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有子曰 禮之用이 和爲貴하니 先王之道斯爲美라 小大由之니라. 유자가 말하기를, “예절의 시행은 화합이 소중한 것이니, 선왕의 도는 이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것에서 나왔다.
禮者,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也. 예라는 것은 천리(天理)의 절문(사리에 따라 정한 조리, 예절과 법도)이요, 인사의 의례와 법칙이다.
朱子曰 節者等級也 文者不直截而回互之貌 是裝裹得好 如升降揖遜 天下有當然之理 但此理無形影 故作此禮文畵出一箇天理與人看 使有規矩可以憑據 故謂之天理之節文 주자가 말하길, “節이라는 것은 等級이다. 文이라는 것은 직접적이지 않으면서 완곡(回互: 빙 둘러 말함)하게 하는 모습이니, 이는 곧 잘 포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오르고 내리며 읍하고 사양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천하에는 당연한 이치가 있다. 다만 이 이치에는 형체나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이 禮文을 지어서 하나의 天理를 그려내어 사람들에게 주어 보도록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의지하고 근거할 規矩(법도)를 갖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를 일컬어 天理의 節文이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如天子之服十二章上公九章 各有等數 此是節 若山龍華蟲之類爲飾 此是文 如冠如婚 此是人事 若冠禮裏有三加揖讓升降處 此是儀 若天子冠禮 則當如何 諸侯則當如何 各有則樣 此是則 면재황씨가 말하길, “예컨대 천자의 복식은 12장이고 상공은 9장으로 각자 等數(등급에 따른 숫자)가 있으니, 이것은 節이다. 만약 산과 용과 꽃과 벌레 같은 종류는 장식이니, 이것은 文이다. 예컨대 冠婚(관례와 혼례) 같은 것은 人事다. 관례 안에 세 번의 읍양승강(읍하고 사양하고 오르고 내림)의 절차를 둔 것이라면, 이것은 儀다. 만약 천자의 冠禮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하고, 제후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고 각자 則樣(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則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天理只是人事中之理而具於心者也 天理在中而着於事 人事在外而根於中 天理其體 而人事其用也 節文儀則 四字相對說 節則無太過 文則無不及 儀在外有可觀 則在內有可守 儀謂容儀 有粲然可象底意 與文字相應 則謂準則 有確然不易底意 與節字相應 必有天理之節文而後 有人事之儀則 진씨가 말하길, “天理는 그저 人事 안의 이치이면서 마음에 갖추어진 것이다. 天理는 마음 가운데에 있으면서 일에 부착되어 있고, 人事는 밖에 있으면서 마음 가운데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天理는 그 體이고, 人事는 그 用인 것이다. 節文儀則, 이 네 글자는 서로 짝지어 말하는데, 節은 너무 지나침이 없는 것이고, 文은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이며, 儀는 밖으로 볼만한 것이 있음이고, 則은 안에서 지킬만한 것이 있음이다. 儀는 일컬어 容儀라고 말하는데, 찬연하게 형상할 수 있다는 뜻이 있으니, 文자와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則은 일컬어 準則이라고 말하는데, 확연하여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節자와 서로 호응한다. 반드시 天理의 節文이 있은 연후에 人事의 儀則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天理其體 故先節而後文 人事其用 故先儀而後則 호씨가 말하길, “天理는 그 體이기 때문에, 節을 앞에 하고 文을 뒤로 한 것이고, 人事는 그 用이기 때문에, 儀를 먼저 하고 則을 뒤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和者, 從容不迫之意. 蓋禮之爲體雖嚴, 然皆出於自然之理, 故其爲用, 必從容而不迫, 乃爲可貴. 先王之道, 此其所以爲美, 而小事大事無不由之也. 화라는 것은 조용하고 급박하지 않다는 뜻이다. 대체로 禮가 體 되는 것은 비록 엄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온 것이기에, 고로 그 用이 됨에는 반드시 조용하고 급박하지 않아야만, 마침내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선왕의 도가 이것(和)을 아름답게 여겨서,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모두 그것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다.
