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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개관 3단계 (중공군 개입과 유엔군 재반격)
[ '50.10.25~51.6.23]
1 . 4 후퇴
제 1 절 피아의 전쟁지도
1. 공산군의 승리 확대전략
중공군은 10월 공세(1차공세)와 11월 공세(2차공세)로 평양을 탈환한데 이어 12월 중순까지 인민군이 잃었던 38도선 북쪽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중공지도부는 1~2차 공세작전을 통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승리를 확대하기 위하여 3차공세(신정공세)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당 지도부와 현지 지원군 사령관 사이에는 공세시기 문제를 놓고 내부적인 갈등이 표출되었다.
[팽덕회의 건의 : 부대정비와 휴식 후 '51.2~3월에 공격]
당시 지원군사령관 팽덕회는, 동부전선의 제9병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어 함흥지역에서 2개월간 휴식 및 부대정비를 실시해야 하고, 서부전선의 제13병단도 2개월 동안 작전 수행으로 몹시 지쳐있다고 판단하였다. 여기에 병참선이 신상되어 유엔군의 항공폭격에 취약하여 월동피복이 도중에 소실되었고 식량과 유류 등이 제한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여기에 지난 10월과 11월의 전투는 진격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치약점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에서 준비된 진지에서 방어함에 따라 쉽지않다고 보았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방어로 전환하여 전선을 축소하여 병력을 집중하여 배치할 것이며, 이로 인해 방어종심도 강화하였다. 병력도 다소 감소하였으나 26만 명을 유지하여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 중공군은 겨울 동안 충분한 휴식과 부대정비를 실시한 후 증원부대인 제19병단이 참전한 이후인 1951년 2~3월 경에 제3차공세를 개시하여야 적 주력을 격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다.
[12월 19일 모택동의 명령 : 지금 국군 몇 개 사단을 섬멸하면 유엔군을 쉽게 고립시키고 미군 몇 개 사단만 섬멸하면 한반도 문제는 종식]
유엔군은 우리를 정전으로 유인하여 휴식기간을 가진 후 재공격할 음모를 기도하고 있다. 또한 유엔군은 파견한 국가들간에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이 상충되어 혼란상황이 게속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국군을 집중적으로 삼멸하면 미군과 유엔군을 고립시킬 수 있고, 그후 미군 몇 개 사단만 섬멸하면 한반도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아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을 대에 적의 약점을 이용하여 38선을 넘어 다시 일전을 치른 후 1~2개월 동안 휴식가 정비를 취하면서 춘계공세를 준비하도록 하라
[팽덕회의 결정 : 지금 공격하여 37도선까지 진출한 후 부대정비와 춘계공세 준비한다]
[12월 하순 김일성의 작전방침 ]
적 방어가 취약한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한 후 후방에 강력한 제2전선을 깊숙히 형성, 중서부의 중공군이 주저항선을 돌파하면 이들과 연결작전으로 포위망을 구축하여 적을 섬멸하라
2. 유엔군의 축차방어전략
제1통제선 : 38도선 진지로 임진강 하구에서 양양에 이르는 주저항선
제2통제선 : 수원-양평-홍천-주문진을 연하는 선
제3통제선 : 평택-안성-원주-삼척을 연하는 선, 한반도에서 가장 방어정면이 협소한 선
제4통제선 : 금강선으로 금강남안과 소백산맥을 연하는 선
제5통제선 : 소백산맥선으로, 이 선을 이용항여 필요시 낙동강 방어선을 준비하기 위한 선
제6통제선 : 낙동강 방어선으로 여기서 무너지면 유엔군은 일본으로, 국군은 연안도서로 철수한다.
여기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제2군수사령관에게 한국인 노무자와 가용한 전물자를 동원하여 마산-동해안선, 진해-동해안선, 낙동강하구-동해안을 연하는 3개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요새화 하도록 명령하였다.
제 2 절 서울의 재실함
1. 중공군의 신정공세
38도선 배치현황(12.26)
시변리
임진강 철원 김화 북한강
중40군 중42군
연천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중50군 중39군 중38군 중66군 북5군단 인제 북2군단
국6사 미24 수도사
개성 고랑포 국1사 국2 국5 국8 국3 소양강 양양
문산 덕정 가평 춘천 "C"방어선
북1군단 미25 국9사
터 봉일천 의정부 "C"방어선 홍천강 홍천
"C"방어선
서울 양평 "C"방어선 횡성
인천
경안리 원주
수원
[신정공세 계획]
● 우전방 5개 군(중공 제38.39.40.50, 북한군 제1군단)은 주공으로 동두천. 서울 방향으로 공격하며, 좌전방 2개 군(중공 제42. 66군)은 가평, 춘천을 공격한다, 그리고 북한군 2개 군단(제2.5)은 자은리, 홍천방향으로 공격한다.
● 북한군 제1군단은 문산지역을 양공하여 중공군 공격을 지원하고 우측방을 엄호한다. 일부 부대는 적의 상륙에 대비하여 해주 해상을방어한다
● 중공군 제50군은 고랑포링에서 제39군과 협조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증원 차단 및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라
● 중공군 제39군은 임진강을 도하, 일부는 신산리로 진출하여 국군 제1사단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주력은 제50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1사단을 포위공격한다.
● 중공 제38군은 한탄강을 도하하여 , 일부부대는 칠봉산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6사단의 퇴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 주력은 제40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6사단을 포위공격하라.
● 중공 제40군은 한탄강을 도하, 동두천 방면으로 공격하여 중공군 제38군 및 제39군과 협동으로 국군 제6사단을 포위공격한다
● 중공 제66군은 지암리로 진출하여 중공군 제42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2사단을 포위공격한다. 그리고 일부부대는 춘천을 공격하여 국군 군 제5사단을 고착 견제하여 인민군제2, 제5군단의 공격을 지원한다.
● 중공 42군은 66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2사단을 포위공격한다.
● 북한군 제5군단은 양구, 인제로 진출한 후 국군 1,2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공격하여 홍천으로 진출한다. 퇴로가 차단된 국군을 전방부대와 협조하여 포위공격한다.
● 북한군 제2군단은 공세가 개시되기전에 은밀하게 38도선에 침투한 후 홍천 동남방으로 진출하여 전선부대와 연결작전을 실시한다
● 북한군 제3군단은 원산을 , 제4군군단은 서해안을 각각 방어한다. 그리고 중공 제9병단은 함흥에서 계속 정비와 휴식을 시시한다.
이 계획에 의거 공산군은 12월 27일 공격대기 지역을 은밀하게 점령하였다.
이 무렵 아군의 항공정찰대는 적의 대규모 포병지진지가 주공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제1,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인 연천-의정부 도로에 집중적으로 배치되고, 임진강변에 다량의 교량용 물자들이 비축되어 있는 것도 관측하였다. 그리고 생포된 포로들도 적의 주공은 서울로 지향하고, 공격은 12월 31일 밤에 시작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1950년 12월 31일 17:00시에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신정공세를 개시하였다.
2. 38도선 방어
중공군과 북한군은 '50.12. 31일 임진강을 도하하여 국군 제1사단 지역으로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 제13병단은 자정무렵에는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에 배치된 국군 제6사단으 ㄹ공격하엿다. 그리고 3시간 후에는 춘천 북쪽의 구구 ㄴ제5사단을, 새벽에는 철원-포천도로 우측의 국군 제2사단을 공격하므로써 국군이 담당하는 방어지역은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가. 임진강 부근 전투(국군 제1사단 : 중공군 제116사단)
사단은 적의 주공이 예상되는 고랑포 정면의 임진강 남쪽 장파리-마포리-도감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제11연대를 비장리 일대에, 제12연대를 도감포 일대에 배치하고 예비인 제15연대를 마지리 일대에 배치하였다.
압도적인 적의 파상공세에 사단은 '51.1.1, 새해 첫날 두포리-금곡리-무건리 선에서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고, 돌파된 우측 제12연대는 덕정 서쪽의 가납리일대에서 재편성에 들어갔다.
문산-동두천 전투('50.12.31~'51.1.2)
연천
백학 회춘리
고소성리
도감포 전곡 국6-19연 영평
고랑포 고능리 국6-7연
국1-12연 추동리
비장리 적성 종현산
장파리 국1-11연 마지리 감악산 금동리 국6=미24
국1-15연 마차산 소요산
두포리 파평산 무건리 안흥리
미25사=국1사 동두천 국사봉
금곡리 국6-7연 포천
미1군단=미9군단
문산 해룡산
법원리 노고산 국1-15연 덕정
국1-11연 가납리 국1-12연
의정부
봉일천
제15연대가 노고산 일대에서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역부족이었고 지연전 속에 고양리로 철수하였다.
'51.1.2~3일 사단은 군단의 명령으로 2일 제12연대가 먼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한데 이어 제15연대도 철수하고 철수를 엄호한 제11연대도 미 제25사단의 전초진지인 봉일천 일대에서 차량편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1월 3일 한강 남쪽의 영등포-노량진-동작동을 연하는 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한다.
나. 동두천 부근 전투(국6사 : 중공군 제38군)
국군 제6사단은 전곡-동도천 도로 좌측의 고능리 부근에 제7연대를, 우측 추동리에 제19연대를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2연대는 마차산과 소요산 일대에 배치하였으며 사단의 ㅈ좌측은 국군 제1사단, 우측은 미 제24사단이었다.
사단은 '50.12월 중순부터 주저항서늬 전투진지를 보강하였으며, 제19연대 정찰대가 한탄강 북쪽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2명을 생포하여 심문한 결과 중공군이 연천일대에 집결해 있으며 곧 남침할 것이라 진술하였다.
적은 개전 초기 주공을 동도천-의정부 축선에 두고, 중공군 제38군을 주축으로 사단 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적은 비무장한 양민들을 선두에 세워 사단의 지뢰지대를 통과하도록 한 다음 주력이 인해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사단이 정면의 적을 격퇴하는 동안 좌측 국군제1사단 제12연대를 돌파한 적이 사단의 안흥리로 진출하고, 우인접 미 제24사단을 돌파한 적이 동두천을 기습하였다. '51. 1월 1일 적이 사단 후방으로 침투하면서 사단의 전세는 급격히 악화되고 덕정으로의 철수마저 어렵게 되었다. '51. 1. 1일 10:30분경 동두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미 제9군단에서 퇴로가 차단된 제6사단을 구원하기 위해 영 제27여단을 덕정부근에 투입하였다.
하지만 이미 적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어렵게 철수할 때, 미 제8군사령관은 제6사단을 창동에 집결하라 명령을 내렸다. 2일 아침에 군단 예비가 되어 한강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이도을 개시하였으나 완전한 편제를 유지한 연대는 없었다.
분산 철수하여 한강을 도하한 제6사단은 제2연대가 광진교-신장리를 연하는 방어선에 , 제19연대가 수진리에서 재편성하고, 제7연대는 경기도 광주에집결항여 부대 정비를 하였으며 이때 까지도 분산 철수하는 낙오병들이 속속 복귀하고 있엇다.
다. 춘천부근 전투(국군 2사, 국군 제5사 : 중공군 66군, 제42군)
국군이 전담하고 있는 중동부 전선은 인민군이 홍천. 현리 일대로 제2전선부대를 침투시켜 거점 화ㅑㄱ보를 기도함으로써 이들과의 접전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국군 제3군단은 제2사단을 명지산 북쪽의 고지군에, 제5사단을 화천-춘천 도로변의 지촌리 일대에 , 제8사단(제7-3연대 증강)을 화천저수지 남쪽의 내평리 일대에, 그리고 제3사단을 인제 남쪽 소양강변 청구리 일대에 배치하고 수많은 지뢰와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50.12.31일 자정이 지나며 제2사단과 제5사단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된다.
국군 제2사단의 좌전방 만세교리 동쪽의 제17연대와 화악산 일대에 배치된 제32연대는 적의 초기 공격에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좌우인접 사단의 전투지경선을로 침투한 적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철수하게 된다. 철수과정에 지휘통신이 마비되어 상황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국군 제5사단은 좌전방 제36연대가 북한강 서쪽 지암리 일대에서, 중앙의 제35연대는 북한강 동쪽의 송암리에서, 우전방 제27연대는 고성리 일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좌전방 제36연대는 적의 공격에 돌파되며, 좌인접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를 돌파한 적이 후방으로 침투하여 퇴로가 차단된 상황에서 북배산과 용문을 경유 양평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내평리 일대를 방어하던 국군 제8사단은 접적이 경미하여 계속 주저항선을 방어 중에 좌우 인접 사단들이 돌파되어 적중에 고립될 상황에 직면하여 홍천으로 철수하였다.
라. 인제-현리 부근전투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2군단(배속 제3사)과 국군 제1군단(배속 제9사. 수도사)의 상황은 판이하게 달랐다. 양 군단은 정면공격보다 오히려 신정공세 이전에 후방으로 침투하여 퇴로를 차단한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의 일부 부대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국군 제3사단은 인체-홍천 도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소양강변 관대리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단이 주저항선 방어에 주력하고 있을 무렵, 약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우인접 제9사단 제28연대 지역을 침투하여 사단의 후방교란 및 보급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횡성 북쪽 창봉리에 출현한데 이어 홍천으로 북상 중임이 판명되었다.
12.31일 이에 사단장 최석 준장은 전방 연대는 자은리-홍천-원주 진출을 기도하는 인민군 제2사단을 저지하도록 하고, 사단 예비인 제23연대는 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북상중인 미 제2사단 제23연대와 협조된 공격으로 인민군을 격멸하도록 하였다. 이에 양 사단의 제23연대는 삼마치일대에서 포위공격으로 적을 격퇴하여 퇴로를 확보하게 된다. 이후 사단은 육본의 명으로 평창으로 이동한다.
한편 현리 남쪽의 상남리 부근을 방어 중인 국군 제9사단은 '51. 1. 1일 사단장 오덕준 준장 후임으로 부임한 김종갑 준장의 지휘하에 수일전에 피탈 당한 현리지역을 재탈환하기 위해 상남리-1091-광주동-방태곡-용포를 목표로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런데 이날 12:00시에 좌인접 국군 제3사단 지역을 돌파한 적 1개 연대 규모가 오마치 고개 서쪽 금부리 전방으로 기습공격을가해옴으로써 사단은 진출을 멈추고 '51.1.2일 18:00시까지 혈전을 펼쳤으나 상황이 악화되어 방대곡으로 철수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을 방어 중인 수도사단은 도채동-서림-양양 선에서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적의 정면공격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적은 오대산과 설악산으로 여녈되는 산악지형을 발판삼아 사단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기도하였다. 12우러 30일, 제26연대는 제9사단 제30연대와 협동 작전으로사단 후방인 대사리에 출몰한 적 약 1,000명을 포착하여 격파하고 하진부리까지 지출하였다.
'51.1.1일 한편 전선을 시찰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국군 제1.6사단의 돌파구를 역습으로 회복할 시기를 놓쳤고, 중동부 전선의국군 제3군단의 국군 제2, 제5사단이 적중에 포위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 1일 정오에 미 제1, 제9군단은 서울 교도보선으로 철수하고, 국군 3개 군단을 C방어선(한강-양평-홍천-원포리)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마. 서울 교두보선 확보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미 제1, 제9군단의 서울 교두보선(행주-의정부-퇴계원) 점령에 앞서 양 군단장에게 철수시 긴밀히 협조하여 강력한 지연전을 펼치면서 철수하도록 하고, 철수도 아군의 항공폭격이 가능한 주간에 철수하도록 강조하였다.
