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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궁전(부여문화단지)
물론 정식국호는 당연히 ‘백제’가 맞지만, 성왕 때는 백제가 부여의 계승국이라며 ‘남부여’라고 국호를 변경한 적도 있다.
성왕때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한 건 당시 백제의 최대 적국인 고구려에 대한 경쟁의식이 결과물이었다.
즉 고구려 역시 부여에서 나온 국가이므로, 백제가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주장하면 자연히 고구려는 정통성면 에서 다소 백제보다 아래 놓인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고구려는 백제의 이러한 도발에 전혀 개이치 않았던 듯하다.
아무튼 사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또 가장 많은 국왕을 배출했고(좋은 것 아님/ 그만큼 백제에 쿠데타가 많았다는 의미)
부여문화단지 내 십제국 복원지구
그리고 원래 국호인 십제(10개의 집단이 하나가 되어 국가를 이룸)에서, 백제가 된것만 봐도 백제의 정치구조가 상당히 복잡했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일단 ‘왕비족’이 고구려와 신라는 하나였던 것에 반해, 백제는 초기에는 2개(해씨와 진씨) 그리고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8성의 유력가문이 ‘왕족 부여가문’ 에게 도전을 했다.
즉 백제의 ‘내부 결속력’은 그리 강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게 약점만 되는 것은 아닌게
풍납토성 복원모형
백제내 세력들이 나름 독자적으로 새로운 지역(마한의 끝인 전라도 지역에서, 왜국과 멀리는 중국의 요서나 산동까지)에 ‘영토나 해양무역 거점 확보’에 큰역할을 한 듯 하다.
백제의 해상진출 지역들(해상 네트워크)
문제는 백제의 이러한 상황(귀족들의 힘이 너무 센 것)이 잘나갈 때는 ‘시너지’도 될 수도 있었지만, ‘국난의 위기’가 찾아오면 백제 자체를 궤멸하게 만들기도 쉬웠다.
1. 끊임없이 발생하는 백제의 쿠데타 (천수를 누린 국왕이 없었던 백제)
백제는 앞서 언급한대로 왕비족들 간에 끊임없는 쿠데타가 발생해서, 수많은 백제 국왕들은 제대로 명을 다해 죽은 왕이 없을 정도였다.
백제의 국왕은 대부분 비명횡사한다
사반왕을 시작으로 해서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부여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 등이
모두 쿠데타나 암살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한국의 왕조 중 가장 많은 국왕을 배출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침에 의해서도 죽음을 당한 국왕들이 많았는데, 21대 개로왕과 26대 성왕은 고구려와 신라에 의해 전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성왕
그리고 전장에서 죽은 두 왕(개로왕과 성왕) 모두 그 죽음은, 국왕으로서는 상당히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개로왕은 고구려에 망명한 백제의 옛 신하의 침을 맞은 후 죽었었고 성왕은 신분이 미천한 ‘도도’ 에게 죽음을 당한 후 신라 조정의 계단밑에 그 머리가 묻히는 수모를 당했다.
비참한 굴욕을 당하는 아신왕
또한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재위기간이 1년 남짓으로 너무 짧은 것으로 봐서 암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2. 백제의 최고의 난제, 왕비족들(강력한 귀족세력)
백제의 경우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한 왕비 가문(대성팔족)의 세력은 거의 왕족에 근접할 정도로 막강했다고 한다.
웅진으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 더욱 드세지는 귀족들의 발호와 백제왕권의 약화
그래서 백제의 국왕은 백제의 왕비족의 세력을 얼마나 잘 통제하느냐에 따라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사실 왕비족 들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었다.
백제국왕은 왕권강화를 모색하면 귀족들에게 대부분 암살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부여씨는 때로는 수도를 옮기고
(웅진에서 사비로,사비에서 익산으로)
또 삼국 중 가장 먼저 ‘율령제’를 채택하며 ‘왕비족들’을 억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왕비족들은 국왕에 맞서 정변을 일으켜 왕권강화를 시도한 국왕을 죽인 후, 정권을 차지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국왕’을 앉히기를 반복했다.
