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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세정
출판
세창미디어
발행
2014.08.15.
머리말
왕양명의 역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실천적인 삶과 그 삶에서 잉태하고 성장한 사상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책이 『전습록』이다. 『전습록』은 제자들과의 대화와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왕양명의 삶과 사상
1. 성인(聖人))을 꿈꾸던 소년 시절
내우외환과 학문적 교조화의 분위기 속에서 양명은 1472년 9월 30일 밤 절강성 소흥부 여요현 서운루에서 걸출한 문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명의 본래 이름은 '구름'이란 뜻의 '운雲'이었으나 다섯 살 때 '어짊을 지킨다'는 '수인守仁'으로 개명하였다. 훗날 회계산 기슭의 양명동에 석굴을 만들고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양명선생'이라 불렀으며, 이것이 그의 호가 되었다. 1528년 11월 19일 강서성 남안의 청용포에서 향년 57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양명은 어린 시절부터 과거 급제를 통한 입신양명의 출세가 아닌 유가의 진정한 인간인 '성인'이 되고자 하는데 자신의 삶의 목표를 두었다.
주자학자 루량은 양명에게 송나라 유학자들의 격물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인은 반드시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다.
2. 성인을 향한 방황과 좌절
유가와 불교 및 도교에 대한 섭렵 과정은 이후 양명이 교조주의나 독단주의에 빠지지 아니하고 유·불·도 세 학파의 사상을 회통하면서 '주체적이고 역동적이며 창조적인 마음'에 대한 자각과 '천지만물과의 일체성' 및 '인간의 평등성'을 중시하는 독창적인 심학 사상을 수립함에 있어 그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3. 용장 유배 - 심즉리와 지행합일을 설하다
당시 학자들은 성현의 글귀만을 암송하는 사장과 기송의 습관에 빠져 있었다. 이에 양명은 '심신의 학문'을 제창하면서 사람들에게 "먼저 반드시 성인이 되고자 하는 뜻을 세우라"고 강조하였다.
"비로소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으로 스스로 충족하니, 지난날 대상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은 마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있다고 하는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대한 깨달음이다.
'격물'에 대한 양명의 깨달음은 '성즉리설'에 근거한 주희 격물설에 대한 반론이자 양명 자신이 독창적인 심학 사상을 수립하는 출발점이다. '대상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한다'는 주희의 격물설에 반면 양명은 격물을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으로 해석한다. 사욕에 의해 가려진 부정한 마음을 바로잡아 지선(至善)한 본심을 회복하고 선을 행하는 위선거악(爲善去惡)이 바로 격물이라는 것이다.
성(性)만을 이(理)로 보고 마음을 인식 주체로 보는 주희의 입장과 달리 양명은 "마음이 곧 이(理)이다"라고 하고 "마음이 곧 성이며, 성이 곧 이"라 하여, 마음과 이와 성을 한 가지로 보고 있다. 양명은 '대상 사물에 있는 것이 이가 된다'는 정이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여 "이 마음이 물에 있은 즉 이가 된다. 예컨대 마음이 어버이 섬기는 데 있으면 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란 마음의 조리이다. 이 이가 부모에게 발휘되면 효가 된다"고 주장한다. 양명에게 있어 효와 같은 이는 주자학에서와 같이 인간 마음 밖에 존재하는 불변하는 선험적인 당위의 도덕규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와 같은 대상과 감응하는 과정에서 상황에 부합되도록 마음으로부터 항상 새롭게 '창출되는 실천 조리'를 의미하는 바, '마음이 곧 이'가 되는 일원의 계기를 갖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양명의 지행합일설은 심리 일원적 체계에 바탕하고 있으며, 이는 '먼저 알고 나서 실천한다'고 하는 주희의 선지후행설에 대한 반론이다.
"앎은 실천의 주된 의지이며, 실천은 앎의 공부이다. 앎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은 앎의 성취이다"
4. 정좌에서 성찰극치로
"성인의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아서 약간의 가림도 용납하지 아니하며 열심히 갈고 닦는다."
양명의 정좌는 세상 한가운데서 마음을 갈고 닦아서 사사로운 의념과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마음의 선천적인 '인체(仁體)'를 회복하는 공부이다.
고요함만을 추구하고 움직임을 싫어하며 깨달음에만 관심을 갖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정좌 대신에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성찰극치의 실제적인 공부를 하도록 하였다.
5. 백성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보살피다
불인지심(不忍之心)과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바탕을 둔 양명의 강한 '애민(愛民)'과 '보민(保民)' 의식을 가졌다.
양명은 덕행과 마음의 근본에 힘쓰고, 서로 예로써 양보함이 날로 새롭게 되고, 풍속이 나날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고 사학을 흥성시켰다. 양명의 교육관은 엄격주의를 배격하고 아동들의 생의(生意)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를 강조하며 아동 정서의 함양에 주력한다.
6. 치양지(致良知)를 설하다
"나는 참으로 양지가 사람마다 같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배우는 자들이 깨닫지 못하여 달갑게 습속의 그릇됨을 따르는 것이다"
배를 조종함에 있어서 키를 손에 꽉 잡고 있으면 잔잔한 물, 파도치는 물, 얕은 물, 빠른 물에 관계없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바가 없다. 비록 역풍과 역랑을 만나더라도 키의 손잡이가 손안에 있으면 물에 빠지는 근심을 면할 수가 있다.
양명의 3대학설 가운데 하나인 '치양지설'은 양명의 독창적 심학 사상의 최종 귀결처이다.
살아 있는 존재물들의 고통을 내 몸의 절실한 아픔올 느끼는 '만물일체의 인심(仁心)'이 바로 '양지(良知)'이다.
자신의 이익과 안위에만 집착하는 사욕을 극복하고 자신의 생명 주체인 양지를 회복하여 천지만물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친애하며 이들을 온전하게 양육시켜나가는 것이 바로 '치양지(致良知)'이다.
양지 실현을 통한 자아의 본질 실현(內聖·成己·修己·明明德)과 만물의 본질 실현(外王·成物·治人·親民)이 하나 됨을 의미한다.
7. 내 마음이 광명한데 또 무슨 말을 하겠느냐?
양명의 교학 근본인 사구교(四句敎)를 제시하였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체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념의 발동이며,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
주적이 눈물을 흘리면서 "무슨 말씀을 남기시렵니까"라고 묻자, 양명은 "나의 마음이 광명한데 또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느냐!"라 하고, 세상을 떠났다.
2장 『전습록』이란 어떤 책인가?
1. 『전습록』의 편찬 과정과 책명
『전습록』은 양명의 제자들이 양명의 어록과 편지글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제자들과의 문답, 지인들과의 편지글로 구성되어 있어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고 따뜻함과 인간미가 배어 있다. 상·중·하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단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적 추이를 두고 만들어졌다.
"지금 나는 여러분과 더불어 각각의 치우치고 가리워진 것에 나아가 경계하고 힘써 갈고 닦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현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획일적인 것이 아니며 고정불변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의사가 환자의 증상에 따라 약을 다르게 처방하듯, 질문을 하거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상황과 근기와 수준과 상태에 따라 적의타당하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이다. 바로 '수시변역(隨時變易)'이요 '인시제의(因時制宜, 시대의 변함에 따라 그때 알맞게 함)'의 가르침인 것이다.
양명은 자신의 말들이 하나의 책으로 엮어져서 불변하는 고정된 원칙과 규범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논어』「학이편」에 "증자가 이르기를 나는 하루에 세 번 내 자신을 돌이켜본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마음을 다하지 않은 바가 있었는가? 벗을 사귀는 데 미덥지 못함이 있었는가? 전하는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라는 말이 있다. 『전습록』의 '전습(傳習)'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즉 전해져 내려오는 가르침 또는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내용을 연습하고 복습하여 익히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전습록』의 구성과 내용
중권은 상권, 하권의 어록 형식과는 달리 서간집이다.
