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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Scene 16. The Seal /봉인/
"어떻게 되가고 있지?"
담담한 듯 하지만 확실히 어떤 격정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렌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르나스 후작이
서 있었다.
대리석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의 눈동자는 말을 건 렌
이 아니라 렌 너머로 보이는 안개 같은 환영들을 향해 있었다. 렌은
조용히 대꾸했다.
"계획대로."
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동굴은 안개같기도
하고 혹은 꿈틀거리는 연체생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어떤 것이 천정까
지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그 앞쪽은 무엇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
지만 그래도 이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목적하는 곳 까지는 갈 수 없다.
그곳까지 가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카르나스는 그런 렌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채 몇발자국을 옮기지 못하고 그는 렌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열쇠는……"
렌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어떻게 할 거죠?"
카르나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렌도 천천히 카르나스를 향
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동굴안에 울려퍼졌다.
"이곳을 전부 통과한다고 해도 어차피 열쇠가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 계획을 맞추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카르나스는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에 마치 주변이 환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였지만 렌에게는 오히려 눈쌀을 찌푸리게 했
다.
"티에라는 반드시 온다. 너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나중의 염려가 아니
라 당장 이곳을 돌파하는 일이다. 렌."
카르나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렌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반드시라……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죠, 카르나스?"
카르나스의 발걸음이 다시 한번 멈췄다.
"이것들도 그래요. 도대체 이런 정보들을……"
렌은 손에 들고있던 종이들을 카르나스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점점 커지는 목소리
와 함께 카르나스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어떻게 손에 넣은 건가요? 대답을 해 봐요. 카르나스 페루시오. 나에
게 할 말이 없나요?"
"할 말이라……"
카르나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빛이 뿜어나오듯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내게 할 말이 없나? 렌 마이야. 지호 티에라의
일 말이다."
"나, 나는……"
렌은 카르나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카르나스의 입가
에 마치 비웃음처럼 가는 미소가 걸렸다가 곧 사라졌다.
"티에라는 이곳에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가 오면 너에게 마지막 기회
를 주겠다. 렌 마이야."
렌의 커다란 눈이 카르나스를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의혹으로 물들
어 있었다.
"티에라를 얻어라. 아니면 그를 죽여라. 만일 네가 그를 얻지도, 죽이
지도 못한다면 내가 직접 죽이겠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알았나?
렌 마이야."
그 말을 끝으로 카르나스는 몸을 홱 돌려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넓은
동굴에 울리던 카르나스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점점 사라져 가자 렌의
얼굴에는 복잡한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를 죽인다고? 카르나스가, 직접……
불현듯 그녀의 눈 앞에 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이 피
로 물드는 모습이 상상되며 렌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짓
눌린 입술이 파랗게 되어갔지만 렌은 깨닫지 못했다.
그럴수는, 그렇게 놔둘 수는 없어.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들려있던 종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렌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상한 안개
같은 것을 노려보았다. 기분나쁘게 일렁이며 꿈틀대는 것 같기도 한
짙은 안개가 그녀의 눈 앞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고 있었다.
* * *
달칵.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럽게 장식이 된 문은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문을 연 지호 앞에 커튼으로 강한 햇살을 가린 부드러운 빛이
감도는 고급스런 실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호의 시선은 방안
의 장식보다는 침대 위에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리니아에게 가 닿고
있었다.
"상태가 좀 어떻습니까?"
침대 옆에서 리니아를 진찰하고 있던 의원은 지호의 물음에 고개를 들
었다.
"조금 피를 흘리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
만 한동안은 안정이 필요합니다. 평소에도 조금 무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푹 쉬어야 할겁니다."
의원은 옆에 서 있던 하녀에게 무언가 지시를 한 뒤 짐을 챙겨서 일어
났다.
"일단 환자에 대한 것은 에드워드 도련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다
른 환자들은 어디에 있죠?"
