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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히브리서 제11강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히12:1-29
요절/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신앙 경주를 하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신앙 경주를 갓 출발한 분도 있고 신앙 경주의 한참을 뛰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경주가 쉽지만은 않은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주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앙 경주에서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완주함으로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위대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1절에서 이런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의 경주를 하는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홀로 경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증인들’은 단순히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신앙 경주를 힘껏 감당했고, 마침내 하나님의 상을 받은 위대한 신앙 선배들입니다. 자신들이 달려간 길, 또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생명과 진리의 길이요, 영광의 길임을 목숨 걸고 증언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총동원해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와 함께 경주하고 있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우리 UBF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세계 교회의 수많은 성도가 이 길을 함께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응원과, 함께 뛰는 믿음의 동지들을 생각할 때 힘을 내 신앙 경주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를 생각해보십시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하려고 팬티와 런닝만 입고 신발도 최대한 가벼운 것을 신고 심지어 머리도 짧게 자릅니다. 모든 부분에서 가장 잘 달릴 수 있도록 제작된 기능성 복장을 착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경주를 하면서 무겁게 하고 얽매이게 하는 죄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신앙 경주에서 뒤처지도록 무겁게 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탐심과 염려입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을 많이 가지려다 보면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 경주를 뒤처지도록 자꾸만 뒷덜미를 잡습니다. 또 생활의 염려에 짓눌리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을 내다가도 전공, 직장, 물질, 노후, 자녀교육, 건강 문제 등의 염려에 부딪히면 주와 복음 역사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탐심과 염려 부분에서 영적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욕이나 세상 쾌락, 죄악 된 습관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시선이 하나님 없는 세상을 향할 때 찾아옵니다. 세상을 향할 때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찾아와 우리를 얽매이게 하고 신앙 경주를 방해합니다. 탐심과 염려가 우리 심령을 무겁게 하고 정욕과 세상 쾌락이 신앙 경주를 방해합니다. 우리는 신앙 경주를 방해하고 무겁게 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버려야 합니다. 무거운 죄 짐을 진 채로는 멀리 갈 수도 없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죄 짐을 내 의지로만 벗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연약함과 죄성,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애통해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매우 중요한 경주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경주입니다. 우리 주님의 상을 향한 경주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일평생 달려야 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단거리 경주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면 금방 골인점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장거리 경주인 신앙 경주는 아무리 달려도 골인점이 쉽게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도중하차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믿음의 경주에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 경주는 쉽사리 끝나지 않습니다. 죽을 것만 같은 마라톤 경주도 아무리 늦어도 몇 시간 내에는 끝납니다. 하지만 신앙 경주는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끝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늘 반복되는 생활에 지치고 피곤할 때가 있습니다. 점차 신앙적 감동도 희미해집니다. 웬만해서는 감흥이 없습니다. 또 세상 유혹과 탐욕이 다가오고, 내 생각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런저런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을 때, 신앙생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 될 때, 아니,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적 인내는 무작정 버티기가 아닙니다. 신앙에서 우리의 인내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 11절을 말합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세상에서는 인내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공할 확률은 조금 높아질지 몰라도 어느 누구도 확실한 인내의 열매를 보장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인내하며 감당한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우리의 신앙 경주는 인내하기만 하면 결과가 확실히 보장된 어느 누구나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있는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경쟁해 받는 상이 아니라 신앙 경주를 함께 한 모든 분이 함께 하늘의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주를 마치는 그날까지 우리가 인내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가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상을 함께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잘 감당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무엇보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주에 있어 바라봐야 할 목표는 매우 중요합니다. 목표를 놓치게 되면 달려갈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신앙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목표로 삼으면 자연스럽게 세상 욕망이 찾아옵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탐욕을 갖게 합니다. 남들이 가진 것들을 가지지 못하면 우울하고 뒤처지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이런 세상은 우리의 올바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목표는 어떻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영웅들보다 더 탁월한 ‘믿음의 주’입니다. ‘믿음의 주’는 ‘믿음의 창시자, 믿음의 개척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믿음의 완성자로서 인류 구원역사를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부여해주시고 우리의 믿음의 길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최종 완성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난 믿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 앞서 믿음의 경주를 하셨고 우리가 그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올 수 있도록 모든 면에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1세기에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중죄인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었기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진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과 수치, 상처와 저주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참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앞에 있는 기쁨’, 즉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눈을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의 보좌에 고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 뒤에 있는 하늘의 영광을 바라봤기 때문에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같은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을 때 지금 내 앞에 있는 고난의 십자가를 인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즐거움을 생각할 때 고난의 십자가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데 애매한 고난을 겪게 되면 피곤한 생각이 들고 낙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3).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의 교만과 무지와 불순종과 허물을 오래 참아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덧입고 신앙 경주를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히브리 성도들은 이미 고난을 경험했고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어 더 큰 환난이 예상되는 시점이었습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고난으로 인해 신앙적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죄’는 1절에서 살펴봤던 일반적인 죄와는 달리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위협적인 세력으로 신앙의 회의를 품고 배교하게 만드는 그런 요소들을 말합니다. 당시 교회는 복음을 영접한 후 모욕과 멸시, 재산 강탈, 투옥 등의 온갖 고난을 감당해왔지만 아직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시험을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가능성이 보이고 더 고통스러운 환난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게 되자, 많은 사람이 머뭇거리고 뒤로 발을 빼며 신앙 경주를 포기하고 배교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교회가 주와 복음을 위해 피 흘리기까지 견디며 고난받을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또 성도들의 고난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겪는 고난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5,6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여기 ‘징계’는 영어로 ‘disciplin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꼭 죄의 결과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이 잘 성장하도록 부모가 자녀의 행동을 훈련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성도들을 훈련해 더욱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지만, 생활 습관이나 내면은 여전히 노예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해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일 양식을 말씀대로 순종해 받아먹는 훈련, 안식일 훈련, 감정과 육신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따라 사는 훈련 등을 비롯해 많은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런 훈련들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스러운 자녀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도 이런 훈련이 없다면 사생아이지, 참 아들이 아닙니다(7,8).
