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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 아리랑의 어원
아리랑의 기원과 어원에 대해 알아내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에 내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하였는바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신한다. 이 글이 다른 많은 '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설 중의 평범한 하나로 치부되고 잊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진심이 담긴 조그만 노력이 왜곡을 바로 잡고 인류가 빛을 발하는데 미미하나마 보탬이 된다면 더 바랄게 없다.
지금 세상에는 왜곡되고 변질된 종교들과 지식, 역사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인류가 '일신 일일신 우일신'하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새로운' 마음을 유지했다면, 지금의 세상이 이데아(유토피아, 지상천국)일 것이다. 지금 처럼 왜곡되고 변질된 문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에, 아리랑의 올바른 뜻을 알려 조금이나마 인류의 본성을 일깨우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일신 일일신 우일신'의 참뜻은 <날마다 발전한다>가 아니라 <순수함을 지킨다>이다. 항상 거울(마음)을 닦아서 때가 끼지 않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롭다'는 교체가 아니라 때를 벗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리랑'은 우리민족 속에 아주 깊게 배어있지만, 그 누구도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애창하고 있을 뿐이다. 아리랑이 다른 노래들과 다르게, 유달리 널리 깊게 우리민족(?)에게 애창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누구에게 물어 보라! 아리랑을 애창하는 우리민족이 그 어의를 모른다는 것은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왜 모르는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민요들과는 달리, 왜 유독 아리랑이 애창되고 우리 민족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가? '아리랑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외국인들에게, 얼굴을 붉히며 '우리도 모른다'고 대답하면서도 왜 아리랑을 애창할까? 우리는 그 의미도 모른 채 애국가보다 더 아리랑을 애창한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 화와이의 재미교포가 그 의미도 모른 채 다른 것은 잊어버려도 아리랑은 기억한다.
아리랑의 '가사'는 일반 백성들의 사사로운 넋두리가 대부분이지만, 분명히 그 속에는 우리 민족사가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그들 삶 속의 고통이나 슬픔, 기쁨 등을 아리랑 속에 집어넣어 노래해 왔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도 슬픈 일이 있을 때도, 민중의 힘을 결집시킬 때도, 불의와 맞설 때도 항상 아리랑을 애창한다.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 민족과 동거동락해 온 아리랑이다.
정말로, 아리랑이 남녀의 이별을 노래한 것일까? 왜, 그러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들, 인생의 고비들) 일들에 남녀의 이별을 노래한 아리랑을 애창할까? 왜, 그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 아리랑을 애창할까? 아리랑은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성격을 띤 노래로서, 민족이나 그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단결시켜주는 힘이 되어준 노래였다. 아리랑은 단순히 다른 민요들과 함께 여러 민요들 중에 하나로 치부할 수 없는 특별함과 매력을 지니고, 우리민족의 운명과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러한 아리랑의 참뜻을 밝혀보려 한다.