3장 천지만물일체의 우주론
유학사상은 크게 '우주론', '인간론', '수양론', '경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학의 경우 '이기론'이 우주론, '심성론'이 인간론, '거경궁리설'이 수양론에 해당된다.
양명의 경우에는 '천지만물일체설'이 우주론, '심즉리설'과 '양지론'이 인간론, '지행합일설'과 '치양지설'이 수양론에 해당한다.
"동·식물과 천지 또한 인간과 동체이다", "대저 사람이란 천지의 마음으로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이다", "사람은 천지만물의 마음이며, 마음은 천지만물의 주체이다"라고 하는 천지만물일체설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인간을 중추로 한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유기체적 세계관'이다.
1. 자기-조직하는 우주자연
"천도의 운행은 한순간의 쉼이나 멈춤이 없다"
"천리는 한순간의 끊어짐이 없다. … 이것이 곧 천덕이다"
"천지의 기기는 본래 한순간의 중단이 없다"
"활발발을 본질로 하는 천기는 쉼이 없다. … 한 번 쉼은 곧 죽음이다"
"천지가 만물을 화육(化育)한다"
"천지가 서고 만물이 양육된다"
천지만물로 표현되는 우주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무생명의 물리적 기계가 아니다. 이는 항구적인 변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생명을 창생·양육해나가는, 즉 '자기-조직성'을 지닌 하나의 유기체이다.
'유기체적 우주'는 끊임없는 창출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자기-조직(self-organizing)'해나가는 특징을 지닌 것으로 규정된다.
양명은 사람을 '천지' 또는 '천지만물'의 '마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마음'은 살아 있는 유기체나 사회조직 혹은 생태계를 특징짓는 시스템적 현상으로 정의된다.
2. 우주자연의 중추인 인간
"사람이란 천지의 마음으로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 몸이다"
"사람은 천지만물의 마음이며, 마음은 천지만물의 주체이다. 마음이 곧 하늘이니, 마음을 말하면 천지만물이 모두 열거된다"
천지는 만물의 생육을 목적으로 하는 유기체, 즉 목적 지향적 존재이다. 따라서 '천지의 마음'은 천지가 만물을 낳으려는 목적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가 약간 정미하면 해, 달, 별, 바람, 비, 산, 강이 된다. 이보다 약간 더 정미하면 우레, 번개, 도깨비, 풀, 나무, 꽃이 된다. 한층 더 정미하면 새, 짐승, 물고기, 자라, 곤충의 무리가 된다. 지극히 정미하면 사람이 되고, 지극히 영묘하고 지극히 밝은 것은 마음이 된다."
'존재의 연속성'의 토대가 되는 '기'는 천지만물의 동일한 질료적 토대임과 동시에 그 정밀함에 따라 천지만물과 인간의 계층적 차별성의 근거가 된다.
"천도의 운행은 한순간의 쉼이나 멈춤이 없으며, 내 마음 양지의 운행 또한 한순간의 쉼이나 멈춤이 없으니, 양지는 곧 천도이다"
"천명의 성이 내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그 혼연한 전체 가운데에 조리와 절목이 무성하게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천리라고 부른다"
인간의 마음은 천지만물과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이들의 자연한 생명현상에 따라 작용한다.
"대저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다.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이므로, 살아 있는 존재물들의 고통은 무엇인들 내 몸에 절실한 아픔이 아니겠는가? 내 몸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시비지심이 없는 자이다. 시비지심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고 배우지 않더라도 능한 것이니, 이른바 양지이다"
3. 인간과 우주자연의 호혜적 관계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몸이니, 그 발동하는 감각 기관 가운데 가장 정묘한 곳은 바로 사람 마음의 한 점 영명함이다. 바람과 비, 이슬과 우레, 해와 달, 별과 성좌, 새와 짐승, 풀과 나무, 산과 냇물, 흙과 돌은 모두 사람과 본래 한몸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곡이나 새와 짐승의 부류는 모두 사람을 양육할 수 있고, 약이나 돌침과 같은 부류는 모두 병을 치료할 수 있으니, 다만 이 일기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마음의 '영명'함이 천지만물의 정수로 규정되고, 천지만물과 인간을 하나의 유기적인 정합체로 연결시키려는 입장에서 일기의 유통이 제시되고 있다.
"새가 슬퍼 울고 짐승이 사지에 끌려가면서 벌벌 떠는 것을 보면 반드시 참아내지 못하는 마음(不仁之心)이 일어난다. 이것은 그의 인이 새나 짐승과 더불어 한몸이 된 것이다. 새나 짐승은 오히려 지각이 있는 것이다. 풀과 나무가 잘려나간 것을 보면 반드시 가여워서 구제하고 싶은 마음(憫恤之心민휼지심,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그의 인이 풀, 나무와 더불어 한몸이 된 것이다. 풀과 나무는 오히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이다. 기와장이 무너지고 돌이 깨진 것을 보면 반드시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顧惜之心고석지심)이 일어난다. 이것은 그의 인이 기왓장, 돌과 한몸이 된 것이다"
양명은 이러한 천지만물에 대한 인간의 영명한 마음의 감응 과정 또한 일기의 유통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일기의 유통'이라는 인간과 천지만물 사이의 '호혜성'은 하나의 생명체가 건강한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토대이며, 전체생명의 부분들이 건강하게 양육될 수 있는 근간이다. 이러한 호혜성은 부분들 간의 호혜적 관계로서 생명의 본질이자 자기-조직화 과정이다.
4장 마음이 곧 이치라는 이론
'심즉리설(心卽理說)'은 '인간론'에 해당된다. 인간이 '천지만물의 마음', 즉 천지만물의 중추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1. 성인(聖人)은 천리(天理)를 실현한 사람
양명이 말하는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거와 그 방안은?
성인이 성인이 되는 까닭은 단지 그 마음이 순수한 천리로서 인욕의 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순금이 순수한 까닭은 단지 그것이 지닌 성분이 넉넉하여 구리나 아연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과 같다. 사람이 순수한 천리에 이르러야 비로소 성인이며, 금은 성분이 넉넉한 데 이르러야 비로소 순금이 된다. … 생각건대 그것이 순금이 되는 까닭은 순도에 있지 무게에 있지 않다. 그들이 성인이 되는 까닭은 순수한 천리에 있지 재질과 역량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이라도 기꺼이 배워서 이 마음을 천리에 순수하게 만들면 역시 성인이 될 수 있다. … 배우는 사람들이 성인이 되기를 배우는 것은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금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구리나 아연과 같은 이물질이 섞여 있으면 순금이 아니다. 사람 또한 재질과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마음에 인욕이 섞여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없다. '마음의 천리에 대한 순수성'에 달려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려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 성인은 '인욕의 섞임이 없이 순수한 천리의 마음을 소유한 인간'이다.
2. 마음이 곧 천리
양명에게 있어 '천리'란 무엇일까?
모두가 이 마음에 있을 뿐이니, 마음이 곧 이이다.(心卽理) 이 마음이 사욕에 가려지지 않은 것이 곧 천리이니, 밖에서 한 터럭이라도 보탤 필요가 없다. 이 순수한 천리의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데 발휘하면 이것이 곧 효도이고, 임금을 섬기는 데 발휘하면 이것이 곧 충성이며, 벗과 사귀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발휘하면 이것이 곧 믿음과 어짊이다. 다만 이 마음에서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데 힘쓰기만 하면 된다.
첫째, '이 마음이 사욕에 가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천리이다' 심즉리의 이는 '천리'를 지칭한다. 천리는 사욕에 의해 가려지지 않은 마음의 순수한 상태로서의 '마음의 본체'를 의미한다.
둘째, 마음이 순수한 천리의 상태일 때 마음으로부터 효도(孝)·충성(忠)·믿음(信)·어짊(仁)과 같은 각종 실천 조리가 창출된다는 의미에서의 심즉리이다.