新安陳氏曰 因用而遡其體 惟體出於自然之理 故其用以從容不迫爲貴 從容不迫 蓋從自然中來 신안진씨가 말하길, “用을 바탕으로 하여 그 體에 거슬러 올라가면, 오직 體가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用이 조용하고 급박하지 않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조용하고 급박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연 안으로부터 왔기 때문인 것 같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字貼斯字 指禮之和而言 신안진씨가 말하길, “此자는 斯자에 붙인 것인데, 禮의 조화로움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禮之用和爲貴 見君父自然用嚴敬 此是人情願 非由抑勒矯拂 是人心固有之同然者 不待安排便是和 纔出勉强便不是和 주자가 말하길, “禮의 用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기는데, 임금과 아비를 알현하면, 자연히 嚴과 敬을 쓰는 것이다. 이는 人情이 바라는 것이지, 억눌러 강제로 하고 비틀고 부추김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이는 사람의 마음이 본래부터 갖고 있던 똑같은 것이다. 따로 안배하기를 기다리지 않아야 곧바로 조화로움이지, 조금이라도 억지로 함에서 나온다면, 이는 바로 조화로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和是自家合有底發見出來 無非自然 조화로움이란 자기가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것이 발현되어 나온 것이니,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禮主於敬而其用以和爲貴 然敬而和著意做不得 纔著意嚴敬 卽拘迫而不安 要放寬些 又流蕩而無節 須是眞箇識得理之自然處 則事事物物上 都有自然之節文 雖欲不如此 不可得也 故雖嚴而未嘗不和 雖和而不嘗不嚴也 又曰和便有樂底意思 故和是樂之本 禮는 敬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만 그 用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공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일부러 그러한 생각을 하면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嚴과 敬에 뜻을 둔다면, 곧장 그에 구속되고 불안해지고 만다. 만약 조금 놓아주어 관대하게 한다면, 또 방탕한 데로 흘러서 절제함이 없어질 것이다. 반드시 진짜로 이치의 자연스러운 부분을 알아서 터득한다면, 모든 사물 위에 다 자연의 節文이 있게 될 것이니, 비록 이와 같지 않기를 바랄지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엄할지라도 일찍이 조화롭지 않은 적이 없었고, 비록 조화로울지라도 일찍이 엄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또 말하길, “조화로움이라면 곧바로 즐겁다는 의미가 있으니, 이 때문에 和는 樂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禮如此之嚴 分毫不可犯 何處有箇和 須知道吾心安處 便是和 如入公門鞠躬 須是如此 方安 不如此 便不安 不安便是不和 以此見得 禮中本來有箇和 不是外面物事至嚴之中便是至和處 不可分作兩截看 禮가 이처럼 엄하니, 터럭 하나라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 어느 곳에 조화로움이라는 게 있겠는가? 반드시 내 마음이 편안한 곳을 곧바로 和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公門에 들어갔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은 모름지기 이렇게 해야만 바야흐로 편안하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곧바로 편안하지가 않다. 편안하지 않으면, 곧 조화롭지 않은 것이다. 이로써 禮 안에 본래 조화로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지, 외부 사물의 지극히 엄한 것의 가운데가 곧바로 지극히 조화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두 개로 나누어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但不做作而順於自然 便是和 和是嚴敬中順禮而安泰者也 다만 일부러 하지 않고서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조화로움이다. 和는 嚴과 敬 안에서 禮를 따르면서도 편안하고 태연한 것이다.
