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종파사건’에 대하여
1956년 8월, 김일성을 반대하던 세력들이 모든 것을 내걸고 김일성에 도전한 북한 역사에서 가장 심각했던 권력투쟁 사건이었다. 북한의 권력투쟁은 한국전쟁 후 북한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영향력을 높이고 있던 중국과 가까웠던 연안파와 전통적인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줄을 대고 있던 소련파가 합작해 김일성에 대항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하지만 결과에서는 김일성의 승리, 연안파와 소련파의 몰락으로 끝이 난다. (연안파- 중국 국민당과 행동을 함께 했던 임시정부세력과는 달리 중국공산당 지부가 있던 옌안을 중심으로 공산주의운동을 하다가 귀국한 세력이 중심이었다.) 연안파는 김일성의 노선에 반대했다. 김일성의 노선은 중공업 우선과 농업, 경공업 동시 발전이라는 정책이었다. 8월 30일 전원회의가 개최되어 인민보건 사업의 개선방안을 토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윤공흠이라는 사람이 느닷없이 의제와는 상관없는 중공업 우선 노선과 김일성 개인숭배 및 당 독재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은 김일성을 옹호하며 반대파의 행위를 반당행위로 몰아세웠다. 사건이 이렇게 되자 소련은 서한을 보내 이 사태에 개입을 했으며 김일성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친중국 정권을 세울 계획으로 북에 들어왔으니, 김일성이 잘못을 시인하고 시정하겠다는 바람에 그냥 돌아가버렸다.
그 후, 김일성은 반대파는 비판하며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 작업으로 인해 김일성을 비판할 수 있는 세력이 완전이 사라지게 되었고 동시에 당내 활력을 높일 수 있는 건전한 의미의 비판, 견제 세력까지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뜻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유일지도체제를 가지고 북한의 정권을 계속 잡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파가 비판하던 자신의 개인숭배경향을 인정하고 이를 반성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것으로 인해 그 해 2월부터 얼마간 방송이나 공식석상에서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사라졌다.
첫댓글 어찌되었든 공산국가들은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세력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는 것 같구나...
그러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