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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8일(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여호수아 17:14~18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본문 접맥적 주제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여호수아는 불평하고 두려워하는 요셉 자손에게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고 요구한다.
*설교 목적: 우리는 불평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 삶을 개척해야 한다.
미국의 종합 경제지 <포춘>에 따르면 세계 500대 기업들도 평균 수명이 약 40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1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을 30년으로, 한국 상공회의소는 한국 기업의 평균 수명을 23.8년으로 발표했습니다. 한때 잘 나가던 기업도 혁신을 멈추면 쇠퇴하게 됩니다.
1950년대 한국의 주요 그룹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삼성과 LG뿐이라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의 성취와 은혜가 평생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면, 늘 새로운 순종과 개척이 필요합니다.
-출처: 권구, “불평이 아닌 개척으로”,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12월호), 122쪽.
오늘 본문에서, 요셉 자손은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14절)
요셉 자손은,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자기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16장에는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소개되어 있고, 17장 상반부에는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은 가나안 중부지역에 속한 땅입니다. 모세가 요단 동편 북부 지역의 땅을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미 요셉 자손은 상당히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던 셈이죠.
요셉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은 해발 약 600~900m 정도의 산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산지는 돌이 많고 숲이 우거진 지역이어서 땅을 개간하거나 정복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산지에서 전혀 농사를 지을 수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산지에서 계단식 농사가 가능했지요. 또 포도나 올리브처럼 과일을 재배할 수도 있었고요. 한 번에 많은 곡식을 거둘 수는 없었지만, 만일 그들이 땀 흘려 일한다면 그 산지에서도 꾸준히 수확물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요셉 지파가 기업으로 받은 땅 모두가 산지는 아니었습니다. 요셉 지파가 분배받은 땅 중에는 이스라엘의 최대 곡창지로 알려진 이스르엘 평야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평지에 철 병거를 운용하는 강력한 가나안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 자손은 산지 대부분을 점령했지만, 비옥한 평지를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의 말대로, 요셉 자손이 얻은 산지는 그들에게 너무 좁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14절에서 요셉 자손이 했던 말이 제 마음에 걸립니다. 저는 그들의 말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제가 요셉 자손의 말을 다시 들려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요셉은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다”라고 고백합니다. 참 은혜로운 말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서 왜곡된 자기 인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내가 큰 민족이 되었다”라는 말에 강조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불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셔서 내가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땅은 왜 이것뿐입니까?” 이런 식의 불평입니다.
그들의 말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감사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고작 한 제비, 한 분깃만 주시면 어떡합니까?”라는 불평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에 감사했나요? 하나님이 한 제비, 한 분깃을 그들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나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 자손은 그들의 주장대로 다른 지파에 비해 큰 지파가 되었나요? 민수기 26장에서, 하나님은 “전쟁에 나갈만한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를 계수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 20세 이상의 남자가 대략 60만 명이었습니다.
지파별로 그 수를 파악해보니, 요셉 자손이 85,200명이었습니다. 요셉 자손이 다른 지파에 비해서 인구수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의 수를 합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도 76,500명이나 되었고, 그 외에도 6만 명이 넘는 지파가 세 지파나 더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요셉 지파가 큰 민족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요셉 지파만 크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도 분명합니다.
문제는 “내가 이렇게 큰 민족이 되었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 정도의 땅밖에 주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라는 불평이 그들 안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감사는 찾아볼 수 없고, “그런데 왜 이것뿐입니까?”라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아직 채워지지 않은 부분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인권 운동가였던 하워드 서먼(Howard Thurman)이 하계 강연 차 한 대학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때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서먼에게 찾아와 자기 룸메이트가 심하게 코를 골아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코 고는 소리를 계속 놀려 댔고, 심지어는 코를 고는 남자의 아내가 남편을 나무라지 않았다면, 그건 그 아내 역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코를 곤다는 의미일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먼은 그 남자에게 자기 방에 보조 침대가 있으니 거기서 자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불평하던 남자는 고마워하며 먼저 잠자리에 들었고, 서먼은 저녁 독서를 위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서먼이 지금까지 살면서 들어 본 코골이 중에서 가장 극심한 코골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서먼은 그 방을 빠져나와 다른 침실에서 자야 했습니다. 불평하던 남자는 잠에서 깬 뒤 서먼이 다른 곳에서 자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저런! 말도 안 돼! 코 고는 사람에게 다시는 화내지 않을게요!”
