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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림이 타락한 천사들이 인간 여자들을 취하여 낳은 자손들이 아니라, 타락한 셋 계통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었으니, 이어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거인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인들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좀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거인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도 정말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거인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는 생소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러한 사람들을 내심으로써 말씀하시려고 하는 뜻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에서 거인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피림이 거인들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수천 년 후에 팔레스틴 땅에도 네피림이 있었고, 또 그와 유사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13:32-33절에는 가나안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의 보고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불신앙 중에 악평하는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그 정탐꾼들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는 네피림의 후손들인 아낙 자손들 네피림 곧 거인들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낙 자손들은 네피림이었고 거인들이었습니다. 이 아낙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대표적인 거인족이었습니다. 족속 전체가 거인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낙 자손은 그곳 거인족의 기준이었습니다(신2:10,21-‘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크므로’).
그리고 이런 아낙 족속에 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엠 족속”도 아낙 자손과 같이 키가 큰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모압 사람들에게 멸망을 당했었습니다(신2:10-11). 그들은 ‘르바임’이라고 불림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이 ‘르바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암몬 족속이 차지한 땅에도 살았었습니다. 이들도 아낙 자손들처럼 키가 크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을 암몬 족속 앞에서 멸하셨기 때문에 암몬 족속이 그 땅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신2:20-21). 암몬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삼숨밈”이라고 불렀습니다.
엠족과 삼숨밈족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인 모압족과 암몬족에게 멸망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암과 암몬에게 그들을 붙였기 때문에 모압과 암몬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엠과 삼숨밈을 여호와께서 어떻게 멸망 시켰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암과 암몬이 이들을 싸워서 멸망시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명기 2:21절에는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삼숨밈을 멸절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직접 멸망시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질병으로 그들을 쳐서 갑자기 거인들을 멸망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리족도 에서의 자손들에게 멸망을 당하였다고 합니다(신2:12). 문맥상 호리족도 거인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대체 얼마나 키가 컸을까요? 이것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신명기 3:11절에 나와 있습니다.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지금 오히려 암몬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장이 아홉 규빗이요, 광이 네 규빗이라”(개역)고 했습니다. 한 규빗이 보통 1자 반이라고도 하고, 약 131/2 피트라고도 합니다. 이 수치를 따라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바산 왕 옥의 침상은 대충해도 길이가 4m 가 넘었습니다. 침상의 길이가 이 정도였으니, 키는 이것보다 20-30센티쯤 줄여서 생각해도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 키였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침상의 넓이가 4규빗(1m 80cm)이라고 했으니, 그 몸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도 가능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엠족과 삼숨밈족의 기원은 먼 아브라함 시대에 등장합니다. 창세기 14장 5-7절에는 북방의 왕들 즉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왕들이 군대를 끌고 와서 가나안 지역의 왕들을 쳤습니다. 그때에 북방왕들이 친 족속들이 르바 족속, 수스 족속, 엠 족속, 호리 족속, 아말렉 족속, 아모리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때의 남방 족속들은 거의가 거인족속들이었습니다. 이 거인족속들이 북방에서 침략해 온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에 의해서 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친 사람이 아브라함과 그의 작은 사병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거인족들을 친 왕들을 깨뜨린 진짜 ‘거인 킬러’(giant-killer )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들을 깨뜨렸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는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정복해야 할 족속들을 열거하는 중에 ‘르바 족속’, 아모리 족속이 명시됩니다. 즉 거인족들이 명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엠 족속, 르바 족속, 아모리 족속, 아말렉 족속 등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도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가나안의 거인들을 쳐서 깨뜨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은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19-20)라고 했습니다. 이 축복의 내용처럼,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이 대적들을 붙이실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시 대적들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은 대적들을 쳐 부어야 했었습니다. 대적들이 비록 거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들을 쳐서 부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약속의 땅에 있는 거인들을 심판하여 진멸하는 하나님의 군대였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거인들 곧 아낙 자손들과 같은 르바임은 ‘위대하고’, ‘수가 많고’, ‘키가 컸다’고 합니다(신2:21), ‘위대하다’는 말은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지만, 그 세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키가 크고, 번식력도 강해서 그 수도 많았고, 때문에 그 세력이 대단하여 사람이 견줄 수 없는 족속들이었다는 의미로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라도 죄악이 꽉 차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여 멸해야 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에 앞서서 그들을 멸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르바임의 세력은 바산 왕 옥뿐이었는데, 그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멸망시켰습니다. 때문에 이제 남은 거인 세력은 잔당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나안으로 진군하여서 가나안의 족속들을 심판하고 약속의 땅을 얻어서 약속된 나라를 이루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거인족들은 가나안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그 세력이 얼마나 강대하고 난공불락의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의 전례와 바산 왕 옥을 친 것은 이스라엘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역사적인 사건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바산 왕을 쳤듯이 또는 모압과 암몬이 거인족들의 땅을 치고 차지했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훈적인 사건들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은 참 좋은 역사적인 가르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면서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7년의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7년간의 정복전쟁 시대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 힘들지만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대부분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차지하였습니다. 