'천리'는 마음 밖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보편적 존재 원리나 당위의 도덕규범을 의미하지 않는다. 천리는 천지만물의 생명 본질에 근원한 인간의 생명 본질로서 천지만물과 감응하고 일체화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유기적인 생명성' 또는 '유기적 생명력'을 의미한다.
'천리'는 불변의 고정된 법칙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수시변역성(隨時變易性)'을 지닌다.
중(中)은 다만 천리이며, 다만 역(易)이다.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니 어떻게 고집할 수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때에 따라 마땅함을 제정해야 하니, 미리 하나의 규구(規矩, 법도)를 정해 놓기가 어렵다.
'천리'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중(中)', 즉 시중(時中)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易)'으로 규정된다.
천지만물은 생생불식(生生不息)의 끊임없는 생명 창출과 변화를 자신의 생명 본질로 한다. 따라서 만일 천리를 고정불변한 당위의 규범으로 상정하게 되면, 인간은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창출·전개하는 천지만물의 자기-조직화 과정에 긍정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미리 설정된 틀에 변화하는 천지만물을 가두어 버림으로써 천지만물의 생명을 질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천리의 수시변역성을 바탕으로 인간은 천지만물의 모든 존재물들과 하나 된 삶을 전개함으로써 자신의 생명 본질을 실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3. 마음이 곧 본성
성(性)만이 이(理)이며 마음은 결코 이(理)가 될 수 없다는 주희와 달리 양명은 '마음이 곧 본성(心卽性)'이라고 주장한다.
본성은 마음의 본체이며, 하늘은 본성의 근원이다. '마음을 다한다(盡心)'는 것은 곧 '본성을 다한다(盡性)'는 것이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능히 자기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천지가 만물을 생성·양육하는 것(化育)을 알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한다(在心)'는 것은 마음에 아직 다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이다. '하늘을 안다(知天)'는 것은 주와 현의 일을 주관하는 것처럼, 하늘의 일이 자기 분수상의 일이며 이미 하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본성의 근원처로서의 '하늘'은 물리적 실체나 형이상학적 본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천지만물의 생명 본질로서의 자기-조직성 또는 자기-창출성을 의미한다.
'본성'은 주자학에서와 같이 단지 마음이 구비하고 있는 작용성이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원리나 도덕적 당위의 규범으로서의 이(理)가 아니다. 본성은 곧 천리로 천지만물과 감응하고 일체화할 수 있는 인간 마음의 유기적인 생명성이다. 따라서 본성은 작용성을 지닌 마음 자체의 '유기적 생명성'으로 '본성이 곧 마음(心卽性)'이라고 하는 일원적 체계가 성립된다.
본성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네 마음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본성이고 천리이다. 이 본성이 있어야 비로소 살 수 있으니, 이 본성의 생리(生理)를 인(仁)이라 한다. … 천리가 일신을 주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이라 한다. 이 마음의 본체는 본래 다만 하나의 천리이며, 예가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너의 참된 자기(眞己)이다. 이 참된 자기가 육체를 주재한다. 만약 참된 자기가 없다면 육체가 없게 된다. 참으로 이것이 있으면 삶이고, 없으면 죽음이다.
마음은 신체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각종 작용을 주재하는 '진정한 자기(眞己);로 정의된다. 마음이 신체 기관을 주재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에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본성이라는 유기적인 생명성이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신체 기관을 주재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 기관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생명 활동은 바로 본성의 발현이 되는 것이다.
'인(仁)'은 본성의 생명 원리(生理)로 정의된다. 본래 인이란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인(仁)', 즉 인간이 천지만물의 생명 손상을 자신의 아픔을 느끼면서 이들을 보살피고 양육하는 인간의 역동적 생명성이다. 본성은 한 개체를 살려나가는 근원일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과의 감응을 통해 그들을 살려나가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 생명 본질의 구현, 생명 주체의 실현, 천지만물의 온전한 생명 구현은 한 가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4. 실천 조리를 창출하는 마음
'마음이 곧 본성(心卽性)'이라는 심성 일원적 체계는 마음이 실천 조리를 창출할 수 있는 '심즉리'의 토대가 된다.
양명의 '마음이 곧 이'라고 할 때의 이(理)는 '천리'와 '신천 조리'라고 하는 두 가지 뜻을 함축한다.
이 마음이 물(物)에 있으면 이(理)가 된다. 예를 들면 이 마음이 어버이 섬기는 데 있으면 효가 되고, 임금 섬기는 데 있으면 충이 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 그러므로 나는 '심즉리'를 말하여 마음과 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하여 곧 마음에서 공부를 하고, 밖에서 의로움을 거두어들이지 않도록 하려고 했으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왕도이다. 이것이 내 주장의 근본 취지이다.
양명이 말하는 '물(物)'은 내 마음 밖에 존재하는 대상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 섬김'과 같이 인간 자신이 관계 맺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 마음으로부터 발동되는 '섬김'과 같은 구체적 실천 행위를 의미한다. 내가 대상과 관계 맺는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부터 창출되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의 '조리(條理)'를 의미한다.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그 전체의 측은히 여기는 것으로 말하면 인(仁)이라 하고, 그 마땅함을 얻은 것으로 말하면 의(義)라 하고, 그 조리로 말하면 이(理)라 한다.
실천 조리로서의 이(理)는 인간 마음으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에 '마음이 곧 이'라고 하는 일원적 체계가 성립된다.
자기 내면으로 돌아가 천지만물과 나를 분리시키는 극단적 개체 욕망(사욕)을 제거하고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생명 주체로서의 유기적 생명성(천리)을 보존하는 마음공부와 실천공부만이 요구된다.
5.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격물(格物)
'천리'와 '본성'은 인간 마음의 '유기적 생명성'이며, '이(理)'는 인간 마음이 창출하는 '실천 조리'라는 양명의 일원론적 체계는 마음과 이를 둘로 나누는 주희의 격물설을 비판한다.
주희에 있어 격물은 구체적 대상 사물에 나아가 사물에 내재된 이, 즉 물리를 궁구하는 인식 방법으로 설명되며, 이 과정에서 마음은 대상 사물 속에 내재된 이를 파악할 수 있는 인식 능력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주자학에 있어 마음과 이는 둘로 나뉘는 이원적 구조를 지니게 된다.
몸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발한 것이 의념이며, 의념의 본체가 바로 지(知)이고, 의념이 있는 곳이 바로 물(物)이다. … 의념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 있다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양명이 말하는 '격물(格物)'의 '물'은 '임금 섬김', '어버이 섬김', '백성을 어질게 대함', '보기 듣기 말하기 움직이기' 등과 같은 실천 행위를 의미한다. 대상과의 관계성 속에서 마음에 의해 발동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실천 행위가 바로 '물'이다.
'격(格)'이란 바로잡는다(正)는 것이다. 그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아 바른 것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격물'은 마음으로부터 사욕을 제거하여 마음의 생명 본질인 순수지선한 본성, 즉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성의 회복은 단지 본성을 회복하는 단계만이 아니라 본성의 발현으로서의 '실천 조리의 창출'과 더불어 '선한 실천 행위로의 이행'을 모두 포함한다.
내가 말하는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내 마음의 양지를 각각의 사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양지가 바로 이른바 천리이다. 내 마음 양지의 천리를 각각의 사물에 실현하면 각각의 사물이 모두 그 이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처지이고, 각각의 사물이 모두 그 이를 얻는 것이 격물이다.
5장 양지론 1 - 양지의 생명 창출
37세에 주창한 '심즉리설'에서 출발한 심학사상은 50세 때 제창한 '치양지설'에 이르러 비로소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
심즉리설이 양명심학의 씨앗이라면 치양지설은 양명 심학의 결실이다.
1. 양지의 보편성과 선천성
양지양능(良知良能)은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리석은 지어미나 성인이 똑같다.
무릇 양지가 바로 도(道)이다. 양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비단 성인과 현인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일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양지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성인과 어리석은 자의 구분이 없으며, 천하 고금이 다 동일하다.
양지는 모든 인간에 대해 선천적이고 보편적인 '내재성'을 지닌다.