아리랑의 어원을 분석하는데 있어 한가지 짚고 넘어 갈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말은 비교적 순수하게 수 천년동안 변형 없이 잘 보존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가장 큰 변화는 후기조선(임란 후)과 일제시대 때로 추정되고 있다(이것은 일반, 학계에 대체적으로 인정받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리랑의 뜻을 잃어버린 결정적 시기는 그 때인 것 같다. 어쩌면 훨씬 더 오래 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다른 우리말과는 달리 아리랑은 일제시대가 되기 전인 조선말에, 이미 그 어의를 잃어 버린 것으로 판단된다. 혹자는 일제시대로 볼 수도 있으나, 조선말 조선에 들어온 서양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아리랑의 어의를 몰라 그 어의를 추정하는 대목, 일제시대때(1930년대 전후)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를 반증한다. 또, 에벵키족의 언어에서 보이는 유사단어나 인도의 '아리람 스리람'神, 수메르어나 아람어에서 보이는 유사단어의 어원이나 어의가, 그들 나름대로는 잘 인식하고 있다 여기지만, 그들도 확실하게 그 어의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아리랑의 어의를 잊어 버린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아리랑의 어원이 조선말(1896년, 헐버트) 이전에 이미 그 어의를 상실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여러 정황이나 기록상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임란전후, 임란전)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리랑의 기원은 까마득하게 오래 되었을 수 있다. 그 기원이 적어도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이 어원을 밝히는데 있어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 현재의 우리말(한자어가 아닌 우리말, 한자나 한자어도 우리의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한자어에 그 기원을, 또는 단 하나의 역사적인 상황(아랑전설 혹은 경복궁 등등)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상황이 있기 전부터 아리랑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기존 아리랑의 노랫말을 자유로이 개사 하여 그 사건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나는 수차례 우리의 역사를 논하려면 종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또, 동이가 단순한 정치세력(민족, 국가)이 아니라 종교적 특수집단이라 밝혔었다. 그리고, 그 동이들이 쓰던 언어인 동이어가 현 한국어라고 말했다. 모든 언어는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용어에서 파생, 확장된다. 더구나, 종교집단인 동이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동이의 후예인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의 어원도 당연히 종교적인 접근을 해야만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와 항상 같이 해 왔던 아리랑은 평범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 민족 그 자체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또, 아리랑을 해석(?)하는데 있어 현 우리 말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혹자는 우리 말과 유사한 외국어(에벵키어, 타밀어, 아람어, 수메르어 등등)에서 그 어원이나 의미를 찾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이다. 그들이 참고는 될 수 있어도 주가 될 수는 없다. 아리랑을 현재도 열창하고 있는 민족이 누구인가? 다시 말해, 아리랑을 부르던 동이의 직계 후예인 우리의 언어에서 그 어원이나 의미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아리랑을 해석하는 데 있어 주가 되는 언어는 현 한국어가 되어야 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는 아리랑의 어의를 잃어버리고 그 뜻을 밝히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 있다. 한반도(남북한과 교포들을 포함한 한국어를 쓰는 한민족)에서 그 어의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에벤키어와 만주어, 몽골어 등을 우리말과 비교하여 밝히려는 주장이나 아리안의 언어에서 차용되었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그것까지는 바람직하다. 그런데, 왜 그들의 어의를 고스란히 우리말(아리랑)에 적용하려 하는가? 그들은 '아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리랑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우리 뿐이다. 아리랑의 '어의'를, '아리랑'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그들의 언어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아리랑을 부른 동이(우리 민족)의 주변민족인 그들이, 우리의 영향을 받아 아리랑의 '어의'를 왜곡수용할 가능성은 왜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인가? 아리랑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어의를 모르는데, 가지고 있지도 않은 타민족(우리에게서 분화된, 교육 받은 민족)이 알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왜, 현재의 우리말에서 해석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아리랑을 해석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에 중심을 두고 현재의 우리말과 가장 비슷한 일본어를 비교하고, 또 우리말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수메르어와의 연구, 그 다음에 기타 주변어와의 비교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종교에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을 잊으면 절대로 안된다.
아리랑은 남녀의 애정과 이별을 노래하거나 삶의 고달픔 등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노래가 아니다. 사실, 넓게 해석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아니다. 먼저 지금까지 알려진 아리랑에 대해 정리를 하고 아리랑에 대한 풀이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지금 여러 종류의 아리랑이 전해지고 있지만, 대표적인 아리랑은 신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아라리), 밀양아리랑 등을 꼽을 수 있다. 신아리랑은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서, 일제시대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미 전래하던 아리랑(경기지방 혹은 전국)을 서양식으로 편곡하고 개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현재 학계에서도 신아리랑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되어있지 않다) 진도아리랑과 정선아리랑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왔다고 보이고, 밀양아리랑은 여러 가지의 이본이 보이고 있다.
