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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ㆍ 모리스 이서먼, 스튜어트 위버
옮긴이 ㆍ 조금희, 김동수
그린이 ㆍ 디 몰나르
펴낸곳 ㆍ 하루재클럽
분 야 ㆍ 등산 > 등산의 역사
펴낸날 ㆍ 2015년 11월 2일
판 형 ㆍ 178×252 양장본 / 쪽수 : 680쪽
가 격 ㆍ 62,000원
ISBN 978-89-967455-1-8 03900
| 책 소개
히말라야의 고봉들과 그곳을 오르려 했던 영웅들의 이야기!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1953년 에베레스트 초등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 두 사람 말고도 높고 위험한 히말라야의 여러 산에서 기술과 담력을 시험하려 했던 모험가들이 있었다. 이 책에서 역사가 모리스 이서먼과 스튜어트 위버는 생생하고 풍부한 삽화, 사진과 함께 50년 만에 최초로 히말라야 도전의 방대한 역사를 모두 다루었다. 이들은 1980년대 이후에 이루어진 주요 등반에 대해 체계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으며, 특히 그 시대의 사회적․문화적인 배경에 비추어 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냈다.
| 저자 소개
저자인 모리스 이서먼Maurice Isserman은 해밀턴대학의 제임스 L. 퍼거슨 역사학 교수이며, 스튜워트 위버Stewart Weaver는 로체스터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열성적인 등산가이다.
| 목차
-서문(어느 등산가의 죽음)
1장 사람과 산의 만남
-눈의 거처
-탐험의 초창기
-지도를 만든 일꾼들
-그레이트 게임
-유럽의 놀이터
2장 제국의 시대(1892~1914년)
-카라코람의 콘웨이
-머메리의 죽음
-여성에게 투표권을
-엄청난 짐승 666
-진정한 왕족 등산가
-에베레스트를 향하여(1893~1914년)
3장 산이 거기 있으니까
-조지 맬러리와 에베레스트를 향한 투쟁(1921~1924년)
-에베레스트의 맬러리
-1921년: 정찰
-1922년: 공략
-1924년: 실종
4장 어디서나 수확의 기쁨을 누리다(1929~1933년)
-파울 바우어와 뮌헨파
-눈으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 보물
-카메트를 정복하다
-벌거벗은 산
-다시 에베레스트로
5장 히말라야의 전성기(1934~1939년)
-성채
-낭가파르바트의 분노
-에베레스트: 정찰과 참패
-난다데비 등정
-성공과 실패
-1938년의 에베레스트
-승리와 비극의 K2
6장 미뤄진 황금시대(1940~1950년)
-고산 정복인가, 세계 정복인가?
-전시의 히말라야
-1940년대 후반의 등산계
-제국의 종말
-네팔의 개방
-8천 미터로 돌아가다
7장 소심한 겁쟁이가 되지 말라
-에베레스트(1950~1953년)
-에베레스트의 남쪽
-거듭된 정찰
-초오유 정찰등반
-스위스의 에베레스트 도전
-포스트 몬순 시즌의 도전
-영국인들이 선택한 대장
-존 헌트의 원정
8장 히말라야 등반의 황금시대(1953~1960년)
-에베레스트 초등의 여파
-헤르만 불의 낭가파르바트
-미국인들이 K2로 돌아오다
-이탈리아인들이 K2에 오르다
-오스트리아인들이 초오유에 오르다
-영국인들이 칸첸중가에 오르다
-마칼루, 마나슬루, 로체, 가셔브룸2봉
-다소 낮은 산들
-오스트리아인들이 브로드피크에 오르다
-미국인들이 히든피크에 오르다
-여성의 히말라야 원정대
-중국인들이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
-스위스인들이 다울라기리에 오르다
9장 새로운 등반, 새로운 인물(1961~1970년)
-히말라야 과학 원정등반대
-노먼 다이렌퍼스의 뉴 프런티어
-미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에베레스트와 맞선 네 사람
-에베레스트로 가는 공식 원정대
-변화하는 미국의 등반
-히말라야에 등장한 새로운 얼굴들
-등산과 첩보활동
-1960년대 중반의 공백기
-트레킹 산업의 등장
-등산과 반문화주의
-네팔의 입산 금지 해제
-새로운 인물: 크리스 보닝턴
-새로운 인물: 라인홀드 메스너
10장 극한등반의 시대(1971~1996년)
-1971년: 국제 에베레스트 원정대
-막다른 골목과 창의적인 새 시도
-작은 규모의 의미 있는 등반
-창가방
-1975년: 에베레스트
-1970년대의 미국인 등산가들
-1976년: 난다데비
-여성의 자리: 1978년의 안나푸르나
-1978년: K2
-메스너의 시대
-1977년: 거장들의 죽음
-붐비는 히말라야
-새로운 인물: 피터 보드먼과 조 태스커
-기록을 세워라
-중국의 개방
-히말라야의 개탄할 상황
-희박한 공기 속으로
-용기를 내라
찾아보기
옮긴이의 말
| 책 속으로
눈의 거처, 히말라야