[미 제1군단 상황]
미 제1군단장은 문산일대에 배치된 미 제25사단을 국군 제1사단의 엄호하에 이동시켜 1번도로 좌측의 원당 일대에 군단 예비로 신둔리에 집결 중인 영 제29여단을 도로 우측의 고양 일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군단의 철수징후를 감지한 중공군이 오후 내내 국구 ㄴ제1사단 정면을 돌파하려고 파상공격을 하였으나 사단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미 제9군단상황]
미 제9군단은 전바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24사단이 축차적인 지연작전을 펼쳐 덕정 일대에 배칟ㄷ된 영 제27여단의 엄호하에 의정부 남족으로 철수하여 교두보선 우측방을 점령하도록 계획한다.
이 계획에 의거 미 제24사단은 자정무렵 교두보선을 확보했으나, 우전방 국군 제6사단이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어 분산 철수함으로써 군단에비인 영 제27여단이 교두보 전전방을 담당하게 되었다.
'51. 1. 2일 저녁에 미 제8군사령관은 교두보지역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태국군 대대를 영 제29여단에 배속하였고, 경주에서 올라오는 미 제10군다느이 제92, 96포병대대를 적 주공을 포격할 수 있도록 미 제1, 제9군단 지역에 배치한다.
3. 서울 철수
(가) 서울 철수 결정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은 "한반도에서 물러나지 않고, 군대를 신속히 정비하여 다시 공세작전을 펼칠 것이다"라고 공언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고 38도선 부근의 주저항선에서 너무 쉽게 물러나자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울 고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그는 서울 철수를 불가피하에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서울 철수 명령 동기]
첫째 : 2일 한강상에 설치한 교량을 통제하던 공병부대 보고 때문이었다. 당시 공병은 피난민들이 도보로 한강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고, 한강이 도보로 도하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결빙되었다고 보고하여, 이는 중공군의 전면공격을 가능하게 할 뿐만아니라, 아군이 포위될 위협에 처할 수도 있고 많은 피난민 속으로 오열들이 아군진지로 쉽게 접근함은 물론 많은 피난민 대열은 부대기동과 물자 수송을 제한하여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 판ㄷ나했다.
두 번째 이유는 동부전선즤 불안이었다. 이에 대처하여 리지웨이 장군은 2일 저녁 무렵 주저항선 방어를 위해 미 제10군단을 중부전선에 투입하고, 국군 군단들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였다.
국군 제1군단(제9, 수도사)과 제3군단(제3, 제7)으로 태백산맥과 그 동쪽지역의 홍천-원포리 선을 점령, 확보하고, 제3군단의 제2,제5, 제8사단은 미 제10군단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국군 제2군단(배속 제11사)을 대전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3일까지도 동부전선 국군 부대들이 C방어선(양평-홍천원포리)을 점령하지 못하자, 미 제8군 작전참모는 그 남쪽의 D방어선(평택-안성-장호원-원주-원포리)의 점령도 어렵다고 건의하였다. 이에 리지웨이는 원주가 피탈되면 서부전선 부대들의 우측방이 적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 무렵 중공군 제66군은 제42군의 지원을 받아 가평을 점령하였고, 서울-춘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1월 3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교두보에 배치된 모든 부대에 철수 예비명령을 내리게 된다.
이 무렵 공산군 연합사령부는, 유엔군의 철수 징후를 간파하고, 전과확대를 위해 우공격제대(제38.39.40.50군.인민군 제1군단)는 서울 .인천, 수원. 양평을, 좌공격제대(제42. 66, 인민군 제2. 제5)는 홍천. 횡성. 양양. 강릉을 각각 점령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교두보선 부대의 철수
1월 3일 1번 국도를 따라 진출한 중공 제50군은 3일 03:00시에 미 제25사단을 공격하고, 이어서 일출 무렵에는 33번 도로(철원-연천-의정부)를 따라 진출한 중공 39군의 일부가 영 제29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쪽의 미 제9군단 지역에서도 중공 제38군과 제40군의 일부가 공격을 하였다.
당시 한강에 설치되었던 기존 교량은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었고, 미 공병대가 가설한 몇 개 임시 교량을 통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피난민까지 철숳해야하는 상황이라 한강 도하에 어려움이 많았다.
서울 서쪽의 미 제1군단 지역에는 M-4 부교와 중장비를 도하시킬 수 있는 부교가 설치되었고, 동쪽의 미 제9군단 지역에는 M-2 부교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피난민들은 주로 5개의 도보교를 이용하였다.
[서울 서부지역 ] 4일 새벽, 제29여단은 200~300명의 인원과 10대의 전차 손실을 입고 4일 14:00시경 철수가 완료된다.
1월 4일, 미 제1군단은 미제25사단 제27연대의 엄호하에 사단 주력이 차량으로 철수를 완료하자, 이어서 영 제29여단이 이동을 개시하였다. 자정무렵에 중공 제39군 주력부대가 영 제29여단의 후미를 기습하였다. 그러나 이미 본대가 철수한 상황이라 증원부대 투입이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제29여단은 200~300명의 인원과 10대의 전차 손실을 입고 4일 14:00분경 철수가 완료된다. 이후
한편 미 제9군단의 철수는 적의 방해가 없어 3일 오후 영 제27여단의 엄호하에 미제24사단이 차량으로 철수하고, 제27여단은 4일 02:00시에 철수를안료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교가 얼어붙어 분해철수가 어려워 교량은 새벽 07:30분경 폭파한다.
교랴이 폭파된 지 1시간이 경과할 무렵 중공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서울 시청 건물에 인공기가 나부끼게 되었다.
이로써 유엔군은 서울을 두 번째로 적의 수중에 넘겨주고, 1월 4일 D방어선(평택-안성-원주-삼척)으로 철수하였다.
(다) 군수지원부대의 철수
※ 4일 정오까자 철수하지 못한, 160만 배럴의 석유제품과 9천톤의 공병자재, 그리고 12대의 화물차에 실린 탄약을 파괴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1월 3일 제3군수지원사령관에게 D방어선 북쪽에 위치한 보급시설을 철수시키고 , 인천항은 4일 정오에 폐쇄하도록 명령하였다.
4일 정오까자 철수하지 못한, 160만 배럴의 석유제품과 9천톤의 공병자재, 그리고 12대의 화물차에 실린 탄약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인천항의 폭파가 5일 15:00시까지 계속되며, 유엔군이 해상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항만시설의 파괴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그 최종판단은 역사 속에 맡기게 된다.
(라) 민간인의 철수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2일 특별 훈령으로 민간인의 전선 진지 통과를 금지하도록 하고, 서울-인천 간의 이동도 경인국도가 아닌 조우츠긔 보조도로를 이용하도록 유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번 철수작전은 초기 작전과는 다르게 지난 2주간 필수요원을 제외한 정부관리와 그 가족, 입원환자, 고아원의 원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주요 문화재 등이 후송되었다. 따라서 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피난민은 4일 낮까지 도보교와 빙판을 가로질러 철수하였고, 일부 피난을 떠나지 못한 민간인은 한강 북쪽의 가까운 시골로 피난을 떠나 서울은 텅빈 상황이었다.
4. 평택-삼척선으로 철수
※ D선(평택-안성-원주-삼척)으로 철수한 이유 :
동부지역은 국군이 담당하였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일부가 춘천-홍천-횡성도로와 산악지대로 진출하여 원주를 공격하고, 일부가 남서쪽으로 공격방향으로 전환하여 미 제1, 제9군단을 포위할 가능성이 있었다
[리지웨이 사령관의 중공군 평가] : " 병력 숫지만 많았지, 나머지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였지만, 그 당시에 미 제8군사령관 리지으ㅞ이는 미 합참에 보고하기를 " 중공군의 신정공세로 아군이 잠시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미군은 아직 중공군을 대적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그는 "중공군은 단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무기체계에서는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매우 열등하다. 그리고 한공지원 능력도 없고, 빈약한 통신장비와 소수의 기갑차량을 갖고 있을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미 제1, 제9군단이 서울 교두보 선에서 철수하는 동안 중공군의 위협적인 공세는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동기는 "동부전선이 돌파되었기 대문이다"
당시 동부지역은 국군이 담당하였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일부가 춘천-홍천-횡성도로와 산악지대로 진출하여 원주를 공격하고, 일부가 남서쪽으로 공격방향으로 전환하여 미 제1, 제9군단을 포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D선으로 철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사령관은 추격하는 중공군에 대해 전차로 증강된 엄호부대를 편성하여 강력한 역습을 실시하고, 주력은 5일 정오에 D방어선으로 철수를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철수 명령의 혼선과 국군 제6사단의 조기 철수]
접적이 경미한 가운데 5일 아침 철수준비가 완료된 상황에서, 10:00시경 미 제8군은 수원에 비축된 보급물자의 후송이 지연됨에 따라 차후 명령까지 현진지를 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이 선발대로 철수를 한 상태에서 사단이 수원 동쪽으로 진출할 무렵에 전달되어, 사단은 금양장리-양지리 도로에 배치되었다. 이날 밤에 중공군 1개 연대가 한강을 도하, 관악산을 넘어 국군 제1사단 전지역을 포함하여 정찰을 실시하였으나 국군 제6사단이 빠져나간 우측의 노출된 지역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평택-삼척 방어선으로 철수 상황
김포공항 서울
터키여 미25사 국1사 국6사 8기병 양평
인천 경안리 남한강
미25사 안양 국1사
미25사=국1사
수원 금량장 국6사 용지리 이천 여주
발안장 오산 미1군단=미9군단 백암리
장호원 미24사
국6사 영27여
국6=미24
평택 안성 국1사
영29여 미3사
1월 5일 미 제1군단은 평택 남쪽 1번 국도 좌측 서해안 지역에 영 제29여단(태국군 대대 배속)을 , 우측의 구릉지대에 미 제3사단을,17도로 우측 안성 일대에 국군 제1사단을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미 제25사단과 터키여단을 천안에 집결시켜 예비로 한다.
미 제9군단도 국군 제6사단을 좌인접 국군 제1사단과 연결하여 죽산리 일대에, 영 제27여단을 법천리 일대에, 미 제24사단을 장호원 일대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미 제1기병사단을 에비로 충주에 집결시켜 병참선을ㄹ 엄호토록 하고, 제5기병연대는 단양일대에서 활동 중인 적 유격대의 준동에 대비 충주-문경간 도로를 확보하도록 조치하였다.
'51. 1. 8일 한편 중공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한강 남쪽으로 추격했으나 당초 기대와는 달리 대량 살상의 기회를 포착할 수 없게 되자, 이를 유엔군이 의도적으로 평택-안성-제천-삼척 선으로 물러나 의도적으로 중공군을 유인하기 위한 철수작전으로 판단하고 1월 8일 추격작전을 멈춘다
5. 중동부 전선의 위기
중동부 전선 상황('51. 1. 7)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양양'
인제
내평리 현리
춘천 원포리
홍천 북2군단 강릉
D방어선
북5군단 횡성 수정된 D방어선
정선 삼척
국9사 평창 국3사 국9사 (1.9) 수도사
원주 미2사 국3군단=국1군단
여주 국5사
국2사 국7사 영월 국7사(1.8)
제천 미10군단=국3군단
미9군단=미10군단 미7사(-)
충주 남한강 단양
국2사
중공군은 신정공세시 주공은 서부전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지역으로 지향하고, 조공은 중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 지역으로 공격하였다. 아군이 중서부전선에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또 하나의 조공부대인 인민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이 중서부 전선의 측후방을 공격하기 위하여 태백산맥의 험준한 준령을 이용하여 중동부전선으로 소리없이 침투하고 있었다.
(가) 북한군의 기도
북한군 제2군단은 아군의 반격작전에 괴멸의 상태까지 몰렸으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2개월여의 재편성을 완료한 후 신편된 제5군단과 같이 다시 중동부 전선에 비치되었다.
두 군단은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지원하기 위하여 12월 하순 태백산맥의 험한 준령과 국군 사단의 배치공간을 이용하여 제2, 제12사단을 주저항선 후방으로 침투시켰다.
이로 인하여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퇴로가 차단됨으로서 주저항선의 방어에 실패하고 후방으로 물러나게 되며, 또 인제로부터 홍천에 이르는 지역에 돌파구를 허용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원주를 방어 중인 미 제2사단의 정찰대가 생포한 포로들의 진술에 의해 적의 기도가 구체적으로 폭로되었다. 포로들은 " 신정공세를 개시한 북한군 제2군단과 제5군단의 전투지경선은 춘천-홍천-횡성을 연하는 29번도로이다. 이 도로와 서쪽으로 진출한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5군단(제6.제7.제27. 제28. 제43사단)은 전면공격으로 원주를 점령하며 미 제10군단의 철수를 강요한다. 그리고 그 도로 동쪽의 최현이 지휘하는 북한군 제2군단(제2. 제9. 제10. 제31사단)은 29번 도로 동쪽의 산악을 타고 접적을 회피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하여 원주. 제천. 단양 그리고 대구를 공격한다. 그리고 5천~7천 5백 명의 유격부대를 산간 내륙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29번 도로를 이용하여 단양 부근에 집결시켜 유엔군의 주병참선인 부산-안동간의 교통망을 차단한다. 이러한 북한군의 작전은 서쪽의 중공군의 진격과 연계하여 실시하도록 한다"고 진술하였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6일 밤 횡성에서 남하한 북한군 제6사단과 제27사단은 다음날의 여명공격을 개시하기 위하여 원주 북방에서 전투태세를 완료하고 대기하였다. 이에 앞서 홍천-횡성으로 진출하였던 북한군 제2사단이 도로를 가로질러 원주 북서쪽을 방어 중인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진지 전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북한군 제2군단 제10사단은 제5군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노출된 산악 공간 지역을 통해 신속히 웑주 동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무렵 설악산에서 오대산으로 연결되는 산악지대에 은거 중인 길원팔 부대의 2,000 며의 공비들이 후방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나) 아군 상황
중공군의 신정공세를 받아, 중동부 전선에서 물러나는 국군 부대 중 제1군단의 수도사단만이 2일 계획된 C방어선(양평-홍천-원포리)을 점령하였을 뿐 제3군단의 상황은 불투명하였다.
[방황하는 국군 제3군단 예하 사단들]
군단의 좌전방 가평 북방의 국군 제2사단은 첫날(1.1일) 1개 연대는 거의 완전히 분산되었고, 다른 2개 연대도 중앙의 제5사단 좌측방을 뚫고 들어온 중공군 제66군 예하부대에 의해 가평 북방 8KM지점에 고립되었다. 중앙의 제5사단과 우전방 제8사단은 통신이 두절되어 상황조차 파악이 불가하였다.
그리고 군단 예비인 제7사단은 원주 북쪽 20마일 지점에 집결 중에 있었다. 이때 국군 제3사단은 24번 도로를 따라 홍천으로 이동 중이며, 사단은 홍천 일대에 형성된 북한군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평창에 집결할 계획이었다.
적의 신정공세에 국군 제2, 제5, 제8사단의 춘천정면이 돌파되고, 적의 유격부대에 의하여 도처에서 아군의 보급로와 퇴로가 차단되었다.
이러한 중동부 전선의 불안은 서부전선에 배치된 유엔군 주력부대의 우측방이 공격을 받게 됨으로서 결정적인 위기에 직면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중동부전선을 조기에 안정시킬 목적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여 경주일대에서 정비 중인 미 제10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 3일 이 결정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인제-홍천 일대에 형성된 돌파구 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1월 3일부로 주력부대인 미 제2사단, 미제7사단과 국군 제3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국군 제2, 제5, 제8사단 등 5개 사단으로 양평-홍천상의 48KM 에 달하는 C방어선을 점령한다.
