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병역거부가 오직 양심상의 결정에 따른 것으로서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보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경우 입영불응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된다’. 병역법 제 88조에 위반한 이른바 ‘양심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지난 5월 21일 서울 남부지법에서 내려진 무죄판결의 핵심논지이다. 하급심에서 엇갈리는 판결이 속출하고 있고, 아직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민감안 현안에 대한 다분히 파격적인 판결이라는 점에서 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동 판결은 대법원의 판례(1992. 9.14, 92도1534)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동 규정에 대한 위헌심판제청사건(2002헌가1)에 대하여 2년여 지난 지금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도 관련 진정에 대하여 판단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내려진 지방법원 단독판사의 제1심판결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II. 견해
우선 매년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양심 내지는 신앙상의 병역거부로 징역형에 처해지는 딱한 일을 더 이상 그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깊은 번민의 흔적이 뚜렷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그 전향적인 발상의 전환에 찬사를 보낸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법대로 판단하였을 뿐’이라고 밝힌 담당 판사의 차분한 목소리는 바로 그 법과 법의 해석을 통해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담아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당연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법텍스트가 형식적인 기호분석론의 대상인 고착된 의미의 폐쇄구조나 힘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수단만이 아니라, 위대한 대화의 마당을 제공하는 열린 구조이고 또한 법관이 단순히 주어진 ‘법을 말하는 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을 품어서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가슴과 머리’이기도 하다는 점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동 판결은 그 내용만을 보면 새롭고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양심상 병역거부는 미국, 독일, 대만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 이미 판례나 실정법상 인정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인 입장이 다수의견이기는 하지만, 양심상 병역거부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특히 기본권해석론의 차원에서 이른바 ‘규범조화적 해석’의 요청에 따른 ‘대안식 해결방법’ 내지는 ‘최후수단억제의 방법’등이 설득력 있는 해결방안으로 제시되어 왔다. 말하자면 동 판결은 ‘규범조화적 해석’의 지침에 충실한 헌법지향적 법률해석의 가능한 결론들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콜롬부스의 계란’ 자체에 관심이 모아지는 사회적인 논란의 맥락을 떠나서, 법리적인 관점에서 주목되는 바는 계란을 깨서 탁자 위에 세워 놓는 ‘콜롬부스법관’이 우리 헌법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것인지, 바람직한 것인지 여부이다.
우선 현실 상황의 관점에서, 그 동안 딱한 현실을 외면해 온 무성의한 국회와 정부, 별다른 설득력 있는 논거 제시도 없이 “종교의 교리를 내세워 법률이 규정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양심상의 결정’은 헌법에서 보장한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해 온 대법원, 전술한 바와 같이 결정을 마냥 미루고만 있는 헌법재판소 등 관련 헌법기관들의 행태에 비추어 볼 때, 동 판결은 불가피하였고 또한 법정책적 관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의제상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정의를 빌리면, 헌법상 보호되는 ‘양심상의 결정’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개인이 선악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 스스로 구속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내면의 소리에 따르는 경우 심각한 양심의 가책이 없이는 거스르기 어려운 모든 진지한 윤리적 결단”(BVerfGE 12.45/55;48.127/173)을 의미한다. 숫자의 다소를 불문하고 그 진지함과 개인적인 회피불가능성에 비추어 볼 때,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인격을 걸고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결정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어야 하는, 이른바 ‘애고(愛顧)요청’(Wohlwollensgebot)의 대상인 양심상의 결정에 해당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교조주의적 관점을 제외한다면, 윤리적 판단의 객관적인 기준을 부인하는 상대주의 내지 회의주의든, 이성의 토대를 긍정하는 칸트의 정언명법이든 또는 인간의 감성과 열린 담론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입장이든, 이를 부인하는 주장이 원용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공해 주는 윤리학은 없다. 사회적 실재로 주어져 있는 가치규범으로서 헌법은 윤리학과 토대를 같이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적인 보호의 내용과 방법은 별론의 대상이되, ‘현역입영 또는 소집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 또는 소집에 불응한 때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규정상 ‘정당한 사유’에 ‘양심상의 결정’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는 해석론은 적어도 입법자의 의도나 안보논리를 절대시하는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한다면 문리해석, 논리해석 등 일반적인 법해석방법론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핵심가치로 하는 헌법질서 속에서 양심의 자유의 의미와 기능을 각별하게 배려하는 관점에서 헌법지향적 체계해석을 하는 경우, 합헌의 범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남는 당연한 해석론으로 여겨진다. 법적용의 양형단계에서 헌법상 국방의 의무(제39조)와 양심의 자유(제19조)를 조화시키고 형평성을 고려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법구조적,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법해석론의 차원에서 선택이 가능한 대안은 무차별적인 처벌과 무죄 둘 뿐인데, 이제까지 법운용이 분단휴전상태의 특수한 안보상황을 이유로 국방의 의무를 중시하는 관점에서의 일방 극단의 법해석이었다면, 적어도 양심의 자유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관점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반대방향의 극단, 즉 ‘양심상의 결정’을 ‘정당한 사유’에 해당되는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것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헌법의 통일성을 중시하는 이른바 ‘규범조화적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양 극단의 관점은 선택의 대안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타협의 한계점, 즉 배제의 기준으로 주어져 있다. 따라서 이 양 극단의 관점에 따른 법률해석은 헌법의 통일성을 무시하였다는 점에서는 달리 평가되지 아니한다.
