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회장 팔자
조선일보 [조용헌싸롱]
한국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팔자가 재벌 팔자이다. 재벌의 오너가 되던지, 재벌가의 가족이 되는 팔자는 만인이 선망한다. 돈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돈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전인 조선시대에도 인간 욕망의 순서는 돈이 제일 먼저였다. 재색명리(財色名利)가 그것이다. 색(色)보다도 돈이 앞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팔자가 세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은 돈을 유달리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많은 화근을 초래한다. 모두가 달려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곡괭이를 들고 달려들고, 누구는 부비트랩을, 또는 독극물을 투약하려고 한다. 때로는 색풍(色風)이 몰아치기도 한다. 팔풍(八風) 중에서 색풍도 대단히 강하다.
재벌을 만나는 사람은 대부분 바라는 게 있다. 그냥 만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부탁 사항이 있다. ‘여기 좀 보태주세요. 거기 좀 지원해 주세요. 이것 좀 신경 써 주세요.’ 그래서 재벌 회장은 사람을 만날 때 끊임없이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저 사람은 또 어떤 요구를 할까. 어떤 트릭과 함정을 파서 나를 상대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을 만날 때마다 긴장을 하고 있어야 한다. 통이 크고 대가 셌던 정주영 회장도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가 돈 달라고 하니까 말이다. 만약 돈을 안 주면 그 사람은 뒤돌아서서 욕을 하게 되어 있다. ‘그 인간 정말 짠돌이다.’
돈을 유지하고 관리하다 보면 반드시 배신을 겪는다. 아주 믿었던 주변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몇 번 당하면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경험한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므로 수면제는 상비약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은 장기 중에서 폐에 충격을 준다. 재벌 오너가 폐암에 잘 걸리지 않던가. 꼭 폐암이 아니더라도 근래에 LG 구본무도 70대 초반에 갔고, 한진의 조양호도 70에 갔고, 삼성의 이건희도 70대 초반에 식물인간이 되었다. 보통 사람도 요즘 어지간하면 80세는 넘기는데, 이들 오너들은 평균수명 미달이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서 먹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리 간 것은 그만큼 보통 사람보다 훨씬 시달리며 살았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재벌을 운영하려면 오장육부가 강철로 되어있어야 한다. 창업주는 강철도 있지만 3세쯤 가면 멘털이 양철도 안 된다. 재다신약(財多身弱)이 재벌 회장을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시달리며 사는 ‘심난한’ 팔자이다.
[조용헌 교수]
영정중월詠井中月
영정중월詠井中月은 고려중기 이규보의 시로 ‘우물 속의 달을 노래하다’는 뜻이다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산승이 달빛을 탐내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으리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는 것을
산에 사는 승려가 물을 길어 갔다가 우물에 비친달이 아름다워 병속에 담아간다. 돌아와 병을 기울여 물을 따르고 나니 달도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는다. 물병 속의 달은 탐용일 수도 있고 이상 세계의 진리일 수도 있다. 얻은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 삶이 그렇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한다. 물질이든 진리든 얻었다고 각성하더라도 그 또한 한순간 덧없음이니 집착할 이유가 없다. 중세의 천동설이 오늘날의 지동설에 이른 것처럼 진리 또한 인간이 구성한 것이므로 또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이다. 삶이든 진리든 공정불변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불교관을 잘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빛viit향기와 차명상이 있는 그림찻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