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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6일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길
날짜 : 1959. 7. 5(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향을 찾아가는 도상에 있는 인류
지금 이 세계의 인류는 평화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누리는 개인이 되어 자유의 사회, 자유의 나라, 자유의 세계에서 살기를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평화가 없고 자유가 없고서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다운 평화 속에서 참다운 자유를 구가하며 참다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과 참다운 인생길을 걷고자 하는 이런 이념적인 조건을 생각해 볼 때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여기에 상충적(相衝的)이냐, 그렇지 않으면 상응적(相應的)이냐를 분명히 밝혀야 할 때가 끝날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늘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구동성으로 이 세계는 평화의 세계가 못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나 심정에서 우러나 살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이 못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우리 인간은 이념적으로 고대하는 행복의 자아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나와 우리라는 것, 이러한 사회와 세계라는 것, 이렇게 걸어온 역사노정과 현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체는 내가 즐거워할 수 있는 본향의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요,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에서 살고 있지 못하며,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고대해야 되고 평화와 자유를 고대해야 하는 우리의 심적인 움직임이 자기를 재촉하고 환경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생활권 내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우리 인류가 바라는 본향의 세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인류가 그 세계에서 살지 못하고 있는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류는 본향을 찾아가는 길거리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인류라는 것을 우리는 밝히 알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잘난 사람도 본향을 찾기에 허덕이고 있고, 못난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양을 갖춘 존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본향 길을 찾아 헤매는 역사적인 사조권(思潮圈) 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 시간 느껴야만 될 것입니다. (7-14)
본향으로 가는 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성현 혹은 현철들이 나와서 인생의 갈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렇게 가라” 혹은 “이러한 주의를 중심삼고 살라” 하면서 어떤 방향성을 세워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학이 지향하는 방향성도 있겠고, 어떤 주권자가 내세운 이념을 통한 길도 있겠고, 혹은 사회적인 윤리관을 통해서 가는 길도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외적인 세계를 끌어내어, 여기에 영원한 이념을 연결시키려고 하는 종교적인 방향성도 있겠습니다. 크게 보면 그러하겠고, 작게는 개인을 중심하고는 이렇게 가야 되고, 가정은 이렇게 가야 되고, 대인관계에서는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방향성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이념이 지향하는 행복의 한 때를 대비해서 움직이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천륜을 해명해 가지고 하늘의 뜻을 완전하게 세우는 그 날에 가서는 반드시 천륜에 걸리는 입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가는 길, 윤리를 중심삼고 가는 길, 혹은 철학이 지향하는 진리의 길에서 행복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어떻게 찾아야 되겠느냐? 사람의 심정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수천 년 전에 가졌던 심정이나 억천만 년 후에 나타나는 심정은 같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같은 기반에서 움직이는 심정을 이끌어내어 행복의 동산을 이룰 수 있는 세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적인 기준,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 종교적인 의식 등 이러한 것이 이 땅 위에는 없을 것이냐? 만일에 없다고 단정한다면, 하나님은 어디로 가 계실 것이냐? 그렇게 되면, 그 하나님은 인류와 더불어 계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인류를 붙들고 섭리하고 윤리와 도덕을 세워 선을 지향케 하는 천륜이 있다고 할진대, 하늘은 기필코 우리와 관계되고 인연되어진 모든 것을 해명해 주는 것은 물론이며, 나아가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심정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한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화(和)하고 동(動)하면서 이 행복이 우리의 행복이요, 이 평화가 우리의 평화요, 이 자유가 우리들의 자유라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한 때가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할진대 하나님은 물론이요, 어떤 위대한 사상가라도 우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분석하게 될 때 안팎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의 실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도 나타나는 사회의 조직이 있고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계획된 조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안팎으로 전개되어 나갑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외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동시에 내적인 사정을 가지고 사는 연고로 서로 안팎의 사정을 통하고 마음과 몸이 통하여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또, 그 환경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성현 현철들이 왔다 갔지만, 자기의 인생행로를 노래하면서 승리적인 하나의 표어를 세워 “만민이여, 이렇게 가라” 하고 호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나를 의지하고 내 심정과 내 사랑과 더불어 너는 이렇게 살라”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을 말했으나 사랑을 중심한 행복관, 사랑을 중심한 평화관, 사랑을 중심한 자유이념에 대해서는 해명을 못 하고 갔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나를 믿으라, 나를 바라보고 오라’ 했지만,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고 “내 심정과 동하여 천정(天情)을 중심하고 노래하며 살자”고 못 해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수많은 선각자들이 역사상에 왔다 갔을지라도 심정을 중심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지 못했고 하늘의 심정과 통하는 자유와 평화의 세계관을 중심삼고 세계를 화동시킬 수 있는 기쁨의 내용을 소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고대하는 곳은 어디냐?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본향의 세계입니다. 그곳에 간 후에는 영원히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계, 보고 또 보아도 싫지 않은 세계, 한번 느낀 감촉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 웃음이 있다고 할진대는 영원히 웃을 수 있는 세계, 그 세계에서 한 주인을 찾았다면 그 주인을 영원히 놓칠 수 없다고 하는 세계와 같은 그런 한 곳이 있어야만 합니다. (7-16)