이것이 백제의 최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고구려에서 남하해서 내려온 소서노와 온조
사실 백제는 왕족인 ‘부여씨’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구나 영향력 등에서 기존 ‘위례성의 토착 세력’이었던 '진씨 와 '해씨' 즉 백제 초기 왕비족들의 도움없이는 국가의 유지는커녕 국왕노릇 하기도 어려웠다.
잦은 쿠데타가 발생한 백제
그렇게 초창기 백제의 쿠데타는 사실상 이 두 가문간의 정쟁과정에서 일어난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백제국왕의 시해는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왜나하면 국왕이 죽어야 왕비도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더 약화되는 백제의 왕권
고구려에게 쫓겨 웅진으로 천도한 이 후 부터는, 충청도 지역의 토착세력인 ‘사씨와 백씨’ 까지 왕비족에 가세하면서
미륵사지의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의 사리함
왕비가문은 무려 ‘대성팔족(8개의 가문)’으로 확대되어, 백제국왕의 권위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진다.
사실 웅진천도 이후 제대로 천수를 누린 백제국왕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유력 귀족들은 백제국왕을 무시하고 ‘정사암 회의’를 구성하는데, 고구려의 ‘제가회의’나 신라의 ‘화백’처럼 만장일치제가 아닌
요서까지 진출하는 백제
다수결로 결정을 했기에, 정사암회의 결정에 수틀린 귀족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아예 중국이나 왜국으로 이주를 해 버렸다.(백제국왕의 결정도 아닌 귀족들 지들끼리 결정인데)
그래서 백제는 국력에 비해 해외거점(왜국ㆍ 산동 혹은 요서 등)이 많았던 듯하다.
4. 사실상 독립적이었던 마한의 소국들
근초고왕때 마한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했다고 하지만, 그건 형식적인 것이었고,
사실 ‘사비 천도’ 때 까지도 백제는 마한 즉 전라도 남부의 영산강 일대까지 모두 장악하지는 못했다.
침미다례(혹은 신미국)은 백제가 고구려의 침락을 받은 틈을 타서 독립을 하려했고 중국에 사신을 파견한다.
즉 교통의 중심지 정도만 장악을 하고, 위세품이나 하사품을 ‘마한 소국’에게 내려서 간접적인 지배는 했지만 완벽히 통제 하지는 못했다.
당시의 연안항로
마한의 기존 부족장들이 백제의 지방 귀족화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 이들 지방세력들은 백제에 형식적인 통합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특히 475년 위례 함락이후 백제가 망국의 상황을 겪었을 때에는, 마한의 소국들은 곧 백제에서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했다.
5. 나라가 망해도, 내 기득권이 더 소중했던 백제의 귀족들
백제의 귀족들은 백제가 잘나갈 때도 왕권의 발목을 잡았지만 특히 나라가 망할 지경에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백제귀족의 상징 금동대향로
일례로 개로왕 때 장수왕에 의해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는 위기 속에서도 백제 귀족들은 왕실인 부여씨를 지원하지 않았다.
개로왕의 죽음
결국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훗날 문주왕)가 신라에 가서 1만 지원군을 요청해 위례성에 도착했을때 까지도, 백제 귀족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내놓지 않았았다.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일단 백제의 사직을 구한 ‘문주왕’ 이었지만, 그 역시 결국 귀족에게 암살을 당했다.
동성왕은 백가라는 귀족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 후 동성왕(토착귀족인 백가에 의해 죽임을 당함)을 시작으로, 웅진시대에 특히 ‘백제국왕’을 향한 귀족들의 암살시도가 연이어 발생했다.
결국 의자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좌평’ 등을 왕자나 왕족으로 임명을 하자 백제 귀족들은 곧바로 왕실에 대한 지원을 아예 끊어 버렸고,
의자왕은 당나라군이 아닌 백제의 귀족 예식진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라와 당나라’가 쳐들어오는 국난의 상황에서도 관망만 했었다. 이에 의자왕이 ‘사비를 버리고 웅진’ 으로 피난을 가자
‘웅진의 성주’였던 ‘예식진’은 당나라와 한번 싸우지도 않고, 의자왕을 배신한 뒤 그를 생포한 후 곧바로 당나라에 항복해 버리는 ‘매국노적 행동’을 자행했다.