그리고 가평, 춘천 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과 국군 제1군단으로부터 배속받은 제9사단으로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사이의 험준한 태백산맥 지역을 맡아 적의 돌파구 첨단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인민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고전하고 있었고, 제7사단도 홍천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야 하므로 상황을 낙관할 수 없었다.
국군 제1군단은 제9사단을 제3군단에 배속시키고, 대신 국군 제2군단으로부터제3사단을 배속받아 태백산맥 동쪽에서 동해안까지의 전선을 방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3사단이 홍천에서 남쪽으로우회기동하여 제1군단에 복귀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해안의 수도사단과 원주 북쪽의 미 제2사단 사이에는 인민군이 남하시 저지할 부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배치공간이 생겨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1월 5~6일 이 무렵 육본은 북한군 제2. 제9. 제31사단의 주력부대들이 횡성지구로 육박하기에 앞서 5일 밤에 국군 제1, 제3군단에 원주-삼척 간의 수정된 D방어선으로 철수하돌고 명령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병력들이 6일 원주를 지나 충주-제천-영월-삼척 선으로 남하함에 따라 원주 일대에서 국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미 제2사단의 동측방이 노출되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 원주 쟁탈전
※ '51.1.8~11일 : 미 제2사단이 원주 시가지 남쪽 247고지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 3,300명 사살, 군우리 오명을 씻었다.
원주 전투('51.1.7~11)
목계리
513 북5군단 학곡리 안흥리
섬강 누산 미38연
원주 비행장 치악산
적12사
외남송 단구리 남대봉
문막 국8-10연 247
599
여주 미23연
국8-10연 미천 미38연 원동
충주 제천
미 제10군단장은 38도선에서 철수한 국군 제5사단을 남한강 동쪽에, 중앙에 국군제8사단을, 원주에 미 제2사단을 배치하여 원주 방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때 미 제7사단과 미 제2사단의 일부(제9연대)는 제천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그리고 분산 철수 중인 국구 ㄴ제2사단은 군단 예비로 충주에 집결토록 하였다.
원주는 중부전선 제1의 요충지다. 적이 탈취한다면 여주, 이천으로 도 충주를 거쳐 대전으로 김천으로 진출하여 서부전선의 아군을 위협할 수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천-영주로 지향하고 안동, 재구를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확보가 차후 작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미 제2사단의 원주 결전은 불가피했다.
이때 미 제2사단은 원주와 남쪽의 비행장을 방어하기 위하여, 원주 외곾을 따라 제23연대를 서쪽과 남서쪽에, 제38연대를 북쪽과 북동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1월 7일 ,북한군 제5군단은 주력부대의 공격에 앞서 7일 05:30분에 400명 가량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29번 도로를 따라 피난민 대열에 잠입시켰다. 이들은 사단의 전초진지와 주진지를 통과한 후 후방에 있는 2대 대대의 본부를 기습공격하였고 이때야 비로소 사단은 적의 침투를 알게 된다.
이 공겨과 거의 동시에 북한군 제12사단이 사단의 좌인접 문막 북동쪽에 배치된 국군 제8사단 제10연대를 공격하여 돌파하고, 북서쪽으로 진출함을로서 미 제2사단의 진지가 돌출되어 버렸다.
이에 사단장은 군단에 건의하여 철수를 단행하게 되는데, 군단장은 원주 시가지를 통제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차후 공격발판이 될 수 있는 남쪽의 고지군을 점령하기를 기대했으나, 사단장은 그보다 7km 후방인 훨씬 남서쪽의 원주-목계동 도로로 철수하였다.
1월 8일 , 그러자 군단장은 4개 대대 이상을 시가지 바로 남쪽의 고지군에 배치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사단은 8일 아침에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 시가지 남쪽의 247고지로 진출한다. 당시 공격부대들은 부근에서 취침 중인 적을 기습공격하여 2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연대 규모의 적이 포위공격을 기도하여 247고지 후방, 연대 주력이 있는 미천으로 철수하여 국군 제8-10연대의 후퇴로 노출된 좌측방을 엄호하였다.
1월 9일~11, 이에 제10군단장은 다시 미 제2사단장에게 2개 대대로 247고지를 공격하여 247고지의 적을 격멸하고 원주비행장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이 명령에 의거 9일 10:00시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 근접항공지원을 받으며 적을 공격항였으나 공격이 돈좌되고, 10일에도 폭설 속에서 공격을 감행했으나 돈좌되고 말았다. 10일 하루만도 몇 차례 공방이 진행되며 북한군 200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미군도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여 11일 프랑스 대대와 네널란드 대대를 증원받았다. 이날 오후부터 기상이 맑아 지면서 항공지원속에 공격을 계속하여1,100명을 사살하고 247고지를 점령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계속하여 247고지 탈환을 위해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많은 인명피해와 탄약마저 바닥나 원주 장악에 실패하였다. 결국 17일 제27사단을 전방에 배치하며 접적을 유지하도록 하고 주력이 횡성부근으로 철수함으로서 원주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다.
이로써 미 제2사단은 북진작전간 청천강 교두보와 군우리 "불지옥의 계곡"에서 당한 오명을 싯어내며 중동부 전선의 국군 철수를 엄호하고 동시에 적의 돌파구를 저지하여 반격작전을 위한 중요 요충지를 고수하였다.
(라) 단양-영월 돌파구
※ '51.1.8일 국군 제7사단 정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0사단 선두부대인 제27연대는 29번도로를 따라 제천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작전 중인 미 제7사단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500여 명이 사살되고 14명이 생포되었다.
※공산군은 이번 신정공세에서 30여 만명(중공군 6개 군 23만 명, 북한군 3개 둔단 7만여 명)을 투입하여 서울을 재점령하고, 37도선 부근으로 진출하였으나 북한군 2,700명을 포함하여 85,000며이 전사
중동부 전선 상황('51. 1. 7)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양양'
인제
내평리 현리 C방어선
춘천 원포리 D방어선
C방어선
홍천 북2군단 강릉
D방어선
북5군단 횡성 수정된 D방어선 수정된D방어선
정선 삼척
D 방어선 국9사 평창 국3사 국9사 (1.9) 수도사
원주 미2사 국3군단=국1군단
여주 국5사
국2사 국7사 영월 국7사(1.8)
제천 미10군단=국3군단
미9군단=미10군단 미7사(-)
충주 남한강 단양
국2사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1군단과 제9군단은 1월 1ㅣ일에는 C방어선(홍천-원포리)으로 철수한데 이어, 5일에는 D방어선(원주-원포리)로 철수하게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형에 한정된 주요 통로마저 적들이 차단하고 있어서 철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현리부근의 제9사단은 4일 창촌을 경유, 속사리로 이동 중에 있었고, 홍천으 제3사단은 홍천-횡성을 경유하여4일 평창에 집결해 있었다. 또 홍천-춘천으로 북진하던 미 제7사단은 춘천 동북쪽에서 홍천-횡성-원주를 경유하여 목계-창동 선으로 철수 중에 있었다.
그러나 각 사단들이 D선을 점령하기도 전에 5일 다시 수정된 D선(원주-저선-삼척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내여왔다. 당시 제3군단의 제3사딘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있었고, 제7사단은 신림리에서 영월로 이동 중 적과 조우하여 격전을 펼치고 있었고, 제9사단도 장평리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선으로 철수 중에 있었으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이동 중에 있었다.
이렇게 중동부 전선의 모든 부대들이 수정된 D방어선으로 이동 중에 있어서 사실상 원주--동해안 간에는 적의 진출을 저지할 부대가 없어서 공백지대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은 이러한 국군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원주-제천-단양-도로의 동쪽 산악지대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들의 선두부대인 제2, 제9사단은 원주-삼척 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 부근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길원팔부대를 통합지휘하게된 북한군 제2군단은 군단주력으로 정면을 공격하고, 제2전선부대를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에 침투시켜 후방교란을 획책하려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로써 미 제8군의 판단과는 달리 영월 일대에 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이에 미 제8군은 미 제10군단에게 적이 영월 남쪽으로 한 발짝도 넘지 못하도록 적을 저지하라 명령한다. 미 제10군단장도 원주로 공격중인 제5군단보다 영월로 진격하는 제2군단의 측방공격을 우려하여 작전의 우선권을 적의 영월 남쪽 진출을 저지하는데 두었다.
육본도 38도선에서 격전을 치룬 후 작전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제3군단장 이형근 소장을 해임하고 참모차장인 유재흥 소장을 신임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이 당시에 국군 제9사단은 정선에, 제7사단은 영월 남동쪽에, 제3사단은 춘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51.1.8일 국군 제7사단 정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0사단 선두부대인 제27연대는 29번도로를 따라 제천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작전 중인 미 제7사단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500여 명이 사살되고 14명이 생포되었다.
공산군은 이번 신정공세에서 30여 만명(중공군 6개 군 23만 명, 북한군 3개 둔단 7만여 명)을 투입하여 서울을 재점령하고, 37도선 부근으로 진출하였으나 북한군 2,700명을 포함하여 85,000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병참선이 신장되어 보급형편이 어렵게 되면서 신정공세는 일단락 되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도 서울을 실함하고, 원주를 지키면서 1.4후퇴의 위기를 평택-원주-제천-삼척 선에서 극복하고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단양-영월 산악지대로 침투하여 후방지역을 교란하는 북한군 제2군단의 소탕이 급션무였다.
제 3 절 정부의 총력전 태세 확보
1. 국민 방위군 설치
정부는 국민방위군을 설치, 운용하기로 결정하고 '50.12.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고 국민방위병을 편성하게 되었다.
가. 국민으로 만 17세 이상 만 40세 미만 남자는 지원에 의하여 국민방위군에 편입할 수 있다.
나. 국민방위군은 지역단위로 편성함을 원칙으로 하되 국방부장관이 정하는기관은 기과별로 편성할 수 있다.
다. 전시 또는 사변에 즈음하여 군작전상 필요시는 병역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집단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소지할 수 있다.
이에 다라 국방부 및 육본은 김윤근 준장을 국민방위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 그 병력은 50만여 명에 달하였다.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전국에교육연대를 51개소 설치하여 17세부터 40세가지의 장정을 수용하였다 사령부의 몇 간부와 일부 교육연대장 그리고 극소수의 기간요원만 현역이고, 나머지 지휘관은 모두가 주로 청년단 출신의 급조된 방위군 출신 장교로 충당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하순에 편성되었으나, 중공군의 공세로 1.4후퇴와 더불어 후방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때 방위군 사령부는 대구로 이동하고, 지역 방위군은 지역별로 남하하여 대구, 부산 등지에 재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동간 방위군의 이동과 수용에 사용하여야 할 국고금, 양곡, 피복, 의료품 , 기타 보급자원을 부정착복함으로써 수많은 방위병이 영하의 기온과 장거리 이동하는 도중에 와병 또는 탈주자, 심지어는 아사. 동사. 병사자가지 생기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2. 대한청년단의 무장시도 : 맥아더 원수의 반대로 무산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대한청년단 50만 명을 무장시킬 장비제공을 요구하였다. 장면 주미 대사를 통해 투르먼 대통령을 면담하여 "기초훈련을 받은 100만 명이 무기지급을 기다리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미 합참에서는 긍정적으로 검토가 되엇으나,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기전붇대의 임무수행상테가 너무나도 좋지않기 때문에 새로운 부대의 창설에는 이점이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한 청년단은 기존부대의 보충요원으로운용하는것이 최선책이라고 하였다.
제 4 절 전쟁의 기로
중공군의 참전으로부터 1.4후퇴 기간은 전재으이 대기로가 되었다. 공수가 역전되면서 새로운 전략의 수립과 "철군이냐, 확전이냐"의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다.
1. 새 전략의 모색
가. 유엔군 측의 대응
'50년 11월 말부터 미 합참과 유엔군 사령부는, 전쟁을 중공으로까지 확대하려는 확전론, 38도선에서의 휴전론, 그리고 강압에 의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철수론에 일르기까지 당야한 논의가 전개된다.
이 논의에서 미국과 유엔군 측은 중공이 "두 번째 팀"이며 진짜 적은 소련이므로 미국기 중공과의 전쟁에서 깊이 휘말려들어 군사력의 주력을 투입해 전면전을 전개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유엔이 한국을 결코 포기해서도 안되고 일본의 방위를 위해 주한 미군의 병력과 부대를 재앙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 새 전략 수립의 촛점이었다. 특히 미국의 지도부는 중공의 침략에 대한 대처 방안도 빈드시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 조치를 통해 강구되어야 한다며 서방측 유엔회원국의 결속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확전이나 철수보다는 유엔 주도하에 38도선에서 휴전을 이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고려되었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한국정부는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우리는 일관되게 중공을 격퇴해야 하며 통일 정책목표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 문제 검토와 영국의 반대(당시 영국은 중공과의 무역으로 많은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은 중공의 참전에 대한 새 대응전략의 하나로, 사실 미국은 '50년 7월 초순부터 극비리에 한국전쟁에 핵무기 운용계획을 검토 발전시켜 왔으며 '50년 10월과 11월에 중공군의 공세로 위기에 처하자 이의 사용가능성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유엔군의 철수방침이 정해진 이튿날인 1950년 11월 30일에 트루먼 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직접 제시함으로서 표출되고 현안문제로 부상되었다.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불안해 하는 우방국 , 특히 유엔 참전국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유엔군은 한국에서 임무를 포기할 의도가 전혀 없다"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한다. 뒤따른 기자 질문에"미국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의 사용을 포함하여 군사상황에 대처할 어떠한 조치도 취할 것이다. 핵무기의 사용에 대해서도 늘 적극적으로 고려해 왔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즉각적인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으며, 특히 나토의 안보 이익적 관점에서 극동에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바람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영국 수상 애틀리가 12월 4~8일에 트루먼 대통령과의 회담을 갖게된다.
이회담에서 양국은 철군 문제에 관하여 유엔군의 자발적인 철군은 고려할 수 없다는데는 합의 하였으나, 강압에 의한 철수의 경우는 미국은 유엔에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등 군사. 정치. 경제적 보복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에 반하여 영국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이전의 경계선을 토대로 종결짓겠다"는 합의였다.
한편 유엔에서는 '50년 12월 5일 아시아-아랍 13개국이 중공과 북한에 38도선을 넘지 않도록 요청하는 제의를하고 38도선에서의 휴전에 관한 쌍방의 의사 타진을 하였다.
나. 중공군의 대응
하지만 이미 작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맏는 중공측이 이런 제안을 받아드릴리가 없었다. 주은래는 한국에서의 군사행동의 중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한국으로부터 모든 외국군의 철수
2. 대만해협과 대만지역으로부터 미군 철수
3. 한국문제의한국민족에 의한 해결
4. 중국대표의 유엔 참가와 장개석 정부의 유엔 탈퇴
5. 일본과의 평화협정 준비를 위한 4대 강국 외무장관 회의 소집
중공은 이를 소련 스탈린에게도 보내 완전히 동의한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당시 스탈린은 미국의 첩자국이라 할 수있는 대표들에게는 솔직하거나 미리 계획을 알려주지 말라고 요구한다.
