술했다.
표현은 절제 없이 과장되어 있고
적 훈족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남기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이런 기록으로 인한 훈족에 대한 서양인들의 편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바로 1998년 월트디즈니사에서 제작된 ‘뮬란’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거기에는 주인공이자 선의 세력인 중국의 적으로 훈족이 등장하는데,
훈족이 중국을 침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상영시간 내내 훈족은 마치 저주에 찬 악마들처럼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침략과 파괴를 일삼는다.
또한 그들의 외모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거칠고 폭력적이며 색깔조차도 어둡게 묘사를 했다.
동양인인 우리가 보기에도 훈족은 혐오스러운 외모를 가진 존재로,
사악한 외모를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훈족에 대한 그러한 서양인들의 편견이야말로
정착문명의 역사가 지난 천년동안 저질러온 과거사에 대한 잘못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유럽을 진동시킨 훈족의 실체에 대해 서양의 역사가들은 많이 알고있지 않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데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동부유럽 트라키아 지역에서 제작된 황금보검과 같은 것이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트라키아 지역은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훈족의 아틸라의 근거지이다.
우연 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은 훈족과 한민족이 친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게 아닐까?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유물을 제시하였다.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 지방에 출토되었다.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되었다.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어느 특정 지역에 주로 출토되던 물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에 있었다고 말하는 건 속단이다.
하지만 이 유물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유물들을 만든 이들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정화 의식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던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 용기로,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동복이 한반도 동남부 김해, 경주 지역에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북방계 유목문화가 상당히 흡수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브론즈 냄비는
가야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브론즈 냄비는 가야국 등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참고로 훈족은 동복을 말 엉덩이에 매달고 다녔는데,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 같은 신라 시대 점토상을 보면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엉덩이에 싣고 있다.
그런데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이들 솥이 말이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의 복장이고,
안장과 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우주개념을 이해하는데 순록과 우주수목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라 금관의 장식이 바로 이 순록과 우주수목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신라가 북방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관되는 특성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1. 훈족의 후예들에게는 몽골리안 반점이 있다.
프랑스 등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골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훈족은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이 특이한 활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 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훈족이
이 특이한 활을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3. 훈족은 편두를 갖고 있다.
편두라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반듯이 눕혀 놓은 상태에서
이마를 돌 같은 것으로 눌러 이마와 뒷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대신
정수리를 봉긋 솟아오르게 만든 머리 형태이다.
일종의 성형수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몽골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뼈를 보면
이마와 뒷머리는 눌려있고
정수리는 툭 튀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서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과는 구별되는, 꽤 오랫동안 한민족 사이에서 내려온 풍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 한 가지는,
훈족에게는 편두 풍습이 있었지만
흉노에게는 그 풍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민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특성은
훈족과 가야, 신라의 친연 관계를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훈족이 한민족과 연관된다는 증거가 여럿 있다.
북방 유목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 등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장례의 절차는 우리의 장례 절차와 비슷하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그가 사망한 지 3일, 7일, 49일째 되는 날
고인의 말을 도살하여
일가친척과 지인들이 함께 나눠먹고,
문상객들을 잘 대접하며
남은 음식은 말의 재갈이나 안자, 무기와 함께 장작더미 위에 놓고 태웠다.
이 때 남은 재와 문상객을 대접할 때 사용한 청동솥(동복)을 깨뜨려
부장품으로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런데 우리의 장례절차는 사망한지 3일째 되는 날(3일장) 시신을 무덤에 매장한다.
사망한 후 5일되는 날에는 삼오제를 치르며
사망한 후 49일째 되는 날에는 49제를 치른다.
그리고 3년상이라 하여 3주년 되는 기일에 탈상한다.
죽은 사람을 장례치르는 의식은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다.
그런데 훈족의 장례의식과 우리의 장례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
이는 훈족과 우리민족이 연관성이 있다고 해석되어도 좋지 않을까?
유럽을 호령하고 중세시대의 서막을 연 훈족...