본향을 그리워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
그곳은 심정을 가지고 있는 인간 개개인들이 살 수 있는 곳이요, 인류역사의 종말시대에 소개되어야 할 우리의 본향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오늘날 이 세계는 수습하려고 해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소개할 수 있는 어떤 이념이나 주의를 논리적인 견지에서 세우지 않을 수 없는 때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본향의 세계, 본향의 땅, 본향의 형제, 본향의 가족, 본향의 친척, 본향의 동산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 중에서 “나는 그런 본향을 찾았노라”고 장담할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본향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구주로 와서 ‘나를 따라오라’ 하며 그 길을 제시해 놓았지만 “나와 더불어 살자” 할 수 있는 본향의 동산을 이루어 놓고 살다 가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도 인류를 끌고 나오셨지만 오늘날 이 자리에서 “나와 더불어 살자”는 말씀을 못 하시고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의 동산에 가서 살자”고 말씀하시며 이러한 섭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그랬듯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오늘날 여러분 자체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본향을 바라면서 걷고 있는 여러분, 그 날을 맞아 즐거워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 날을 맞이해서 나는 행복하다고 노래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날을 즐기셨느냐? 하나님도 그렇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날을 맞게 해주는 어떤 주의가 있었느냐? 그것도 없었습니다. 하늘도 즐기지 못했다는 거예요. 천지의 내용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 운세를 이탈하여 살 수 없는 양심을 가진 사람은 공통적인 목표와 이념 밑에서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의 심정을 체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도 가면 갈수록 행복의 마음은 간절하나 행복 그 자체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을 마음으로 간절히 고대하며 발버둥쳐서 그 목적지에 당도해 온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은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아득한 내용으로 여러분의 마음세계를 비추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차피 가야 할 과정적인 현상을 밟고 올라서서 행복의 본향을 노래할 수 있는 개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에 만 우주를 대해 “나와 더불어 화동하고, 나와 더불어 노래하며, 나와 더불어 행복하자” 할 수 있는 그 한날을 맞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요, 어떤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의 목적입니다. 또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도 역시 그러한 목표 밑에서 인간을 내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섭리권 내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인 고로 어떤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그 역시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다 같은 인생길을 가고 있는 이 마당에 여러분 자신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환경이 좋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 가진 세력이 당당하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가지고 인생의 갈 길을 해결짓지 못하고 본향의 세계를 해결짓지 못합니다. 왜 그러하냐? 오늘날 인류가 지향하는 방향성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해결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늘이 이런 입장에서 섭리를 해왔지만 도리적인 면이나 진리적인 면에서만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지 심정적인 면을 중심삼고 우리의 갈 방향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실생활에서 실감할 수 있는 행복과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평화와 자유를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것들을 아득한 소망의 한 초점으로서 바라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인 연고로 우리에게는 잘나나 못나나, 슬프나 기쁘나 하루의 생활에서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일년의 생활에서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르고, 또 일생에 있어서 생활적인 감정의 자유는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를 중심삼고 흐르고 있는 역사적인 심정, 생활, 이념과 관(觀)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은 그렇게 볼 것이며, 또 그렇게 보아야 될 것입니다. (7-18)