아리랑에 있어서 '노랫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후렴(여음, 전렴, 앞소리)에 대해서 논하려고 한다. 아리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이 후렴 때문이다. 노랫말은 따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과 다르지 않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을 자유롭게 창작 개사하여 노래했다. 흑인 음악인 '랩'과 같은 즉흥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렴은 거의 변함 없이 전래되었다. 간혹 변형되거나 왜곡되기도 하였고 색다른 모습(사투리)을 띄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기본형은 동일하다. 따라서, 아리랑은 후렴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할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아리랑(민요)은 서양노래와 달리 후렴(後斂)이 뒤에 오지 않고 앞에 온다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전렴(前斂)'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음악가들은 후렴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한 아리랑의 후렴들을 살펴보고 해석(?)해 보면, 우리 민족의 종교성과 잊혀진 역사를 알아가는 데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그럼, 먼저 네가지 아리랑의 후렴을 살펴보자!
*아리아리랑 스리(쓰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진도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신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주게 [정선아리랑]
*아리당닥 쓰리당닥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어절씨구 잘 넘어간다아리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랑 얼시구 노다가게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밀양아리랑]
(사실, 밀양아리랑 뿐만 아니라 다른 아리랑들도 이형(異形, 이본異本)들이 많이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자세히 다룰 역량이 없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만 취했다.)
여기서 다룰 곡은 신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과 밀양아리랑(3본)은 능동형이 아닌 수동형으로서, 사견으로는 후대의 변형으로 보인다. 또, 밀양3본은 다른 아리랑(진도와 정선)을 짜집기한(합쳐 놓은) 것처럼 보이고, 밀양1,2본은 비교적 변형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누가 누구를 모방하거나 짜집기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결국, 아리랑의 최초 원본이 있었다 가정하면, 현 모든 아리랑은 그 원본을 모방하고 짜집기, 변형 한 것일테니 말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리랑'을 해독(?)해 보겠다. 먼저, 신아리랑의 후렴을 살펴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신아리랑에서는 '아리랑, 아라리요, 고개로, 넘어간다'의 네개 단어만 그 의미를 파악하면, 아리랑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아리랑'은 <알+이랑>이다. '알'은 태양(太陽, 神, 하느님)을 말한다. '이랑'은 사전적의미로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붙어, 둘 이상의 단어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이어 주는 접속 조사]이다.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붙을 때는 "우리랑, 너랑 나랑, 아빠랑, 친구랑" 처럼 '랑'이 쓰인다. '이랑, 랑'은 <~과 함께 (하는), ~이 함께 (하는), ~이 함께 (해주시는)>의 뜻이다.
즉, '아리랑'은 [알이랑 => 아리랑]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이 함께 하는', '하느님이 함께 해주시는'의 의미이다.
혹여, 아리랑이 <아리+랑>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으나 <아리+랑>은 아니다. 물론, '아리'라는 단어가 있고 그 어원도 알에서 연유하여 '알'과 뜻이 유사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 상 또는 '아리'의 의미로 보아 '아리랑'은 <알+이랑>이다.
'아라리요'는 <알+아리+요>이다. '아리'는 [아들, 아이, 아지, 삼신, 사람]의 뜻이다. 원래, 아리의 의미는 '빛, 광선'이다. 태양인 알에서 발산되는 '빛줄기'가 아리이다. 곧, 알은 아빠가 되고 아리는 그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리]는 '가다'라는 뜻의 말이라고 한다. 즉, 아리는 <아ㄹ+리>로서 '알이 가다' 또는 '알에서 가다'는 뜻의 빛줄기를 의미한다. 또, race는 [인류, 민족, 종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원래 의미는 광선을 가리킨다. 광원에서 '뻗어 나오는(나가는) 빛줄기'를 race라 한다. 역시, 빛줄기가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리ARI[ari, ali]'가 후대에 'R'을 묵음으로 발음하면서 '아이ARI[ai]'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곧, '아라리(알아리)'와 '아라이(알아이)'가 같은 말이라는 말이다.
또 아리랑의 별칭인 아라리(강원도 지역)가 태백지역에서는 '아라레이'로도 불려지고 있는데, '아이'의 고어가 '아해'이다. 즉, '알+아레+이'는 '알+아해+이'의 변형으로 추측된다.