중공의 전략은 이미 12월 4일에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보낸 "조선 전쟁의 전개 방향"에 대한 의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모택동의 의견]
"적군은 정전을 요구할 것이다. 이때 미 제국주의는 조선에서의 철수를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데 우선은 38선 이남까지 철수해야만 우리는 정전회담에 응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우리가 평양을 수중에 넣을 뿐만 아니라 서울도 수복하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적을 섬멸하는 것인데, 먼저 남조선군을 섬멸시켜야 미 제국주의 철수를 촉진시키는 데에 더욱 큰 힘이 될 것이다"
아시아-아랍 블록은 공산군측의 기도는 간파하지 못한 채 외교적 주도 노력을 걔속하여 12월 11일에 두 개의 결의안을 총회에 상정하였다. 하나는 휴전을 추진할 3인 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후 극동문제에 관한 회담이 신속히 열리도록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중에 첫번째 안은 이란. 인도. 캐나다 대표로 3인 위원회를 구성한다는 안으로 12월 14일유엔 총회를 통과하였다.
한편 미국은 12월 11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휴전을 고려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휴전조건을 논의하였다. 그것은 "유엔군에게 군사적 불이익을 부과하지 않고 정치적 양보를 내포하지 않아야 하며 휴전에 관한 세부사항은 유엔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휴전을 수락하기 전에 협상행야 한다"는 원칙 하에 구체화 되었다.
당시에 유엔 외교가에는 영국외상이 미국과 중공 간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하여 한반도에 완충지대 설치안을 제의했다는 보도 등이 난무하며 한국 정부는 장면 대사와 임병직 외무장관이 한국정부는 38도선의 재획정을 절대로 반대한다고 강한 의지를 천명하지만 그 효과는 의문시 되었다.
하지만 12월 21일에 북경으로부터 답신은 중공의 참여없이 취해진 유엔의 모든 결의는 불법이라는 잉유로 휴전위원화의 제의를 거절하고 당시 유엔에 머물고 있던 대표단을 철수시켜 버렸다.
[이미 그들은 신정공세를 준비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교시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이었다. 12월 13일 모택동은 38도선 남쪽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섬멸하고 서울을 점령하라고 3차공세(신정공세) 명령을 하달했다.
12월 23일, 주은래는 미국의 행도을 비난하면서 "분계선으로의 38도선은 유엔군의 북한 영토 침범에 의해 영원히 무효가 되었다"고 강조하고 한국에서의 외국군 찰수와 대만에서의 미군철수 등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 했다.
이에 미국은 12월 16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데 이어 1월 20일에는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상정하였으며, 이는 2월 1일 유엔총회를 통과하였다.
일주일 후 1951년 1우러 1일 그들은 신정공세를 취하였다.
2. 철군과 확전 논쟁
중공군의 참전으로 제기된 철군과 화전 논쟁은 1950년 12월 초순, 영미 영수회담에서 한국전쟁을 유엔 주도하에 휴전으로 해결하기로 전쟁지도 방침을 정하고 휴전위원회가 할동을 시작하지만 공산군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자, 미 합참은 '50. 12월 22일 대단히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즉 한국전쟁에 미군가 유엔군의 투입을 가져온 유엔의 최초결의(지시)는 이제 시효가 지났으며, 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하고, 중공이 전력증강에 뒤이어 강력한 공격을 가해 그들의 의도가 유엔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려는 것임이 명백해진 만큼 정부수준에서 가능한 빨리 유엔군의 철수 결정을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중공의 침략에 대해 유엔이 추가적인 전력을 한국에 보내 그들로 하여금 값비산 대가를 치르게 하여 침략 의도를 포기하게 응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판단하였지만, 당시 국제정세와 유엔의 분위기로 보아 유엔의 실질적 증강이나 미군의 추가 투입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한반도가 그들로서 주요전쟁을 할 장소가 아니라는 일관된 정책기조하에 중공의 참전으로 전면전의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범세계적 전략상 중공과의 싸움이 나머지 지상군을 투입해서는 인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현 작전부대의 보존을 위해 유엔군의 강제 축출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은 이와같이 강압에 의한 철군정책 결정을 내리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0.12월 29일에 유엔군사령관에게 통보하였다.
" 적에게 가능한 한 큰 손실을 가하면서 부대안전을 주로 고려하는 조건으로 축차적인 진지에서 방어하도록 한다. 사태가 우리의 철수를 강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특히 일본에 대한 위협을 고려하여 군의 질서정연한 철수에 대비, 적절한 기회를 마련해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금강과 거리로부터 동쪽으로 연한 진지로 철수를 강요당하고 그 후 중공군이 우리를 한국에서 밀어내려는 명백한 가능성을 보이며 바어선으로 대부대를 집중시킨다면 이 조건하에서 일본으로 철수를 시작하도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맥아더의 회신, 네가지 방책 ]
맥아더에게 이 지시는 전쟁에서 싸워서 이기려는 의지의 상실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였다. 맥아더는 다음날('50.12.29)회신에서 이와는 달리 방어를 위한 강력한 보복조치(확전조치)를 요구하였다. 그는 중공의 전 군사자원이 유엔군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만주와 한반도에 집중되었기 대문에 다은 지역은 취약하나 기존정책은 이 기회의 이용을 금자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정부가 "중공 당국에 의해 전쟁 상태가 강요되었음을 인정하기"로 결정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1. 중공의 해안 봉쇄
2. 중공 공업의 전쟁수행 능력을 해공군의 폭격으로 파괴
3. 자유중국 부대로 유엔군 참전
4. 자유중국군에게 중국 본토에 대한 견제 공격의 허용
맥아더는 이 조치를 통하여 유엔군측은 상대적으로 적은 군사력의 투입으로 중공의 침략전쟁 수행능력에 심한 손상을 가하고 크게 무력화시킬 수 있으며, 아이아가 그들에게 정복을 당하지 않도록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유엔군에 대한 압력이 완화될 것이다. 그때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해공군으로 중공에 대한 작전을 계속 펴면서 근해 도서에 재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방책과 주장이 주요전쟁을 도발할 것 같다는 이유로 앞서 거부된 일이 있지만 이제는 중공이 전쟁에 완전히 개입한 이상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 없다면서 보복조치의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소련의 참전여부는 "투기의 문제"이며 오직 상대적 전력과 능력에 기초하여 그들 스스로 결심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한 그들이 일본에 대한 관심이 집중하고 있음에 유의하여 4개의 주 방위사단을 극동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추가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전략배치의 우선순위에 대하여 유럽의 안보요구를 이해하고 그 지역의 지원에 동의하나 다른 모든 지역에서의 패배 후에는 유럽의 패배도 반드시 초래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극동의 현 위기에 대한 부대운용이 국가전략의 기본개념을 해치지 않는다면, 극동에 대한 우선적 지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결론에서는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에 대한 제한이 계속된다면 합참의 판단에 동의한다.. 철군은 그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부산교두보가지 방어선을 남으로 축차저긍로 축소해가면서 강행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였다.
결국 극동군사령부는 '51. 1월 7일에 철군계획을 확정했다.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질서정연하개 철수시킨다. 미군은 전면전쟁에 대비하여 국방방어선에 재배치한다. 유엔군은 모국으로 귀국조치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계획목적상 유효하다는 단서를 붙여 예핟ㄷ대에 하달하였다.
이 이후에도 워싱턴과 도쿄의 전쟁지도 노선의 갈등은 계속된다.
우선 맥아더 원수의 보복조치에 관하여, 신중을 기한다는 전제하에 , 해안봉쇄는 철군을 완료하던가 전선이 안정 되던가에 따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중공 본토 폭격은 중국이 한반도 외부로부터 유엔군을 공격할 경우에 승인할 수 있다. 자유중국군의 유엔군 편성은 큰도움이 되지 못할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그의 운용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채택이 곤란하다. 그밖에 추가 병력지원은 한국의 방어선이 안정될 경우 2개의 주방위사단을 일본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개하고, 그랗지 못할 경우 그 목적은 한국으로부터철수하는 부대로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맥아더 원수에게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가하면서 축차적 진지에서 방어하되, 인력과 장비의 심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불가피할 경우 일본으로 철수하라는 지침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한반도에서 군사저긍로 계속적인 저항이 불가능할지라도 철수 후 제주도와 같은 한반도에서 저항을 계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당시 미국정부는 최악의 경우 망명정부를 유지하여 저항을 계속하도록 한국을 지원할 것을 정책목표의하나로 설정한다.
3. 정부의 이전 검투
미국정부가 1951년 1월 12일 중공군의 참전과 관련하여 결정한 유엔군의 전쟁지도 지침에는, 강압에 의한 철수시 유엔군은 일단 일본으로 철수하되,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시켜 저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중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한국정부로 하여금 제주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고 본토수복을 위해 저항을 계속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장면대사가 미국 국무부에 들어가 사실을 확인, "유엔군이 중공군을 격퇴하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경우엔 한국 국민은 죽어버릴 것이 아니냐" 라고 하자 당시 미 국무부(러스크)는 "미국은 한국전쟁을 포기하거나 군사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철군할 생각이 전혀 없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최악의 경우 미군이 한반도를 떠난다면, 물론 그런 일이 없겠지만, 한국 망명정부 수립 가능성에 대한 검토를 대사가 원한다면 그것에 대한 의견을 알고 싶다고 의미심장한 뜻을 전달하였다.
당시 미국이 극비리에 추진한 이 계획에 따르면 "대한민국이 법적 정통성을 유지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국정부와 군경을 제주도로 이전한다"라고 전제하고 그 대상 인원을 행정부 괸리와 그 가족36,000명, 한국 육군 260,000명, 경찰 60,000명, 공무원, 군인 및 경찰 가족 400,000명을 포함하고 기타 요원을 고려해 도합 100만 명으로 판단하여 수송계획까지 발전시켰다.
망명정부의 위치는 제주도를 적지로 결정하였으나 이곳에는 이미 25만명에 달하는 피난민과 포로가 수용되어 있어 식수가 부족하여 추가 수용이 불가능한 실정이므로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을 먼저 근해도서로 이송하기로 하였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한국인을 일보능로 이동시키지는 않기로 하였다.
당시에 맥아더 원수는 이 계획의 검토과정에서 "한국인의 철수와 관련해서 제반 문제는 유엔(회원국)과 협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철수 정소, 급식문제, 의료지원 등 이에 따른 비용 등에 대하여 유엔군의 철군여부를 결정할 때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유엔구능ㄴ 제공권과 재해권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중공군의 시장된 뵹참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에 부산 교두보(낙동강 방어선)를 상당기간 확보할 수 있다"하고 하였다.
[TOP SECRET : 철수계획 검토안]
그러나 당시 유엔군측 지도부는 철군계획을 최고비밀로 유지하고 있었다.이는 한국군의 사기저하와 한국군민에게 미칠 영향을 보다 심각하개 우려하고 있었으며, 특히 이러한 전략이 중공군에 누설될 경우는 더욱이 많은 문제점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따라서 부산교두보(낙동강 방어선)에 도착할 때까지는 철군을 위한 에비명령을 작성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너무 신중한 판단 : " 유엔군의 철수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유인작전이다"]
그러나 유엔군측의 적의 능력에 대한 이러한 판단과는 달리, 후에 밝혀진 중공의 항미원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이 무렵 중공군은 유엔군을 더 남쪽으로 밀어붙일 힘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유엔군의 후퇴를 철군의 징후로 보지 않고 자신들을 유인격멸하기 위한 전략으로 판단한 나머지 신정공세를 추격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스스로 멈추었다.
이에 따르면 중공군의 제1 및 제2차 공세에 총 투입된 30개 사단 중 2차로 투입된 제9병단(3 개군 12개 사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하여 함흥 부근에서 재편성 중에 있어서 신정공세에 참가하지 못하였을 뿐만아니라 , 1차로 투입되어 38도선 까지 진출한 제13병단(6개군 18개 사단)은 2차에 걸친 동계작전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약 23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탄악 및 보급이 바닥을 드러낸 실정이었다. 북한군은 3개 군단 약 75,000명이 전방으로 전개하였으나 새로 징집된 신병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였었다.
중공지원군 사령관 팽덕회는 유엔군의 철군기도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도리어 유엔군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여,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우선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서울을 점령하는 선에서 동계공세를 일단 종료하기로 하였었다
당시 팽덕회는 모택동에 보낸 서신에서 "신중하게 공격을 해야 한다"라고 건의하고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렸다
[모택동에 보낸 팽덕회의 전쟁 평가]
조선전쟁은 상당히 장기적이고 어려운 전쟁이 될 수 있다. 적군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였고, 전선은 축소되고 짧아졌으며, 병력이 집중되고 바어정면이 협소하여 자연히 종심이 강화되었고, 합동작전에 유리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볼 대, 적군이 이 시점에 서 조선을 포기하게 됨년 제국주의에 매우 불리할 것이기에 영국, 프랑스도 미국이 조선을 포기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적은 한두 번 패배를 격더라도, 또 다시 2~3개 사단이 섬멸되더라도 아마 몇 개의 교두보 진지(부산, 인천, 군산)까지 물러나면서 방어할 것이며 결코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모택동의 회신]
적 정세에 관한 당신의 예측은 정홯다. 반드시 장기계획을 세워야 하고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하려는 판단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라고 팽덕회의 판단에 동의하는 전문을 회신하였다. 그는 전역을 마친 후 주력은 스스로 철수하여 휴식과 재정비를 갖추게 해야한다. 그러므로서 아군이 춘게에 다시 적을 섬멸함에 유리하게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는 신정공세의 목표가 국군과 유엔군을 남쪽 바다로 밀어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서울 점령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들은 유엔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철수를 자신들을 깊숙히 유인하여 자신들의 측후방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하려는 기도를 품은 것으로 판단하여 멀리 전진하여 이용당하는 것을 막고 앞으로의 춘계작ㄷ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추격을 중지한 것이다.
[50KM의 대전환점, 37도선 !]
결과적으로 유엔군의 수정된 D선으로의 철수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유엔군은 이 선을 물러나 금강-소백산맥 선에 이르면 앞서 계획했던 철군계획을 구체화 하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수정된 D선(평택-안성-원주-삼척선)에서 금강-소백산맥선은 불과 50KM거리였다.
우리는 월남의 패망에서 자유를 향한 "보트 피플"의 비참한 탈출을 기억하고 있다. 작금에도 우크라이나-소련의 전투에서 빚어지고 있는 조국을 떠나는 피투성이 피난민들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전에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가지지구 전투나 시나이 반도의 화약고에서, 미국과 이란(소련, 중공의 사주)의 사태에서 자유와 공산주의(독재와 사회주의 이해)에 대한 힘겨루기를 돌아보며 상대의 기도와 전략의 오판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를 통해 한 국가, 한 민족의 운명이 기로에 서게 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37도선, 50KM, 우리 민족에게 제주도로 정부를 이전(대만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본토, 즉 중국땅에서 밀려난 것처럼)하느냐, 아니면 교두보선에서 저항하느냐의 운명적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아닌 적의 선택으로 유엔군이 다시 재반격하는 아이러니컬한 전쟁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유엔군의 재반격
제 1 절 재반격의 전초전
1.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지침
가. 공산군의 상황
공산군은 이른바 그들의 신정공세(제3차 공세)를 '51.1.1~8일까지 실시한 후 유앤군에 대한 추격작전을 멈추었다.
이는 계속된 동절기 전투로 전력이 저하되고, 혹한과 피로로 지쳐 있을 뿐만 아니라 과도한 병참선의 신장과 유엔군의 공중공격에 보급품이 고갈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방지역에 대한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우려하여 동부전선으로 침투 중인 제2전선 부대를 제외한 주력부대는 수원-금양장리-용인-이천-여주-원주 선에서 멈추었다.