훈족의 실체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훈족은 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이며,
더욱이 우리민족과 연관된 풍습이 많다는 것이다.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물 및 사료들을 한민족의 그것과 연결시켜볼 때
훈족의 지배집단을 한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이는 한민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한민족이 세계 문명사에 기여한 점은 거의 없고,
중국 등으로부터 수혜만 받아왔다는
‘스몰 콤플렉스(Small Complex)’를 가지고 있다.
훈족과 아틸라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훈족이 유럽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런데 그런 훈족이 우리 한민족의 일원이라는 것은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할 정도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훈족의 지도자이자 세계 3대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중세시대 서막을 연 아틸라는
우리가 광개토태왕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인물이 아닐까?
[ 참고 ]
이종호,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
『한국 7대 불가사의』
『과학으로 여는 세계 불가사의 2』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역사의 비밀』
패트릭 하워스, 『훈족의 왕 아틸라』
웨스 로버츠, 『아틸라의 리더쉽』
차용구, 『로마제국 사라지고 마르탱 게르 귀향하다』
김종래, 『유목민 이야기 - 바람에 새겨진 역사』
출전: 우리역사의 비밀 www.coo2.net /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19705752
시대소리뉴스 www.sidaesor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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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유럽이 동양인에게 먹혔다는 것에 대한 쪽팔림 =>흉노(한민족) "아틸라'를
추악한 서양인으로 변신시켰다고라!!! 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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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을 보고 편두를 안다."
[책세상]
마야(Los Mayas) / 송영복 경희대 스페인어학과 교수
[부산일보 2005-04-25 12:21]
마야인의 편두
'신대륙의 발견'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연히 '유럽의 침략'이다.
콜럼버스? 그가 살아있다면 통곡할 발음이다. '꼴론'이다.
'메소아메리카 문명'에 속한 마야는 단일제국이 아니었다.
멕시코 유카탄(현지발음 '유까딴') 반도에 뿌려져 있었던 도시들을 통칭한 문명의 개념이었다.
그들은 동서양과 다른 20진법의 수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기존의 서구적 인식과 달리,
마야에는 엄격한 사회 계층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다.
"마야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지녔으나
아주 특이한 씨족 국가적 특징들을 유지 발전시켰다"
그게 '가족 민주주의'였다.
주목할 사실은 고도의 과학 농업 건축 예술이 있었지만
마야인들은 돌도구(石器)만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족 민주주의가 이뤄졌던 비밀이겠다.
'마야는 전쟁을 위한 무력의 증대를 꾀하지 않은 문명이다.
'마야인들에게는 훈족이나 김해 예안리의 가야인들처럼 편두 전통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머리에 송판을 대고 몇년간 단단히 눌러 원하는 모양을 얻었다.
"오늘날의 원주민들은 500년간의 식민지적 침탈에 지친 모습으로 다가온다.
라틴아메리카의 처절한 현실이 마야인들의 혼이다.
" 상지사. 최학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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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로마 호령한‘훈족’은 한민족”
몽골리안 반점·편두형 골상 등 인체 특징 유사 …
마상 무예·동복 문양도 선조들과 같아
주간동아 2003년9월25일자
한민족의 북방사를 주로 다루는 ‘백산학회’ 회보(제66호, 8월30일 발매)에
유럽에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에게
같은 시기 한반도에 있었던 신라 가야 고구려의 지배계층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는
이종호씨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프랑스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과학사 쪽에 관심이 더 많은 이종호씨로부터
훈족과 신라 가야 고구려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설명을 들었다.(편집자)
이탈리아의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에는 훈족 병사(왼쪽)가 몸을 돌려 뒤따라오는 로마 병사에게
활을 쏘는 그림이 있다(작은 그림).
이 그림은 중국 지안(集安)의
고구려 무용총에서 나온 고구려 무사의 수렵도(큰 그림)와
비슷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한민족의 강한 군대가 마음껏 달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375∼413)은 즉위 초부터
정력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여 서로는 요하,
남으로는 한강 유역에까지 세력을 미쳤으며
북으로는 개원, 동으로는 옥저와 예(濊)까지 차지했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394∼491) 시대에 고구려가
고조선이 차지했던 영토를 거의 되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동양에서 치열한 정복사업을 펼칠 때
서양에서도 한민족의 일족인 훈족이
서양문명사를 새로 쓰게 하는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서기 375년,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게르만족인 동고트를 공격하자
동고트는 서고트를 공격했고,
서고트는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했다.
