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1일부터 미국 군사고문단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아 "美式사단"이라 할 수 있는 신편 36개 사단의 부대훈련과 재무장에 들어갑니다. 훈련기간은 총 26주간으로, 처음 절반은 무기사용훈련, 후반 절반은 전술훈련 숙달에 치중하였으나 시간과 현실적 여건상 부대별로 훈련정도와 무기 보급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45년 2월 12일, 군사위원회에서는 "중국육군작전계획대강"을 수립합니다. 주된 내용은 "중국 육군은 연합군이 동남 해안에 상륙함과 동시에 계, 상, 월에서 공세로 전환한다. 특히 귀주, 계림 방면에 주공을 두어 의산, 유주를 공략하여 연합군과 서강에서 합류한다."라고 함으로서 미군의 대만 탈환과 중국 상륙을 전제로 한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중국군의 재무장 시기가 너무 늦은데다, 미군은 중국군의 전투력에 대한 의심과 많은 병력이 소요되는 중국상륙 대신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를 공략하는 쪽을 택함으로서 실현되지는 못하였죠.
또한, 일본군은 이치고작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노하구와 지강에 대한 공격을 계획합니다. 재중 미공군사령부가 있던 계림이 44년 11월 함락 된후 센놀트의 재중 미공군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호남성 서부의 지강비행장과 호북성 서부의 노하구비행장으로 거점을 옮긴 다음 일본군 통제하의 화중, 화남의 철도 수송과 양자강의 수송선단을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버마전역에서 승리함으로서 그쪽에 파견되어 있던 공군력을 다시 중국 전선으로 돌릴 수 있어 이치고작전당시 일본이 일시 장악할 수 있었던 제공권의 균형이 다시 연합군측으로 기울게 됩니다.

현재의 지강공항이라고 합니다. 2차대전 당시 중국의 하늘을 날았던 참전용사들이 지강공항을 방문하여 과거의 추억을 회고했다는군요.(사진출처 : http://korean.cri.cn/1/2005/09/06/1@46340.htm)
중국파견군 사령관인 오카무라대장은 일본 대본영의 결정에 따라 45년 1월 22일 북지나방면군 및 중지나파견군산하의 제6방면군(한구 주둔)에게 노하구와 지강 공격에 대한 지시를 하달합니다. 동원된 병력은 북지나방면군 산하 제1군과 제12군, 제34군, 제6방면군 산하 제20군 등이었습니다.
우선 노하구작전은 3월 22일부터 개시되었는데, 하남성 정주에 주둔한 제12군이 주공을 맡고 제34군이 조공을 맡아 제110사단이 우익을, 제115사단이 좌익에서 진격하여 중국군의 진지를 돌파한후 기병 제4여단과 제3전차사단(97식 20량, 경장갑차량 100량)이 신속하게 노하구, 서섬구까지 진출토록 하고 제34군의 제39사단이 남동쪽으로 진격해 남북에서 협격하여 중국군을 격멸토록 합니다.
이런 일본군의 공세에 대해 중-미측은 사전에 파악하였고 지강에 중국군 주력을 집중 배치하여 방어토록 합니다. 호종남의 제1전구가 북쪽정면을, 이품선의 제10전구가 평한철도 남단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여 병참선을 차단하여 적의 진격을 둔화시킨후 제1전구, 제5전구, 제10전구가 협격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할 것을 지시합니다.
일본군의 최초 공세는 성공적이었고 기병 제4여단은 3월 26일 노하구 비행장 근처까지 진출하여 중국군 방어선에 대해 기병돌격을 시도합니다. 이 돌격은 전사에서 최후의 대규모 기병돌격이라고 합니다. 이종인의 제5전구는 일본군의 전차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결국 4월 10일 노하구 전역이 완전히 함락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계선이었고 중국군은 공군과 M4 셔먼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을 전전선에서 격퇴합니다. 4월 4일 장개석은 반격을 명령하였고 일본군을 소탕하여 서협구에서만 일본군 5천명을 격멸하고 전차 50여대를 파괴합니다. 4월말까지 빼앗긴 지역을 모두 탈환하는데 성공하죠.
또한 같은 시기 호남성 서부지역에 대한 일본군 제20군의 공격 역시 완전히 실패로 끝납니다. 4월 8일 제20군산하 제116사단, 제47사단, 제68사단, 제34사단 등 약 10만명의 병력으로 공세를 개시합니다. 하응흠은 새로 편성된 미식사단들을 동원하여 이들을 방어키로 하고 탕은백의 제3방면군과 왕요무의 제4방면군이 종심방어를 펼치고 신편 제6군을 지강에 주둔시켜 예비대로 합니다.
일본군은 3로로 분산하여 진격했으나 중국군에게 완전히 저지당했고 5월초부터 중국군의 맹반격을 받았고 6월초까지 중국군은 모든 영토를 탈환합니다. 이 전역에서 일본군은 참전병력의 30%에 가까운 2만 8천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더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 전선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됩니다.
여기다 3월부터 6월까지 오키나와전역에서 일본군은 완전히 패배하였고 유럽전선에서는 독일이 항복하였습니다. 소련은 일소불가침조약 연장 불가를 통보하고 병력을 극동으로 수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도쿄의 참모본부는 중국전선의 축소를 결정하고 병력을 상해, 남경, 홍콩, 광주 등 동쪽 연안으로 이동시킵니다. 중국군은 노하구, 지강전역의 승리와 일본군의 전선축소를 기회로 삼아 우선 화중과 화남에서 제한적인 반격을 개시합니다.
5월 26일 장발규의 제2방면군 일부가 중월국경의 요충지인 남녕을 회복하고 광서성의 유주로 진격합니다. 탕은백의 제3방면군은 6월 14일 의산을 탈환하고 제2방면군과 함께 6월 30일 유주를 탈환하죠. 7월 28일에는 광서성의 성도인 계림을 탈환합니다.
7월초 하응흠은 광주와 형양에 대한 공격작전을 수립하지만 웨드마이어는 현재의 병참능력과 공군력으로는 이 두가지 공격작전을 동시에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대합니다. 따라서 형양 공격은 연기되는 대신, 남녕을 육군총사령부 전진거점으로 삼고 광동성 탈환을 개시합니다. 장발규의 제2방면군이 오주로 진출하고 탕은백의 제3방면군이 가현과 전현을 탈환하여 광주를 눈앞에 두게 됩니다. 그러나 8월 6일과 8일 원폭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공해오자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중일전쟁 역시 막을 내립니다.
결론적으로 44년에 중국군은 거의 파멸적인 패배를 겪었지만 이를 결국 극복해 냈고 45년 1월부터 군의 재편성과 반격준비를 시작하여 5월부터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섭니다. 장개석은 전면적인 총반격을 46년초로 계획하고 있었으나 일본은 그 전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일본의 항복으로 이후 국공내전에서 전략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죠. 또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광복군 역시 기회를 상실하였습니다. 이는 장개석이든 우리든 아쉬운 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