정확히 말해 히말라야는 인더스Indus 강과 브라마푸트라Brahmaputra 강을 경계로 하여 2,400킬로미터에 걸친 구간이며, 서쪽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에서부터 동쪽의 남차바르와Namcha Barwa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러나 아시아 지각판과 맞물리는 범위는 히말라야보다 훨씬 더 넓어서 대략 아프가니스탄에서 미얀마까지 걸쳐 있고 융기현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인도 쪽은 티베트 쪽 지각을 1년에 5센티미터라는 무서운 속도로 밀어붙이고 있으며, 이로 인해 히말라야 산맥이 1년에 1센티미터 정도씩 높아지고 있다. 에베레스트(공식적인 네팔어로 사가르마타Sagarmatha, 지역 방언으로 초모룽마Chomolungma)는 현재 8,850미터의 고도로 세계 최고봉이지만, 히말라야의 서쪽 끝에 있는 낭가파르바트의 고도가 아주 빠르게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낭가파르바트가 세계 최고봉이 될지도 모른다. 지표면과 성층권의 중간 지점까지 솟아오른 이 산들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그러나 지질학적 의미에서 이 산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히말라야는 그 자체로도 거대하며, 인접한 카라코람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까지 포함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지형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산맥의 자리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에 양보한다 해도, 분명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는 그 북쪽 지역에서부터는 해발 평균 6,000미터 고도로 이어지며, 해발 8,000미터가 넘는 고봉 14개를 모두 거느리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해발 7,620미터(25,000피트)가 넘는 산이 30개 이상 있다. 이에 비해 서반구 최고봉인 아르헨티나의 아콩카과Aconcagua(6,962m)는 상위 200위 안에도 들지 못한다. 극지방을 제외하면, 히말라야에는 ‘눈의 거처’라는 이름에 걸맞게 세계에서 가장 큰 빙하지대들과 그로 인해 생성된 가장 깊은 골짜기들이 있다. 또한 히말라야는 세계적인 하천 가운데 세 개, 즉 인더스,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강에 물줄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이 세 강의 유역에는 세계 인구의 1/6이 살고 있다.---p.40
에베레스트를 향하여(1893~1914년)
히말라야 ‘15번 봉우리Himalaya Peak XV’로 알려진 산은 1856년 대인도 삼각 측량 조사에서 원래 높이보다 약간 낮은 8,840미터(29,000피트)로 계측된 이후 ― 확실하지는 않지만 ―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일지 모른다는 점에서 그 당시 지형학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까지 서양인은 시킴의 싱갈리라 능선에 있는 산닥푸Sandakphu 근처의 작은 마을 팔루트Phalut까지밖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혹은 당시 헤르만 슐라긴트바이트가 실수로 58킬로미터 서쪽에 떨어진 산과 착각하여 가우리샹카르Gaurisankar로 잘못 알려진 산)는 발견과 동시에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1857년 알파인 클럽이 창립되자 회원들은 곧바로 고도 문제와 더불어 과연 지구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p.122
산이 거기 있으니까
4캠프에는 해저드가 남아있었고, 오델은 5캠프에, 맬러리와 어빈은 6캠프에 있었다. 그다음 날인 1924년 6월 8일, 오델은 약간의 긴급 물자와 맬러리가 결국 자신의 성격답게 마지막 순간에 5캠프에 두고 간 나침반을 갖고 혼자서 6캠프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았다. 오델은 고산의 지질학에 관심이 있어서 약간 우회하는 루트로 북벽을 향해 전진했다. 아침에 안개와 구름 사이로 산 위쪽이 간간이 보였다. 12시 50분, 오델이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작은 바위를 올라갈 무렵 하늘이 맑아지면서 정상 부근 능선이 완전히 드러났다. 오델의 시선이 작고 검은 점에 꽂혔다. 그 점은 능선의 바위 계단 아래쪽 눈 덮인 부근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 그 점이 움직이고 나서 곧 다른 검은 점이 움직이더니 두 점이 합쳐졌다. 오델은 이렇게 전했다. “첫 번째 점이 거대한 바위 계단으로 접근했고 곧 그 위로 올라갔다. 두 번째 점도 그렇게 했다. 그러고 나자 그 환상적인 광경이 구름에 가려 사라졌다.”---p.197