우리가 찾아야 할 분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을 보아도 불쌍하고 저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것입니다. 이 불쌍한 인류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신들임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가 왔습니다. “네 자신의 불쌍함을 탄식하라, 불쌍한 자체를 보고 울어야 하겠다, 하늘땅을 붙들고 울어야 하겠다. 내가 가는 발자취의 종단은 어떻게 될 것이냐? 변천하는 환경의 결과가 어떠한 내용을 내포해 가지고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냐? 이런 문제를 해명해 주며 네 자신을 놓고 근심하라”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지도자가 나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어떤 혁명적인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를 거치고 세기를 거쳐오면서 새로운 이념, 새로운 목표, 새로운 행복, 새로운 자유, 새롭다는 그 무엇을 가지고 나온 많은 사람들은 그 시대를 가로막고 불쌍한 자아를 해명해 주기 위하여 수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대에 영향을 미친 사명자들이요, 특정한 시기나 시대에 필요했던 사명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7-20)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기의 이 불쌍한 사정을 연결시켜서 세계와 통할 수 있는 불쌍한 사정을 가진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또, 자기에게 어떤 외로움이 있다고 할진대 그 외로움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뿐만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게 갑갑하고 컬컬함이 내 마음에 사무쳐 있다면 이 고달픈 심정이 세계와 더불어 연결될 수 있는 때로 찾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그 모든 것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분, 즉 나의 불행과 불쌍함과 고독과 한스러움을 맡아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고대하는 이상의 세계를 소개해 줄 수 있고 행복과 평화 그리고 자유의 세계에서 영원히 느끼고 싶었던 심정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 심정이 영원성과 연관하여 존재세계의 어떠한 것과도 버젓이 행복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동기의 주체로서의 한 분을 만나는 사람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성공자일 것입니다. 슬픈 세상에서 그런 한 시간을 느끼게 하고 체험시킬 수 있는 예수님이어야 되고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걷고 있는 발자취를 거두어서 어차피 거쳐야 할 한 때를 넘어설 수 있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처한 사정을 거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망의 기준을 넘어서 사정을 통하고 심정을 수습할 수 있는 동시에 내용적인 면에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야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심정의 이념을 갖추고 걸어가야 고달픈 인생행로에서 서러움에 부딪쳐도 그런 심정의 세계에서 느껴진 감정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치고 때려도 더 강해지고 하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무엇, 심정의 인연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이는 지옥의 밑창에 몰아 넣을지라도 점령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곳이 기필코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방향은 그 한 곳, 본연의 동산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지배해 온 하나님의 섭리는 수많은 곡절의 노정을 거쳐서 그 한 기준을 세우게 되었고, 이것을 따라가야 하는 인간들도 역시 수많은 고통의 과정을 거쳐 가지고서야 그 한 기준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존재세계에 있어서 모든 존재물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기점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노정을 가야 하는 우리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7-22)
우리들이 바라는 본향
본향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합니까? 본향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사랑하는 마을이 있고, 사랑하는 집이 있고, 사랑하는 형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멀리 외국에 가 있게 되면 그 본향의 범위는 넓어져서 조국, 즉 나라까지 본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또 우주나 혹은 천주(天宙)의 견지에서 보면, 이 세계가 나의 본향이 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범위가 크면 클수록 그 본향의 범위도 비례적으로 커 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생활과정에서 잘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본향은 어떤 곳이냐? 여러분이 어느 곳이 내 고향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 곳이 아닙니다. 마음의 본향, 그곳은 마음이 즐길 수 있는 내 심정의 안식처요, 심정세계의 보금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것을 두고 구원섭리를 해 나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찾아주고 인류를 찾아준다면 나는 하나님께 “사정적인 조건보다도 심정적인 조건으로서 저를 찾아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것은 왜냐? 사정은 천태만상이 될 수 있으나 심정은 오로지 하나의 조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관을 찾아나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본향은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그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감정과 더불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엉클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본향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행로에 있어서 본연의 마음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본향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고 본향의 동산을 느끼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역사가 바라고 있는 참다운 행복의 동산이요, 참다운 평화와 자유를 소개할 수 있는 그 본향에는 누가 계실 것인가? 생각해 보세요! 그 곳에는 높고 크고 존엄하신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또, 우리가 고대하던 주님이 그 곳에 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신이 그 곳에 계실 것이며 역대 섭리사에 왔다 갔던 수많은 공신들이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또,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충신들이 그 곳에 있을 것이며, 세계의 어느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효자와 효녀 그리고 열녀들이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마음의 인연을 넓혀서 이념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타락의 인생길을 걷고 있는 불쌍한 인간들에게 수많은 성현들은 삼강오륜(三綱五倫) 등을 가르쳤고, 모세는 십계명을 소개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도인들도 그런 일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수고해 왔습니다. 인류가 본향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심전(心田)을 개발할 수 있는 사명을 지니지 못한 도주(道主), 그런 종교, 그런 윤리, 그런 이념은 이 우주상에서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물러가지 않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물리치십니다.
