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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준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1874년 장사 차 만주로 건너갔다가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로스 목사와 매킨 타이어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3년 동안 우장(牛荘)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던 그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신앙을 고백하고, 1876년 이웅찬, 이성하, 김진기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자가 된 백홍준은 동료와 함께 로스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문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1882년에는 최초의 번역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심양에서 문광서원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다. 그리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서]라는 표제가 붙은 신약성서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완역된 성경으로 흔히 [로스번역](Ross Version)이라고 알려져 있다. 백홍준은 1882년 간행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로스와 웹스터를 동반하여 서간도를 찾아가 전도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1883년 백홍준이 로스 목사로부터 권서인(勸書人: 순회하며 성경이나 신앙 서적을 판매하고 선교사들을 돕고 때로는 통역이나 번역을 함)의 직임을 받아 활동할 때의 일이다. 간행된 복음서를 등에 지고 국내에 들어올 때 성경책이 발견될 위험이 없어야 했다. 그는 밤새 성경을 한 장씩 낱장으로 말아서 노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안전할 때 ‘노끈 성경’을 정성껏 풀어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이 귀중한 성경을 가지고 의주를 비롯하여 강계, 삭주 등지 일대를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반년이 못되어 10여 명의 신자가 그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게 되었다. 이 의주교회는 정식으로 된 조직교회가 아닌 일종의 기도처였지만 예수님 이름으로 모인 국내 최초의 집회였다.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놓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로서 백홍준과 서상륜의 두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새문안교회를 발족하였다. 백홍준 장로는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에게 의주에 와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드디어 언더우드는 1889년 결혼을 구실로 하여 의주까지 신혼여행 허락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의주에 온 언더우드는 세례받기를 희망하는 100여 명의 신자가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세례 문답을 거친 후 33명을 선발하여 배에 태우고 압록강 한가운데로 나아가 중국영토에서 물을 떠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1890년 백 장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개최한 최초의 신학반에서 공부하였고 그 후에 서상륜, 최명오 등과 함께 한국교회에서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선교사 사역을 대신하는 조사(助事: 성례를 제외한 목회의 일을 담당하는 직분으로 아직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목회자 즉 현재의 전도사이다)로 임명을 받았으며 평북 일대에서 개척의 중책을 맡았다. 그가 순교한 1893년부터는 그의 사위 되는 김관근 조사(후에 목사가 되었음)가 의주교회 시무를 인계받았다.
▲1887년 로스가 신약성경을 번역했을 때백홍준은 성경번역에 동참했다.
백홍준 장로는 한국인 최초 7명 목사 중의 한 사람인 한석진에게도 전도하여 1891년 마펫 선교사가 의주에 들렀을 때 김정호, 김석례 등과 함께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온갖 환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전도인의 삶을 충직하게 걸어가는 백홍준을 「백사도」(白使徒, Apostle Paek)라 불렀다.
한편 백홍준을 길잡이로 하여 양인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서 관가에서는 백홍준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1892년 그는 평안감사 민병석의 지시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백홍준은 목에 칼을 쓰고 2년 동안 고초를 다 겪다가 몸이 쇠약해져 1893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인 개신교인으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조선 땅은 백홍준 전도사의 땀과 눈물과 피를 잊지 말아야 한다.
김헌곤 목사 '한국교회 순교자 열전'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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