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Tangier Gate, Volubilis, Maroc
씨야 Maroc 紀行 (2)
버스가 20분 달렸나, 탕헤르서 첫밤을 보낼 Hotel Ahlen에 도착했다. 이미 모기떼와 호텔시설의 열악에 대한 설명은 수도 없이 들은터다. 호텔 프런트 모습에서 벌써 여기가 ‘앗 살람 마그레브’다. 기하학적 아라베스크 무늬의 양탄자들 하며 짐을 날라다가 주는 종업원들이 풍기는 인상도. 굶을지 모른다고 겁을 주던 저녁은 잘만 나왔다. 마치 장조림 같은 송아지고기 요리가 꿀맛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항상 Maroc 요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갖고 있었지 먹어보지를 못했다. 아들네가 West LA 살때 부근에 미국서 제일 유명하다는 Maroc 음식점이 있었지만 한번도 들린적이 없다. 이번 겨울 LA에 가면 Westwood 길에 있는 그 음식점을 한번 찾아가야 겠다.
객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방을 바꿔 달라고 해봐야 그방이 그방이라고 가이드는 못을 밖으며 모기향을 나누어 주었다. 이미 객실을 찾아가기 전 나는 이미 두군데나 물렸다. 방에 들어서자 말자 에어컨 켜고 모기향부터 피웠지만 정작 나를 반겨야할 모기는 객실에는 없는듯. 씻고 누웠더니 종업원이 똑똑, 에어컨 리모콘을 들고와 켜 주겠단다. 이 무슨소리, 내 방에는 에어컨 리모콘이 있어 벌써 켰는데. 아마 리모콘도 방마다 있는게 아니고 종업원이 들고 돌면서 켜주는 모양이다. 우리내외는 운이 좋아 그래도 흠이 없는 좋은방을 배정 받았나 보다.
이번 여행 우리 일행은 6명. 내 동서 내외와 그 친구 삼성석유화학 ceo를 지낸 손사장 부부까지. 내 동서는 우리가 이용한 이 여행사의 모회사 사장과 고문으로 십수년 봉직했기에 인천공항서 부터 남다른 대접을 해 주었다. 가방도 여행사 직원들이 들고가 다 부쳐주고 좌석도 Bulkhead seat로 배정해주고. 거기다가 머무는 호텔에서 와인도 방에 보내 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길길이 좋아했던 것은 대혁명후의 프랑스사를 전공하고 경험도 많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는 성실한 가이드를 인솔자로 배정해 준 점이다.
우재형 가이드는 40대 중반, 말한마디에도 교양과 기품이 있는분이었다. 계속 공부를 한다고 했다. 거기다가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기스 스페니쉬까지 막힘없이 구사했다. 폴르투갈 리스보아에서 우리와 합류한 이인선이란 여자 가이드분도 참 탄복할 정도로 역사에 대해 막힘이 없었다. 특히 유럽 왕가의 그 복잡한 혼맥에 대해 그분 만큼 훤히 꾀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후배 이야기로 드는 사람으로 봐서 아마 외대 서반어과 졸업생으로 나는 추측했다. 유학와서 마드리드에 주저앉아 살며 가이드생활만 17년 이라는데 유럽과 마그레브의 역사를 켜(layer)로 잘라 알기쉽게 해설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50년전 정치사상사를 강의한 이용희 교수가 희랍어나 라틴어, 영불독어 등을 막힘없이 구사하며 유럽역사를 켜로 잘라 강의했다. 얼마나 내가 빠져들었던지 남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고 강의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극을 받아 희랍어와 라틴어도 2년씩 수강하고. 나는 이 두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당신같은 박문강기한 분의 해설을 들으며 여행하게 된것은 큰 홍복 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우리 일행이 묵었던 Ahlen 호텔의 로비
우리 일행이 우연히 묵었던 탕헤르의 이 Hotel Ahlen은 Maroc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현장. Maroc은 베르베르족과 아랍인이 주 구성원 이다. Tarik 장군이 아랍귀족과 그 밑에 베르베르족 전사들로 구성된 선봉을 이끌고 711년 스페인으로 쳐들어가 찬란한 이슬람 지배 800년이 시작된다. 특이한 것은 이때 아랍 귀족을 따라갔던 베르베르족 전사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었다는 것이다. 버나드 루이스가 쓴 이슬람문명사에서 분명 나는 그렇게 읽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페니키아도 Maroc 땅에서 베르베르족을 몰아내지 못했고, 심지어 BC146년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이 지역을 차지했던 로마도 이 베르베르족 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강인한 민족이다. 종교는 AD3세기경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퍼졌던 사회혁명적 성향이 아주 강한 기독교의 한 분파인 Donatus파에 속했다가 회교가 전파되자 이슬람으로 서서히 바꿔가며 끈질기게 살아남은 종족이다. 적어도 중세까지 그들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 남아 있었던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있다.