[재미있는 것은 '아라이'라는 말이 일본어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름이나 회사이름으로도 쓰이고 있는데, '아라이'는 일본어 '아라우(씻다, 닦다)'의 명사형이라고 한다. 일제시대때 朴씨들이 '아라이(新井)'로 창씨개명을 많이 했다고 한다. 朴이 '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박씨들이 '아라이'로 창씨한 것은 당연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물론, '아라이'의 의미가 '아라리'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에게 물로 세례하는 장면이다. 우리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종교적인 의미로 목욕재개를 한다. '그리스도'의 의미도 '기름 부음 받은 자'이다. 물과 기름이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지만 그 행위가 모두 비슷하다.
일본 전통 쌀과자(전병)인 탄세이야끼를 '아라레'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모른다. '아라레이'와는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재미 삼아 적어 본다.]
'요'는 ['이다, 아니다'의 어간에 붙어, 사물이나 사실을 나열할 때에 쓰이는 연결 어미]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라리요의 뜻은 '하느님의 아들이요'이다.
'고개'는 어떠한 위기(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상황)나 고비를 가리킨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해 넘어야 할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는 난관들이나 구도자가 깨달음의 문턱에서 만나는 고난을 말한다. 嶺을 고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인체의 (뒷)목덜미를 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아리랑고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아리랑'과 '고개'를 하나의 단어로 착각하여, 어떤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의 이름이 아리랑이라고 생각해서 '아리랑고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아리랑과 고개는 뛰어 쓰기를 해야 된다.
'넘어간다'는 말 그대로 '극복하다, 통과하다, 이겨내다'의 의미이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넘어간다'가 능동형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 의존하는 수동형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문장이다. 다른 아리랑에서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노래한 부분은, 아무래도 후대에 왜곡(변형)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신아리랑의 후렴부분 전체를 해석해 보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는,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는, 우리는] 고비를, 이겨낸다
우리는 (신)아리랑이 슬픔(애환, 이별, 한, 고통)을 노래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은 슬픔과 고통이 아닌 비장함이 스며 나온다. 고비를 넘기 위해 스스로를 자각(하느님의 아들 이라는 인식)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곡의 내용을 모르고 언뜻 들으면, 아리랑은 슬픔과 이별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려서 그러한 오해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신아리랑은 슬픈 노래가 아니라 두주먹을 불끈 쥐고 힘있게 전진하는 희망의 노래이다.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난관들과 싸울 때, 한 걸음 전진해 나가기 위해 부르는 노래이다. 구도자가 깨달음의 문턱에서 유혹과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는 주문(명상, 자기최면)이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항상 아버지인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고 고통스럽겠는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편 4절 )
신아리랑과는 성격이 조금 다른 진도아리랑을 살펴 보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 아라리가 났네
여기서는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났네, 음--'을 해석해 보면 진도아리랑의 정체가 밝혀질 것이다.
'아리아리랑'은 '아리랑'의 반복강조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아리아리랑'의 '아리'가 아리랑의 반복강조인가? 아니면, '아라리'의 '아리'와 같은 단어인가?>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라리'의 '아리'가 아닌 '아리랑'의 어간(알이)을 반복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아라리의 아리라면 댓구로 쓰이는 '스리(쓰리)스리랑'의 스리가 따로 발견되어야 하는데, '알스리'나 '스라리'와 같은 단어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스리'가 독립된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세계 각 제어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반복강조가 아닌 '아리'로 해석하면 뒤에 오는 '아라리'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강조로 보면 자연스럽게 해석이 된다. 수 많은 아리랑에서 '아리'가 '아라리'가 아닌 단독으로 쓰인 예가 없다. 즉, '아리'라는 글자는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로 쓰였지 '아리'로 쓰인 예가 없다는 말이다. 그 뜻은 "하느님이 하느님이 함께 (하는)"이다.