적은 신정공세로 38도선에서 남쪽으로 80~110km의 지면은 확보했으나, 무려 85,000명(인민군 2,7000명 포함)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유엔군의 조직적인 철수작전으로 유엔군 주려부대 격멸에 실패하여 공세기도에 차질을 빚어 춘계공세 준비를 위하여 1월 8일 신정공세를 종료하고 방어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적은 북한군 제1군단이 인천 부근에, 중공 제50군을 수원-금량장리, 제42군은 여주-이천 선에 배치하여 한강 남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 후방에는 중공 제39군을 의정부 일대에, 제38군과 제40군을 서울 북동쪽 수락산 일대, 중공 66군은 양덕원리 부근에 집결시켜 휴식과 부대정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적의 예비안 중공 제9병단은 장진호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아지고 함흥 지역에서 재정비 중에 있었다. 다만 동부전선의 북한군 제5군단은 원주로, 제2군단 예하부대들은 제천-영주 선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나. 유엔군의 상황
아군은 주저항선을 38도선에서 37도선으로, 평택-안성-장호원-원주-주문진을 연하는 D선으로 조정하면 방엉에 유리한 지형을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이 험준한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계속 침투작을 펼쳐, 원주ㅡ주문진 선에서 방어진지 편성이 불가능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1월 5일 D방어선을 원주-주문진에서 64KM 남하시켜 원주-삼척선으로 수정하고 국군 제1, 제3군단이 점령토록 한다.
이 무렵 유엔군의 전선은 다음과같다. 미 제1군단은 영 제29여단을 1번 국도 서쪽에, 미 제3사단을 1번국도와 제17 국도(천안-안성금양장리-경안리) 사이에, 국군 제1사단을 안성북쪽에 배치하였다.
미 제1군단의 우인접으로 장호원-남한강에 배칟ㄷ된 미 제9군다능ㄴ 국군 제6사단을 죽산리에, 영 제27여단과 미 제24사단을 장호원 일대에 배치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후방지역과 주보급로를 엄호하기 위해 충주에 확보하였다.
그리고 중부전선의 남한강-원주 선에 배치된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5사단을 문막 서쪽에, 국군 제8사단을 문막 동쪽에, 미 제2사단을 원주 남쪽 일대에 배치하고, 예비인 국군 제2사단을 충주에 두어 군사시설과 보급로를 엄호하게 하고, 미 제7사단은 제천-안동 간 주보급로를 경계하게 한다.
방어선의 수정으로 평창-장평리에서 이동하는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9일 국군 제7사단을 영월 북쪽에, 국군 제9사단을 전선 북쪽에 배치하고, 국군 제2군단에서 배속된 국군 제3사단을 춘양에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 이동하여, 도로망의 결핍과 결빙으로 12일 삼척 서쪽의 방어선을 점령한다.
다. 제8군사령관의 작전지침(("분쇄기식 전술")
(1)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제압하기 위해 화력(포병, 해공군)과 기동력(보.전. 포)에 의한 우세를 최대한 활용한 살상전술을 달성한다
(2) 지역 확보보다는 오로지 적을 살상하는 것이다. 아군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인원, 물자에 최대의 출혈을 강요한다.
(3) 공격은 모험적인 작전을 회피하고, 최초 소단위부대의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적정을 확인한 후에 보다 강력한 전투정찰 또는 제한목표를 탈취하기 위한 전면공격으로 확대한다.
(4) 공격간에는 공격의 속도보다는 인접부대와의 횡적인 협조와 연결을 긴밀히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축차적인 통제선을 설정한다. 모든 공격부대는 전선이 돌출되거나 적의 우회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군단장급 지휘관의 사전승인을 얻은 후 이 통제선을 통과한다.
(5) 적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 아군은 인접부대 사이의 연락과 협조를 유지하면서 사전 계획된 축차방어선으로 질서있게 후퇴하되, 어느 한 부대의 급속한 철수로 말미암아 전선의 불균형을 초래하거나 적에게 돌파구나 후방침투를 허용하지 않도록 한다.
(6) 후퇴간 무든 부대는 일방적인 철수가 아닌 반드시 적과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지연전투를 감행하고, 모든 가용한 기회를 포착하여 초대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아군의 화망속으로 유도한 다음 지상 및 항공화력을 집중 강타한다.
(7) 적의 공격기세가 한계점에 도달하면 아군은 지체없이 공세로 전환하여 반격을 지속적인 기동전을 수행함으로서 적의 출혈을 강요하여 전투력을 소모시킨다.
2. 위력수색 작전
※이번 위력수색작전으로 미 제1군단은 항공작전으로 1,180명, 지상작전으로 195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면서 10며의 손실을 입었다.. 미 제9군단은 항공작전으로 50명, 지상작전으로 15명을 사살하고 7명의 손실을 입었다.
'51.1.7~15일 미 제1군단이 국군 제1사단 수색대를 금양장리 부근에, 미 제25사단 제27연대를 1번도로 좌우측과 진위천 북쪽지역을 ㄱ광범위하게 정찰하고, 미 제군단 정찰대도 이천과 여주 지역을 수차례 정찰하여 그 지역이 공간 지대임을 확인하였다.
당시 중공군의 특별한기동은 확인되지 않고 있었고, 수원과 오산 사이의 1번 도로변과, 경안리 부근의 13번도로와 17번 도로의 교차점에 주로 집결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보고되는 반약한 정봉에 불안감을 느낀 제8군사령관은 동부전선에 대하 ㄴ적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부전선에서의 제한된 규모의 위력수색을 계획하였다.
가. 미 제1군단의 울프하운드(미 제25-7연대 별칭) 작전
미 제1군단은 예비인 미 제25사단 제27연대에 1개 전차대대와 포병 및 공병을 증원시켜정찰대를 편성한다. 정찰대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미 제3사단은 보병과 전차로 편성한 소규모 부대를 파견하여수원-금량장리간 20번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고, 국군 제1사단은 급량장리 남쪽 5KM지점의 17번 도로상의 천리에 1개 대대를 배치한다
제27연대 주력은 1월 15일 1번도로를 따라 북진 중 오산과 발안장 부근에서 1차 진출을 중지하고 16일 수원까지 차량화부대로 진격한 다음 철수한다.. 여기서 국군 제1사단 12연대 제2대대가 천리로 진출하고, 다만 미 제3사단의 제15연대 제1대대가 금양장리 부근에서 적 600~800명과 조우하여 진출이 돈좌되었다.
나. 미 제9군단의 위력수색작전
미 제9군단도 미 제1군단 작전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국군 제6-7-3대대를 군단 전투지경선인 금량장리에, 제6-7-2대대를 백암리에 배치한다. 그리고 상주에 있던 에비인 미 제1기병사단 제70전차대대를 진천으로 전진 배치하여 국군 제6사단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 제9군단자은 금량장리-이천-여주를 연결하는 도로의 남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을 포착하기 위해 우전방의 여주에 있는 미 제24사단의 1개 대대를, 중앙의 이천에는 전차와 포벼응로 증강된 1개 대대를 배치하여 책임지역을 방어하였다.
미 제9군단은 접적이 없자, 1월 22일 제8기병연대에 제70전차대대와 포병으로 증강된 특수임무부대(잭슨 부대)를 편성하여 백암리 부근의 국군 제6사단 전초진지를 초월하여 양지리로 진출시켜 금량장리-이천간의 20번 도로 북쪽의 고지대를 정찰하도록 하여, 적이 20번 도로 이남에는 업승며 소규모가 도로변에 배치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번 위력수색작전으로 미 제1군단은 항공작전으로 1,180명, 지상작전으로 195명을 사살하고 5명의 포로를 생포하면서 10명의 손실을 입었다.. 미 제9군단은 항공작전으로 50명, 지상작전으로 15명을 사살하고 7명의 손실을 입었다.
3. 제2전선부대 차단
영월부근 전투('51.1.18~22)
미7-17연
북제2선선 완택산 국7-8연
일곡
영월 두평 석항 국7-3연 백운산
용봉산 만경대산
북9사
태화산 옥동리 국3-23연
국3-23연
영춘
의풍리 태백산
어래산
제천 북2사 원만허 국5-35연 국3-18연 북31사 선달산
형제봉 남대리 옥석산
단양 미7사(-) 국3-22연
국5-36연 비로봉
국5-27연 아호리 국3-18연 문수산
춘양
도솔봉 풍기 봉화 국3사
영주 북10사
서부전선에서는 전선이 안정되어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적정을 파악하고 한강으로 진출을모색하는 동안, 신정공세와 대를 맞추어 북한군 제2군단 4개사단(제2. 제9.; 제10. 제31사)이 홍천-횡성-원주 선으로 종심깊에 침투하여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제천-영월 남쪽의 단양, 문경, 영주, 안동 일대에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홍천-주문진의 방어선을 유지 하기 못하고 1월 5일 20:00시 육본 명으로 영월-삼척(황우선)으로 철수하였다.
'51.1. 9일 이형근 준장의 후임으로 국군 제3군단에 부임한 유재흥 소장은 영월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좌전방 제7사단을 영월 북동쪽 완택산 일대에, 우전방 제9사단을 정선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배속된 제3사단을 예비로 춘양에 배치한다.
한편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투 이후 동부산악지대로 철수하면서 다른 부대의 낙오자와 패잔병들까지 수집하여, 화천-김화-양덕에서 재편성하여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대는 게릴라 전을 수행했으며, 북한군 중에 동부 산악지형에 익숙하고 침투전술에 가장 능한 부대였다.
이들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후방지역에서 교란작전을 펼칠 목적으로 신정공세 이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이들은 제10사단이 원주부근에서 미 제2사단과 조우하자, 미군과의 접촉을 회피하기 위하여 동쪽을로 이동하여 29번도로 동쪽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2군단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사이에 생긴 제천-영월 간의 약 24KM 배치 공간을 이용하여 접적없이 진출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한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최대의 위험은 원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5군단이 아니라 이 통로로 침투 중인 제2군단이라고 판단하고 미 제10군단에 지역내 통로를 차단하고 인민군을 격멸하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1월 11일 상주에 대기 중인제187공정단을 안동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에 배속시킨다. 아울러 안동-영덕간의 도로 남쪽 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함흥에서 철수하여 마산에 대기 중인 미 해병 제1사단을 영천-경주-포항지역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강화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제천-영월 사이를 방어하기 위하여신정공세 기간 중에 접적이 경미했던 문막 동쪽의 국군 제5사단을 이곳으로 이동시키고, 그동안은 미 제7사단의 정찰활동을 강화 시켰다.
'1월 9일 , 북한군 제10사단의 선두인 제27연대가 제천으로 진출 중에 미 제7사단 정찰대와 조우하여 치열한 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특별공격대대(대대장 배동걸 소령)는 1월 12일 점촌에서 단양으로 침투한 적이 문경 북방 황장산 하록의 적성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1개 연대를 식별하여 항공폭격과 이틀 동안의 격전에서 1,000여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전투장비를 획득한다.
미 제10군단장은 적이 종심깊이 침투한 현재의 상황에서제천-영월 간으 방어하는 것보다 후방지역 종심배치하여 정찰을확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한다.
'51.1.16일 군단장은 군단 방어선을 여주-원주 선에서 운남리-제천 북쪽으로 남하시켜 미 제2사단이 주저항선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고 문막에서 방어 중인 제5사단은 영춘에, 제8사단은 황강리에 투입하게 된다.
적은 군단의 증원부대 투입에도 불구하고 계속후방으로 진출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은 이미 안동-의성지구로 침투하여 후방교란을 하고 있는제10사단과 연결하기 위해원주-제천-안동 선으로 진출하여 12일 형제봉 서쪽의 원만허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전투지경선인 남한강변을 따라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은 국군 제3군단의 후방지경선인 영주-봉화-춘양을 확보하기 위해 제9사단은 영월 남동쪽 옥동리에, 제31사단을 남대리 부근에 집결 중이었다.
적이 침투한 지역은 속리산-이화령-죽령-소백산-태백산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 지역으로 적은 산악거점을 점령하여 활동이 용이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7사단을 제천에서 영월 방면으로, 제187공정단을 제천-영주간 29번 도로 주변을, 국군 제2사단의 제17연대는 단양에서 충주에 이르는 도로변을 수색정찰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의 주력은 영주 북쪽 군단후방을 정찰하고 국군 제2사단의 주력은 문경새재에 배치하여 산속에 고립된 패잔병들의 당양 진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때 국군 제3군단장도 군단의 방어선인 두평-후천-정선-송계리 전방에서 적의 저항이 없자, 군단 후방지역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을 공격에 투입한다. 제3사단은 남대리 부근에서 활동중인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하기 위해 제18연대가 남대리, 제22연대가 옥석산, 제23연대가 어래산을 공격 목표로 설정하고 공격 개시하였다.
이때 적은 산속으로 잠적한 후 야음을 이용하여기습공격으로 저항하였으나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분산하여 도주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사단 좌인접 국군 제5사단 지역으로 들어가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51.1.19~22일, 국군 제7사단도 제8연대가 사단 후방지역을 방어하고, 제3연대와 배속된 제3-23연대로 석항에서 영월을 목표로 공격히여 망경대산, 매봉산을 확보하고, 22일 미 제7사단 제17연대와 협동작전으로 미 제7-17연대는 북쪽에서, 국군 제3연대는 남쪽에서 영월을 포위 공격하여 시내 도처에 시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산재해 있었다.
당시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되어 북한의 침투활동을 제한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으로 적 병력과 탄약 을 파괴하여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북한군 제2군단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력이 약화되자 북한군 제5군단 제27사단을 제천으로 투입하여저항하였으나 22일 경에는 조직이 거의 와해되고 대열이 흩어져서 저항이 경미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월 20일 북한군 제2군단을 평창 부근으로철수하여 재정비하도록 하였으나 1월 말에야 평창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당시 북한군 4개 사단에 병력 16,000명이었으나 생존자는 8,600명에 불과했고 특히 공격의 첨병 역활을 수행한 제10사단은 안동으로 진출 도중에큰 피해를 입엇으며 미 제10군단에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망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산악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펼쳤으나 '51.1.18일부터 3주 동안 포항-안동-영덕 일대에서 펼친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의 수색작전에 완전히 와해 되었다.
이로써 북한군 제2전선부대는 1월 말 전후하여 소탕되었고, 후방지역이 안정을 되찾자, 미 제10군단은 남한강-제천-영월 선에, 우인접 국군 제3군단은 영월- 정선 서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다시 전선을 회복하였다.
제 2 절 재반격 작전
1. 한강으로의 재진출(1.25~2.10) "선더볼트 작전(번개작전)",
※ 남한산-양자산을 연하는 중공군 최후 교두보를 남기고 2월 10일 종료
※ 인천-영등포-흑석동(관악산)-대모산
국군과 유엔군은 '51.1월 중순 서부전선에서 펼친 위력수색과 동부전선에서의 북한군 제2전선을 차단 및 소탕함으로서 반격작전의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총공세로 전환하기에 앞서 한강 남조게 배칟된 적의 방어진지를 보다 명백히 파악하기 위하여 울프하운드 작전보다 더 강력한 부대로 신속하게 종심깊이 파괴적 위력수색작전이라는 의미로 "선더볼트" 즉 번개작전을 명령했다.