覺軒蔡氏曰 有子專以禮之用言 朱子兼以禮之體言 禮之用 固貴於和 論禮之體 則禮中本有自然之和 非禮之外又加從容也 각헌채씨가 말하길, “유자는 오로지 禮의 用으로써 말했지만, 주자는 禮의 體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 禮의 用은 본래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기지만, 禮의 體를 논한다면, 禮 가운데에 본래부터 자연의 조화로움이 있으니, 禮의 밖에서 또 다시 조용함을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
2 | 有所不行하니 知和而和요, 不以禮節之면 亦不可行也니라. 그러나 행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화합하는 도리를 알아서 화합해야 하므로, 예의에 맞게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承上文而言, 如此而復有所不行者, 以其徒知和之爲貴而一於和, 不復以禮節之, 則亦非復理之本然矣, 所以流蕩忘反, 而亦不可行也. 윗글에 이어서 말하길, 이렇기는 하지만 다시 해서는 안 될 바가 있는데, 그저 和가 귀한 것만 알고 和에만 전일하여, 禮로써 그것을 다시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더이상 이치의 본연이 아니므로, 따라서 방탕함으로 흘러서 돌이킬 줄 모르니, 이 또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한 것이다.
新安陳氏曰 節卽天理節文中本然之節 신안진씨가 말하길, “절제한다는 것(節)은 곧 天理節文 중의 本然의 節로 나아간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禮之用 和是禮中之和 知和而和 是放敎和 纔放敎和 便是離却禮了 주자가 말하길, “禮의 用에서 和는 禮 안의 和이니, 和를 알아서 和하는 것은 和하도록 시키는(放敎: 使) 것이니, 조금이라도 和하도록 시킨다면, 그 즉시 禮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子曰: “禮勝則離, 故禮之用和爲貴. 先王之道以斯爲美, 而小大由之. 樂勝則流, 故有所不行者,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 정자가 말하길, “예가 우세하면(지나치면) 중도에서 벗어나므로, 그래서 예를 씀에는 和를 귀한 것으로 삼는 것이다. 선왕의 도는 이것을 훌륭한 것으로 여겨서,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하였다. 악이 우세하면(지나치면) 방탕함으로 흐르므로,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 것이다. 和가 귀한 줄만 알아 오로지 和만 추구하면서, 예로써 절제하지 못하면 이 역시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禮勝則離 樂勝則流 二句出樂記 此章本只論禮 未嘗論樂 程子特借樂字以言和字耳 신안진씨가 말하길, “禮가 우세하면 중도에서 벗어나고, 樂이 우세하면 방탕으로 흘러 빠진다는 이 2구절은 樂記에 나온다. 이 장에서는 본래 단지 禮만 논했지 樂을 논한 적은 없었다. 정자가 특히 樂자를 빌려와서 和자를 말하였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好就勝字上看 只爭這些子 禮纔勝些子便是離了 樂纔勝些子便是流了 知其勝而歸之中 便是禮樂之正 주자가 말하길, “바로 勝자 위로 나아가 본다면, 그저 이러한 것들을 다툴 뿐이니, 禮가 조금이라도 우세하다면 곧바로 중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樂이 조금이라도 우세하다면 곧바로 방탕으로 흘러 빠질 것이다. 그 우세함을 알고서 그 中道로 되돌아간다면, 바로 이것이 예악의 올바름이다.”라고 하였다.