이 베르베르족 족장 후예인 무함마드 우프키르(Muhammad Oufkir)가, 1956년 무함마드 5세가 망명을 끝내고 국토를 프랑스로부터 회복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12년 이후 Maroc 왕정이 중단되었던 프랑스 점령시절, 그는 프랑스군 소령이었다. 이 우프키르 소령의 아버지도 프랑스 점령하 거주민장관을 지낸 인물. 무함마드 5세가 1957년 왕정복구를 선언하자 우프키르 소령은 2인자로 등장, 장군이 되어 Maroc 국방장관과 군사령관에 취임한다. 이 우프키르 장군에게는 1953년에 태어난 맏딸 말리카 우프키르(Malika Oufkir)가 있었다. 말리카가 5살때 무함마드5 세의 사랑하는 공주, 랄라 미나의 친구 겸 ‘장난감’으로 입양된다. 입양이 된 계기는 대가 쎈 어린 공주인 자기 딸에게 전연 기가 죽지 않는 말리카의 모습을 왕이 봤기 때문이었다. 말리카의 할렘 생활은 11년, 입양되자 금방 무함마드 5세는 아들 하산 2세에게 양위를 했다. 말리카는 하산 2세를 졸라 16살에 자기 생가로 돌아온다.
그 사이 Maroc 정치정세는 급변한다. 부왕과 사이가 친밀했던 우프키르 장군은 아들 하산 2세와는 사이가 벌어진다. 인구의 44%를 차지하는 이 베르베르족은 원래 종족 자의식이 아주 강한데 하산 2세 치하에서도 그 부패에 고도의 불만을 표출한다. 이미 프랑스 치하에서도 1926년 리프산맥을 중심으로 존경받는 베르베르족 학자 Abd-el-Krim 주도로 반란을 일으킨 역사도 갖고있다. 1971년7월10일, 하산 2세의 42회 생신날 왕립군사대학 훈련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쿠테타를 감행한다. 스키하라트와 수도 라바트에 있는 왕궁을 포격하여 수백명의 생신하객, 장교, 신하들이 죽는다. 그러나 이 쿠테타는 실패한다. 왕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요행히 진압에 성공. 쿠테타 가담 장교 10명이 체포되어 즉결총살 당했다. 문제는 이들 장교 모두가 우프키르장군의 수족들이라는데 있었다. 또 부정부패를 척결하려고 일으킨 쿠테타의 파장은 일파만파로 Maroc 정국을 강타한다. 학생들의 쿠테타 지지데모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회교 교주 무함마드의 핏줄이란 사실 하나 때문에 300여년을 Maroc 땅에서 권위를 자랑하던 왕가는 이미지에 치명적 손상을 입었고 베르베르족의 저항염원을 등에 업은 우프키르장군은 왕과 각을 세운다.
1972년 8월16일 드디어 우프키르 장군이 직접 쿠테타를 주도한다. 테투안지역 상공에서 왕실 비행기를 폭파하고... 그러나 이번에도 쿠테타는 차디차게 실패한다. 우프키르는 몸에 다섯발의 총알을 맞고 즉결 처분을 당한다. 숨막히는 Maroc의 현대사다. 애도기간이 끝나자 우프키르의 남은 가족들은 사막으로 끌려간다. 아사에서 1년, 아그즈드를 거쳐 타마타트에서 4년, 비르 즈디즈에서 10년, 사막감옥을 옮겨 갈때마다 환경은 아주 극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맏딸 말리카를 필두로 모두 7남매와 우프키르 장군의 미망인 파티마, 오래전부터 집안 일을 도와오던 하녀 두명. 모두 10명은 얼굴을 잊을 정도의 세월을 격리되기도 하고 집단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바퀴벌레가 온몸을 뒤덮고 쥐와 더불어 살며 상한 음식을 일상으로 먹어가며 15년을 버티다가 맏딸 말리카를 비롯 기동이 가능한 4남매가 결국 1987년 탈출에 성공한다.