결국 패망하는 백제
결국 백제가 기어코 망해서야 백제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군사를 풀었고
그 때문에 당나라는 백제의 정규군보다 오히려 ‘백제의 부흥군’ 과의 전투에서 더 큰 곤욕을 치른다.
백제멸망후 오히려 맹렬히 당나라에 저항했던 백제부흥운동 세력들 망국 이후에야 백제귀족들은 군사를 내놓는다.
이는 결국 당나라의 한반도에서의 철군을 가져와 신라가 백제지역을 통합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6. 결국 백제는 왜국의 군사에 더욱 의존하고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각별했다. 4세기 이후까지 왜국은 ‘야마토 정권’을 주축으로 하여 일종의 호족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왜국의 야마토 정권
이 시기에 백제가 왜국에 전해준 문물은, 왜국의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최신기술 들이었다.
이렇게 백제의 선진문물을 받은 ‘야마토’는 일본열도의 군소 국가들에 비해서 강력한 국력을 갖추게 되어 주변국가들을 병합시켜 나갈수 있었다.
야마토의 왜왕
백제가 왜국에 선진문물을 전수한 이유는 왜국의 인적자원을 백제왕실의 용병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했다.
귀족들이 사병들을 내놓지 않아서 백제왕실이 쿠데타나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자, 아예 군사력을 ‘왜국의 용병’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근초고왕이 왜국에 하사한 칠지도
근초고왕때 칠지도를 ‘왜국’에게 하사한 이래로, 백제는 왕실의 주요인사를 파견하여 항시 왜국의 용병을 데려올 준비를 하게 하였고
왜국의 용병들(드라마 근초고왕중)
변란이 많은 상황에서 후사를 보존하기 위해, 태자를 왜국에 보내 만일의 변고나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왜국과 혈연관계를 맺는 백제왕실
그래서 왜국에 백제의 태자들이 항상 거했던 것이고, 그렇게 되다보니 왜국의 ‘덴노의 모계’가 ‘백제계’가 되는 형국에 이르게 되었다.
7. 백제와 왜국의 시스템이 하나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
결국 ‘스이코 덴노’ 시절에는 ‘스이코 덴노와 만조백관들이 백제옷을 입었다’는 구절이 존재할 정도로 둘은 시스템상 거의 근접하게 되었다.
그렇게 백제와 왜국의 관계는 돈독할 수 밖에는 없었고, 결국 백제왕족들과 귀족들 역시 왜국조정의 최상층에서 활동하게 된다.
‘조메이 덴노’ 이후 부터는 ‘백제의 대빈’이라고 하여 아예 왜국 국왕의 죽음의례 역시 ‘백제 왕실식 장례’를 치룰 정도로 두 국가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였다.
백제국왕이 왜국에 보낸 바둑판
(사실 장례의식은 가장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왜국이 백제의 장례문화를 받아드린 것은 둘간의 밀접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즉 백제와 왜국간의 관계 초기에는, 왜국이 수혜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후왕’이라는 처지에 있었지만
개로왕은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왜국에 보낸다
점차 백제왕실이 ‘왜국의 용병’에 의존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점차 평등해진다.
결국 이러한 ‘백제와 왜국의 혈맹관계’는 백제 성왕이나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할 때, 자국 군사보다 왜국의 용병을 이용하려 군사작전을 펼쳤고,
왜국이 전력을 다한 백강전투
백제 멸망후 부흥운동 당시, ‘백강전투의 예’ 처럼 왜국이 자신들의 국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일본의 백제왕 신사
결국 백제귀족들이 나라를 잃은 후, 새롭게 정착한 곳은 신라가 아니라 왜국이었다.
백제 도래인이 세운 일본신사
그랬기에 한반도에 남은 백제귀족들(사실상 쩌리 귀족들)은 신라의 골품제에 편입될때, 고구려와는 달리 6두품도 아닌 5두품에 편입이 되었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하자 백제 유명 귀족들은 곧바로 왜국에 망명한다.
이는 백제 명문귀족 가문들은 사실상 왜국으로 피난 갔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