다만 양심상 병역거부를 인정하여 무죄로 판단하는 경우에 형평의 원칙에 위배되는 결과가 초래된다는 지적도 입법개선촉구의 논거로서는 몰라도, 처벌을 전제로 양심상 병역거부 자체를 부인해야만 하는 이유로서는 설득력이 없다. 대체복무제도 등의 형평을 맞추는 제도보완이 있기 전 까지는 일단 징역형이 형평의 수단으로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뒤바뀐 오류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균형성의 감각도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특수한 안보현실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무분별한 병역거부심리의 확산에 대한 우려도 신중하게 가늠 잡아야 할 중대한 문제이기는 하되, 다만 우리의 병력상황과 젊은이들의 의식수준이 일부 극소수의 동료 젊은이들의 고통을 덜어 줄 한 치의 여유와 유연성도 없다는 성급한 예단도 경계되어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양심상 병역거부자에 대하여 형사처벌과 무죄, 두 가지 대안 중에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불가피한 법해석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입법단계에서 예정 또는 용인된 것이다. 법적용상의 차별화를 통한 합리적인 문제해결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이 상태 그대로 가는 것도 용인될 수 없다면, 이러한 법상황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더 이상 미루어질 수는 없고, 그 선도(先導)의 책임은 온전히 의회에 있다. 상급심에서의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든 관계없이, 이미 ‘양심상 병역거부’를 인정한 단 한번의 하급심 판결만으로도 재론의 필요성 자체에 대한 공식적인 확증으로 충분하다.
여기에서 법관의 법형성적 기능의 한계나 법운용상의 기술적인 한계 등에 관한 상론은 약하되, 다만 양심상 병역거부의 문제는 사안의 본질상 법해석 내지는 개별 판결을 통해서 해결될 수도 없고 또한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이 문제에 대한 법리논쟁에서 양심실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의 근거로 또는 그것에 우선되는 헌법적 명분으로 국가안보상의 필요성 내지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가 제시되는데, 사실 이 문제가 법도그마틱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심리적인 갈등과 저항감이다. 말하자면 대체복무 등의 방법으로 유무형의 손익을 따져서 형평을 맞추는 식으로 해소되기 어려운 정신적인, 심리적인 요소가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양심의 자유를 지켜주는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생명을 버릴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희생과 봉사의 자긍심이 그것이다. ‘모두 같이 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기대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반발과 분노는 결코 그릇된 윤리적 풍토로 매도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계산과 논증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와 관용은 강요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성과 논리가 아닌 감성과 정념에서만 구해진다. 결국 상호 역지사지 연민의 감정과 관심을 공유하고, 대화의 마당을 여는 것이 문제해결의 시발점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의 결정을 용인하는 넉넉함을 보여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 번 시도해볼 만한 아름답고 멋있는 일이다. 이미 폭넓게 대체복무제를 시행하고 있는 대만이 우리보다 크게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지 않는가? 다만 멋과 아름다움은 우선 정치예술의 몫이다. 그것은 ‘논증의 원칙’이 적용되는 좁은 법도그마틱의 법정이 아니라, ‘합의의 원칙’이 적용되는 넓은 담론의 광장에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III. 맺는말
정치의 역할이 ‘타협이 필요한 때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타협이 불가능할 때에는 그것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방안을 찾는 것’이라는 말을 빌리면, 양심상 병역거부의 현안은 타협을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유감스럽게도 문제의 성격상 타협을 불필요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은 찾기 어렵지만,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진지하게 재검토하여 타협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해명과 함께 이해를 구하는 애고(愛顧)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대법원은 물론이고,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타협 내지는 타협을 전후한 이 정치작업은 불가피하다. 다행히도 우리보다 앞서서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한 선례들이 있어서 제도적인 방안의 모색을 위해서 정치적 상상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담론의 마당을 마련하고, 건강한 토론을 선도하는 정치 본연의 역할이 기대되고, 요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