양지가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과 전 우주 공간을 통틀어 같지 않음이 없다.
양지는 인류가 탄생한 이래 인간의 개체성과 역사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인간 누구나 내재하는 역사적 보편성을 지닌다.
양지는 원래 순수하고 밝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버이에게 효도할 경우에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사람은 이 양지에 의거하여 실제로 착실하게 효도를 다할 따름이다. 배워서 알고 이롭게 여겨서 행하는 사람은 단지 때때로 반성하고 각성하여 이 양지에 의거하여 효도를 다하고자 힘쓸 따름이다. 애써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사람은 가리고 막힌 것이 이미 깊어서 비록 이 양지에 의거하여 효도하고자 하더라도 다시 사욕에 막혀서 하지 못한다.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한 번 행할 때 자신은 백 번 행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 행할 때 자기는 천 번 행하는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이 양지에 의거하여 효도를 다할 수 있다.
개체 욕망을 제거하고 양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후천적인 노력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 양지 실현의 귀결처는 보통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인과 다름이 없다.
2. 감응 주체인 양지
'도(道)'는 하늘의 자기-조직성임과 동시에 천지만물의 중추로서의 인간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양지는 맹자의 이른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람마다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이는 곧 하늘이 부여한 본성으로서 내 마음의 본체이니 자연히 영명하고 밝아서 환하게 깨닫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천지만물과 감응 과정을 통해 시비를 판단해나간다. 인간 마음의 감응 주체가 바로 '양지'이다.
대저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다. 천지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이므로, 살아 있는 존재물들의 고통은 무엇인들 내 몸에 절실한 아픔이 아니겠는가? 내 몸의 아픔을 알지 못하는 것은 시비지심이 없는 자이다. 시비지심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알고 배우지 않더라도 능한 것이니, 이른바 양지이다.
천지도 사람의 양지가 없다면, 또한 천지가 될 수 없다. 천지만물과 사람은 본래 한몸이니, 그 발동하는 감각 기관 중에 제일 정묘한 곳은 바로 사람 마음의 한 점 영명함이다. 천지만물은 모두 사람과 본래 한몸일 뿐이다.
생물이나 무생물 나아가 우주는 인간의 양지가 없으면 생명의 전모가 자각적으로 파악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 가치 또한 부여받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의 양지는 단지 선험적인 도덕지나 인식지의 범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의 '총체적인 우주정신' 또는 '총체적 우주생명력'으로 확대될 수 있다.
3. 양지의 창출성
천지만물과의 감응 주체로서의 인간의 양지 또한 중단 없는 '역동성'을 토대로 천지만물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천지 사이에 활발발한 것은 이 이 아닌 것이 없으니, 곧 나의 양지가 유행하여 쉬지 않는 것이다.
양지의 천지만물의 변화에 대한 '순응성'은 인위적인 고정적 틀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의 '주체성'과 '창출성'의 토대가 된다.
양지는 곧 역(易)이니, 그 도(道)됨은 변화하고 움직여서 일정한 데 머물러 있지 않고, 일정한 표준을 정할 수 없다. 오직 변화에 따라갈 뿐이다.
성(誠)은 실리(實理)이며, 다만 하나의 양지일 뿐이다. 성인은 다만 그 기미를 알아서 변화를 당하더라도 소통할 수 있을 뿐이다. 양지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다만 현재의 기미만을 알아서 한 가지를 알면 백 가지를 알게 된다.
양지는 고정된 법칙이나 표준화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역(易)', 즉 변화의 속성을 지닌다. 또한 양지는 이전의 지식과 판단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앞에 전개되는 상황의 기미를 알아서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양지의 역동성은 곧 시비준칙을 새롭게 창출하는 양지의 '창출성'의 바탕이 된다.
인간은 그 사건과 현상 속에서 보이는 보편적인 특성과 요소들을 가지고 이를 이론화하고 법칙화한다. 그리고 이후에 발생한 사건을 미리 설정된 보편적 법칙과 이론에 맞추어 재단함으로써 오히려 천지만물의 생명을 질곡시키는 폐단을 야기한다.
양지란 하늘이 심어준 영특한 뿌리로서 스스로 낳고 낳아 쉬지 않는다.
천지만물의 중추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양지의 영명성을 바탕으로 천지만물의 생명의 전모를 자각적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천지만물과의 유기적 그물망 안에서 자신의 역동성과 창출성을 통해 천지만물의 자기-조직화 과정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간다.
양지의 발용에 순응하면 천지만물은 모두 나의 양지가 발용·유행하는 가운데 있게 되므로 어떠한 존재물도 양지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6장 양지론 2 - 양지의 유기적 생명성
1. 생명의 온전성에 대한 시비준칙
'양지'는 자가준칙(自家準則), 시비지심(是非之心), 커다란 표준(大規矩), 규구(規矩)·척도(尺度), 도(道), 밝은 스승(明師), 시금석(試金石), 지남침(指南針)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된다. 이들은 시비와 선악 및 진위의 '판단 준거' 및 방향을 지시하는 '지향성'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대가 갖고 있는 한 점의 양지는 그대 자신의 준칙이다. 그대의 의념이 붙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알고 그른 것을 그른 것으로 아니, 다시 조금이라도 속일 수 없다.
이 사소한 것(양지)을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아무리 그가 천 만 마디의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의 옳고 그름(是非)과 진실하고 거짓됨(眞僞)은 그 앞에 이르기만 하면 곧 분명해진다. 양지에 부합하는 것은 곧 옳은 것이고, 부합하지 않는 것은 곧 그른 것이다. 마치 불가에서 말하는 심인(心印, 글이나 말에 의하지 아니한 부처 내심의 실증)과 비슷하니, 참으로 하나의 시금석이자 지남침이다.
양지는 일단 인간 마음에 내재화되어 있는 '시비판단의 준칙'이다.
맹자에게 있어 후천적인 이성적 사고 작용을 통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선천적 자각 능력으로서의 '양지'와 후천적으로 학습하지 않고도 실천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동적 실천 능력으로서의 '양능'을 양명은 '양지'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양지는 타존재물과의 감응 과정에서 단지 시비를 판단하는 선천적인 영명한 자각성만이 아니라 이들을 진실하게 측은히 여겨 아파하는, 진성측달하는 통각의 주체이다. 양지는 맹자가 말하는 사단의 통합체이다.
2. 영명한 자각성과 항동성
양지의 영명한 자각적 판단력은 소명영각(昭明靈覺), 허령명각(虛靈明覺), 영소불매(靈昭不昧), 본래자명(本來自明), 자연명각(自然明覺) 등으로 표현된다.
마음은 몸의 주재이며, 마음의 허령명각이 이른바 본연의 양지이다. 허령명각의 양지가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을 의지(意)라 한다. 양지(知)가 있은 뒤에 의지가 있고, 양지가 없으면 의지가 없느니, 양지는 의지의 본체가 아니겠는가? 의지가 작용하는 곳에는 반드시 그 물(物)이 있으니, 물이 곧 사(事)이다. 만일 의지가 어버이를 섬기는 데 작용하면 어버이 섬기는 것이 하나의 물이 된다. 무릇 의지가 작용하는 곳에는 물이 없을 수 없다. 이 의지가 있으면 곧 이 물이 있고, 이 의지가 없으면 곧 이 물이 없으니, 물은 의지 작용이 아니겠는가?
양지란 마음의 본체로서, '항상 비추는 존재'이다. 마음의 본체는 일어남도 없고, 일어나지 않음도 없다. 비록 거짓된 생각이 발생하더라도 양지는 있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이 보존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간혹 마음을 놓아버리는 때가 있을 뿐이다. 비록 극도로 어둡게 막혔다고 하더라도 양지는 밝지 않은 적이 없다. 다만 사람이 살필 줄 모르기 때문에 간혹 가려지는 때가 있을 뿐이다. 간혹 놓아버리는 때가 있더라도 그 마음의 본체는 실제로 있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간혹 가려지는 때가 있더라도 마음의 본체는 실제로 밝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그것을 살피기만 하면 된다.