[선더볼트 작전]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전차로 증강된 미군 1개 사단과 군단자의 판단에 따라 국군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여 1월 25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한강가지 수색작전을 펼치도록 하고, 공격제대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군단지역 전방에 8KM간격으로 5개의 작전 통제선을 설정하고 통제선 통과는 군단장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작전부대에 충분한 하력을 지원화기 위하여 미 제5공군이 25일부터 이틀 동안 최대의 근접항공지원을 보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천 외항에 있는 미 제95기동함대의 순양함 2척의 구축함으로부터 함포사격의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가. 수원-이천 진출 작전
※ '51.1.25~26 군우리에서 당한 치욕을 갚아준 터키여단의 투혼, 신갈 151고지 전투 : 중공군 474명의 시체 확인, 모두가 턱이 깨어지고 총검에 찔린흔적 확인, '52. 9월에 이승만 대통령 부대 표창과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수상
'51.1. 25일 3주 동안 부대정비를 재정비한 미 제1군단은 1월 25일 좌전방 39번 도로와 1번 도로 사이에는 미 제25사단의 제35사단 연대를, 우전방 55번 도로에는 터키여단으로 공격제대를 편성하고 공격을 개시한다.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은 우전방 공격제대로 신갈 남쪽의 151고지와 금량장리를 공격하였다. 26일 151고지로 접근하자 중공군은 진지마다 기관총도 배치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결국 백병전으로 점령한다. 군우리에서 당한 치욕을 갚아준 터키여단의 투혼, 신갈 151고지 전투 : 중공군 474명의 시체 확인, 모두가 턱이 깨어지고 총검에 찔린흔적 확인, '52. 9월에 이승만 대통령 부대 표창과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수상
군단장은 한강에 접근할수록 보다 강력한 적과 조우할 것을 예상하여, 미 제3사단을 적정이 강한 수원동쪽의 55번 도로 축선에 우전방 공격제대로 투입하고, 신갈-금량장리에서 혈전을 펼친 터키여단을 서해안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예비로 주보급로를 경계중인 국군 제1사단의 제15연대를 미 제25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수리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31일이 되어서야 수원북방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1군단의 우인접에서 공격 중인 미 제9군단은 26일 제8기병연대가 양지리 부근에서 완강한 저항을 받아 28명이 전사하고 141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에 제5기병연대가 초월공격하여 양지리 부근에서 적 300명을 사살하고 17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기 시작한다. 이때 군단장이 전과확대를 위해 미 제24사단을 군단의 우측방으로 투입하엿으나 군단의 진출은 31일 이천 북쪽의 제2통제선을 지나고 있었다.
'51. 1. 29일 이 무렵 생포된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서해안과 1번도로 사이에는 인민군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이 터키군과 미 제35연대의 전방에 배치되어 있고, 그 후방에는 북한군 제1군단의 주력인 제47사단이 인천에, 제17사단은 영등포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1번도로와 17번 도로 사이에는 중공 군 제50군의 제148. 제149. 제150사단이 미 제25사단과 제3사단 및 미 제1기병사단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17번도로 동쪽의 남한강까지는 중공군 제38군 예하 제112, 제113사단이 미 제24사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나. 인천-서울 -곡수리 진출
신정공세 이후 중공군은 유엔군이 계속적인 철수작전으로 피해를 ㅎ회복하고 부대정비를 거쳐 2월에 가서야 충공세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국군 과 유엔군이 한강선으로 진출을 시도하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중공군은1월 27일 서둘러 휴식과 부대정비를 중지하고 유엔구늬 공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포로들은 유엔군의 공격개시를 구저인 2월 6일을 전후하여 판단하고, 한강 남쪽에서는 일부 부대만 배치하여 접적을 유지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까지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라고 진술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 제13병단 주력들이 한강 북쪽에 집결되어 있엇으나, 갑자기 지평리, 가평 북쪽지역으로 이동이 현저하게 증가되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한강 남쪽에 주저항선을 설치하고 병력을 증원시켜 배수의 진을 치고 완강하게 저항할 징후라고 판단, 위력수색부대들의 전면 공격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특히 미 제1군단은 기갑부대로진격계획을 수립하고, 제 5공군은 한강아남지역에 강력한 항공폭격으로 적을 고립시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중동부전선의 제10군단장에게도 북한군 제2, 제5군단의 재편성을 저지할 수 있도록 서부전선의 한강진출 작전과 같은 유사한 ㅈ작전을 검토하도록 하였다.
미 제8군의 서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5연대(미 25사 배속), 미 제25사 35연대, ㅌ키여단으로 편성된 공격 제대들은 1월 31일부터 안양 남쪽의 수리산-모락산 을 공격한다.
[수리산, 모락산 공격]
1월 31일부터, 미 제35연대와 터키 여단은 수리산을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 제150사단과 주야로 공방전을 벌여 수리산 일대를 일부 점령하여 작전 주도권을 잡았다.
이때 국군 제1-15연대는 31일 미 전차의 지원하에 모락산을 공격하여 5일만에 백병전을 치른 끝에 이를 점령한다.
미 제1군단장은 좌전방 미 제25사단이 안양선으로 진출하자 "알렌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전방의 적진지를 돌파한 후 한강으로 진출, 인천에서 영등포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김포공항 서쪽의 적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며, 우전방 미 제3사단은 검단산과 청계산을 경유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도돌 하였다.
이어서 한강 진출의 마지막 관문인 관악산을 공격하도록 하여, 극동 해군사령관에게 적의 증원을 차단하고 북으로 철수를강요하기 위해 인천에 위장상륙작전을 요청한다.
[관악산 공격]
1.9~10일 국군 제15연대가 9일 관악산을 공격하여 10일 노량진-영등포 선으로 진출하여 우인접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인천. 김포공항.김포반도 점령]
미 제25사단 기갑부대가 10일 인천으로 진출하였으나 이미 적이 철수하여 텅텅 비어 있엇다. 이에 위장상륙계획은 취소되고, 계속하여 김포공항과 김포반도로 진출하였으며 북한군 제1군단은 한강 결빙을 이용하여 퇴각하였다. 이로써 미 제1군단은 인천-영등포-대모산으로 진출, 서울 공격을 목전에 두고 도강 준비에 돌입한다.
한편 미 제1군단의 우인접 미 제9군단은 2월로 접어들며, 군단 정면의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2월 8일까지는 무난히 한강변으로 진출할 것으로 에상했다. 그러나 남한산과 양자산으로 연결돤 산악지대로 접근하면서 도로망의 결핍으로 기동이 재한되고 기상악화로 한공지원도 곤란하여 공격이 돈좌 되었다.
2.9~10일 미 제9군단은 5알 국군 제6-19연대를 미 제24사단에 배속하여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경안리에서 동쪽으 양평에 이르는 24km, 한강에서 6~10km, 불거져 나온 U자형 지형이 중공군의 강력한 교두보지역으로 , 교두보 전방에는 남한산과 양자잔 외에도 태화산, 천덕봉 등 수개의 감제고지가 있어서 적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제9군단은 남한산-양자산을 연하는 적의 교두보를 남겨둔 채로 한강진출작전을 종료하였다.
1월 23일, 한국전쟁 개전이후 최초로 한만국경선 부근에서 F-84전폭기 33대와 MIG- 15 전투기 25대 간의 공중전이 펼쳐져서 적기 3대가 격춛된다.
그리고 유엔 해군이 재해권을 확보한 가운데 한국 해군은 황해도 지역에서 해상으로 탈출하는 많은 피난민을 서해 5도(백령도. 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를 비롯한 연안 도서로 구출하였다.
2. 홍천 포위공격(라운드업 작전)
홍천 포위공격
홍천강 홍천
창봉리 창동리
국8사 국3사 국5사
양평 지평리 횡성
미2-23연
말다리
미24사=미2사
원주 평창
미2사=미187 미187=미7사 미10=국3군단
도돈
여주 주천리
영월
장호원 목계 주포 제천
서부전선에서 미 제1, 제9군단이 한강 진출작전을 펼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은 1월 중순 적 제2전선부대의 침투로 제천-영월 이남지역에 형성된 돌파구내의 북한군을 격파하고, 원주-평창 선으로 진출 중에 있었다.
이때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2사단은 한강진출작전간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하여 여주-원주를 연하는 선을 점령하고 일부 부대로 지평리까지 수색정찰을 실시하였다.
1월 29~2월 1일 미 제2사단과 미 제24사단의 함동 정찰대는 1월 29일 보급품을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지평리 부근의 쌍터털을 목표로 정찰을 실시한다. 이 당시에 중공군 제42군 제125사단이 터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감제고지에서 정찰대를 지며 본 뒤 퇴로를 차단하고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정찰대는 항공폭격과 미 제23-3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지원으로 구출은 되었으나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적은 이곳에 2개 연대를 투입하고 있었으며 결국 아군의 포격과 항공 폭격에 큰 피해를 입고 2월 1일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1월말 입수된 정보판단에 홍천 부근에 강력한 중공군 대규모 적이 집결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북한군 제5군단도 포함되어 있어 이들은 지평리를 경유하여 여주와 충주로 진격하거나 횡성 경유하여 원주를 공격할 것으로 판단 되었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이러한 적의 이동을 저지하기 위해 홍천을 군단의 주목표로 선정하였다. 군단은 홍천지역을 신속히 양익포위로 적의 증원거점을 분쇄하고, 동시에 후방침투에 실패하고 국군 제3군단 지역에서 퇴각 중인 북한군 제2군단을 추격 섬멸함은 물론, 아군이 홍천-대관령-강릉 선로 진출하여 차기 공격에 유리한 발판을 확보할 목적으로 국군 제3군단과 협조된 공격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을 "몰이" 즉 포위한다는 의미로 라운드업작전이라 명명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지평리-횡성에 미 제2사단, 횡성 남동쪽 치악산 북쪽에 미 제187공정단, 평창 남서쪽 주천리에 미 제7사단으로 방어선을 배치하고, 공격제대로 좌전방에 국군 제8사, 우전방에 국군 제5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을 포위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 제2사단은 1개 야포대대, 자동화기포대, 차량화 보병대대를 편성한 제21지원부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8사단을 직접지원하고, 이와 유사한 규모의 제7지원대를 편성하여 국군 제5사단을 지원토록 하였다. 추가로 미 제2사단에서 2개 중대 규모의 보전조를 편성하여 국군 제8사단에 배속시켰다.
이때 군단의 우익으로 영월-정선 선서 북진 중인 국군 제3군단은 공격개시일인 2월 5일에 공격개시선인 평창에 도착, 북한군 제2군단을 공격하여 미 제10군단 우측방의 엄호에 들어갔다.
이 계획에 의거 좌전방 미 제2-23연대는 지평리를, 중앙의 미 제38연대는 횡성을 점령하였고, 군단예비인 미 제7사단은 원주부근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제천.영월에서 평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의 주공으로 투입될 국군 제5사단과 제8사단도 제천. 영주부근의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국군 제2사단에 인계하고 원주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제8사단은 능우리, 제5사단은 평장리 부근의 공격대기 지점을 점령, 2월 5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홍천을 좌측과 중앙으로 공격하는 제8사단(최영희 준장)은 작전지역이 홍천-용둘리-횡성을 여하는 삼각형 내의 산악지형으로 , 성지산.갈기산.매화산.오음산 등의 신이 종횡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에 사단장은 3개 연대 병진공격을 계획하여, 주공인 제21연는 전차소대와 보전조로 29번도로(횡성-홍천)를 따라 벽학산-독재봉-오음산으로 기동하여 홍천을 점령하고, 중앙의 제10연대는 성지산을 점령 후 상오안리-양덕원리로 진출하도록 했다. 좌전방 제16연대는 2번도로(횡성-용두리)를 다라 증안리로 진출, 화채봉을 넘어 용두리를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은 2월 8일 우전방 제21연대가 29번 도로상의 대삼마치와 오음산(930)을 공격하면서 중공군 제66군 예하 제198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되었다.
한편 홍천 우측방을 공격하는 국군 제5사단은 전투정면이 홍천 남서쪽의 20KM나 되고, 죽람산(640). 어답산(789). 봉복산(1028). 발교산(998), 덕구산(668) 등 종횡으로 연결된 산악지형이었다.
이에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우선 1단계로 제27연대를 기동시켜 적정이 미약한 동측방 조항리-소사리-둔방내리-화동리 지역으로 기동하여 화동리-삽교리 선을 차단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주공인 제36연대는 산전리-포동리-유동리에 이르는 도로를 따라 진출하여 초현리-유동리 선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격제대들이 초현리-유동리-화동리=삽교리 선을 점령하면 제2단계로 홍천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격 개시 첫날부터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의 저항으로 공격 5일째인 9일에야 적의 방어거전을 돌파하여 섬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적 제6사단의 지휘소가 위치한 포동리를 양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적은이미 철수하였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공격제대들이 진출 속도가 느리게 되자, 국군 제8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미 제8군사령관에게 국군 제3군단의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을 요청하였다.
이 므렵(2월 8일), 국군 제3군단은 제천-영월에서 적 제2전선부대의 돌파구를 분쇄하고 상당히 진격하여,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 북쪽 창동으로, 우전방 제9사단이 정선 부근의 한강 계곡을 통과하여 하진부리 남쪽으로 진출하고 있엇다. 그리고 국군 제7사단을 후속하고 있던 미 제7사단 제17연대가 평창 북쪽으로 진출하여 국군 제7사다늘 증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군사령관은 국군 제3사단을 미 제10군단에 임시 배속조치한다.
홍천 공격부대들이 중공군과 격전을 하고 있을 때에 국군 제3사단(최석 준장)은 창리 부군에서 이동하여 10일 홍천 포위공격의 우전방 부대로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인 횡성-홍천 도로의 우측방을 인수받아 좌전방 제23연대는 송전리, 우전방 제22연대는 대문동으로 진출하고 제18연대는 예비로평창리 동쪽에 집결해 있었다. 그리고 작전지역을 인게한 국군제5사단은 제3군단과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이동하여 북한구늬 홍천 증원을 차단하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의 대규모 중공군 발견보고를 묵살하는 미 제10군단장?]
공격제대들이 전선을 조정하는 동안 국군 제8사단의 대전차포 대대(보병)는 작전지역 전방을 수색 중 11일 제21, 제10연대의 전투지경선 부근인 대삼마치 북쪽에 사단 규모로 보이는 중공군을 발견하고 사단에 보고하였다.
이에 사단은 여러 정보를 종합 분석하여 미 제10군단에 보고 하고, 이목동-창봉리 선에서 방어를 건의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과소평가 하여 묵살하고 계속 공격을 요구한다.
따라서 국군 제8사단자은 제10연대를 도원리-상유동, 제21연대를 상창봉리-오음산에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때 사단의 우인접인 국군 제3사단은 삼배리, 제5사단은 유동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로써 홍천 포위공격은 공격개시 7일이 되었지만 국군 제3사단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이 지역으로 중공군의 대병력과 북한군이 집중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3. 대관령 확보(수도사단)
※ 화난봉 부근에서 4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강릉부근 전투
연곡천 연곡천
운계봉 적69여
연곡천 국-수-1연
죽현리 경포호
황병산 남대천
국-수-1기갑 청량리
칠봉산 아산 비행장
국-수-26연
오봉산 구산리 운산리
대관령 금광리 아전리
횡계리 탑동 산성우
도마리
화란봉 목계동
태백산맥 서쪽의 국군 제3군단이 북한군 제2전선부대 소탕작전을 마치고 홍천포위작전의 우전방 엄호를 위해 북쪽으로 진출을 개시하자,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도 제3군단의 진출을 지원하는 동시에 전선을 연결하기 위하여 경강국구도의 요충인 대관령과 강릉을 공격하게 된다.
당시 국군 제1단은 중공군 신정공세 기간에 비교적 접적이 경미하여38도선 북쪽 진지를 고수하다,전선 조정을 위해 1월 10일경에 송계리 - 삼척선으로 철수하였다.