어디서나 수확의 기쁨을 누리다
네팔과 티베트가 외국인 여행객을 막아 초모룽마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1920년대 후반 등산계의 관심은 영국령 인도 쪽에서 접근이 가능한 히말라야 지역으로 옮겨갔다. 이 봉우리들에 대한 도전은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칸첸중가는 다르질링에서 고작 72킬로미터 거리에 있지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며 가장 추운 산이었다. 쿠마온 지역의 난다데비는 알모라에서 121킬로미터 거리일 뿐이며 높이는 에베레스트에서 맬러리가 세운 5캠프와 비슷한 7,816미터밖에 안 되지만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모두가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서쪽에는 트랜스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있었다. 그곳에는 카라코람(K2, 브로드피크, 가셔브룸)이 있고, 펀자브 히말에는 낭가파르바트와 눈 쿤 산군이 있으며, 가르왈-쿠마온에는 카메트와 난다데비가 있고, 시킴에는 칸첸중가가, 아삼에는 초몰하리가 있었다. 1925년, 등산가들은 불가피하게 영국령 인도로 접근을 시도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등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p.204
인간이 제안했고, 신은 이에 뜻대로 처분했다
비교적 소규모의 원정대가 1936년 난다데비에서 놀라운 성공을 이루어낸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엄청난 홍보를 하면서 진행된 대규모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실패가 비교되면서, 결국 등반은 쉽턴과 틸먼의 방식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또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가난과 굶주림을 일상적으로 목격해야 하는 시대상황이 되자 엄청난 액수의 공공자금을 무의미하게, 심지어는 사적인 야망을 위해서 써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936년의 실패 직후 에베레스트 위원회의 퍼시 콕스Percy Cox 경이 “에베레스트의 정복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전력을 다해야 하는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라고 큰소리치기도 했다. 그러나 켄싱턴 고어 바깥쪽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 등산계의 요란스러운 국가주의는 어느 면에서 영국의 반작용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맬러리의 약간 경박한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말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흘러갔다.---p.307
제국의 종말, 네팔의 개방
서양 등산가들은 더 이상 티베트를 통해 히말라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맬러리와 어빈이 올랐던 에베레스트 북쪽 루트는 사회주의 국가의 등산가들을 제외하고는 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서양 등산가들은 티베트 쪽에 속한 8천 미터 급 고봉에도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즉 로체, 마칼루, 초오유, K2, 가셔브룸1봉, 가셔브룸2봉, 브로드피크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8천 미터 급 고봉인 시샤팡마는 완전히 티베트 영토 안에 들어가 있었다. 쉽턴과 틸먼의 무즈타그 아타 등정 시도를 마지막으로 그 후 30년간 서양 등산가들은 어느 누구도 티베트 쪽으로는 히말라야의 고봉에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새로운 가능성이 네팔에서 서양 등산가들에게 열렸다. 1950년대 초 빌 틸먼은 금단의 왕국 네팔을 “서양인들이 탐험하지 않은 나라 중 사람이 거주하는 가장 큰 국가”라고 표현했다. 네팔은 동서 축의 길이가 대략 845킬로미터로 동쪽은 시킴과 맞닿아 있고 서쪽은 인도와 맞닿아 있다. 또한 폭은 145~240킬로미터로 남쪽으로는 인도와 맞닿아 있고 북쪽으로는 티베트와 맞닿아 있다. 