속이지 않으면 양지에 거짓됨 없이 성실하게 되고, 성실하면 밝아지게 된다. 스스로를 믿으면 양지에 미혹된 것이 없어서 밝아지게 되고, 밝아지면 성실하게 된다. 밝음(明)과 성실(誠)은 서로를 낳으니, 이 때문에 양지는 항상 깨닫고 항상 비춘다. 항상 깨닫고 항상 비추면 밝은 거울을 매단 것처럼 어떤 사물이 다가와도 저절로 그 아름다움과 추함을 감출 수 없다.
양지의 끊임없는 시비판단 작용, 즉 항동성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 본질인 천지만물의 창생·양육 과정에 주체적·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속성이다.
3. 수시변역성(隨時變易性)
앎이 없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은 본체가 원래 그와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태양이 일찍이 사물을 비추려는 마음을 지닌 적이 없으나 저절로 비추지 않는 사물이 없는 것과 같다. 비춤이 없으면서도 비추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원래 태양의 본체이다. 양지는 본래 앎이 없는데도 이제 도리어 앎이 있기를 요구하고, 본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도 이제 도리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단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양지의 본체는 밝은 거울처럼 밝아서 조그마한 그늘도 없다.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이 다가오면 사물에 따라 형체를 드러내지만, 밝은 거울은 더럽혀진 적이 없다. 이것은 이른바 '감정은 온갖 일에 순응하되 감정이 없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머무는 데가 없되 그 마음을 낳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밝은 거울이 사물에 응할 때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추한 것은 추하게 응하기 때문에 비추는 것마다 모두 참된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그 마음을 낳는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추한 것은 추하게 응하되 일단 지나가면 남겨 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머무는 데가 없다'는 것이다.
양지는 끊임없이 새롭게 직면하는 대상과 상황에 감응하고 시비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이전의 일에 얽매여서 이를 다시 하나의 틀로 만들어 새로운 대상과 상황을 재단하지 않는다.
천지만물의 중추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 과정의 한복판에 놓여 있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고정된 격식과 준칙에 얽매이지 말고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준칙을 창출함으로써만이 천지만물의 변화에 대응하면서 천지만물의 생명 창출·양육 과정을 온전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
7장 양지 실현의 필요성과 그 의미
'천지만물의 마음'이라는 위상을 지닌 인간은 누구나 천지만물과의 감응과 통각 주체로서의 '양지'를 선천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양지의 선천적 내재성만으로는 천지만물의 생명 창출·양육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인간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할 수 없다. '치양지', 즉 '양지 실현'이라는 후천적 과정이 수반될 때, 비로소 인간은 천지만물과 하나가 됨과 동시에 인간 자신은 물론 천지만물의 생명 본질을 실현할 수 있다. '양지'는 인간의 선천적인 마음의 본체이며, '치양지'는 선천적인 양지를 실현하는 후천적인 실천 과정이다.
1. 사욕이란?
사람들 중에 누가 뿌리가 없겠는가? 양지가 바로 하늘이 심어준 영명한 뿌리이니 저절로 쉬지 않고 생성한다. 다만 사욕이 누가 되어 이 뿌리를 해치고 막아서 자랄 수 없을 뿐이다.
인위적인 개체 욕망의 발동은 선천적인 양지를 어둡게 차폐시킨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구하는 것을 일곱 가지 정감(七情)이라고 한다. 이 일곱 가지는 모두 사람의 마음에 본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 칠정이 그 자연스러운 유행에 따르는 것은 모두 양지의 작용이며, 선과 악으로 구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집착하는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칠정에 집착이 있으면 모두 욕(欲)이라고 하며, 모두 양지를 가리게 된다.
사욕은 감정적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리적, 사변적, 의지적, 감성적 영역 모두를 포함한다.
2. 사욕의 폐단
욕망에 움직이고 사사로움에 가리는 데 이르러 이해로 서로 공격하고 분노로 서로 격돌하게 되면 사물을 해치고 동류를 무너뜨림에 못할 짓이 없게 되고, 심지어는 혈육까지도 서로 해치는 데 이르러서는 일체의 인이 없어질 것이다.
겉으로는 인의라는 이름을 빌리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를 사사롭게 하고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실질을 추구하며, 궤변으로써 세속에 영합하고 행위를 꾸며서 명성을 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덮어서 가리고 그것을 답습하여 자기의 장점으로 삼으며, 다른 사람의 사사로움을 들추어 은근히 자기가 정직하다고 여기며, 분노 때문에 서로 이기려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은 의로움을 따른다고 말하고, 음험하여 서로 쓰러뜨리면서도 오히려 악을 미워한다고 말한다. 현명한 자를 질투하고 능력이 있는 자를 시기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은 시비에 공정하다고 여기며, 제 감정과 욕망대로 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은 백성들과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3. 치양지(致良知)의 의미
『전습록』에서 '치양지'는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회복한다"는 의미와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확충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과 학문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능력이 미치는 정도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나무에 어린 싹이 조금 돋아나면 물을 조금만 주고, 싹이 다시 자라나면 물을 더 주는 것과 같다. 손으로 움켜잡을 만한 굵기의 나무로부터 한 아름 굵기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물을 주는 일은 모두 그 나무의 능력이 미치는 정도에 따른다. 만약 조그마한 어린 싹에 한 통의 물이 있다고 해서 다 부어준다면 흠뻑 젖어들어 죽어버릴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드리는 절목이 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봉양의 마땅함이 되는지를 아는 것이 이른바 지(知)이지만, 그것을 아직 차지(致知)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드시 어떻게 하는 것이 따뜻하고 시원하게 해드리는 절목이 되는지를 아는 지(知)를 지극한 데까지 확충하여 실제로 그것으로써 봉양한 뒤에야 그것을 치지라고 말한다.
양지 실현은, 전체로서의 천지만물은 물론 천지만물의 중추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신의 생명 본질을 구현하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8장 지행합일과 양지 실현
양명의 지행합일설은 주희의 '선지후행설'에 대한 반론이다.
'지행을 합일'하는 일이 바로'양지를 실현'하는 일이다.
1. 지와 행은 둘이 아니다
'지와 행이 두 가지 일이다'라고 하는 것은 '효의 이치를 아는 것'과 '효의 이치를 실천으로 이행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사욕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지, 지행의 본체가 아니다. 아직까지 알면서 행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다만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
참된 앎은 실천 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앎으로 지와 행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2. 지행합일과 양지 실현
지행합일의 근거는 지행의 '지(知)'가 일반적인 존재의 법칙이나 당위의 규범에 대한 인식론적 차원의 앎이나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양지(良知)에 의한 자각적 판단'을 의미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주재하는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마음이라 하며, 마음이 발하여 움직이는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의(意)라 하고, 의가 영명한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지(知)라 하며, 의자가 가서 닿아 있는 곳을 가리켜 말한다면 물(物)이라 하니, 다만 한 가지일 뿐이다.
자각적 판단, 실천 의지의 발동, 실제적 실천 행위는 모두 양지에 의해 전개되는 하나의 생명 과정으로 통합된다.
내가 일찍이 말한 지(知)는 행(行)의 주된 의지이며, 행은 지의 공부이다.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의 완성이다.
지는 행의 시작이며 행은 지의 완성이니, 성학은 다만 하나의 공부로서, 지와 행을 두 가지 일로 나눌 수 없다.
지의 진실하고 절실하며 돈독하고 착실한 곳이 행이며, 행의 밝게 깨이고 정밀하게 살펴지는 곳이 지이다. 지와 행의 공부는 본래 분리해서는 안 된다. … 참된 지는 곧 실천하는 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천하지 않으면 족히 지라고 말할 수 없다.
3. 학행합일과 양지 실현
배움과 실천의 합일, 즉 '학행합일'을 통한 양지 실현을 주장한다.
