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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옛날 옛쩍에 간날 간쩍에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요즘은 어찌 된 판인지 한국 드라마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 – 고 하면 좀 부풀림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대단하다. 얼마 전에는 네플릭스가 돈을 댄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대히트를 쳐서 매스컴을 도배하다시피 하던데 뭘 하느라 그리 바쁜지 아직 전편을 다 보지는 못했고 여기저기서 맛뵈기만 찔끔찔끔 봤다. 그런데 좀 보다 보니 이게 참 맹랑하고 섬찍하면서도 엽기적인 내용이다. 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어릴 때 흙바닥에서 놀았던 그 놀이들이 삶과 죽음을 갈라 놓는 러시아 룰렛 게임 같이 돼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내 귀에 아직도 쟁쟁하게 남은 것은 그 주황색 옷의 단발머리 인형이 읊어 내는 일정한 억양의 기계음 같은 후렴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 열 마디 소리의 후렴은 내가 어릴 때 숨바꼭질 하며 술래가 되면 노상 읊던 그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럼 그렇게 조금 천천히 또박또박 내뱉진 않고 라디오 광고 조건 붙이기처럼 잽싸게(물론 우리 고향말 억양으로) 열 번을 벽에 이마 대고 눈 감고 외었으니 도합 백 마디를 숨가쁘게 내뱉은 것이다. 그 동안 아이들은 후다닥, 낟가리 뒤며 외양간 구석이며 툇마루 밑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런 숨바꼭질 만이 아니었다. 반세기 너머로, 지금은 많이 기억이 흐려졌지만 우리는 무얼 하고 놀든 간에 일정한 가락의 흥얼거림 – 일종의 주문이랄까 후렴을 외었었다. 지금은 앞꼭지만 조금 생각나는 그런 주문이랄까 노래들을 순서없이 떠올려 보겠다.
여름이 되면 개울에 가서 살다시피 했는데 발가벗고 물에 들락날락 하면서 헤엄도 치고 온갖 장난을 하다 보면 몸이 오스스 추워진다. 햇볕에 달구어진 자갈 위나 바위, 모래에 누워 있어도 금방 물끼에 식었고, 더구나 구름이 해를 가리면 몸이 빨리 마르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해야 해야 나온너라
김칫국에 밥 말아 묵고
장구 치고 나온너라
(이 뒤에도 가사가 많은데 잘 생각이 안 난다)
이렇게 주문을 외다 보면 정말 해가 나와서 젖었던 머리도 마르고 해서 옷을 꿰어 입고 물줄기를 찾아 낚시를 하기도 했다. 낚싯대라 해 봐야 손수 만든 조악한 물건이지만 진흙을 뒤집어 지렁이(우리는 거시, 혹은 껄께이라 불렀다)를 잡아 잘라 낚시바늘에 미끼로 끼우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아가리 딱딱 벌레라
김치 국물 드간다
아가리 딱딱 벌레라
호박 찌짐 드간다
(이하 생각 잘 안 남, 앞으로 이와 동)
낚시도 시들해져서 어디 다른 데로 몰려 가면서는 걸핏하면 이런 노래를 불렀다.
갓데 구루마 바꾸 누가 돌렜노
집에 와서 생각하이 내가 돌렜네
구루마는 분명 수레를 뜻하는 일본말이고 갓데도 마찬가지 같은데 뜻은 여태 모르겠다. 그리고 하필 이런 수레바퀴 돌리는 주문을 읊었는지는 수수께끼다.
그러다 길에서 스님이라도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다 조금 거리가 나면 되돌아서 소리치며 놀렸다. “중중 까까중 접시 밑에 까까중…” 그러고는 헤헤 웃으며 도망쳤다. 스님은 우릴 무시하고 내쳐 가시거나 돌아보며 빙그레 웃으실 뿐이었다. 우린 누굴 따라 배워서 그런 무엄한(?) 장난을 했을까?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계집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건지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니,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같은 노래라든지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하는 몇 가지 노래를 부르며 폴짝폴짝 뛰고 있었고 감나무 그늘에는 애들이 둘씩 마주보며 손뼉 맞추는 놀이를 하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실 적에
편지 한 장 써 주세요
구리구리 구리구리
멍 텅구리
그렇대서 애들이 이렇게 마을 공터나 골목길에서 노상 놀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큰 착오다. 실상은 늘 일자리에 불려 다녔다. 집에서도 잔일을 거들고 심부름을 다니는 등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았지만 농사일 때문에 식구들이 논밭으로 일하러 갈 때는 따라 나서야 했고 아니면 소먹이고 꼴 베러 산이나 들로 돌아다녀야 했다. 오뉴월 농사일은 송장 손도 빌린다고 했던가.