일부 남은 부분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충분하게 그들의 세력을 눌렀고, 또 멸망시킬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났고, 여호수아 세대의 사람들도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다음 세대들은 정복 세대의 교훈을 망각하여갔었습니다. 동시에 정복 세대가 싸웠던 전투의지도 상실하여갔습니다. 앞 세대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정신을 망각하여갔던 것입니다. 앞 세대는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이유를 그래도 깨닫고 있었지만, 그 다음의 세대들은 그렇게 싸워야 할 이유를 잊어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가나안 사람들을 향해서 시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오래 싸우다가 보니 지치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사람들과 타협하는 마음도 생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들도 사람인데 설마 어떨라고?’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과 타협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와 그들이 섬기던 각종 신들을 인정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우상적인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점점 망각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가나안 사람들과 같이 살고자하는 상태에 빠져서 싸우기를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상태에 빠졌을 때, 쇠퇴하여 가던 가나안 족속들은 점점 강성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채찍으로 사용하시려고 그들을 강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블레셋의 강성이었고, 골리앗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골리앗 앞에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골리앗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였습니다. 사울도 아마 키가 1m 90내지 2m는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사울은 블레셋의 골리앗에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은 키가 3m 쯤 되었습니다(삼상17:4-6규빗 한 뼘). 그 키와 덩치와 기세와 차려 입은 투구와 최소 60kg-약80kg 되는 어린갑옷과 다리에 찬 놋경갑과 어깨에 맨 놋단창과 베틀 같은 창자루에 6kg 이상 나가는 창날을 달고 방패 든 자를 앞에 세워서 나타나는 위풍에 눌려서, 이스라엘은 대적하여 싸울 마음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고양이 앞에 생쥐같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40일을 그렇게 나타나는 골리앗 앞에서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골리앗은 거인 골리앗만이 아니라, 가나안 세력을 대표하는 자로서 등장하였고, 사울은 가나안 세력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꼴이 된 이스라엘의 상태를 상징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이방 세력과 타협한 결과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분개하여 일어났던 자가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대한 골리앗을 물매 돌 한 개로 쳐서 꺼꾸러뜨렸습니다. 그로부터 다윗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오히려 거인과 같은 장군들이 다윗의 나라에 나타나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는 블레셋 거인 이스비브놉을 쳐 죽이고 다윗을 구원했으며, 후사 사람 십브개는 블레셋의 거인 삽을 쳐 죽였습니다. 또 베들레헴 사람 엘하난은 골리앗의 동생 라흐미를 죽였습니다. 라흐미 역시 베틀채 같은 창자루를 가진 창으로 휘두르는 자였습니다.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요나단이 여섯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진 블레셋 거인을 쳐서 죽였습니다. 이로써 블레셋의 거인들이 이스라엘의 용사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블레셋의 세력은 몰락하였음을 물론입니다. 그 외에도 아디노라는 사령관은 혼자서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또 이와 버금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혼자서 블레셋의 모인 사람들을 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게의 아들 삼마라는 장군도 혼자서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여호와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싸워서 구원을 이룬 대장군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여호와를 의지하고 두려움 없이 싸워서 구원을 이룬 장군들이었으니, 거인 못하지 않는 신체와 힘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외에도 요압의 동생 아비새는 창으로 블레셋 사람 300인을 죽였고, 브나야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들 둘과 애굽 사람 거인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서 그를 죽였으며, 구덩이에 빠진 사자를 구덩이에 내려가서 잡았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맨손으로 사자를 잡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이스라엘의 장군들은 가나안의 거인들보다 훨씬 힘이 세고 강했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다윗 휘하에는 날고뛰는 듯한 장수들이 37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할 때에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보다 강해지고, 130만 이상의 강대한 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주변 나라들과 타협했을 때, 이스라엘은 쇄락의 길을 걸었고, 여호와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섰을 때는 중흥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역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싸운 육신적인 싸움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신령한 싸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귀와 죄와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싸움을 싸울지라도 온전하게 승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또한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마귀와 죄와 싸워주셔서 온전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온전한 싸움의 승리를 덧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온전히 승리를 이루어주셨으니,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포기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주어졌으니, 그 믿음을 가지고 싸우는 데까지 싸워야 하며, 또 죽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 또한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믿음의 생명력의 드러남입니다. 따라서 생명력이 있는 믿음은 싸움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싸워야 할 거인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생각해 온 것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큰 것 숭상하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큰 세력을 숭상하고, 큰 것을 숭상하고, 힘과 권력 곧 지배하는 것을 숭상하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라로 말하면 제국주의 정신이요, 교회로 말하면 휘하의 교회들과 수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자본주의화 된 교회의 정신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거인의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것들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확인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거인 정신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주의 정신이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하게 하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복주의와 물질주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는 세속적인 경영철학이 도입되고, 돈과 힘이 지배하는 왕국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곳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사라지고 잔인함이 지배하게 됩니다. 신자들은 오로지 이 세상의 안전과 축복만을 구하게 되고, 나그네로서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