여러분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그 본향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 아득한 피안의 본향을 바라보며 가고 있다고 할진대, 여러분은 그 노정의 어느 지점에든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서부터 천국 끝까지의 그 길은 어떤 길이냐?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인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이가 들어 노숙해 가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자체를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본향의 동산과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염려 중의 염려요, 근심 중의 근심일 것입니다.
그러면 본향은 어떠한 곳이냐? 그 곳을 찾아온 자를 대하여 환희의 팔을 버리고 맞아주는 그런 곳을 말합니다. 그곳이 그리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에서는 억울한 사정, 비통한 일, 혹은 분하여 참을 수 없는 입장에 서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기 위하여 나선 몸이기에 그러한 사정은 필히 있어야 할 것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길에서 돌아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세워 놓은 역사적인 모든 위훈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인생길을 개척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도주들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쇠하기 전에 인생의 행로를 개척해야 할 우리입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늠름한 모습을 갖출 수 있는 심정과 마음의 중심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이것이 오늘날 여러분 자체를 걸어 놓고 문답해야 할 중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지적하여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7-23)
본향을 찾아가는 자가 가져야 할 태도
본향, 그곳에는 그리운 부모가 계시고, 그리운 형제가 있고, 그리운 산천이 있습니다. 우리가 본향을 그리워하여 찾아간다면 기뻐하지 않을 존재물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그곳을 찾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오늘 내 생활이 처량하구나, 오늘날 내 생활의 행로가 비참하구나” 하는 것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본향을 찾아가는 노정이니 여기에 억울함이 있고 분함이 있고 눈물을 지으며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할지라도 본향을 생각하는 그 마음을 잊고 쓰러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모든 성현들이 본향을 찾아가는 길에서 마음과 이념의 세계를 두고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그 세계를 찾기 위하여 인간적인 사정도 다 저버리고 인간 세상에서 정적으로 인연되었던 모든 환경까지도 다 끊어버렸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불쌍한 아버지가 웃으실 수 있는 그 한 시간이 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모하고 붙들고 싶었던 그 심정을 아시고, 나를 붙들고 울어주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인생길을 가기에 어느 누구보다도 비참한 환경에서 상처를 입고,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위하고 본향을 찾기 위하여 그러한 길을 걸어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하늘은 그 사람을 붙들고 통곡할 것입니다. (7-25)
우리는 본향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운명의 노정, 가지 않으면 안될 과정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만민이여, 온 천주여! 내 말에 호응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인생행로에서 본향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어디로 돌려야 하느냐? 참다운 사랑의 부모가 계시고, 참다운 사랑의 정적인 보금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우리가 머물 곳이요, 우리가 안식할 곳입니다. 또한 그곳이 행복과 희망이 넘치는 평화의 세계요, 자유의 동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곳을 사모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땅을 대하여 깨끗이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들은 다 그렇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잃어버린 부모를 찾기 위해서는 천리 길도 멀지 않다 하고 달려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만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본향의 동산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그만도 못하다면 반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 생애의 어느 한 기간에서 본향길을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까? 그런 데 무책임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책임을 질 수 있고, 그 길에 책임적인 생활의 한 부분을 남길 수 있어야 본향의 역사를 재창조하고 본향의 섭리의 뜻을 세워 나오는 천륜 앞에 면목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간 선조들이 역사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고, 그렇게 간 도인들이 종교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본향의 부모를 그리워하고, 본향의 산천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가정을 그리워하고, 본향의 세계를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유물사관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본향을 꿈꾸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외적인 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내적인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세계에서 만난 사람은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영원히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의 사람을 만나고, 그런 자리의 사람을 찾았다면 먹는 것을 초월하고 입는 것을 초월하여 취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상주의가 있다면 그 주의를 통하여, 어떤 사상이 있다면 그 사상을 통하여 어느 정도 취해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느냐를 봐서 그 주의나 사상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질은 취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어떤 대학자가 있다고 할진대 “내가 이렇게 공부하여 이런 학자가 되겠다” 하는 사람은 그렇게 못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취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세계적인 대가가 되는 것입니다. 취하는 감정을 통하지 않고는, 오늘날 기성의 내용 이상의 어떤 법칙이나 공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7-27)
참된 지도자
인간이 찾고,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심정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그러한 행복, 그러한 평화, 그러한 자유를 소개해 주는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그러한 방향성을 가르쳐 주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참 지도자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인생길을 가는 사람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념과 현실은 상충된 면을 지향해 나가고 있습니다. 마음과 몸은 언제나 싸움의 대상이 되어 투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이상세계를 찾아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는 땅 위에 형성되어 있는 마음세계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거쳐 나오는 노정에 있어서 그는 편안한 생활을 해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역사적인 위인들을 봐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 “나는 배운 것이 없고 무식하고 형편없는 모습”이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행로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잘나고 못난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하냐? 심정을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것은 다 같은 법입니다. 대통령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일개 노동자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다 같습니다.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이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부족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그 자식이나 아내를 대하여 부모의 사명을 못 하니 미안하고 남편의 사명을 못하니 미안한 마음이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라 하는 사람은 “내 할 일 다하고 있다” 합니다.