국토의 모든 지역이 산지는 아니지만 국토 북쪽의 1/3은 엄청나게 고도가 높아 히말라야 산맥의 1/3에 해당하는 면적을 차지한다. 틸먼은 그 지역이 개방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흥분에 못 이겨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네팔처럼 산이 많은 국가는 없다. 에베레스트와 칸첸중가, 그리고 이 두 산의 8,230미터(27,000피트)가 넘는 위성봉 2개를 제외하고도 7,925미터(26,000피트)가 넘는 봉우리가 6개 있고, 7,620미터(25,000피트)를 넘는 봉우리는 14개 있으며, 이보다는 못 미치지만 6,100미터(20,000피트) 이상의 봉우리가 상당수 있는데, 현존하는 지도에 이 봉우리들이 모두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 숫자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다.”---p.357
힐러리와 텐징,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다
두 사람은 헉헉거리는 호흡을 진정시킨 후 정상을 바라보았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힐러리가 앞장섰다. “지난 2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발판을 깎았다. 텐징의 움직임도 매우 느려졌다. 한 스텝을 깎고 올라서자 또 다른 모퉁이가 나타났다. 나는 멍해져서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처음에 느꼈던 기쁨이 우울한 기분이 드는 투쟁으로 바뀌었다. 그때 앞쪽의 능선이 갑자기 완만해지더니 멀리 아래쪽으로 노스 콜과 롱북 빙하가 보였다. 위를 쳐다보니 좁은 능선이 눈에 덮인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단단한 눈에 몇 번 더 피켈을 휘둘러 박은 다음 우리는 정상에 올라섰다.”---p.427
새로운 등반, 새로운 인물
젊고 유행에 민감하며 서양문명에 대해 문화적·정신적으로 염증을 느낀 사람들에게 네팔이 삶의 신비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카트만두는 물론이고 네팔의 등산로에서도 유럽인과 미국인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서양 등산가들은 점차 히말라야에 대한 도전을 국가의 영광이나 정복이라는 전통적인 기준보다는 개인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이라는 기준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까지는 공식적인 협찬을 받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진행되었던 구식 원정이 히말라야에서 압도적이었지만, 1960년대 말이 되자 많은 등산가들은 그런 원정을 구시대의 부끄러운 잔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유형의 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규모의 비공식적인 원정이나, 또는 대규모라도 대중의 관심을 끌거나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유명 등산가의 카리스마에 기대는 원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셰르파들은 자신들이 보기에도 그리고 그들이 모셨던 나리(‘나리’라는 말은 이제 점차 꺼리는 명칭이 되었다.)들이 보기에도 점차 제국주의 시대의 종속관계 잔재를 벗고 서양 등산가들과 동등한 위치로 부상했다. 또한 등산가들은 8천 미터 급 고봉의 능선에서 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든 면에서 볼 때 1960년대는 히말라야 등반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p.511
극한등반의 시대
20세기 후반에는 다른 대원에 대한 의무감과 복종심이 점차 사라졌다. 산으로 들어갈 때 낯선 사람들이었던 등반대원들은 헤어질 때도 자주 서로 섭섭한 마음을 품은 채 흩어졌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함께 등반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도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뛰어난 히말라야 등산가였던 존 로스켈리John Roskelley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확보를 하지 않을 때는 로프를 풀어놓습니다. 그것이 제1의 규칙입니다. 그래야 제가 다른 대원들을 죽이지 않고, 다른 대원들도 저를 죽이지 않습니다.”