또, 아리랑이라는 단어는 거의 모든 아리랑에서 발견되지만 스리랑은 그렇지 않다. 일부에서만 쓰여지고 있다. 아라리 역시, 거의 모든 아리랑에서 발견된다. 곧, 아리랑에서 아리랑, 아라리라는 단어가 스리랑 보다 더 중시되고 있고 빠져서는 안될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거의'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리랑이 아라롱, 아러렁 등의 이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리스리랑'은 먼저 '스리랑'의 의미를 파악해 보면 된다. 우리는 스리랑(쓰리랑은 경음화 현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전(?표준어)은 '서리랑'으로 추측된다. 혹자는 ㅡ발음을 못하는 경상도 사람들이 ㅓ로 발음해서 그렇다고 말하나(은혜 -> 언혜), 서리랑으로 발음하는 아리랑은 경상도 지방의 아리랑이 아닌 진도아리랑이나 정선아리랑이다. 결국, '스리랑'의 원어는 '서리랑'으로서 '설+이랑'이다. '설'은 '삼신'을 말한다.
'설'의 의미가 좀 복잡하다. 설이 삼신이라고 했는데, 그 삼신은 누구를 말하는가? 일신으로서의 삼신인가 또는 사람으로서의 삼신인가, 그것도 아니면 최초 원인자로서의 사람인가, 환인(환웅, 단군)을 가리키는가? 사실, 네가지의 의미 모두 다 맞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의 삼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라리'라는 단어가 뒤 따르고 있고 아리랑과 댓구를 이루는 스리랑이 아리랑과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로서의 뜻을 지녀야만 문맥상의 흐름이 이어진다. 따라서, 설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럼, 환인(동이의 왕)을 가리키는가? 물론, 후대에 그렇게 왜곡되어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삼신일체 또는 삼위일체는 인간 영혼육(천지인)의 일체 또는 神의 전지, 전능, 편재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삼신)의 원래 의미는 환인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설은 삼신으로서의 一神(Directive Principle)을 가리키거나 최초원인자(모든 인류의 아버지, Lord God, 아담)로서의 삼신(사람)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위의 네가지 의미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나의 의미로 갈무리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태양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서의 삼신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스리스리랑'은 '삼신님이 삼신님이 함께 하는'이라는 뜻이다.
'났네'의 의미는 말 뜻 그대로 '태어나다, 부활하다'이다. 여기서 '부활하다'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되다', '깨달음을 얻다' '부처가 되다'는 의미이다. '났네'를 꼭 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육체적인 탄생, 신생아를 말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식의 낳다는 아니다. 났네의 어원을 '낳다'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났네의 어원은 '나다(없던 것이 생겨나다, 태어나다, 출생하다, 자라다, 겉으로 나오다.)'이다. '낳다'나 '나다' 그 둘이 같은 어원을 가진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분명 그 뜻은 서로 다르다. 그 앞에 오는 '아라리(가)'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주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우리말에서 목적어가 주어 앞에 오지 않는다. 반면, 주어를 수식하는 수식어가 앞에 올 수 있다. 그래도, 도치법이라 우기면? 정통이 사라져 미신이 판을 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음음음'은 흥에 겨운 콧소리로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진도아리랑의 전체를 해석해 보겠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 아라리가, 났네
*하느님이 하느님이 함께 (하는), 삼신님이 삼신님이 함께 (하는),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났네, 하느님이 함께 (하는), 음--, 하느님의 아들이, 태어났네
실제, 진도아리랑은 흥에 겨워서 노래한다. 진도아리랑 역시 신아리랑과 마찬가지로 가사와 곡조가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우리는)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네(그리스도로 부활했네, 부처가 되었네)!" 이 얼마나 기쁨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수행자들이 자신의 본체를 자각해 나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라리'는 힌두교의 아트만, 기독교의 그리스도와 같은 뜻을 지닌 단어로서 하느님의 지상강림, 개체화, 삼신화를 말한다. 따라서, 진도아리랑은 찬송가이면서 '생일축가'이기도 한 것이다. 글쎄, 내 생각에는 '해피 버스데이'라는 노래보다 진도아리랑을 회갑연이나 생일잔치때 부르면 더 어울릴 것이라 여겨진다.