심정적으로 볼 때, 어느 쪽이 더 높겠습니까? 오히려 말단에 있는 사람들이 더 높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그 인연과 더불어, 본연의 심정과 더불어 취해서 “감사합니다” 해야 됩니다. (7-29)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자신을 가지고 심정적으로 취해 갈 줄 아는 자가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하나님이 있다면 심판날에 이런 사람을 호출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갖고 취해서 간 사람은 역사가 옹호해 줍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갖고 하나님의 뜻에 취해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민족적으로도 그 민족의 운명과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하기에 취해서 죽음의 길을 불사하고 넘어간 사람들을 충신이요, 열사라고 했습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 흐른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듯이 천정을 찾아나가는 노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에서 그리워하는 심정이 우러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식이 많고 갖춘 것이 많아서 기세가 당당하다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새로운 무엇을 지향하는 이 마음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상적인 감정을 내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간절히 고대하고 그런 감정에 취해서 말을 해야만 오늘날 어떤 주의, 어떤 사상이라도 이끌 수 있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됩니다.
그러면 인류 앞에 지도자가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 것인가? 인생행로에 있어서 자신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 자신은 인간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나 피조만상 앞에서도 자신을 가지고 자체를 세워 하나님의 심정에 취해서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심정에 취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 앞에 가서 기대어 쉬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갖춘 인격자가 있다면, 누구든지 숭배하고 싶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연의 심정의 발로는 그런 길을 통해야 할 운명에 있는 것을 감지하기 때문에 그 길이 필히 가야 할 노정임을 알고 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지향하여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같은 인생행로에서 처참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우리의 불쌍한 사정을 알고, 우리의 동족이 인생행로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은 하늘 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형제들이 인생행로에서 낙오자가 되는 것을 볼 때 “너는 언제 올 것이냐” 하며 마음을 졸이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심정의 지도자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그러한 지도자, 양들은 그러한 목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하여 울었습니다. “나에게로 오라” 하며 눈물지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대하여 탄식하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누가복음 13:34) 하며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7-31)
인생노정의 성공자
오늘날 이 세계를 품고자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계가 나아갈 길을 개척하여 어떠한 목적지에 접근시켜 주고자 하는 사명을 갖고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이 세계의 허덕이는 실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늘을 대하여 호소하며 흘린 눈물이 그 민족을 받들어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연결시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서 예수님과 같이 이 민족을 위하여 하늘을 대해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사조도 그러하거니와 앞으로의 민족의 전망도 그러합니다. 천리적인 한 때를 바라보고 있는 인류인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고 할진대 그런 과정에서 허덕이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나가는 인생행로에서 자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신과 더불어 소망의 본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에 사무쳐 달음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산아, 가리어라! 바다야, 가로 막혀라! 원수야, 나타나라! 내 갈 길을 누가 막겠느냐” 할 것입니다. 핍박의 바람이 불어와도 한 때일 것이며, 시험의 화살이 날아와도 한 때일 것이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와도 한 때일 것으로 알고 그 한 때를 넘기 위해 달리는 사람, 더 큰 한 때를 찾기 위하여 자기의 작은 생애의 한 때를 잊고 뛰어나갈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생노정에 있어서 성공자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걷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우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갈 때 왜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좋아서 돌리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길을 찾아 나오면서도 본향의 뜻을 생각한 예수님의 심정, 본향의 부모를 염려하며 효성을 다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그 심정을 대하던 순간은 뼛골이 녹아나는 순간이었기에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정의 귀일점이 천지를 통할 수 있는 기준에 섰기 때문에 사망선을 헤치고 부활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심정이 동하지 않고는 사망의 세계를 박차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없고 승리의 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그런 분을 모셔야 되겠다고 생각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감정, 그러한 심정에 연하여 취할 수 있는 일편의 생활내용을 갖지 못했다고 할진대, 우리는 허덕여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노정의 수많은 선조들도 허덕였고, 역사를 지배해 나온 하나님도 허덕여 나오셨거늘 우리가 어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모든 것이 갖춰질 수 있는 것이 하늘의 섭리라면, 그런 말씀은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고달픈 인생길을 가면서 바른 길인 줄 알고 걸었는데 반대의 걸음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서러움입니다. 부모가 바라는 방향은 이러한 것인데, 탕자의 모습이 되어 반대 방향으로 가서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자식의 모습을 보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통곡할 것입니다. (7-32)