품앗이를 해서 들일을 하거나 할 때는 사람들이 걸쭉한 사설이 섞인 노동요를 불렀는데 이런 사설이 생각난다.
항라 적삼 안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마이 보머 병나니더 담배씨만치 보고 가소
기울어진 산기슭 밭에서 밭을 매던 아줌마들도 노래를 불렀는데 팔은 호미질을 하면서도 한 사람이 목청을 뽑고 나면 누군가가 또 뒤를 받쳐서 사설을 풀어내곤 했다.
언니 언니 사촌 언니
시집살이 어떻더노
울도 담도 없는 집이
시집살이 고약터라
고추 당초 맵다캐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장에 갔다가 한 잔 걸쳤는지 얼굴이 벌개진 어느 청년한테서는 이런 노래도 들었다.
설설 긴다 기계장
갔다 와도 안강장
오늘 가도 진안장
서서 본다 서울장
쑥 솟았다 고산장
아가리 크다 대구장
쪼추바리 경주장
코풀았다 흥해장
울고불고 울산장
애고대고 곡성장
초상났다 상주장
일종의 말장난인데 나무하러 가던 외아재는 지게 작대기를 두드리며 육자배기에다가 이런 노래도 불렀다.
오다가다 오동나무
십리 절반 오리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목에 걸려 까시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
옥도끼로 찍어내어
이렇듯 나와 내 동생들이 엄마로부터 “꼬꼬달아 우지 마라, 공공 개야 짖지 마라…” 하는 자장가를 들으며 자란 우리 마을에는 흥얼거리며 찾아오는 외부 사람도 심심찮게 있었다. 엿장수는 “엿 사시오 엿을 사, 울릉도라 호박엿, 강원도라 감자엿..” 하며 큰 가위를 쩔렁거렸다. 주로 겨울이 다가오면 거지와 별 다름이 없는 각설이패가 찾아오는데 그 유명한 품바 타령도 자주 들었다. “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그리고 정말 사람이 죽어서 상여가 나갈 때는 한 사람이 상여소리를 선창하면 상두꾼들은 똑 같은 후렴을 되풀이 했다 “너~홍, 너~홍, 너화넝차 너~홍”
그때는 이미 옛날의 서당 같은 것은 없어졌고 모든 일상생활이 나라에서 제공하고 규제하던 통치에 순응하며 6.25의 상처를 달래 가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시골 마을 사람들의 기억과 문화에는 가깝게는 일제 지배의 흔적, 그리고 그 통치에도 꺾이지 않았던 그 이전부터의 고유한 풍습과 전통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서당은 없어졌지만 전에 훈장을 했다던 두루마기에 안경 쓴 노인이 마을에 찾아온 것을 본 적도 있고 집안의 어른이 어린 자식이나 친족 아이에게 틈틈이 천자문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노래도 불렀다.
하늘 천 따 지
가마솥에 누룽밥
딱 딱 긁어서
니 한 그륵 묵고
내 한 그륵 묵고
그리고 명절이면 애들은 뒷방에 모여서 두 줄로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엇갈려 세우고는 긴 사설의 이런 노래를 부르며 다리를 하나씩 탁탁 짚어 나갔다.
이 거리 저 거리 갓걸이
진주 망건 또망건
천사 만도 두만도
도래 줌치 장도칼
어쩌다 말씨가 엇진 외지 아이와 마주치면 무조건 서울애라 간주하고 이렇게 놀려대었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고기
그런데 학교에 가고부터는 이런 노래도, 놀이도 할 기회가 조금씩 드물어지고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노래와 더불어 어디서 배웠는지 이런 싱거운 노래도 우리끼리는 불렀다.
어린 복동이가 요강 우에 앉아
울고 있지요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그리고 학년이 더 올라가면서는 애들한테서 이런 노래도 배웠다. 따라 부르면서 우습기도 했지만 좀 천박스런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노래는 독감처럼 금방 전교에 퍼졌다.
우리 마누라 일본 동경에 오징어 배 따라 갔는데~
날씨 관계상 기후 관계상 소식이 없더라~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이 정도는 약과였다. 우리 고향은 해병대 본부가 있는 포항과 가까워서 개병대(?)의 출몰이 잦았는데 이들은 내달리는 군용 트럭 위에서도 단체로 목이 터져라 합창을 해댔다.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편지를 쓰고요
흘러가는 물결 그늘아래 춤을 춥니다
처녀 열아홉살 아름다운 꿈속에 아이러브유
라이 라이 라이 라이 차차차
라이 라이 라이 라이 차차차
이 노래는 내가 하도 압도 당해 듣고 익혀서 아직까지 가사 전체를 거의 기억하고 있는데 너무 야한 구절이 뒤따라 나오므로 여기에 차마 다 못 옮기겠다. 그때는 뜻도 잘 모르고 따라 불렀지만.