생각건대 배우는 데는 의심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물음이 생기게 된다. 물음은 곧 배움이자 실천이다. 또 의심이 없을 수 없으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은 곧 배움이자 실천이다. 또 의심이 없을 수 없으므로 변별하게 된다. 변별은 곧 배움이자 실천이다. 변별이 이미 분명해지고, 생각이 이미 신중해지고, 물음이 이미 세밀해지고, 배움이 이미 능숙해지고, 또 그리하여 그 공부를 그치지 않는 것, 이것을 돈독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한 뒤에 비로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능숙해지기를 구하는 것으로 말하면 배움이라 하고, 의심이 해결되기를 구하는 것으로서 말하면 물음이라 하고, 학설에 통하기를 구하는 것으로서 말하면 생각이라 하고, 정밀하게 살피기를 구하는 것으로 말하면 변별이라 하며, 실제로 이행하기를 구하는 것으로 말하면 실천이라고 한다. 생각건대 공부를 나누어 말하면 다섯 가지가 있지만, 그 일을 합해서 말하면 하나일 따름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변별하고 실천하는 것은 물론 궁리조차도 '양지를 실현'하는 구체적 실천 방안이 된다.
9장 양지 실현의 다양한 실천 방안
1. 사상마련(事上磨鍊)을 통한 양지 실현
"고요한 때는 생각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끼다가도 일을 만나자마자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한갓 고요한 가운데서 수양할 줄만 알고 극기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같다면 일에 부딪혔을 때 곧 무너지게 된다. 사람은 반드시 일에서 연마해야만 비로소 확고하게 일어설 수 있으며, 비로소 '고요해도 안정되고, 움직여도 안정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사물과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일'에서 극기(克己), 즉 자신의 개체 욕망을 제거하는 성찰·극치의 동적인 실천 공부를 해야 한다. 양명은 현실과의 단절과 괴리를 야기하는 정좌와 같은 정적인 수행법으로부터 '사상마련'과 같은 '동적'인 실천 공부로 전환한 것이다.
* 사상마련(事上磨鍊):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단련함.
'사상마련'은 실제적인 인간사에 나아가서 개체 욕망을 극복·제거하고 양지의 판단에 의거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으로서, 양명은 사상마련을 '격물치지'이자 일종의 '실학'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만약 사물을 떠나 학문을 한다면 도리어 공허한 데 집착하는 것이다.
'사상마련'은 만물과 이루어진 다양한 관계망 안에서 전개되는 구체적인 일에서 개체 욕망을 제거하고 양지를 실현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2. 집의(集義)를 통한 양지 실현
마음의 본체는 원래 동요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행하는 것이 의(義)에 합치되지 않기 때문에 동요하게 된다. 맹자는 마음이 움직이는지 움직이지 않는지를 따지지 않고, 다만 의를 쌓았을(集義) 뿐이다. 행하는 것이 의롭지 않은 것이 없다면, 이 마음은 자연히 동요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고자와 같이 다만 이 마음이 동요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을 붙잡는 것이니, 장차 그침 없이 낳고 낳는 마음의 뿌리를 도리어 막아서 휘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단지 보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게 된다. 맹자의 집의공부는 자연히 충만하게 길러서 결코 굶주려 쭈그러듦이 없으며, 자연히 종횡으로 자유자재하여 활발하다. 이것이 바로 호연지기이다.
'집의'는 마음을 인위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본질이 활발하게 발현될 수 있도록 마음을 충만하게 양육해주는 것이다.
의란 마땅함이다. 마음이 그 마땅함을 얻는 것을 의라고 한다. 양지를 실현할 수 있다면 마음은 그 마땅함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의를 쌓는 것도 다만 양지를 실현하는 것일 뿐이다. 군자는 온갖 변화에 응수하는데, 마땅히 행해야 한다면 행하고, 마땅히 그쳐야 한다면 그치고, 마땅히 살아야 한다면 살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 죽는다. 헤아리고 조정하는 것이 자신의 양지를 실현하여 스스로 만족하기를 구하지 않음이 없다.
마음의 마땅함의 실현은 곧 양지의 자각적 판단의 실현을 의미한다.
3. 필유사언(必有事焉)을 통한 양지 실현
나의 양지가 유행하여 쉬지 않는 것이다.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반드시 일삼음이 있는' 공부이다. 이 이치는 떠나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떠날 수도 없다. 어디를 가더라도 도가 아닌 것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공부 아닌 것이 없다.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다만 시시각각 '의로움을 쌓는' 것이다. 만약 시시각각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공부를 하되 혹 끊어지는 때가 있다면, 이것은 바로 잊어버린 것이니, 즉시 '잊지 말아야 한다(勿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시시각각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공부를 하되 혹 효과를 빨리 구하고자 하는 때가 있다면, 이것은 바로 조장한 것이니, 즉시 '조장하지 말아야 한다(勿助)'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 공부는 완전히 '반드시 일삼음이 있어야 한다'는 데 나아가 하는 것이며,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은 다만 그 사이에서 경각심을 진작시키는 것일 뿐이다. 만약 이 공부가 원래 끊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잊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으며, 이 공부가 원래 효과를 빨리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시 조장하지 말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이렇다면 그 공부가 얼마나 분명하면서도 간이하며, 얼마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가?
맹자는 송나라 사람이 벼의 싹을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이를 억지로 뽑아 놓음으로써 오히려 벼의 싹이 모두 말라버렸다는 이야기를 통해 조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0장 양지 실현의 최후 경계
양지 실현의 실제성 여부는 인간 마음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양명 또한 양지 실현을 통해 도달하는 내면의 경지로서 '스스로 만족함(自謙자겸)'과 '참된 즐거움(眞樂진락)'을 제시하고 있다.
1. 스스로 만족함의 경지
그대가 다만 자신의 양지를 속이려 하지 않고 착실하게 그것에 의거하여 무엇이든 행한다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 그러한 곳이 얼마나 온당하며 시원스럽고 즐거운가! 이것이 바로 격물의 참된 비결이며, 치지의 실질적인 공부이다.
다만 이 자연히 아는 밝음이 곧 양지이다. 이 양지를 실현하여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는 것이 곧 차지(致知)이다.
부귀를 버려야 할 때 부귀를 버리는 것은 다만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고, 어버이와 형의 명을 따라야 할 때 어버이와 형의 명을 따르는 것 또한 다만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경중을 헤아리느라 조금이라도 양지에 사의(私意)가 끼어들게 되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게 된다.
내적인 마음의 편안한 '만족감'과 편안하지 못한 '불안감'은 양지가 작용하는 표현 방식으로, 마음의 편안함과 불안함은 양지를 검증하고 시비를 판단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군자는 온갖 변화에 응수하는데, 마땅히 행해야 한다면 행하고, 마땅히 그쳐야 한다면 그치고, 마땅히 살아야 한다면 살고,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 죽는다. 헤아리고 조정하는 것이 자신의 양지를 실현하여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지 않음이 없다.
양지 실현의 귀결처는 인간 내면에서의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는 데 있다.
군자의 학(學)은 오직 그 마음을 구하는 것으로서 비록 천지를 세우고 만물을 양육하는 데 이르더라도 내 마음 밖으로 벗어나는 것이 없다. … 마음 바깥에 일이 없으며, 마음 바깥에 이(理)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 바깥에 학(學)이 없다. 이 때문에 어버이에 대해서는 자식이 자신의 마음의 인(仁)을 다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신하가 자신의 마음의 의(義)를 다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의 충신(忠信)을 말하고, 자신의 마음의 독경(篤敬)을 행하는 것과, 마음의 분노를 징계하고, 마음의 욕망을 막고, 마음의 선함을 실천으로 옮기고 마음의 그릇됨을 고치는 등과 같은 사물을 처리하는 일은 가는 곳마다 내 마음을 다함으로써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는 것 아닌 것이 없다.
