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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0일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베드 2,2-5.9-12
복 음 : 마르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며 시련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최약체 동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살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약함으로 인해 지금 인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형성했던 공룡, 맘모스 등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마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확장되어서,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통이 없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고통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검진 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운동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루 1시간 만이라도 운동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첫째 날 운동하기가 쉬웠을까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둘째 날, 온몸이 뻐근하고 힘듭니다. 그래도 버텨서 해 봅니다.
셋째 날, 작심삼일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요.
힘들어도 목표가 있으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멀고 힘들어도 점차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고통과 시련 너머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거부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의 목표인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시력을 잃어 사물을 보지 못하는 요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신부의 특별강론이나 강의가 있으면 녹음합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도 방송기기를 잘 다룹니다.
녹음하여 나눠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당의 자료정리를 위해서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강연이 있어도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를 합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을 뜨고 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압니다.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자료를 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뜬장님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는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간절히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항상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랑입니다.
죄를 저질러도 잘못을 가리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사랑을 갈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나를 어떤 모양으로 부르고 계실까? 누구를 통해서 부르실까?
아니 나를 불러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당시에 겉옷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신분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고, 밤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이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 가는 데 장애 되는 전 재산, 신분마저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겉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못된 습성,
높은 자리에 앉아 지배하고 대접받으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희생 봉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았으면 지체함 없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노숙자들을 만나보면 구걸하는 삶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 하고 말합니다.
연민에 갇힌 자신의 신분에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눈먼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야 영이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이며 소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영의 눈이 뜨여 볼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여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의 도움입니다”(27,8-9).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길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이는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이요,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 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 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성가 중에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오 크신 사랑
하늘 그보다 높고 바다 그보다 깊고 우주 그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최근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신기하고 놀랍다는 걸 새삼스럽게 체험했습니다.
‘시간에 묻힌 한 사제의 삶’이라는 책에서 책의 저자인 신부님은
1963년 군 제대 후에 이민을 고민하다가 여의치 않자, 성당의 신부님께 면담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고민은 3가지였습니다.
계속 이민 절차를 밟으며 기다리는 것,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는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의 이야기를 듣다가 청년의 고향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고향이 평양인데 징집되어 한국 전쟁에 끌려왔고,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석방되고 거처를 정한 곳이 청년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곳 정 부잣집에서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 집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아들이 자신의 둘째 형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에게 안수해 주었고, 하느님께서 청년이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청년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던 젊은이의 갈망을
하느님께서는 신비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젊은이가 신부님께 면담했든 1963년은 제가 태어나든 해입니다.
20년 후에 저는 그 신부님께 면담하였습니다. 저는 젊은이처럼 3가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제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영향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하셨고, 당시 잠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신부님과 면담을 한 후에, 다시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최 씨에, 곱슬머리에, 옥니를 가진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하는데,
신부님이 그 세 가지를 다 갖추었습니다.
신부님은 고집이 세시고, 강직하였지만 속 깊은 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오셨습니다.
임진강 매운탕을 드시면서 본당 사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기하고 놀라운 것인지,
저는 2007년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었고,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직접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고, 원로 사목자가 되어 은퇴하실 때는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계시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인도해 준 신부님이 저의 아버지 신부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2009년 신부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이렇게 제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은 흑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살았어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삶이라 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대가를 지급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 받아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르티매오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이제 한 분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인데, 어느 어두운 밤에 한 소경이 초롱불을 밝혀서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볼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다니느냐고 하니까,
그 소경은 하는 말이 나는 소경이지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초롱불을 보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간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려고 하고,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믿음의 수준은 무엇까지 희망할 수 있는가?’로 알아볼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자비를 청한다는 말은 이미 자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희망하는 능력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희망한다고 다 희망이 아닙니다.
희망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육체와 머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위협이나 나의 생각이 그 희망을 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목숨을 걸 수 없으면 희망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은 말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희망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그 희망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이 브라유는 세 살 때 사고로 실명을 하였지만,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과 빛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의 삶과 점자 발명의 과정은 희망과 인내의 진정한 본보기입니다.
루이 브라유는 1809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쿠브레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마구를 만드는 가죽 장인이었고, 루이는 종종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 살 때, 루이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가죽 송곳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여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감염이 반대쪽 눈으로 퍼져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루이의 부모와 본당 신부는 루이를 보통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루이도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학교에서 안 받아들여 줬지만, 루이는 결국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로얄 인스티튜트 포 블라인드 유스(Royal Institute for Blind Youth)에 입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시각장애인들이 학습할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들은 글자가 양각으로 되어 있어 한 손으로만 읽어야 했고,
크고 무거워서 매우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루이는 이러한 한계를 느끼며 시각장애인들도 효율적으로 읽고 쓰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1821년, 프랑스를 방문한 군인 찰스 바비에(Charles Barbier)는
야간 전투 중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던
‘야간 문자(night writing)’라는 체계를 루이의 학교에 소개했습니다.