-출처: 리치 빌로다스, 「좁은 길, 그 생명 길로」(두란노, 202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6년 1월호), 263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나에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부분 때문에 불평했던 적은 없습니까?
그런데 요셉 자손의 더 큰 문제는 불평에 있지 않았습니다. 불평하는 요셉 자손을 향해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15절)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의 말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그들이 큰 민족이 되었고, 에브라임 산지가 그들에게 너무 좁다는 현실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믿음의 방향을 다시 세워 줍니다.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믿음의 지도자는 불평을 달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방향을 다시 세워 주는 사람입니다. 큰 백성이라면 큰 백성답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삼림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땅입니다. 베어내야 하고, 길을 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위험에 노출되고, 수고가 필요합니다. 삼림은 편안한 땅이 아니라 믿음이 필요한 땅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곳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요셉 자손이 다시 말합니다.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16절)
‘철 병거’는 당시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가나안 주민들이 이스르엘 평지에서 운용하던 철 병거는 요셉 자손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요셉 자손이 불평했던 동기에는 가나안 주민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혹 오늘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복에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있다면, 그 내면의 동기가 혹시 두려움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있는 철 병거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나에게 암과 같은 끔찍한 질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얼마 전에 한 T.V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부부가 나와서 부부 사이에 겪고 있는 고충을 이야기하면, 상담가가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50대 중반 정도 돼 보이는 한 남자가 자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남자는 과거에 두 번 이혼한 경험이 있었고, 지금 사는 아내는 세 번째 아내였습니다. 이 남자가 너무 젊은 나이에 첫 번째 아내를 만났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아이들만 낳아주고 남자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남자는 혼자 힘으로 어린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들어 국제결혼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내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자마자 남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아내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 남자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이 남자는 크게 좌절했고, 하는 수 없이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이 남자는 SNS를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세 번째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세 번째 아내마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그마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고, 아내와 자주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태도 때문에 몹시 힘들었습니다.
부부의 사연을 듣고 상담가가 아내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여보,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남편에게 이렇게 고백해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고 “여보,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한 마디 고백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부부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상담가는 남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던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혹 세 번째 아내마저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남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 잡은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불평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해 삶을 스스로 개척해야 합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18절을 읽겠습니다.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여호수아는 다시 요셉 족속이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비록 삼림이라도 그들이 개척하라고 요구합니다. 비록 가나안 족속이 막강한 철 병거를 가졌다고는 하나, 요셉 족속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능히 그들을 쫓아낼 것이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눈 앞에 펼쳐진 철 병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개척해야 할 삶의 영역은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너무 거대하고 부담스러운 것을 요청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삶에 가장 작은 부분에서부터 개척자의 마음을 가지면 어떨까요?
가령 여러분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다면 여러분 발밑에 팽개쳐진 이불을 가지런히 개어서 이불장에 넣는 일을 실천하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평소보다 15분 먼저 교회에 도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도 작지만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를 몰고 시내를 주행할 때 깜빡이를 넣고 끼어들려는 옆 차선의 자동차를 본다면, 속도를 줄여서 상대방 차가 안전하게 차선을 변경하도록 도와주는 일도 훌륭한 실천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작지만 소중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뉴질랜드에 주로 서식하는 '키위'라는 새는 타조처럼 날지 못하는 대신, 다리가 발달해서 잘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새라면 날아야 하지만, 키위라는 새는 편리함과 익숙함에 젖어 날개가 퇴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반면, 날개 없는 거미는 해발 4.5km 상공까지 몸을 띄워 수백 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어떻게 날개도 없는 거미가 그렇게 멀리 날아갈 수 있을까요? 무엇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기적을 만들어 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터전을 향한 소망과 비전’입니다. 거미가 한 번에 낳는 알의 수는 100~1,300여 개라고 합니다. 부화한 새끼 거미들이 모두 한곳에서 거미줄을 친다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합니다. 거미줄을 길게 뽑아 바람결에 날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비행을 시도합니다.
날개 없는 작은 거미조차 소망을 품고 날아 보려고 노력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우리는 어떤 삶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출처: 궁인, 「하나님의 방식」(두란노, 202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5년 7월호), 109쪽에서 재인용.
우리가 과거의 영광에 취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 나태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비록 삼림이라도 개척하여 그 땅을 넓혀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영적 지역을 넓히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개척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능히 쫓아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삼림이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면 개척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불평과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개척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