본연의 동산은 이상동산입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세계이고 형제의 감정이 만우주 어느 곳에든지 통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민족적인 감정 혹은 국가의 어떤 주권적 차이를 가지고 논의할 수 있는 이상과 주의의 세계는 아닙니다. 민족의 차별 혹은 국가의 주권 등 그러한 모든 것을 넘어서서 논의하는 세계, 인간의 경제적인 사정이라든가 문화라든가 하는 조건의 차이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을 가지고 논의하는 세계입니다. (7-36)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
우리는 본향을 찾아가는 인생행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첨부해야 할 말씀은 “나는 사랑이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빼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는 사랑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진 사람, 하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왔다고 할진대 그를 두고 “너는 이 땅에서 하늘을 배반한 자다” 하면서 심판대에 올려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들딸이 땅 위에 많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높이 보는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내 몸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곳, 내 심정을 맡길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만물의 주인공이었다고 할진대, 만물은 그를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 것이냐? 모든 만물은 아담을 대해 “어서 내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 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하나님“ 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이 “내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상적인 주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고자 하오니 하나님이시여, 주인이 돼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역사, 그럴 수 있는 섭리, 그럴 수 있는 내용의 인격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이 그런 분을 땅 위에서 만났다면 “내 몸, 내 마음, 내 심정을 당신이 주관해 주시옵소서! 내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해야 만물도 그를 고대하던 주인으로 모시려는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존재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7-39)
오늘날 여러분이 진리를 통해 몸이 그렇게 되고, 마음이 그렇게 되고, 심정이 그렇게 되면 이 진리가 세계를 지배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진리는 세계를 지배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있고 싶은 곳, 살고 싶은 곳,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런 곳이 본연의 자리일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식구들은 형제들입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상처를 입고 있으면 그 상처를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래야 됩니다. 누가 상처를 받게 되면 가슴이 메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처음으로 타향에 온 사람들은 가끔씩 고향이 그리워질 것입니다. 그 마음이 순수하고 본연의 심정이라면 자기가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와 형제들의 손을 붙들고 눈물지으면서 자기의 지나온 사정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워가며 털어놓을 수 있는 그 자리, 그 마을, 그 산천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복귀의 한을 풀지 못한 우리에게 인생행로를 걷는 과정에 있어서 “오, 주여! 아버지여” 하는 순간에 온 천지만물이 기쁜 가운데 “옳소이다. 할렐루야” 하고 환호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있었느냐? 여러분에게 그런 순간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다고 할진대, 하늘이 서럽고 불쌍한 자리에 놓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자는 붙들고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자식이 좋다는 것은 무엇이냐? 부모가 어려울 때, 부모가 눈물지을 때 같이 울어 주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또, 부모가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도 같이하고 기쁨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합니다.
우리의 나아갈 도의 이념을 책임진 지도자 혹은 교단적인 책임자가 있다고 할진대, 그는 양들을 위하여 울어줄 줄 알고 통곡하며 불쌍한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양들이 자기들의 모든 사정을 그 지도자 앞에 털어놓고, 그로 말미암아 희로애락의 감정이 풍부해질 때 그 사람들은 참된 목자를 만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하늘이기 때문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인생행로에서 고달픈 몸으로 승리적인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나타나게 될 때 역사적인 모든 성현 현철들과 하늘이 환희로 맞아줄 수 있는 한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그 날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날을 감사히 여기고, 그 날에 자신들의 모든 허물을 잊어버릴 수 있고, 그 날에 고대하던 소원을 다 이룰 수 있기를 바라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들이 오늘날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