그런데 이렇게 야하고 거친 불량 가사들에 어린애 때부터 노출된 것이 교육상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그리 노출은 됐지만 내가 그 때문에 닳아 빠지거나 때가 잔뜩 묻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일종의 면역성을 체득한 건지도 모르겠다. ‘인천에 성냥공장’을 비롯하여 지금 얼핏 앞대가리만 떠오르는 노래도 여러 개다. 더러움이나 깨끗함이란 본래 없음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물론 교실에서는 달랐다. 선생님의 풍금소리에 맞춰 책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동요와 가곡을 배웠다. 그리고 애국가에서부터 대통령(이승만) 찬가,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국세조사의 노래, 새마을 노래, 하는 여러 의식용 노래도 차례로 배웠다. 제도교육이며 군대에서 내게 주입된 이런 제도용 노래가 아마 수십곡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학교든 무슨 산과 강이나 바다의 정기를 안 받은 학교가 없어서인지 반드시 산이나 강, 바다가 가사에 언급되어 있는 교가도 따라 배웠다.
말하자면 나는 학교나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가르쳐 주고 공인한 건전가요(?)와 함께 이런 비공식의 지하가요, 불건전가요(?), 곁다리 문화도 접하며 자라온 셈인데 도회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이런 곁다리 토속문화, 길바닥 문화로부터 단절되었다. 단절 정도가 아니라 무슨 노래든 아예 일부러 노래 듣기, 일부러 노래 부르기, 그리고 음악을 익히고 배움 그 자체로부터 거의 단절되었다고 함이 더 맞을 것이다. 고교 2학년 때부터는 입시에 안 나온다고 음악 시간도 없으졌으니까.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몇 번 반독재, 반정부 데모대에 휩쓸렸는데 다같이 애국가를 부르거나 앞장선 애들은 기존 가요를 가지고 와 가사만 생경하게 바꿔서 선창하고 있었다. 운동권 가요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이었나 보다. 광주 민주화운동 때 나왔다고 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어느덧 국경을 넘어 일본을 비롯하여 동남아 각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혁명가로 불리고 있다. 물론 가사는 현지어로 번역되어서. 이것도 일종의 한류 수출이 아닌가! 하기야 꼭 현금이 바로 들어오는 것만 수출이 되는 것은 아닐테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런데 온갖 것 다 수출이 잘 되는데 유독 한국의 불교는 실적이 미흡하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스님도 모자라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해 오는 판에 수출할 여력이 달리는 것일까? 내수시장이 워낙 넓어서(?) 거기에 충실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은 그게 아니고 수출은 이미 돼서 상품은 부두에 내려져 있는데 현지의 마케팅 전략과 열정이 모자라 좀 지체되고 있는 게 맞을게다. 그렇지만 타종교가 드센 이 미주 동포사회라고 해서 우리는 이런 찬불가를 누가 들을세라 마치 군사정권시대에 운동가요 부르듯이 숨죽여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둥글고 또한 밝은 빛은 우주를 싸고
고르고 다시 넓은 덕은 만물을 길러
억만겁토록 변함없는 부처님전에
한마음 함께 기울여서 찬양합니다
저 모든 하늘 가운데서 가장 높고
이 넓은 세상 만류중에 제일 귀하사
지혜와 복덕 구족하신 부처님전에
한마음 함께 기울여서 찬양합니다
부처님오신날이 멀지 않았다. 올해도 큰 공덕 없이 부처님전에 절을 올릴 것 같다. 코로나 탓이기도 하지만, 여러 대중과 함께 힘차게 삼귀의, 사홍서원을 노래부르며 불전에 예불을 올린 지도 두어해 전이다. 그 동안 다들 무고하시고 나 자신 별탈 없음에 밝은 앞날을 기다리며 감사 드린다. 하지만 그 동안 자신을 가다듬고 되돌아보다 못해 어떤 순간에는 이렇듯 화석화되어 가는 기억의 저편에 옛 가락의 토막들이 떠오름도 어쩔 수 없다. 이리 늦게도 미국에까지 따라오니 말이다.
옛날 옛쩍에
간날 간쩍에
호래이 담배 필 쩍에
미꾸리 용 될 쩍에
베꼬장주 새댁 쩍에
금박댕기 처자 쩍에
대꼬바리 뚜디릴 쩍에
조선쩍에 고릿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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