和固不可便指爲樂 是禮中之樂 如天子八佾 諸侯六 大夫四 士二 此樂之有節處 又是樂中之禮也 便見禮樂不相離 和는 본래 곧바로 가리켜서 樂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禮 안의 樂인 것이다. 예컨대 천자는 8佾이고, 제후는 6佾이며, 대부는 4佾이고, 선비는 2佾인 것과 같다. 이것은 樂에서 節이 있는 부분인데, 또한 樂 안의 禮라고 할 수 있으니, 곧 禮와 樂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問從容不迫 如何謂之和 曰 只是說行得自然 如此無那牽强底意思 便是從容不迫 那禮中自有箇從容不迫 不是有禮後更添箇從容不迫 若離了禮說從容不迫 便是自恣 又曰 只是立心要從容不迫 不得 纔立心要從容不迫 少間 便都放倒了 且如聖人恭而安 聖人只知道合著恭 自然不待勉强而安 纔說要安排箇安 便添了一箇 누군가 묻기를, “從容不迫(조용하고 급박하지 않음)을 어찌하여 일컬어 和(조화로움)라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저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음을 말했을 뿐이다. 이와 같다면, 억지로 끌어다 붙인다는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 곧바로 從容不迫인 것이다. 저 禮 안에는 저절로 從容不迫이라는 것이 있으니, 禮가 있은 연후에 또 다시 從容不迫이라는 것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禮에서 떨어져 나오고서도 從容不迫이라고 말한다면, 곧바로 스스로 방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단지 마음을 세워서 從容不迫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세워서 從容不迫하고자 한다면, 금새 곧바로 모두 放倒(방심하여 정신이 혼미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예컨대 성인께서는 공손하지만 편안해하시는 것처럼, 성인은 그저 恭에 부합되는 것만 알아서(知道) 자연히 억지로 함을 기다리지 않고서 편안해하신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안배하려 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그 즉시 (從容不迫) 하나를 덧붙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禮之體 雖截然而嚴然 自然有箇撙節恭敬底道理 故其用從容和緩 所以爲貴 苟徒知和而專一用和 必至於流蕩而失禮之本 今人行事 莫是用先全禮之體 而後雍容和緩以行之否 曰是 누군가 묻기를, “禮의 體가 비록 확연하고 엄연하지만, 자연히 눌러 절제하고 공경한다는 도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用은 조용하고 온화하며 느슨한 것이니,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삼는 까닭입니다. 만약 헛되이 和만을 알고서 오로지 和 하나만 쓴다면, 반드시 방탕함에 흘러 빠져서 禮의 근본을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일을 행하면서, 어느 누구도 먼저 禮의 體를 온전하게 한 후에 雍容和緩으로써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고 하였다.
知和而和 却是一向去求和 便是離了禮 且如端坐不如箕踞 徐行後長者不如疾行先長者 到這裏更有甚禮 可知是不可行也 和할 줄만 알아서 和하는 것은 도리어 줄곧 가서 和만 구하는 것이니, 곧바로 禮를 떠나는 것이다. 또한 예컨대 단정하게 앉는 것은 두 다리를 뻗고 앉는 것(箕踞)만 못하고, 어른의 뒤에서 천천히 가는 것은 어른을 앞질러 빨리 가는 것만 못한 것이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더이상 무슨 禮가 있단 말인가? 이는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問伊川曰 別而和 別字如何 曰 分雖嚴而情却通 누군가 정이천에게 물어 말하길, “구별하되 조화를 이룬다는 말에서 別자는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구분은 비록 엄하게 하지만 사정은 오히려 통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問上蔡謂禮樂之道 異用而同體 如何 曰 禮主敬 敬則和 這便是 他同體處 又曰 禮主於敬 樂主於和 此異用也 皆本之於一心 是同體也 누군가 묻기를, “상채 선생(사량좌)은 禮樂의 道가 다른 用이면서 같은 體라고 말하였는데,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禮는 敬에 주안점을 두는데, 敬은 곧 和(조화로움)이니, 이것이 바로 그 體가 같은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禮는 敬에 주안점을 두고, 樂은 和에 주안점을 두니, 이는 用이 다른 것이다. 