과거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고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옛 습관과 생각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몸과 마음은 아직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민간인으로 살다가 군대에 입대하면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몸과 마음에 새로운 습관과 마음 자세를 익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습관과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기에 합당하게 빚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주시는 고난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맞게 변화되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통한 훈련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고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9).
10절을 보십시오. 성도들이 겪는 고난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육신의 부모도 자식을 위해 징계하고 훈련하지만 감정대로 할 때도 많습니다.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또 자존심 때문에 징계하기도 하고, 자기의 야망을 위한 목적으로 훈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완벽한 계획 가운데 온전히 우리 유익을 위해 훈련하십니다. 시편 119편 67절과 71절은 말씀합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더욱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도들이 겪는 고난의 또 다른 의미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사람이 똑같이 고난당해도 그것을 의미 없는 세상 풍파로만 여긴다면 내면에 한만 쌓일 것입니다. 툭 건드리면 한 맺힌 눈물을 말통으로 쏟아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고난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고 잘 감당해내는 사람은 그 내면이 거룩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지선아 사랑해], [꽤 괜찮은 해피엔딩]의 저자 이지선씨가 있습니다. 그녀는 유아 심리 상담사를 꿈꾸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취한 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로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어 9년간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으며 그녀는, 인생이란 동굴이 아닌 언젠가 환한 빛이 기다리는 터널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이라는 터널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분인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 몸으로 살 수 있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고난을 통해 배운 삶의 비밀을 사람들과 나누면서 더 나은 내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주변의 귀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소소하지만 행복하다는 그의 고백 속에서 평강의 열매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든 작든 누구도 인생의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럴 때 주저앉기보다 하나님의 훈련으로 영접하고 인내하며 감당할 때 주님 주시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고난의 훈련을 받다보면 너무나 힘들고 피곤해 신앙 경주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12). 너무 힘들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을 생각하며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우게 되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소망하며 일어서야 합니다. 또 우리의 신앙 경주를 위해 곧은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13). 곧은 길은 바위를 옮기고 구덩이를 메우고 돌멩이를 치우는 노력으로 만들어집니다. 곧은 길을 만드는 것은 힘든 작업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방해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 힘을 빼고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요소들과 적극적으로 싸우고 이겨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매 순간 믿음을 지킬 때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저는 다리가 어그러지지 않게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골인점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피곤하다고 누워버리면 다시 신앙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좀 늦더라도 좀 부족하더라도 이 경주를 마치면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다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며 신앙 경주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4-17절은 신앙의 공동체성을 말합니다. 신앙 경주에서 인내나 훈련은 개인적이지만 신앙생활의 상당수 기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저자는 아무리 개인 신앙이 훌륭해도 교회공동체 내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누리지 못하면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고 경고합니다. 성도들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또 교회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 신앙의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돌아봄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15). 서로를 돌아봄을 통해 공동체성이 강화될 때 연약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를 수 있고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 불신앙의 쓴 뿌리가 생기면 교회공동체에 나쁜 영향력을 끼치게 되고 교회의 생명력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음행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망령된 사람들이 없도록 경계해야 합니다(16,17). 이런 죄들이 교회공동체를 심각하게 망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살피고 격려하며 신앙적 공동체성을 강화해가므로 신앙 경주를 더욱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18-29절은 신앙적 배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우리가 신앙 경주를 마치고 받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견고한가를 강조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더 말씀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18-20). 모세도 심히 두렵고 떨린다고 했습니다(2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심히 두렵고 떨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성도들은 영적인 시온산,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 처소,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22-24).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를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25). 구약의 시내 산, 땅에서 경고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도 심판을 피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영적 시온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주님을 거역하고 배교한다면 우리는 더욱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집니다(26,27). 우리 하나님은 태우시는 불이십니다(29). 하나님은 사탄과 악의 세력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그때는 견고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 경주를 해야 합니다(28).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주어질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넉넉히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고난의 훈련을 믿음과 인내로 잘 감당하면 거룩함과 의와 평강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곤해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신앙 경주를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