당시 동양에선 광개토대왕 전성기
이로써 로마제국 안에 게르만족이 들어와 살게 됐는데
이로부터 100여년 뒤인 476년,
로마제국은 게르만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게르만족은 서유럽과 아프리카 북부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만들었다.
이는 훈족에 의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최근 세계 각지에서 발굴된 유물과 사료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한민족의 일파인 것으로 보인다.
훈족은 흉노(匈奴·북방 기마민족을 통칭한다)가 원류인데,
흉노는 진시황 시대인 기원전 3세기 중원 지역을 놓고 중국 민족과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흉노는 심한 부침을 겪었는데
이때 흉노에 속해 있던 한민족의 원류 중 한 부류가 서천(西遷)하여 훈족으로 성장하고
또 한 부류가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동천(東遷)하여
가야 등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에게서
몽골리안 반점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둘째, 훈족이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아 교회의 프레스코화(畵)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서 나온, 말을 탄 채
활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과 똑같다.
셋째, 훈족의 머리 골상이
편두(偏頭·cranial deformation·
일명 납작머리로 불리는 인공적으로 변형시킨 두개골)라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의 칼바도스 지방에까지 이르는 훈족의 이동경로 곳곳에 있는 분묘에서
머리의 관자놀이와 이마가 특이하게 눌려 있고,
머리에 고랑 같은 주름이 있으며
머리통이 긴 두개골을 발견하고 이를 ‘편두’로 명명했다.
편두를 한 훈족의 두개골(위).
아래는 김해 예안리에서 나온 가야시대의
편두(왼쪽)와 정상적인 두개골을 비교한 것이다.
그런데 가야가 있었던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왕도 편두였다는 기록이 있다.
편두는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다는 주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코카서스 북부지역에 사는 유목민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진 풍습으로 인정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도 편두에 관한 기록은 있으며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
반면 훈족에게서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흉노족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은 편두를 만드는 풍습을 갖고 있는 특수 부족으로,
역시 편두를 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의
지배계층과 친연성(親緣性)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기마민족의 상징적인 유물로
유명한 크고 작은 동복(銅·cup cauldrons)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다섯째,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다.
1924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인 기마인물상 토기를 보면
말 잔등에 동복을 싣고 있다.
게다가 이 무덤의 주인도 편두였다.
여섯째, 훈족의 동복 등에서 발견되는 문양이
우리나라의 금관 장식 등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에는
나무 형상(‘出’자형 장식)과 녹각(鹿角)형 장식이 많은데
이는 북방에 살던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음을 나타낸다.
세계 3대 제국 건설한 아틸라왕
지금까지 훈족과 한민족을 연계시키지 못한 것은
서유럽을 공격한 훈족의 원류를
흉노(몽골-투르크계)로 인식했으나,
그들의 지배집단을 동양계(몽골계)가 아닌
서양계의 투르크 민족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투르크인은 한자로는 돌궐(突厥)로 표기하며 서융(西戎)에 속한다.
투르크계는 6세기 중엽 몽골계 유목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오스만투르크 대제국을 거쳐
현재 터키공화국를 이루었다.
훈족을 투르크족으로 예단한 것은
동로마 황제들이 훈족 지도자들을
알타이어로 ‘강한 사람’을 뜻하는 ‘투르크 왕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지 20년 후,
즉 훈족이 서유럽을 침공한 지 20년이 지난 395년에 징기스칸,
알렉산더대왕과 함께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한 아틸라(395∼453)가 탄생했다.
아틸라의 생애는
로마의 역사가 프리스쿠스나 요르다네스에 의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로마는 훈족에게 공물을 주면서 화친을 맺어 게르만족을 견제했다.
