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1.
1976년이면 아주 먼 옛날인가?
주택은행에 입행하고 초임지로 중곡동지점에 부임했다.
당시 지점장실 벽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저축은
국력'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주택은행은 정부투자기관으로 직원은 준공직자 신분이었다.
영업장에 대통령 사진이 걸리지 않았지만 본점의 지시에 의해
전국 지점에서는 '저축은 국력'이라는 액자를 기본 비품으로
관리를 하였다.
또한 '대통령 지시사항'은 통첩보다 상위문서인 통달문서로
관리하였으며, '대통령 지시사항 이행 기록부'는 감찰과 수시 점검
대상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안기부장의 총에 의해 서거(逝去)를
하자 지점마다 액자를 내려 폐기처분하였다.
그런데 인근 거여동 지점장이 '저축은 국력'이라는 액자가 나중에
돈값 좀 할 거라며 집으로 가져간 일이 소문 나는 바람에 인근 점포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일이 기억난다.
그 당시 정부와 기업에서는 중공업과 산업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했고,
국가신용등급이 낮아 해외에서 차관을 도입하기도 상당히 어려웠기에
국민들의 저축률을 끌어올리는 게 당면한 과제였다.
06;00
평소보다 조금 늦게 앞산에 오른다.
오늘따라 등산화가 많이 무겁다.
매일 15,000~20,000보를 걷다가 4일간 합산 1,000보도 되지 않은
탓인가.
퇴원 후 빠진 근육을 보충하느라 금요일은 6,000보, 토요일은
8,000보를 걸으며 서서히 체력을 끌어 올리는 중인데,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낮은 앞산을 오르며 등산화가 무겁다고 느끼니 며칠간
병원생활에 내 체력이 바닥났나 보다.
'체력은 저축'이라는 말은 평소의 내 지론(持論)이다.
30대 초반 뇌종양으로 인한 몸의 마비를 풀고자 시작한 등산과 조깅,
워킹은 내 기본 체력 향상에 많은 도움과 함께 근육량을 저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꾸준한 운동으로 종심이 되기 전까지 체력을 저축하고,
이후 나이 먹으면서 서서히 까먹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태풍이 오고
폭우가 쏟아져도, 영하 10도 아래까지 떨어지는 혹한기에도 나의
등산과 워킹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난 9월 예기치 않은 코로나 감염으로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었고, 그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고자 2달 넘게 애를
썼는데 물거품이 된 모양이다.
06;10
달빛 참 교교(皎皎)하다.
보름 갓 지난달을 올려다보며 이번 가을과 겨울은 시련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암과 체장이 의심스럽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식겁(食怯)해
거금을 들여 검사를 하고, 심장과 간, 췌장, 담도가 매우 건강하다는
검사결과를 받은 지 불과 두 달도 안돼서 위(胃) 점막을 꽤 도려냈으니
참 아이러니(Irony)한 인생이다.
06;30
주치의는 위에 새 점막이 형성될 때까지 3개월 가량 금주령(禁酒令)과
함께 등산 금지령을 내린다.
과격한 운동을 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던지, 피똥을 싸는 응급상태가
올 수 있다고 경고를 하는 거다.
황혼 인생에 친구들이랑 막걸리 한잔을 마시며 노닥거리는 재미도
당분간 사라졌고, 배낭을 메고 거친 숨을 쉬는 등산도 못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재미 없는 인생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아쉬움에 한숨이
나온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산 모퉁이를 돌자 지난주까지 남아있던
단풍잎이 몽땅 다 떨어졌다.
모진 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산길을 늘 지켜주던 단풍나무가 나목
(裸木)이 되고, 그 가지 사이로 달빛이 내려앉는다.
참 쓸쓸한 풍경이다.
저 단풍나무는 세 달 후면 다시 물이 올라 생기 넘치는 잎을 틔우겠지.
그러나 나는 초겨울의 스산함을 느끼며 내 몸과 마음에 찬 기운이
밀려 들어오는 걸 막지 못한다.
그래도 영하 4도까지 떨어진 기온은 머리를 맑게 해준다.
겨울은 끝이 아니다.
또한 나의 체력을 저축하는 투쟁도 끝이 아니다.
매해 반복되는 평범한 겨울이 수십 번 왔다 갔고, 그 시간과 공간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어느 한순간도 고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겨울만큼은 전투력을 발휘하여 체력을 더 많이 저축해야겠다.
먼동이 트면서 산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숲은 가려진 것들을 들춰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 봄을 준비하는 나목(裸木)
들은 힘을 내라고 일제히 속삭인다.
2022. 12. 11.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