군단에 배속된 수도사단은 제1기갑연대를 좌전방으로 송계리 부근에, 제26연대를 우전방으로 묵호부근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제1연대는 예비로 삼척 부근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에 사단 정면의 적은 신방어선으로 철수하는 틈을 이용하여인민군 제69여단 및 길원팔 유격부대 약 6,000명이 강릉부근에서 남하하여 강릉-구산리선에서 방어와 유격활동을 하였다.
'51. 2월 3일 군단은 적에게 재편성과 재보급의 기회를 주지 않고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하기 위해, 좌인접의 제3군단과 연결을 유지하면서 강릉과 구산리-대관령을 확보한 다음 경강국도 북방의황병산-운계봉 선까지 전진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수도사단은 2월 3일 송계리-묵호 선에서 주공인 제26연대가 강릉을, 조공인 제1기갑연대가 대관령-구산리를 공격하게 되었다.
당시 아군의 전방에는 적이 강릉 남쪽의 청량리-아산리 간의 도로변에 견고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강릉을 사수하고자 하여 치열한 격전이 예상되었다.
제1기갑연대 제1대대는 선발대로 험준한 백봉령을 넘어 삽당령으로 이동하여 연대 주력의 구산리 진출을 엄호한 후 화난봉 부근일대를 수색정찰 하던 중에 "산 넘어 부락에도 국군이 있다"는 지역 주민의 제보를 받아 국군을 가장한 적 유격부대를 발견하여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작전으로 4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예비인 제1연대는 제1기가연대를 증원하기 위해 송계리로 진출한다.
'51.2.5~7일 공격연대들은 5일 구산리와 강릉을 목표로 총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음날 제1기갑연대를 후속 중인 제1연대를 작전지역 중앙에 투입하여 공세를 계속하였다.
제1연대 제3대대가 남대천을 도하하여 강릉을 우회하여 북쪽의 죽현리로 진출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후방 차단을 우려한 적 제69여단이 철수를 시작하여 제26연대는 7일 06:00시에 공격을 재개하여 남대천을 도하하여 강릉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제1연대는 적을 추격하여 운계봉으로 진출한다. 또한 사단의 좌전방 제1기갑연대도 황병산-연곡천 일대로 진출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한편 이 당시에 동해안에 배치된 미 제95기동전대는 1월 31일 간성-고성 지역에 상륙양동작전을 실시함은 물론 함포사격으로 군단의 공격을 지원하였다.
제 3 절 중공군의 2월 공세
1. 중공군의 공세준비
'51.2월 접어들면서 전선에서는 적의 부대 재배치를 위한 이동이 활발하였고, 항공 정찰에서도 적의 가평-홍천 지역 집결과 원산에서 재정비 중이던 중공군 제9병단이 춘천 방향으로 이동 중인 것고 관측 되었다.
이때 중공군은 일부 부대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견제하고, 일부는 한강 남안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주력을 동부전선에 집결시켜 유엔군을 종심깊이 유인한 다음 공세로 전환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적은 북한군 제1군단과 중공 제50군은 인천-영등포에, 중공 제38군은 한강교두보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유엔군이 중동부전선에서 홍천 포위공격을 개시하자 이번 공격의 주공부대인 중공 제42군을 지평리 부근으로, 제39, 제30, 제66군을 양덕원리-홍천 일대로 추진 배치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북한군 제2, 제3, 제5군단도 홍천 동쪽으로 집결하였다.
[미 제8군의 정보판단]
중공군 2월 공세 당시에 미 제8군사령관은 좌인접 미 제9군단잉 한강 이남 교두보에서 적을 격퇴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 제2사단이나 국군 제8사단이 24번 도로 진출은 이들 부대가 돌출되어 고립되거나 군단의 전투정면이 과도히 신장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적의 공격이 임박할 당시 홍천을 포위공격하는 한국군 공격부대와 미 지원부대, 그리고 공격개시선 사이에 배치된 이들 지원부대와 모체부대들이 복잡하게 편성되어 적의 공세시 지휘 및 통제 유지가 곤란할 것이라 판단하에 공격제대의 가장 좌측인 미 제2사단의 진출를 정지하도록 명령하였다.
당시 미 제8군 정보판단은 지금의 소강상태는 중공군의 재보급, 수송 및 전력 증강이 제한된 결과이며, 만약 군수문제만 충분히 지원되면 어떤 병력의손실에도 불고하고 "한반도에서 유엔군을 축출한다'는 그들의 목표를 당성하기 의한 공세를 재개할 것으로 판단했다. 또 그들의 집결지는 북서쪽으로는 북한강, 동남쪽으로는 양평-홍천 사이의 24번 도로, 그 어간의 지역이 될 것이며, 이 일대는 중공 제13병단 예하의 제39, 제40, 제42, 제66군의 11만명이 집결되어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남한강을 따라 여주로 진출하고, 다른 일부는 29번 도로를 따라 원주로 진출한 다음 양측에서 충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들은 미 제1, 제9군단을 포위 하기 위하여 남서쪽으로 기동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끝으로 중공군의 공격시기는 원산에서 재편성 중인 중공군 제9병단이 전선에 도착하는 2월 15일 경이 될 것으로 추측하였다.
실제로 공산군은 9일 유엔군의 전선에서 횡성 지역의 양측방이 노출되어 포위작전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작전 중인 국군이 미군에 비하여 전력이 약하고 또 이동 중에 있기 때문에섬멸이 용이하다고 판단, 주공(제39,제40,제42, 제66군)을 홍천-횡성-원주 축선과, 횡성-지평리 축선에, 그리고 조공(북한군 제2.제3.제5군단)을 평창-정선에 두어 이른바 2월 공세를 개시할 준비를 완료하였다.
2. 횡성의 대재앙
※ 국군 제8사단 : 장교 323명, 병 7,142명, 미 제21지원대 : 2,000명 (미군 1,900명, 네덜란드 100명)피해
중공 제13병단 주력은 2월 11일 20:30분을 전후하여 횡성을 목표로 홍천-양평 간의 24번 도로 남쪽 갈기산-매화산-오음산을 연하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국군 제8사단은 좌전방 제16연대가 증안리-도원리, 중앙의 제10연대가 도원리-상유동, 우전방 제21연대가 상창봉리-오음산 하록에서 방어 중이었다.
중공군 제13병단은 우전방 포위부대인 제42군은 국군제8사다늬 퇴로를차단하기 위하여 용도리-횡성 간의 도로를 따라 진출하고, 중앙 돌파부대인 제40군은 제10연대와 제21연대의 전투지경선으로 공격하였다. 그리고 좌측방 포위부대인 제66군의 일부는 오음산에서 제21연대를 정면 공격하고 주력은 횡성 동북방 국사봉-봉화봉으로 진출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12일 01:00시경 지휘통신이 두절되고 전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사단 전 장병은 개인별로 포위망을 탈출해야 했으며 중앙의 제10연대는 갈기산에서 연대장 권태순대령을 포함 전 참모가 전사하고 통제 불능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좌측의 제16연대도 지평리에 배치된 미 제23연대와의 전투지경선을 침투한 적에게 퇴로가 차단되었으나 일부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면서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 무렵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8사단의 주포리 철수와 사단을 화력지원하는 지원부대들에게 원대 복귀를 명하였으나 이 부대들도 이미 포위되어 조직적인 철수는 불가하였다.
결국 사단은 12일 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13일 주포리로 이동하여 재정비에 들어간다. 당시 사단의 피해정도는 전사 또는 실종된 인원이 장교 323명, 여기에는 제10연대장과 전 참모, 제16연대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이 포함되며, 사병은 7,142명이었다. 사단의 장비 손실은 포 14문, 대전차포 5문, 트럭 68대, 투전기 249대, 박격포 87문, 로켓포 137정, 기관총 164정, 자동화기 102정, 카빈소총 2,389정, 소총 4,096정이었다.
한편 국군 제8사단을 화력지원하던 부대들도 큰 혼란에 빠졌다. 국군 제20, 제50포병대대와 미 A지원팀들은 차량과 화포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12일 03:00싱에 최전방이 돌파되고 그로부터 3시간 후에 적의 야간기습으로 포위되어 철수를 강요당하게 되지만 이미 퇴로가 차단된 상태였다. 미 제8군의 정보판단에 나와 있듯이 지휘통제 마비와 통신두절로 상호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결과였다.
이 무렵 횡성 북쪽에 미 제7사단 제38연대에 배속된 네덜란드 대대가 계천 남쪽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병력이 엄호를 받으며 횡성교로 철수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우군인지 적군이지 곤란하고 국군으로 위장하여 침투한 종공군에게 퇴로가 차단되어 결국 대대장 오덴 중령이 전사하면서 원주비행장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횡성전투에서 지원부대인 미 제2사단의 제21지원대 등의 인명피해가 물려 2,000여 명(미군 1,900명, 네덜란드군 100명)에 달하였다. 전투장비는 105밀리 곡사포 6문, 전차 6대, 차량 280대, 무전기195대, 기타 공용화기 277점이다.
3. 평창 부근의 혼전
※ 국군제3사. 제5사 북한군 제5군단(제6. 제7. 제12사)으로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철수
●국군 제5사단은 포병대대와 보병 4개 대대 규모만 생존하여 제천 북쪽으로 철수
●국군 제3사단은 일부 피해를 입고 섬강 일대에서 엄호 작전 수행 후 상남리 부근으로 철수
※국군 제1군단 사령부가 원주로 이동하여 국군 제3사. 제5사. 제8사를 통제하여 원주-평창 선 방어
(수도사단은 국군 제3군단이 통제하여 그대로 동해안 방어)
※계속된 북한군 제5군단 공격으로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이 철수하여 제천-영월 돌파구 형성, 미 제7-31연대 투입 차단
홍천 우측방 29번 도로(홍천-횡성-원주-제천) 동쪽에서 공격 중이던 국군 제3사단, 제5사단도 좌인접 국군 제8사단이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적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공산군은 처음에는 국군 제3사단의 진출을 알지 못해 11일 자정이 지나서야 공격의 폭을 29번 도로 동쪽 8KM까지 확대하여 중공군 제197사단으로 하여금 국군 제3사단을 공격하고, 2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2군단이 태기산(1261)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을 공격, 고착 견제하는 동안 북한군 제3, 제5군단으로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하였다.
국군 제3사단단은 12일 09:00시경 중공 제197사단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은나 13:00시경 오히려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1개 연대가 포위되자 횡성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공 제66군은 횡성 후방의 곡교리-덕고산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었지만 국군 제3사단의 저항으로 진출이 지연되어 퇴로차단에 실패하였다.
국군 제3사단은 철수하는 동안 제23연대는 마옥리 부군에서 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기도 하고, 제18연대는 미 제2사단의 우전방으로 배속중인 제187공정단에 재배속 되어, 횡성 섬강 부근에 진출하여 창봉리에서 철수하는 미 제21지원대를 엄호하였다.
이때 우인접 국군 제5사단은 12일 아침 북한군 제5군단의 강력한 공격으로 포위망에서 벗어나고자 철수를 개시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미제8군사령관에게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을 통제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사령부를 배속시켜 줄것을 요청하였고, 미 제8군사령관은 이를 승인하였다. 수도사단은 국군 제3군단이 통제하여 계속 동해안을 방어하였다. 그리고 한국군을 증원하기 위해 미 제7사단 제31연대를 평강 남쪽 도돈리에 배치하였다.
'51.2.13~14 국군 제3, 제5사단은 13일 원주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 제5군단(제6. 제7. 제12사)이 14일 내내 양사단의 우측방을 우회 추격하여 공격해 옴으로서 양사단은 다수의 피해를 입고 점령행야할 원주-평창 선보다 훨씬 남쪽으로 철수하여 제3사단은 원주 남동쪽에, 제5사단은 제천 북쪽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적의 추격으로 포병대대만 손실이 없고 공용화기는 절반 정도 그리고 병력은 4개 대대 정도만 남았다.
'51. 2. 15일, 북한군 제5군단은 신정공세시 북한군 제2군단이 사용한 통로를 이용하여 제천을 목표로 돌파구를 확대하려고 진출하고 있었다. 신정공세의 전철을 우려한 미 제10군단장은 강릉에서 이동한 국군 제1군단장에게 원주-평창 선의 방어임무를 부여하고 , 국군 제1군단은 국군 제3, 제5, 제8사단의 작전 통제권을 15일 14:00시에 인수하였다.
이때 군단의 좌전방 제3사단은 상남리 부근에, 우전방 제5사단은 주천리 부근에, 제8사단은 예비로 주포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군단의 최우선 목표는 전방사단의 배치 공간에 신속히 제8사단을 투입, 적의 돌파구 확대를 저지하여 제천을 확보하는 것이다.
2월 16일 제천을 목전에 둔 북한군(제6.7.12사)은 16일 아침에 국군 제3사단, 제5사단을 공격하였다. 제3사단은 우전방 제22연대가 일부 돌파되었으나 책임지역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5사단은 주천리를 방어 중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철수를 시작하여 8km를 철수하였다.
이로인해 국군 제3군단의 좌전방에 약 30km에 달하는 공백지대가 생겼다. 이 지역으로 북한군 제2군단의 쇄도를 우려한 국군 제3군단은 횡성 동쪽의 창동리 선에 배치된 제7, 제9사단을 군단 후방지역에 배치된 미 제7사단 제31연대 진지가 있는 평창 남쪽의 도돈리와 연결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약 20~25km철수 시켰다.
홍천 포위공격과 평창 방어 혼전
홍천강 홍천
창봉리 창동리
국8사 국3사 국5사
양평 지평리 횡성
미2-23연
말다리
미24사=미2사
원주 평창
미2사=미187 미187=미7사 미10=국3군단 정선
도돈
여주 주천리
영월
장호원 목계 주포 제천
'51.2월 15~18일 국군의 철수를 추격해온 북한군 제9, 제27사단은 평창을 점령한 다음 평창-영월 도로를 따라 남하하려 영월을 점령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들은 2월 15일부터 18일 새벽까지 중대 또는 대대규모의 돌격을 반복하여 영월 북쪽 13km까지 진출한다.
국군 제3군단은 좌전방 제7사단이 평창-영월 도로를 따라 영월로 남진하는 북한군 제2군단을 저지하는데 벅차서 좌인접 국군 제5사단과의 11km에 달하는 공백지대를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 '51.2.17일 미 제8군사령관의 명령으로 미 제10군단장은 미 제7사단 31연대를 투입하여 국군 제1군단과 국군 제3군단 간의 측방 노출이 해결되고 국군 제3군단은 17~18일 양일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도돈리-정선 간의 방어진지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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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상황(1) : 중공군 신정공세시 단양-영월 돌파구]
※ '51.1.8일 국군 제7사단 정면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10사단 선두부대인 제27연대는 29번도로를 따라 제천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작전 중인 미 제7사단의 정찰대와 조우하여 500여 명이 사살되고 14명이 생포되었다.
※국군 제3군단장 교체, 이형근 소장 해임하고 육본 참모차장인 유재흥 소장이 다시 부임
※공산군은 이번 신정공세에서 30여 만명(중공군 6개 군 23만 명, 북한군 3개 둔단 7만여 명)을 투입하여 서울을 재점령하고, 37도선 부근으로 진출하였으나 북한군 2,700명을 포함하여 85,000며이 전사
제3군단의 제3사단은 7일 홍천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있엇고, 제7사단은 신림링에서 영월로 이동 중에 적과 조우하고, 제9사단은 장평리에서 적과 접촉을 유지하며 정선으로 철수 중에 있고,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은 주문진에서 삼척으로 이동 중에 있었다.