따라서 당시의 외교 관례에 따라
아틸라는 410년경부터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은
라벤나 궁정에서 자랐다.
훈족이 사용한 동복과 이 동복을 말 잔등에
올려놓은 신라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토기.
국보 138호 가야 금관과 국보 188호 신라 천마총
금관에서는 사슴뿔형 장식과 나무 형상의 出자 장식이 보인다.
이 금관은 편두를 한 남자 머리에 맞을 정도로 작은 것이 특징이다(왼쪽부터 시계 방향).
434년 삼촌인 훈족의 왕 루가가 사망하자
훈족의 전통에 따라 아틸라는 형 블레다와 함께 훈족의 왕이 되었다.
동로마가 훈족에게 보내야 할 공물의 납기를 번번이 지체하자
435년 아틸라는 동로마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로마는 자신들의 잘못을 재빨리 인정하고
마르구스에서 공물을 두 배로 올리기로 약속하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때 블레다와 아틸라는 동로마 사절단에게 말을 탄 채 회담하자고 요구했고
동로마측은 순순히 이 제의에 응했다고 한다.
이어 서로마에게서 서고트인에 대한 경찰권을 넘겨받으면서
훈족은 사실상 서양의 패자가 되었다.
443년 블레다가 사망하자 아틸라가
훈족의 단일 지도자가 돼 훈제국을 건설했다.
이때 아틸라가 지배한 지역은 남으로는 도나우 강 남쪽의 발칸반도,
북으로는 발트 해안,
동으로는 우랄산맥,
서로는 프랑스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치하의 종족 수만 45개 족에 이르렀다.
이 시기 아틸라로 하여금 국제전에 개입하게 하는 여인이 등장했다.
450년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인 호노리아는
동생을 황제직에서 밀어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발각돼,
동로마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그러자 호노리아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아틸라에게
자신의 금반지를 보내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반지를 보내는 것은 구혼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아틸라는 서로마 황제에게 지참금으로 로마 제국의 절반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틸라의 요청을 거절한 뒤
호노리아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버렸다.
서로마한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아틸라는 451년
현재의 벨기에와 프랑스의 메츠와 랑스, 오레앙 등
갈리아 지역을 공격했다.
아틸라가 파죽지세로 서로마 근거지까지 접근하자 서로마는
아틸라의 친구이자 ‘최후의 로마인’으로 불리는 아에티우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훈족과 적대 관계인 게르만족을 규합하여 대항했다.
451년 6월20일,
프랑스의 트루아(파리 동남쪽 약 210km) 서쪽에서
세계 15대 전투 중 하나로 불리는
‘살롱 대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양쪽에서 각각 20여만 명이 참전했고
전사자만 15만여 명에 달한 대규모였다.
결과는 무승부였는데 서로마측으로서는
아틸라의 공격을 막아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틸라는 살롱 대전투 후 곧바로 근거지인 판노니아(현재의 헝가리)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 452년 또다시 서로마를 침공했다.
이탈리아반도로 공격해 들어간 아틸라 군은
아퀼레이아를 점령한 후 파두, 베로나, 피비 등
북이탈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훈족의 공격을 피해 해안지역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베니에티암(Veni etiam, 나도 여기에 왔다)”이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변해 지금의 베네치아라는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아틸라와 훈족의 종말은 너무나 어이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일디코 또는 힐디코로 불리는,
유명한 게르만민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크림힐트로 나오는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다음날 아침 시체로 발견됐다.
일디코가 자신의 가족들이 훈족에게 살해된 것에 앙심을 품고
그가 잠들자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학자들은 결혼식 날 과음해 질식사한 것으로 보거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암투로 인해 살해됐다고 추정한다.
아틸라왕 사망 후 훈제국 곧 분열
강력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죽자 아들인 덴기지크가 훈족의 지도자가 됐으나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훈제국은 곧바로 분열돼,
469년 훈제국은 동로마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로마에 패한 후 대다수의 훈족은
동쪽의 카스피해 북부로 귀향했지만,
일부는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러시아 남쪽과 크림반도 지역에 정착했다.
그리고 몇몇 종족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에 정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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