의원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옆에 있던 하녀였다. 의원은 하녀의 대답
을 듣고는 짐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갔다.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치우고
있던 하녀마저 나가자 방 안에는 누워있는 리니아와 지호만이 남게 되
었다.
지호는 잠든 리니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의식해서인
지는 몰라도 리니아의 얼굴은 꽤나 수척해 보였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금방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꽃잎처럼. 그녀의 얼굴위로 파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던 아까의 모습이 겹쳐졌다.
리니아, 도대체 왜……
달칵
지호의 생각은 뒤에서 들린 문 여는 소리에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지호는 고개를 돌렸다. 휘슬과 에드워드가 막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
다.
"어이, 조장. 아가씨는 괜찮소?"
휘슬의 말에 지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휘슬은 괜찮소? 다친데는……"
휘슬은 붕대를 감은 자신의 팔뚝을 힐끗 쳐다보고는 씨익 웃었다.
"이 정도야 뭐 긁힌거나 마찬가지지. 이따가 술이라도 한잔하고 푹 자
면 싹 나을걸."
"칼을 맞고도 술이라니. 죽으려고 작정을 했군."
에드워드가 한마디 했지만 휘슬은 여유만만했다.
"뭐, 이몸은 나약한 귀족 기사 나으리하곤 달라서 말야."
에드워드의 눈쌀이 찌푸러졌다. 휘슬은 일부러 딴청을 피는 척 하며
에드워드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는 지호의 입
가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대 귀족가의 도련님인 에드워드에게 일개 용병따위가 저런 식으로 말
을 거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휘슬이 넉살이 좋
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에드워드 쪽에서 받아들여 주지 않
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몇 년간의 용병 생활이 에드워드의
기사도로 뭉친 신념 가운데 어떤 변화를 가져온 것 만은 분명한 것 같
았다.
지호는 에드워드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다친 사람은 괜찮소? 에드워드."
"아, 지금 상처를 돌보고 있소. 중상인 사람들도 있지만 생명에 지장
이 있을 정도는 아니오. 그보다 이 정도로 쉽게 그 녀석들이 물러간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오."
"뭐, 다 이 휘슬님이 팔에 검을 맞아가며 분투한 결과 아니겠어?"
휘슬의 말에 에드워드의 눈꼬리가 꿈틀했지만 그다지 반박하려는 기색
은 없었다. 확실히 검은 그림자들이 만셀가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시
작했을 때 휘슬의 활약은 괄목할 만 했다. 결국 검은 그림자들에게 특
별히 타격을 준 것은 없었지만.
"그나저나 그 놈들, 왜 왔던거지? 거기다 제국 제3 기사단장이나 되는
녀석이 그런 정체불명의 떨거지들을 달고 말이야."
휘슬의 말대로였다. 분명히 그들의 공격이 매섭기는 했지만 조금 전투
가 진행되자 그들은 의외로 쉽게 물러나 버렸다. 아마 그들이 정말로
공격을 계속했다면 아무리 경비대가 있었다고는 해도 만셀가의 피해는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나 때문인 것 같소."
지호의 말에 에드워드와 휘슬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안하오, 에드워드.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만셀가가 피해를 입게 되
었으니……"
지호는 에드워드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에드워드는 의아한 얼굴로 반문
했다.
"그게 무슨…... 잠깐, 그럼 혹시 일레인에 관련된……"
말을 하던 에드워드의 안색이 변했다. 그의 생각으로 제국 기사단장이
관련될 만한 일이라면 지금 재상의 명으로 움직이고 있는 일레인과 관
련된 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오. 그들은 나를 원하고 있소. 에드워드, 미안하지만 리니
아를 좀 돌봐주시오."
지호의 얼굴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굳어졌다. 그때 옆에 있던 휘슬이
끼어들었다.