바비에의 체계는 12개의 점을 이용하여 소리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으나, 복잡하고 사용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루이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는 이를 바탕으로
더욱 단순하고 효율적인 점자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루이는 바비에의 체계를 개선하여 6개의 점으로 구성된 점자를 고안해 냈습니다.
이 점자는 각 문자를 쉽게 읽고 쓸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1824년, 15살의 나이에 루이는 자신의 점자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점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시스템을 받아들이기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루이는 자신의 발명을 널리 알리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는 점자 체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음악 기호와 수학 기호도 개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점자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이 독립적으로 학습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점자 체계는 결국 1854년, 루이가 사망한 지 2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루이 브라유는 두 눈을 잃고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꿈을 품었습니다.
이는 하느님 자비의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의 행위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믿음과 희망이라는 두 날개로 위로 솟아오릅니다.
구원은 무엇에 의해 이뤄질까요? ‘믿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생존하려고 선악과를 바치지 못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백성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더 위대하고 영적인 것을 갈망하라고 말합니다.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 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순수한 젖이란 엄마의 살과 피입니다. 곧 우리에겐 성체성사가 됩니다.
하느님의 진짜 자녀, 곧 자신도 하느님이기에 불가능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원하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는 마치 넬슨 만델라처럼, 아니면 위 루이 브라유처럼
절망의 상황에서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을 희망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을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매일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넬슨 만델라는 희망을 위해 27년간을 쉬지 않고 준비했다고 말합니다.
매일 운동하고 공부하였습니다. 우리 하루하루의 삶도 믿음이 있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바르티매오는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가문의 사람으로,
눈이 먼 채 주저앉아 구걸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되어 버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타락한 인류의 비참하고 무력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예리코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갔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은총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초대와 약속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하에 따라 생명이나 죽음이냐가 갈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것이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혀 주었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잘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신 분을 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인 우리의 묵은 나를 떨쳐버리고
빛을 선택하여 빛이신 그분을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영적으로 승화케하는 우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하는 여러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는
베드로 서간의 말을 들으면 즉시 클라라 성녀가 떠오릅니다.
클라라 성녀야말로 바로 그런 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죽고 난 뒤 그녀는 환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계단 밑에 있고 프란치스코는 계단 위에 있는 환시를.
그래서 그녀가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 프란치스코에게 가니
프란치스코는 그녀에게 자기 젖을 내밀며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젖을 먹으니 너무도 달콤하여 거듭해서 먹었고 먹은 다음엔
그 젖이 그녀의 입술에 계속 남아있는 그런 환시였습니다.
여기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으로서 프란치스코는 죽어 천국에 있지만
클라라는 아직 계단 밑 곧 지상에 있었으며
쏜살같이 계단을 오른 것은 프란치스코가 있는 천국에 빨리 가고 싶은
클라라의 열망이랄까 갈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이 환시를 볼 당시 클라라는 영적인 시련이 엄청나게 클 때였습니다.
프란치스코를 통해 받았던 영적인 위안이랄까 힘이 끊긴 상태인데다,
남은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코의 영적 유산을 놓고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었고
영적 형제들은 클라라가 대신 영적 지도자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지요.
그러니 영적인 시련과 고독만큼 영적인 위안과 힘이 그녀에게 필요했던 시기였고,
당연히 오늘 서간이 얘기하는 그 영적인 젖에 대한 갈망도 컸던 시기였지요.
사실 우리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바엔 영적인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세상 어려움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을 영적으로 바꿔야 신앙인입니다.
예를 들어 병이 들어도 그것을 병고가 아니라 영적 시련으로 바꾸고,
갈등이 있어도 인간적 갈등에 머물지 않고 영적 갈등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병이 있으면 병만 마주하지 않고 클라라처럼 시선을 위로 돌려 하느님과 마주하고,
갈등이 있으면 그 갈등을 그 인간과의 사이에 두지 않고 하느님 앞에 놓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자하심 안에서 그 병과 갈등을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서일까 베드로 서간은 이미 맛본 하느님의 인자함을 향해 나아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 서간은 주님이 인자하신 분이라고 얘기하고
이어서 주님은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하며 우리도 살아 있는 돌이 되라고 합니다.
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소중한 돌과 나뒹구는 돌,
디딤돌과 걸림돌,
산 돌과 죽은 돌.
우리는 병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디딤돌 삼아 하늘로 오르고,
사람들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며 하느님께 오르며,
나도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줘야 합니다.
우리는 병에 걸려 죽고 넘어져 죽어 죽은 자들,
곧 죽은 돌들이 널브러져 있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함으로써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되어
곧 살아 있는 돌들이 되어 주님의 성전을 짓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