이들 모두 하나의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이는 體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和是碎底敬 敬是合聚底和 蓋發出來無不中節 便是和處 和는 잘게 부서진 敬이고, 敬은 합쳐진 和이다. 대체로 발현되어 나오면 節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和의 부분이다. 敬與和 猶小德川流 大德敦化 敬과 和는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고, 큰 덕은 도탑게 교화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先生常云 敬是合聚底和 和是碎底敬 是以敬對和而言否 曰 然 敬只是一箇敬無二箇敬 二便不敬矣 和便事事都要和 這裏也恰好那裏也恰好 這處也中節 那處也中節 若一處不和 便不是和矣 敬是喜怒哀樂未發之中 和是發而皆中節之和 纔敬便自然和 如敬在這裏坐 便自有箇氤氳磅礡氣象 凡恰好處皆是和 누군가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길, 敬는 합쳐진 和요 和는 부서진 敬이라 하였는데, 이런 까닭으로 敬을 和와 대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 敬은 단지 하나의 敬일 뿐이지 두 개의 敬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두 개라면 敬이 될 수가 없다. 和라면 곧 일마다 모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 여기가 마침 좋다면 저기도 마침 좋은 것이며, 이곳이 節度에 맞으면 저곳도 절도에 맞는 것이다. 만약 한 곳이라도 조화롭지 않다면, 이는 곧 조화로움이 아닌 것이다. 敬은 喜怒哀樂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이고, 和는 드러났지만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조화로움(和)이다. 조금이라도 敬하기만 하면 그 즉시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룰 것이다. 예컨대 敬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곧바로 저절로 하나의 무성(氤氳)하고 방대한 기상이 있게 되는 것이니, 무릇 합당한(恰好) 부분은 모두 다 和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禮樂之用相反相成 曰 且如而今對面端嚴而坐 這便是禮 合於禮 便是和 如君臣之間 君尊臣卑 其分甚嚴 若以勢觀之 自是不和 然其實却是甘心爲之 皆合於理而自和矣 누군가 禮樂의 用은 서로 반대가 되지만 서로 이루어준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말하길, “또한 예컨대 지금 얼굴을 맞대고 단정하고 엄정하게 앉는 것, 이것이 바로 禮인데, 禮에 부합하면, 곧바로 조화로움(和)인 것이다. 마치 군신지간에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아서 그 구분이 매우 엄하니, 만약 그 권세로 보자면 저절로 조화롭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실상은 도리어 달가운 마음으로 그 역할을 행하니, 모두가 이치에 맞아서 저절로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太嚴而不通乎人情 故離而難合 太和而無所限節 則流蕩忘反 所以有禮須用有樂 有樂須用有禮 此禮樂是就情性上說 서산진씨가 말하길, “너무 엄하면 인정에 통하지 않기 때문에, (禮에서) 떨어져 나와 (禮에) 부합되기 어려운 것이다. 너무 온화하여 한계와 절제가 없다면, 방탕함에 흘러 빠져서 돌아올 것을 잊어버리니, 이 때문에 禮가 있으면 모름지기 그 用에는 樂이 있어야 하고, 樂이 있으면 모름지기 그 用에는 예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악은 인정과 본성 위로 나아가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有子論仁論禮 皆只說得下面一截 上面一截 須待程子朱子爲發明之 쌍봉요씨가 말하길, “유자가 仁을 논하고 禮를 논함에 있어, 모두 그저 하면의 한 부분만 말하였을 뿐이라서, 상면의 한 부분은 모름지기 정자와 주자가 그것을 드러내어 밝혀주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范氏曰: “凡禮之體主於敬, 而其用則以和爲貴. 敬者, 禮之所以立也; 和者, 樂之所由生也. 若有子可謂達禮樂之本矣.” 범씨가 말하길, “무릇 예의 體는 공경에 주안점을 두고 있고, 그 用은 곧 和(조화)를 귀한 것으로 삼는다. 공경이라는 것은 예가 설 수 있는 기초고, 조화라는 것은 음악이 생겨나는 바탕이다. 유자 같은 경우는 예악의 근본에 통달했다고 일컬을 만하다.”라고 하였다.
范氏: 名祖禹 字淳夫 成都人 이름은 조우이고, 자는 순부이며, 성도 사람이다.