세살때 사막으로 끌려간 막내동생은 18살이 되어 처음 세상구경을 한다. 4남매는 사막을 헤메다가 삼엄한 검색을 뚫고 카사블랑카를 거쳐 과거 지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수도 라바트까지 숨어들어가 프랑스대사관을 찾아가 망명 시도를 했지만 실패. 우체국을 찾아가 알랭 드롱을 비롯, 시몬느 시뇨레, 프랑스 헌법위원회의장인 시몬 베일 씨등 20여명에게 편지를 띠우기도 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3일만에 도착한곳이 탕헤르의 이 Ahlen호텔. 이유는 과거 이 호텔의 소유주 발라프레즈한테 말리카가 청혼을 받았던 가날픈 인연 하나. 주인 발라프레즈는 라바트에 가고 없었다. 호텔 화장실에 숨어들어 하룻밤을 보낸 4남매는 한 프랑스 투숙객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프랑스 국제방송의 유명한 진행자 알랭 드 샤브롱과 통화에 성공한다. 샤브롱은 프랑스 외무성에 연락을 하고 외무성은 마침 콩코드를 타고 Maroc을 향하고 있던 미테랑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 4남매는 결국 세계의 보도진과 이 탕헤르의 Ahlen호텔에서 접선할때까지 일각이 여삼추 같은 며칠을 보냈다.
결국 우프키르 가족이 사막에서 짐승처럼 보낸 세월 15년이 프랑스 방송 등 세계유수 방송전파를 타자 미테랑 대통령 등이 개입하고 국제인권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고 Maroc 왕정은 궁지에 몰리고.... 그러고도 5년의 세월이 더 흘러 맏딸 말리카는 그 혹독했던 20년 세월을 프랑스에서 책으로 펴낸다. 프랑스서 메종 드 도뀨망 상도 받고 오프라 윈프리 북클럽 도서로 선정되었던 이 책이름은
이책을 잡고 나는 밤을 샜다. 책을 도저히 놓을 수 없었던 점은 첫째 그 폐쇄적 이슬람 왕가의 양녀였던 주인공 말리카가 도저히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의 막다른 처지에 몰려서 처절한 극한상황에 처했을 때 성모마리아를 찾아 기도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내가 Maroc을 이해 하는데 청천벽력 같은 요소였다. 물론 태어날 때 수녀들이 경영하는 가톨릭계 산부인과에서 생의 첫울음을 울었고 또 어머니 파티마도 베르베르족 명문가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프랑스 고위장교였기에 출전명령을 받자 홀애비로 애들을 맡길 곳이 없어 수녀들이 운영하는 메크네스의 수도원에 어린 파티마를 맡긴 것도 원인 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정황은 Maroc 사회가 숨통 막히게 이슬람 일변도는 아니란 걸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두번째로 Maroc을 보는 프랑스의 방송의 시각이다. 미셀 조베르 프랑스 외상과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우프키르 장군을 사막사람들, 즉 베르베르족의 우상으로 해석하는 점이다. Maroc에는 이미 왕정에 거세게 저항하는 세르파티 같은 급진좌파의 영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8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Elias Canetti의 Maroc 여행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유려한 문체 보담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것은 그 수많은 거지들 이야기다. Maroc이란 나라는 빈부의 격차가 말도 못한단 사실이다. 또 내 딸한테서 들은것. Northwestern대학 MBA동기에 Maroc왕 전용기 파일럿 아들이 있는데 그 결혼식에 다녀와서 내 딸이 들려준 이야기는 사치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말리카가 쓴 위의 책에서도 왕궁에서 나와 3년간 파리유학과 교우관계 서술은 완전히 Maroc의 상류사회는 유럽의 상류사회와 한몸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영화배우를 지망했던 말리카는 알랭 들롱과 깊이 사귀고 사막의 감옥에서 탈출, 말리카가 프랑스 매스콤에 보도되자 제일먼저 도움의 손길을 주는것도 알랭 드롱이다. 이런 빈부격차란 병통을 머리에 이고 지중해의 아랫 입술, 마그레브란 지정학적 위치에 서서 윗입술 서구의 개방사회와 얼마나 공존 해나갈 수 있느냐는 점은 대단한 관심이 아닐 수가 없다. 아마 언젠가는 베르베르족의 몇천년 내려온 저항정신이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여인들에게서 검은 차도르를 벗길 날도 멀지않은 것 아닐까?.
Hotel Ahlen을 떠나는 날 아침식사는 정말 형편 없었다. 먹을 것이라곤 바게뜨 빵 하나 정도. 아무리 라마단 금식기간 중이고 사회가 종교에 함몰되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는다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빵들은 퍼렇게 곰팡이가 피어있고. 치즈나 햄 한조각도 없고 커피는 한국의 60년대 꽁피 수준보다도 못했다. 불평을 할려고 해도 종업원 코끝이라도 보여야지. 호텔이름 Ahlen이란 아랍어로 ‘환영합니다’란 뜻. 모기들만 동양에서 온 이 과객들을 반겼던 것인가?
Sep 21, 2010
안양서 씨야
Jannat / Gedeed(모로코 출신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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