한때는 서로를 보호해주는 끈끈한 결속의 상징이었던 로프가 이제는 자기가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옛 등반 문화가 점차 빛을 잃다가 결국 사라지면서 히말라야 등산가들은 글자 그대로나 상징적으로나 서로의 몸에 묶인 로프를 풀어버렸다. 그러자 오랫동안 함께 등반하는 동료의식도 점차 사라져갔다. 등산가들은 단독 등반을 통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전문 가이드들은 분명한 사업으로써 미리 돈을 받고 아마추어 동호인 집단을 히말라야의 고봉으로 데리고 갔다. 서로를 비난하고 서로의 말에 반박하는 풍조가 등산계에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p.575
용기를 내라
우리는 이 책에서 히말라야 등산의 역사는 외국에서 이 지역으로 온 등산가들이 일시적으로 남겨놓은 삶의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앞에서 예를 든 것처럼 그들은 때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휴스턴과 틸먼도 그들 앞에 있었던 맬러리와 어빈, 그들 뒤에 있었던 피셔와 홀처럼 자신들이 산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 가졌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비판은 하되 냉소해서는 안 된다. 히말라야 등산가들의 영웅적인 모험 이야기 이면에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고 해서 그들이 보여준 영웅주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부정한다고 해서 그들의 모험이 주는 감동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단쿠타 마을 주민들이 방문객들에게 지혜롭게 충고한 것처럼 소심한 겁쟁이가 되지 말고 용기를 내라!---p.645
| 출판사 리뷰
제국의 시대부터 극한등반의 시대까지 히말라야 도전의 역사
이 책은 1892년 최초로 진정한 히말라야 원정등반을 했던 마틴 콘웨이, 카라코람 산맥을 선구적으로 탐험했던 패니 벌락 워크먼, 에베레스트의 가장 유명하고도 낭만적인 순교자 조지 맬러리, 1930년대와 1950년대에 미국 K2 원정등반을 이끌었던 찰리 휴스턴, 전설적인 셰르파 앙 타르카이 등을 비롯하여 다른 많은 인물이 재조명되고 있다.
저자들은 책 전반을 통틀어 정치적 ․ 사회적인 변화가 등산에 미친 영향에 대해 조명하고, 팀워크와 동료애를 강조했던 등산 문화가 점차 개인적인 명성과 영광을 위한 도전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영국인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는 한때 “역사는 ‘일련의 대사건’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그와 같은 입장에서 등산의 역사가 ‘일련의 고봉 등정을 기록’한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등산이란 일상생활과 조금 먼 곳에서 이루어지는 도전이기는 하지만, 통틀어봤을 때 세상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저자들은 빙하나 능선, 거대한 벽에 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150년에 걸친 히말라야 등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가치, 기대, 갈등의 역사도 추적했다. 이 책은 언제 누가 어떤 루트로 어떤 산을 올랐는지에 대한 실제 기록뿐만 아니라 그 도전을 규정짓고 지탱한 ‘원정 문화’에 주목했다. 즉, 등반일지와 원정보고서라는 주된 사료에 그치지 않고 등산가들이나 그들의 지인을 직접 마나서 보다 광범위한 자료를 찾고 분석했다.
이 책은 히말라야 등반을 다룬 생생하고 명쾌한 역사서이지만, 까다로운 전문용어가 없어 모든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엄선한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에 대한 등산가들의 열정은 그저 정상을 오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원정등반의 동기와 원정대가 맞부딪친 도전과 경험이 등산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히말라야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뿐만 아니라 등산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일 것이다.
빌 틸먼은 『난다데비 등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베레스트를 성공적으로 오른 이야기가 실패를 거듭한 과거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정상이 함락되면 그 산과 관련된 그때까지의 여러 가지 신비와 위엄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8천 미터 급 고봉 중의 하나가 함락된 이야기를 다룬 책이라면, 등산가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사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하루재클럽은 해외 전문산악도서를 등반사(史)·등반가(家)·등반기(記) 시리즈로 엮어 계속 출간합니다. 하루재에서 인수봉을 바라보며 가졌던 산과 등반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않는 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첫댓글 변교장님께서는
세상에서 젤 멋진 산을 걸으시네요ᆢ
늘 ~~응뭔하겠습니다ᆞ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