朱子曰 自心而言 則心爲體 敬和爲用 以敬對和而言 則敬爲體和爲用 大抵體用無盡時 只管恁地推將去 주자가 말하길, “마음으로부터 말하자면, 마음은 體가 되고, 敬과 和는 用이 된다. 敬을 和와 대비하여 말하자면, 敬은 體가 되고, 和는 用이 된다. 대저 體와 用은 다할 때가 없으니, 그저 이렇게 장차 미루어 나갈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和固不可便指爲樂 然乃樂之所由生 和有樂底意思 和는 본래 직접 가리켜서 樂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리어 樂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터전이니, 和에는 樂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愚謂嚴而泰, 和而節, 此理之自然, 禮之全體也. 毫釐有差, 則失其中正, 而各倚於一偏, 其不可行 均矣.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엄정하되 태연하고, 온화하되 절제함이 있는 것, 이것은 이치의 자연스러움이자 禮의 온전한 體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곧 그 中正(중도의 바름)을 잃게 되지만, 각자 어느 한편에 치우친다면, 그것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新安陳氏曰 嚴謂禮之體 嚴泰謂自然之理及從容不迫 此指上一節 和謂知和之和 節謂以禮節之之節 此指下一節 程范借樂字以形容和字 朱子要歸之論 只言禮而不及樂 的矣 嚴而泰 和而節 六字斷盡一章大意 신안진씨가 말하길, “嚴은 禮의 體를 말하고, 엄정하되 태연한 것은 자연의 이치 내지 從容不迫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위의 한 절을 가리킨 것이다. 和는 온화할 줄 안다는 구절의 和를 말하고, 節이란 禮로써 절제한다는 구절의 節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아래의 한 절을 가리킨 것이다. 정자와 범조우는 樂자를 빌려다가 和자를 형용하였지만, 주자의 돌이켜야 한다는 논리는 그저 禮만 말하였을 뿐 樂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적확한 것이다. 엄정하되 태연하고, 온화하되 절제한다는 6글자는 章 하나의 큰 뜻을 전부 단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註前一節分體用 後一節獨說全體 何也 前章是 因有子言用而推原其體 後總說禮之全體 則包前所謂體用者 在其中矣 如天高地下合同而化 便是嚴而泰 如四時陰陽沖和有節氣有中氣 此便是和而節 此固自然之理而禮之全體 如此也 然禮之全體 嚴者未嘗不泰 人則有嚴而失其中者矣 未免倚於嚴之一偏 不可行矣 禮之全體 和者未嘗不節 人則有和而失其正者矣 未免倚於和之一偏 亦不可行矣 一偏字與全體字相反 夫其體之全也本如此而人之偏也乃如此 人之於理有毫釐之差 則失之故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의 앞 한 절은 體와 用을 구분하였는데, 뒤의 한 절은 오직 온전한 體만을 말하였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앞 장은 유자가 用을 말한 것으로 인해 그 體를 미루어 근원을 찾은 것이고, 뒤에서는 禮의 온전한 體를 총괄적으로 말하였으니, 앞의 이른바 體와 用이라는 것을 포괄하여 그 안에 둔 것이다. 예컨대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데 함께 합하여 변화하면, 이것이 바로 엄정하되 태연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계절과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 節氣(24절기)도 있고 中氣(매월 중반에 있는 절기)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화롭되 절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자연의 이치이면서 禮의 온전한 體가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禮의 全體(온전한 체)에 있어서 嚴이라는 것은 일찍이 태연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사람의 경우에는 엄정하면서도 그 中(중용)을 잃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는 嚴이라는 한 편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禮의 全體에 있어서 和라고 하는 것은 일찍이 절제하지 않은 적이 없으나, 사람의 경우에는 조화롭되 그 正(올바름)을 잃는 자가 있는 것이다. 이는 和라는 한편에 치우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이 역시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一偏이란 글자는 全體라는 글자와 서로 반대가 되는데, 무릇 그 體의 온전함도 본래 이와 같은 것이고, 사람의 치우침도 마침내 이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이치에 있어서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다면, 그것(中正)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