옛 사람들이 타인의 선행을 보기를 마치 자기로부터 나온 듯이 여기며, 타인의 악행을 보기를 마치 자기가 악에 빠진 것처럼 여길 뿐만 아니라, 백성의 굶주림과 곤고함을 마치 자기의 굶주림과 곤고함처럼 보았으며, 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리를 획득하지 못하면 마치 자신이 그를 도랑에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던 까닭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하여 천하 사람들이 자기를 믿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양지를 실현하여 스스로 만족함을 구하는 데 힘썼을 따름이다.
양지 실현의 궁극적 목적은 타인으로부터 명성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스스로 만족함'을 얻는 데 있다.
2. 참된 즐거움의 경계
'즐거움'은 마음의 본체이며, '양지'는 즐거움의 본체이다.
인간의 고유한 생명 현상으로서의 '감정'은 발용 상태에 따라 마음의 본질로서의 천리에 부합될 수도 있고, 개체 욕망의 발동과 차폐로 인해 이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음의 본체로서의 즐거움이 비록 칠정 중의 즐거움과는 같지 않지만 또한 칠정의 즐거움을 벗어나지도 않는다.
비록 성현에게 따로 참된 즐거움(眞樂)이 있지만, 또한 보통 사람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수많은 근심과 고뇌를 찾으며 미혹과 자아 방기를 덧보탠다. 비록 근심과 고뇌, 미혹과 자아 방기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 즐거움은 또한 있지 않은 적이 없다. 한 생각이 환하게 열리고 자기 몸을 돌이켜서 성실하면 즐거움이 거기에 있게 된다.
『맹자』에서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몸에 돌이켜서 성실하면 즐거움이 이보다 큰 것은 없다"고 한 말이 있다.
'참된 즐거움'은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기 위한 마음의 본질적 속성이자 또한 천지만물과 하나 됨을 통해 도달하는 마음의 궁극적 경지이다.
즐거움은 마음의 본체이다. 어진 사람은 마음은 천지만물로써 한몸을 삼아서 기쁘고 화창하여 본래 간격이 없다. … 때때로 익힌다(時習)'는 것은 이 마음의 본체를 회복하는 것이며, '기쁘다'는 것은 본체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벗이 찾아온다(朋來)'는 것은 본체의 기쁨과 화창함이 천지만물에 두루두루 충만하여 간격이 없다는 것이다. 본체의 기쁨과 화창함이 본래 이와 같아서 애초에 일찍이 보탤 것이 있지 않다.
'기쁨'과 '화창함'은 인간 마음의 본질적 속성이게 여기에 더할 것도 없으며, 비록 천하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질적 속성에는 감소될 것이 없다.
11장 대동사회와 친민정치론
1. 만물일체의 유기체적 대동사회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서, 이상적인 유기체적 사회상으로 '대동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눈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귀가 미치는 데 따라서 반드시 거기서 살피며, 발은 물건을 쥐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손이 찾는 데 따라서 반드시 그리로 나아간다. 생각건대 원기가 두루 충만하고 혈맥이 뻗어나가 통하니, 그 때문에 가렵든지 아프든지 내쉬든지 들이쉬든지 감촉하는 것마다 귀신같이 응하여 말하지 않아도 깨닫는 신묘함이 있게 된다.
유기적인 인간의 신체와 같이 '만물일체의 인(仁)'이 실현되는 인간 사회 또한 개체 간의 구분과 간격을 타파하여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관계망을 형성하고 이에 인간 사회를 온전하게 존속시킨다.
2. 대동사회의 유기체적 특성
양명이 제시하는 유기체적 대동사회의 특성
첫째,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둘째, 사회 구성원들의 '온전성' 대동사회에 있어서 구성원들은 재능과 덕성에 있어 어느 한 가지도 결하지 않는 '재덕일치', 즉 사회 구성원들의 온전성이 요구된다.
셋째, 사히 구성원들의 '평등성' 개개인의 직책은 해당자의 신분상의 상하, 존비, 귀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과 덕성의 층차에 따른 것이다.
넷째, 사회 구성원간의 '유기적 상보성' '동심일덕(同心一德)'을 바탕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재능에 따라 부여된 직무에 충실함으로써 대동사회 구성원 상호 간에 생명을 온전하게 양육해줌으로써 결국 유기체적 대동사회를 온전하게 존속시켜나갈 수 있다.
3. 공리(功利) 정치에서 친민 정치로
공리 정치: 위정자의 개체 욕망에서 기인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을 질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정치
친민 정치: 인간 누구나 보편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생명 본질에 근거하여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을 중시하고 이들의 생명을 온전하게 양육시켜줄 수 있는 정치
패도의 무리들은 선왕의 가르침에 근사한 것을 몰래 취하여 밖으로는 그것을 따르는 것처럼 가장하고, 안으로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달성했다. 세상 사람들이 바람에 쏠리듯 그것을 종지로 삼자, 성인의 도는 마침내 무성한 잡초에 막힌 것처럼 방해를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모방하고 서로 본받아 부국강병의 학설, 배척하고 속이는 모략, 공벌하는 잔꾀,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서 한때의 이득을 탐하고 명성과 공리를 갈취하는 온갖 기술을 날마다 구하니, 관중·상앙·소진·장의와 같은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투쟁과 겁탈로 그 재앙을 견디지 못하여 사람들이 금수나 오랑캐와 같은 지경에 빠져들게 되었고, 패술조차도 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유기체적 대동사회에 역행하는 공리 정치의 원인은 인간의 생명 본질과 대비되는 '공리(功利)의 습성'이다.
서로 화합하여 올바른 정치 구현에 진력하기보다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명성을 얻는 데만 몰두하는 등 수많은 폐단을 야기하게 된다.
통각의 주체, 즉 천지의 생명 본질에 근원하며 만물과 영명한 감응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인간의 생명 주체가 '명덕'이다. 이는 공리 정치의 근간이 되는 개체 욕망과 대비된다.
명덕을 발휘는 명명덕(明明德)의 귀결처는 인간이 천지만물과의 하나 됨을 통해 만물의 창생·양육 과정을 주체적·능동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다. 친민(親民)은 무론 격물에서부터 평천하에 이르는 모든 인간사는 결국 인간의 명덕을 구현하는 일로 귀결된다. 따라서 명덕의 구현은 사히 구성원들의 생명을 온전하게 유지시켜주는 친민의 구현이다.
옛날에는 사민(四民: 士·農·工·商)이 업(業)은 달래해도 도(道)는 같이하였으니,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4. 친민 정치를 통한 대동사회 구현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므로,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이 흩어진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평안하다. … 임금과 백성이 한몸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양명의 친민 정치는 '군민일체'에서 비롯된다.
위정자의 정치 행위는 모두 위정자 자신의 양지 실현 과정으로 귀결된다.
친민 정치는 생명 의지와 생명 연대감인 '인'을 발현시켜나가는 과정이다.
성인이 그 마음을 다하기를 구하는 것은 천지만물로서 한몸을 삼는 것이다. 나의 부모와 자식 간에 친애하지만 천하에 아직 친애하지 않은 자가 있다면, 나의 마음을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써 대하지만 천하에 의로써 대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의 마음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으나, 천하에 아직 구별과 차례와 믿음이 없는 자가 있다면, 나의 마음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가족은 배부르고 따뜻하고 편안하고 즐겁지만, 천하에 아직 배부르지 못하고 따뜻하지 못하며 편안하지 못하고 즐겁지 아니한 자가 있다면, 능히 친애하고, 의롭고, 구별하고, 차례가 있고,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마음이 아직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기강과 정사를 설치하고 예악과 교화를 베푸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천리에 따라서 천도를 이룩하고 도와서 자신을 완성(盛己)시키고 타자를 완성(成物)시켜, 나의 마음을 다하기를 구할 뿐이다. 마음이 다하면 집안이 다스려지고, 국가가 다스려지며,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
자신의 생명 본질을 실현하는 진심(盡心), 즉 성기는 가정과 국가가 온전히 다스려지고 종국에는 모든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유기체적 대동사회의 구현으로 귀결된다.