"이봐, 조장.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그러니까 결국 조장을
끌어내려고 그놈들이 왔다 이거 아냐? 그럼 그런 수상한 놈들이 부른
다고 냉큼 가면 어떡해? 분명히 무슨 함정같은게 뻔하다구."
"그래도…… 가야하오."
훗. 뭐 오건 말건 그건 네 자유지만 말야.
지호의 귓가에 지크힐트의 비웃는 듯한 음성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안오면 죽게 된다고. 그 마녀께서 말야. 큭큭, 이거야 말로 희극이군
그래. 마녀를 구하는 기사님이 되게 생겼으니. 안 그래?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지크힐트가 말하는 마녀라면 렌 밖엔 없었다.
카르나스가 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지호는 예전에 카르나스가 '스승 엘윈을 죽인 자의 목숨을 언제라도
내어 주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그 사람이 렌인줄 알았
다. 지금은 카르나스가 언급한 사람이 지크힐트라는 것을 알았지만 결
국 카르나스는 언제든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의 목숨을 내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렌을 죽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이유가 바로 지호 자신 때문이라면 더 더욱.
"무슨 일인지, 말해줄 수는 없소?"
에드워드가 물었지만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을
자신의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지호가 거부하자 에드워
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말이라도 준비하도록 하겠소. 혹시 더 필요한 건?"
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으로 충분하오. 고맙소, 에드워드. 그보다 곧 출발하고 싶
은데…… 되겠소?"
"알았소. 그리고 이 아가씨는 지호님이 돌아올 때까지 잘 보살필 것을
약속하겠소. 그럼."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방 밖으로 나갔다. 휘슬도 지호의
얼굴을 보고는 조금 뚱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뭐, 알고도 가는 거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죽지 말고 살아
오슈.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같이 합시다, 조장."
휘슬은 아직도 지호를 조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경
비대 소속도 아니지만 아마도 휘슬의 '조장'이라는 호칭에는 나름대로
의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에드워드도 여전히 지
호를 '지호님'이라고 부르며 반 존칭을 붙이고 있었다. 아마도 몸에
밴 기사도 정신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휘슬이 방을 나가며 문을 닫자 다시 방 안에는 잠들어 있는 리니아와
지호만이 남게 되었다. 지호는 잠들어 있는 리니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지호는 방을 나서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지호의 귓가에 가느다란 음성이 들렸다.
"지호……"
"리니아!"
지호는 급히 리니아에게 다가갔다. 리니아는 고개를 돌려 지호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언제 깼어?"
"조금 전에."
리니아는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젠……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고마워, 지호."
"아, 아니 뭐……"
생각해보면 지호는 리니아를 다시 만났을 때 꽤 쌀쌀맞게 대했다. 여
기까지 오면서 조금 친해지기는 했지만 그동안 리니아가 계속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게 왠지 미안하게 여겨졌다.
"겉으론 냉정한 척 했지만, 지호는 늘 좋은 사람이었어. 나에 대한 그
런 소문을 들었을 텐데…… 한마디도 묻지 않고 편하게 대해줬지. 고
마워, 지호."
지호는 문득 리니아에 대해 마을에 돌았던 소문들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리니아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말했던 대로, 리니아에 대한 소문은 전혀 사실과
달랐다. 대체 왜 그런 나쁜 소문이 돌게 되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리니아의 말에 지호는 더욱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사실 지호가 그런
소문에 대한 것을 물어보지 않은 것은 리니아의 기분을 배려했다기 보
다는 단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물어봤을지도 몰랐다.
"미안해. 지호는 나한테 잘해줬는데, 그런데……"
갑자기 리니아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간신히 뜬 그녀의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있었다.
"나 때문이야. 마을이 불탄 것도, 지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그
리고 오늘 일도……"
"그렇지 않아. 리니아. 그건……"
리니아의 말에 지호는 무언가 설명을 하려 했다. 그러나 지호의 말은
리니아의 이어지는 말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내가 티에라야. 리니아 티에라. 불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