이때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원주 공격을 기도하는 북한군 제5군단에 대비하였고,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은 수정된 D방어선을 점령하기 위해 기동 중에 있어 사실상 원주-동해안 간에는 적의 진출을 저지할 부대가 없이 공백지역이었다.
"영월 대돌파구 형성"
이 무렵 북한군 제2군단이 아군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원주-제천-단양 도로의 동쪽 산익지대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들 선두인 제2, 제9사단이 수정된 D방어선보다 훨씬 남쪽인 영월부근으로 진출하고 진출하고 있었다."영월 대돌파구 형성"
== 국군 제9사단이 정선, 국군 제7사단이 영월 남동쪽, 제3사단이 춘양에 집결===
이때 길원팔 부대를 통합지휘하는 북한군 제2군단은 군단 주력으로 정면을 공격하고, 제2전선부대를 제9사단의 우측방인 오대산-대관령-태기산-보현산 일대에 침투시켜 후방 교란을 획책하였다.
중동부 전선 상황('51. 1. 7)
화천
화천저수지 양구 양양'
인제
내평리 현리 C방어선
춘천 원포리 D방어선
C방어선
홍천 북2군단 강릉
D방어선
북5군단 횡성 수정된 D방어선 수정된D방어선
정선 삼척
D 방어선 국9사 평창 국3사 국9사 (1.9) 수도사
원주 미2사 국3군단=국1군단
여주 국5사
국2사 국7사 영월 국7사(1.8)
제천 미10군단=국3군단
미9군단=미10군단 미7사(-) 춘양 국군 3사
충주 남한강 단양
국2사
[ 참고상황(2) :제2전선부대 차단]
영월부근 전투('51.1.18~22)
미7-17연
북제2선선 완택산 국7-8연
일곡
영월 두평 석항 국7-3연 백운산
용봉산 만경대산
북9사
태화산 옥동리 국3-23연
국3-23연
영춘
의풍리 태백산
어래산
제천 북2사 원만허 국5-35연 국3-18연 북31사 선달산
형제봉 남대리 옥석산
단양 미7사(-) 국3-22연
국5-36연 비로봉
국5-27연 아호리 국3-18연 문수산
춘양
도솔봉 풍기 봉화 국3사
영주 북10사
서부전선에서는 전선이 안정되어 위력수색을 실시하여 적정을 파악하고 한강으로 진출을모색하는 동안, 신정공세와 때를 맞추어 북한군 제2군단 4개사단(제2. 제9.; 제10. 제31사)이 홍천-횡성-원주 선으로 종심깊에 침투하여 험난한 지형을 이용하여 제천-영월 남쪽의 단양, 문경, 영주, 안동 일대에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홍천-주문진의 방어선을 유지 하지 못하고 1월 5일 20:00시 육본 명으로 영월-삼척(황우선)으로 철수하였다.
'51.1. 9일 이형근 준장의 후임으로 국군 제3군단에 부임한 유재흥 소장은 영월 북쪽으로 흐르는 남한강을 따라 좌전방 제7사단을 영월 북동쪽 완택산 일대에, 우전방 제9사단을 정선 부근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배속된 제3사단을 예비로 춘양에 배치한다.
한편 북한군 제2군단은 낙동강 전투 이후 동부산악지대로 철수하면서 다른 부대의 낙오자와 패잔병들까지 수집하여, 화천-김화-양덕에서 재편성하여 유엔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대는 게릴라 전을 수행했으며, 북한군 중에 동부 산악지형에 익숙하고 침투전술에 가장 능한 부대였다.
이들은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여 후방지역에서 교란작전을 펼칠 목적으로 신정공세 이전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이들은 제10사단이 원주부근에서 미 제2사단과 조우하자, 미군과의 접촉을 회피하기 위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29번도로 동쪽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2군단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 사이에 생긴 제천-영월 간의 약 24KM 배치 공간을 이용하여 접적없이 진출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의 상황을 분석한 제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최대의 위험은 원주로 내려오는 북한군 제5군단이 아니라 이 통로로 침투 중인 제2군단이라고 판단하고 미 제10군단에 지역내 통로를 차단하고 인민군을 격멸하라 명령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1월 11일 상주에 대기 중인제187공정단을 안동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에 배속시킨다. 아울러 안동-영덕간의 도로 남쪽 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함흥에서 철수하여 마산에 대기 중인 미 해병 제1사단을 영천-경주-포항지역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경계를 강화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제천-영월 사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신정공세 기간 중에 접적이 경미했던 문막 동쪽의 국군 제5사단을 이곳으로 이동시키고, 그동안은 미 제7사단의 정찰활동을 강화 시켰다.
'1월 9일 , 북한군 제10사단의 선두인 제27연대가 제천으로 진출 중에 미 제7사단 정찰대와 조우하여 치열한 격전을 펼쳤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특별공격대대(대대장 배동걸 소령)는 1월 12일 점촌에서 단양으로 침투한 적이 문경 북방 황장산 하록의 적성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1개 연대를 식별하여 항공폭격과 이틀 동안의 격전에서 1,000여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전투장비를 획득한다.
미 제10군단장은 적이 종심깊이 침투한 현재의 상황에서제천-영월 간을 방어하는 것보다 후방지역 종심배치하여 정찰을확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한다.
'51.1.16일 군단장은 군단 방어선을 여주-원주 선에서 운남리-제천 북쪽으로 남하시켜 미 제2사단이 주저항선 방어를 전담하도록 하고 문막에서 방어 중인 제5사단은 영춘에, 제8사단은 황강리에 투입하게 된다.
적은 군단의 증원부대 투입에도 불구하고 계속후방으로 진출하였다. 북한군 제2사단은 이미 안동-의성지구로 침투하여 후방교란을 하고 있는 제10사단과 연결하기 위해 원주-제천-안동 선으로 진출하여 12일 형제봉 서쪽의 원만허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전투지경선인 남한강변을 따라 침투한 북한군 제9, 제31사단은 국군 제3군단의 후방지경선인 영주-봉화-춘양을 확보하기 위해 제9사단은 영월 남동쪽 옥동리에, 제31사단을 남대리 부근에 집결 중이었다.
적이 침투한 지역은 속리산-이화령-죽령-소백산-태백산으로 연결되는 소백산맥 지역으로 적은 산악거점을 점령하여 활동이 용이하였다. 이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7사단을 제천에서 영월 방면으로, 제187공정단을 제천-영주간 29번 도로 주변을, 국군 제2사단의 제17연대는 단양에서 충주에 이르는 도로변을 수색정찰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국군 제5사단의 주력은 영주 북쪽 군단후방을 정찰하고 국군 제2사단의 주력은 문경새재에 배치하여 산속에 고립된 패잔병들의 당양 진출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때 국군 제3군단장도 군단의 방어선인 두평-후천-정선-송계리 전방에서 적의 저항이 없자, 군단 후방지역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예비인 국군 제3사단을 공격에 투입한다. 제3사단은 남대리 부근에서 활동중인 북한군 제31사단을 격멸하기 위해 제18연대가 남대리, 제22연대가 옥석산, 제23연대가 어래산을 공격 목표로 설정하고 공격 개시하였다.
이때 적은 산속으로 잠적한 후 야음을 이용하여기습공격으로 저항하였으나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분산하여 도주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사단 좌인접 국군 제5사단 지역으로 들어가 더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51.1.19~22일, 국군 제7사단도 제8연대가 사단 후방지역을 방어하고, 제3연대와 배속된 제3-23연대로 석항에서 영월을 목표로 공격히여 망경대산, 매봉산을 확보하고, 22일 미 제7사단 제17연대와 협동작전으로 미 제7-17연대는 북쪽에서, 국군 제3연대는 남쪽에서 영월을 포위 공격하여 시내 도처에 시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산재해 있었다.
당시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되어 북한의 침투활동을 제한하였고, 국군과 유엔군은 포병화력과 항공지원으로 적 병력과 탄약 을 파괴하여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북한군 제2군단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력이 약화되자 북한군 제5군단 제27사단을 제천으로 투입하여 저항하였으나 22일 경에는 조직이 거의 와해되고 대열이 흩어져서 저항이 경미하였다.
이렇게 되자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1월 20일 북한군 제2군단을 평창 부근으로철수하여 재정비하도록 하였으나 1월 말에야 평창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당시 북한군 4개 사단에 병력 16,000명이었으나 생존자는 8,600명에 불과했고 특히 공격의 첨병 역활을 수행한 제10사단은 안동으로 진출 도중에큰 피해를 입엇으며 미 제10군단에 퇴로가 차단되어 포위망 탈출이 불가능해지자 산악지역에서 유격활동을 펼쳤으나 '51.1.18일부터 3주 동안 포항-안동-영덕 일대에서 펼친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의 수색작전에 완전히 와해 되었다.
이로써 북한군 제2전선부대는 1월 말 전후하여 소탕되었고, 후방지역이 안정을 되찾자, 미 제10군단은 남한강-제천-영월 선에, 우인접 국군 제3군단은 영월- 정선 서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다시 전선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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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평리 고립 방어
※ 프랑스 대대 : 한국 대통령 부대표창,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수상('51.1.28쌍터널 전투 공로로 수상이어 두번째 수상)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사상자 숫자는 무려 4,946명으로 추정되고 , 미 제5기병연대만 적 500여명을 사살하였다. 생포된 적은 79명이었다. 반면 미 제23연대전투단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다.
※ 제5기병연대장은 L중대 160명과 전차 23대로 보전조를 편성하여 공격, 이때 제5기병연대장은 전차의 신속한 기동을 독촉하여, 전차가 단독으로 돌진함으로써 낙오된 보병들의 손실이 컸으나 연대는 17:00시에 피탈된 지평리 남쪽의 망미산을 공격중인 미 제23연대 전차와 연결되었다. 제5기병연대의 증원으로 사기가 저하된 중공군은 철수하였다.
※지평리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 미 제8군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
중 연 봉미산
248
중연 1대대
프랑스 대대 3대대 506
지평리 중 연
248 중 2대대
망미산 중 연
곡수리 5기병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2사단 제23연대전투단은 한강진출작전을 진행 중인 좌인접 미 제9군단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쌍터널을 정찰한 후 지평리에 배치된다. 사단장은 지평리가 돌출 되어 있고 방어정면도 32KM나 되는데다 우인접에서 원주를 방어 중인 미 제9연대와도 20KM의 간격이 형성ㄷ되어 적에게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 남7쪽의 여주로 철수시킬 복안이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은 적이 양평부근의 한강유역으로 침투, 서쪽지역의 유엔군 주력부대를 포위하고자 하므로 제23연대의 지평리 고수를 요구하였다. 동시에 좌인접 미제9군단장에게도 한강 이남의 교두보에서 적과 교전이 없는 국군 제6사단과 영 제27여단을 여주로 이동시켜 미 제10군단의 통제하에 공간지역을 보강하도록 조치하였다.
'51.2.13일 이때 횡성전투에서 국군을 공격하여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중공군은 지평리를 공격하면 유엔군도 계속 철수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전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중공 제39, 제40, 제42군의 총 8개연대로 13일 저녁에 지평리 지역을 점령하고, 제42, 제66군의 주력및 제120사단은 원주 이북및 남서지역까지 진출하여 서쪽으로부터의 유엔군의 증원을 차단하여 원주 일대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도록 하였다.
지평리는 전략적 요충지로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 양평-충주 축선으로 진출, 군단의 후방은 물론 미 제9군단의 우측방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이다. 반면 미군이 점령하면 한강 이남에서 미 제1, 미 제9군단에 저항 중인 적군을 포위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그만 마을인 지평리는 북쪽의 봉미산과 남쪽의 망미산, 그리고 남서쪽은 248고지, 북서쪽은 248고지로 둘러싸여 연대규모가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었다. 당시 미 제23연대전투단은 미 제223연대, 프랑스 대대, 제1유격중대, 제37야전포병대대, 제503야전포병 대대 B포대, 제82고사포대대 B포대, 제2공병대대 B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사단는 사주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공간지대에는 지뢰와 철조망으로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51.2.13일 연대전투단은 13일 낮부터 격전이 시작되었으며 포병은 포 1문당 250발을 집중사격사격하였다. 계속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제파공격을 한 지역이 돌파되면 바로 역습으로 회복하는 등 중공군의 돌파기도를 분쇄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대대도 중공군의 공격이 제파식으로 계속되었지만 지진내에서 수류탄전과 육박전이 전개되지만 포병의 조명지원에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하였다. 이 부대는 지난 1월28일 쌍터널 전투에서도 전공으로 미 대통령 부대표창과 프랑스 육군의 부대표창을 수상한 부대로서 이번 전투에서도 공로로 한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두 번째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 받았다.
이 무렵 중공군이 지평리로 향하는 24번도로와 그 보조도로를 점령하여 미 제23연대전투단은 완전 고립되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제9군당장에게 복브로를 복구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제9군단장은 미 제5기병연대와 1개 공병소대, 2개 전차중대, 2개 곡사포대대를 파견하였다.
2월 14~15일 중공군의 야간공격이 개시되었다. 지평리 상공은 조명신호탄으로 불야성을 이룬 채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져 15일 02:00시경 서쪽의 G중대지역이 돌파되었지만 다른 지역은 진지를 고수하였다.
고립된 제23연대전투단을 증원할 미 제1-5기병연대가 한강을 도하하여 14일 자정무렵 곡수리에 도착하였으나 적이 마을입구 교량을 파괴하여 연대의 공격은 지연되고 있었다.
연대는 15일부터 다시 항공지원 속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저항으로 진출이 돈좌되자, 정성적인 공격으로는 진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L중대 160명과 전차 23대로 보전조를 편성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곡수리-지평리 도로에는 미군의 전차 화력과 기동에 맞선 중공군의 로켓포에 의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이때 제5기병연대장은 전차의 신속한 기동을 독촉하여, 전차가 단독으로 돌진함으로써 낙오된 보병들의 손실이 컸으나 연대는 17:00시에 피탈된 지평리 남쪽의 망미산을 공격중인 미 제23연대 전차와 연결되었다. 제5기병연대의 증원으로 사기가 저하된 중공군은 철수하였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사상자 숫자는 무려 4,946명으로 추정되고 , 미 제5기병연대만 적 500여명을 사살하였다. 생포된 적은 79명이었다. 반면 미 제23연대전투단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었다.
한편 14일 미 제10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발한 미 제9군단의 영 제27여단은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지평리 부근으로 이동하였고, 국군 제6사단도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미 제9연대 제1대대 좌측의 공간지대로 이동하였다. 결국 영 제27여단은 미 제2사단 좌인접으로 진출하여 주암리로, 국군제6사단(19연대 결)은 원주 서쪽 간현리를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미 제23연대 전투단은 고립방어로 중공군 3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진지곳수 의지와 철저한 야간사격 통제, 에비대의 적절한 운용과 역습, 우세한 화력과 긴밀한 공지합동작전의 결과였다.
지평리 전투는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서 얻은 최초의 전술적인 성공으로 미 제8군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제 4 절 재반격 속개와 서울 탈환작전
1. 제천지역 적 섬멸작전(킬러작전)
제천부근 전투
홍천
하진부
중42군 창동리 국9사
창봉리 국7사
양평 지평리 중39군 중 40군 횡성
미23연
섬강 북2군단
곡수 ' 북5군단 평창
주암 영27여 국6사 미187연 원주 국3-18연 도돈 국7사 국9사
후포
주천
여주 국3 미31연
국5 영월
주포 국8 제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