12장 양지 실현의 교육론
양명 교육론의 궁극적 목적은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실천적이고 유기체적인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1. 교육의 목적과 입지
먼저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를 학문과 교육의 선행 조건으로 규정하고, 모든 인간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저 우리가 학문을 하는 데 가장 긴요한 핵심은 오직 입지이다. 이른바 일을 만나서는 곤고해지고 세운 뜻을 잊어버리는 병통도 다만 의지가 참되고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곤고해지거나 잊어버리는 병을 앓은 적이 없는 것은 다만 한결같이 참되고 절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과 가려움은 자신이 알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가려운 곳을 긁거나 아픈 곳을 문지를 수 있어야 한다. 아픔과 가려움을 스스로 알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긁거나 문지르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입지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해주고 끊임없이 참된 자아를 성취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길러주는 과정이다.
2. 입지와 양지 실현
입지를 근본으로 한 학문과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양지 실현'에 있다.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 학문의 커다란 핵심이며, 성인이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신 가장 근본적인 뜻이다. 이제 오로지 견문의 말단에서 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핵심을 잃어버리고 이미 부차적인 뜻에 떨어진 것이다. … 무릇 배우고 묻는 공부는 다만 주된 뜻의 핵심이 오로지 양지의 실현을 행해야 하는 일로 간주한다면, 무릇 많이 듣고 보는 것이 양지를 실현하는 공부 아님이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응대하는 것이 비록 수천수만 가지 실마리라고 하더라도, 양지가 작용을 발하여 유행하는 것이 아님이 없다. 보고 듣고 응대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또한 실현할 수 있는 양지가 없다. 그러므로 양지와 견문은 다만 하나의 일이다.
유기적 생명력으로서의 양지는 일상적인 삶을 떠나서는 존재의 의미도 지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物, 실천 행위)이다. 어린아이의 양지가 단지 그 정도에 도달한 상태라면 청소하고 응대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 한 점 양지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또 만약 어린아이가 선생과 어른을 경외할 줄 안다면, 이것도 역시 그의 양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놀고 있는 중이라도 선생과 어른을 보면 곧 읍하고 공경한다면 이것은 그가 격물할 수 있어서 선생과 어른을 공경하는 양지를 실현한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본래 어린아이의 격물·치지가 있다.
양지가 인간의 유기적인 생명력인 이상, 양지 실현을 위한 교육은 사실상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학습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없으며, 또한 현실과 괴리된 고원한 수련이나 형이상학적 탐구를 통해 이루어질 수도 없다. 양지 실현의 교육은 강제적이고 수동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능동적'이며 '창의적'인 교육이다. 일상적 삶 속에서 각기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자신의 양지에 의거하여 판단하고 실천함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다.
양명이 추구하는 학문과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선천적 양지를 주체적·실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 누구나 '참된 자아'인 '성인'이 되는 데 있다.
3. 재능과 덕성을 일치시키는 교육
사람마다 각기 서로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타고난 서로 다른 재능에 따라 서로 다른 다양한 직분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학교 교육은 사회 구성원들의 덕성을 성취시켜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되 반드시 덕성에 부합되도록 재능을 신장시켜 주어야 한다.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는 그의 덕성에 따르되 그의 재능이 그 직책에 합당한가를 평가해야 한다.
'덕성'은 인간 상호 간에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개체 욕망과 대립되는 서로 살리고 서로 길러주는 '동심일덕', 즉 '만물일체의 인심(仁心)'이다. 유기체적 인간 사회에 있어서 구성원들의 재능을 신장시키는 교육은 반드시 이러한 덕성의 성취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저마다 타고난 개개인의 재능적 특수성과 인간의 보편적 고유성이 잘 배양한다.
4. 능동성·자율성·창의성 증진의 교육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고 아동들이 자신의 생명 본질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 밑바탕이 되는 능동성과 자율성 및 창의성 등을 증진시켜주는 교육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근세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자들은 날마다 구두법과 고시 형식의 문장을 짓도록 감독하고, 단속하기만을 요구하고 예로써 인도할 줄 모르며, 총명하기만을 요구하고 선으로써 키울 줄 모르며, 채찍으로 때리고 잡아 묶어서 마치 죄수를 대하듯이 한다. 어린아이들은 학교를 감옥처럼 여겨서 기꺼이 들어가려 하지 않고, 선생을 원수처럼 여겨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엿보고 피하고 가리고 숨어서 놀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거짓말하고 궤변을 꾸며서 그 우둔함과 비속함을 제멋대로 이룬다. 경박하고 용렬하여 날이 갈수록 하류로 떨어진다. 이것은 대개 악으로 몰아붙이면서 그들이 착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니,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어린아이의 자연스런 정서에 부합되는 바람직한 교육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대체로 어린아이의 정서는 놀기를 좋아하고 구속받기를 꺼린다. 이것은 마치 초목이 처음 싹을 틔울 때 그것을 펼쳐주면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가지만, 꺾거나 휘어버리면 쇠하여 시들어버리는 것과 같다. 이제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그들의 취향을 고무시키고 속마음이 즐겁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럼녀 스스로 그치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비유컨대 때맞춰 비가 내리고 봄바람이 불어 초목을 적시면 싹이 움텨 자라지 않을 수 없어서 자연히 나날이 자라나고 다달이 변화될 것이지만, 만약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린다면 생의(生意)가 쇠잔해져서 날마다 말라가는 것과 같다.
피교육자의 재능과 기질에 따라 그들의 '다양성'을 증진시켜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제 아동 교육은 오직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가르치는 데 오로지 힘써야 한다. 그들을 기르고 함양하는 방법은 시를 노래하도록 유인하고 그 뜻을 드러내게 하고, 예를 익히도록 인도하여 그 위의(威僞)를 엄숙하게 하며, 글을 읽도록 인도하여 그 지각을 개발해 주어야 한다. … 그러므로 시를 노래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비단 그들의 뜻을 드러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뛰고 소리치고 휘파람부는 것을 노래를 통해 발산하고, 그 답답하게 억눌리고 막혀 있는 것을 음절을 통해 펼쳐내게 하는 것이다. 예를 익히도록 인도하는 것은 비단 그 위의를 엄숙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응대하고 읍양하여 그 혈맥을 움직이게 하고, 절했다 일어났다 굽혔다 폈다 하여 그 힘줄과 뼈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글을 읽도록 인도하는 것은 비단 그 지각을 개발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침잠하고 반복하여 그 마음을 보존하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소리를 내어 글을 읽어서 그 뜻을 펴게 하는 것이다. 무릇 이것들은 모두 그 뜻을 순리대로 인도하고 그 성정을 길들이고, 그 속되고 인색함을 가라앉혀 없애고, 그 거칠고 완고함을 묵묵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의에 점차 나아가되 그 어려움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게 하고, 중화에 들어갔으되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본성에 바탕을 둔 '시가 → 의지', '습례 → 위의', '독서 → 지각'의 관계로서, 인간의 정감·태도·정신, 이 삼자 가운데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루 계발시켜주는 유기적 인간 창출의 교육 방안이다.
5. 배움과 실천의 합일 교육
양명의 중요한 교육 방안 가운데 하나는 '배움과 실천의 합일 교육'이다.
『중용』의 박학(넓게 배움)·심문(자세히 물음)·신사(신중하게 생각)·명변(명석하게 변별)·독행(독실하게 실천), 이 다섯 가지를 '배움의 과정'이자 '실천 행위의 과정'으로 보고 이에 배움과 실천의 합일, 즉 '학행합일'을 통한 양지 실현을 주장한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실천하는 일은 모두 배우는 일로서 배우고서 실천하지 않는 자는 없다.
'배움의 시작이 곧 실천이 된다'
배움과 실천 경험은 시간적 선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시작되고 동시에 진행되며 동시에 완성되는 합일적 과정이다.
배움과 실천의 합일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양지를 실현하는 데 있다.
실천하지 않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없고, 실천하지 않고 별도로 궁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