수많은, 아리랑의 어원을 밝힌 설들 중에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내가 알아 본 바로는... 실제, 인도에는 쓰리람이라는 회사도 있고 아리람이라는 사원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아리람, 쓰리람은 인도에서는 남인도에서 많이 볼수 있는데, 남인도 특히 타밀나두지역에는 여행지로 아주 유명한 '스리랑감' 템플이 있다고 한다. 뒤에 붙은 '감'은 접미사 'am'으로서 따밀어 지명 등의 뒤에 흔히 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앞의 '스리'는 존경하는 사람앞에 붙이는 존칭이라 하고 영어로 Mr.라 흔히 말하지만 그 보다는 좀 더 존칭이라 한다. 가운데의 '랑'은 '람'으로서 인도인들이 존경하는 '라마'신을 뜻한다 한다. 타밀나두 여기저기에는 '아리람'이라는 사원이 많이 있는데, 여기의 '아리'도 '스리'처럼 위대한 또는 존경하는의 뜻을 가진 존칭으로서 훌륭한 사람이나 신의 이름 앞에 붙인다는 점에서 '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결국, 아리람은 위대한 라마신 또는 존경하는 람의 뜻이며 쓰리람 역시 존경하는 라마신, 위대한 람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리고, 인도인들의 위대한 신 '람'을 모시는 사원이름이 아리람, 스리람이라 한다.(이운용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우연인지 몰라도, '아리람 쓰리람'은 '아리랑 쓰리랑'과 발음이 비슷하다. 아니, 비슷한게 아니라 똑같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인도인(타밀인)들이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그들이 정말로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세계 각 제민족들이 그들의 언어나 문화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도인들이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리람 쓰리람'은 '하느님이 함께, 삼신님이 함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수 있다. 인도인들이 옳든 내가 옳든지 간에 둘 다 神과 관련된다는 공통점은 무시할 수 없다.
왜, 모든 것을 다른 민족이나 문화에서 우리에게 유입된 것으로만 바라보는가? 반대로, 우리에게서 다른 민족이나 문화로 이식되었다고 바라볼 수는 없는가? 특수종교집단(동이)이 부르던 노래를 접한 주변민족(인도인, 드라비다인)이 그 정확한 어의를 알지 못하고, 어설프게 흉내내어 섬긴 신이 '아리람 쓰리람'神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인가? '아리람 쓰리람'신은 영남의 어원, 가야와 허황후, 인도동북부어(타밀어)와 한국어의 비교, 아쇼카왕과 아요디아 등과 관련하여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랑은 수행자들의 수행과정에 있어서 '화두', '명상의 주제', '마음을 계속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수행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 조상들은 종교가 모든 것이었다. 생활이 종교였고, 삶이 곧 하느님께 나아가는, 하느님과 하나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위의 두 아리랑의 해석을 바탕으로 다른 아리랑들도 쉽게 그 뜻을 알아 낼 수 있다. 단, 오랜 세월동안의 시간에 의해 그 진정한 의미가 왜곡, 변형이 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제는, 왜 아리랑(후렴, 앞소리)에 다양한 종류의 가사들이 붙여져서 노래되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왜 아리랑이 남녀의 이별을 노래하기도 하고 대학가나 파업현장에서 불려지기도 하면서, 또 민중의 일상생활에서도 애창되는지!
아리랑은 우리의 삶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머리로는 그 뜻을 모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항상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민족은 애국가는 몰라도 아리랑은 알고 있는 것이다. 아리랑은 찬송가이다. 찬송가를 종교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비종교적(과학적, 서구적, 외세적)으로 접근하는데, 그 찬송가의 참 의미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아리랑은 '神을 찬양하고 인간의 自覺'을 노래한 동이의 '찬송가'이다. 아리랑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민족(집단)이 부르던 찬송가였었다. 그들의 모습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들의 잔재(아리랑, 유적, 유물, 가르침 등)가 우리 속에 남아 있지만, 우리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르쳤던 가르침들이 선명히 남아 있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들의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우리가 그들의 가르침을 안다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無知)한 후손들이 스스로의 모습을 부정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없애고 있다. 그들의 발자국은 선명히 찍혀서 원하는 자들에게 항상 공개되어 있다. 우리가 찾지 않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가르침은 항상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발자국은 뒤따르는 자들에 의해 더욱 선명히 찍히고 결국에는 대로(大路)가 될 것이다. 그리하면, 뒤에 오는 수많은 이들이 더 쉽게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