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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일 토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유다 17.20ㄴ-25
복 음 : 마르 11,27-33
그 무렵 예수님과 제자들은 27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28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31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32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33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캄보디아의 독재자, 학살자, 일명 ‘킬링필드’로 불리는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20세기 세계사를 넘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최악의 학살자라고 불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캄보디아 전체를 문자 그대로 황폐화한 최악의 독재자로 손꼽히는
이 인물은 바로 ‘폴 포트’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대학살극을 벌입니다.
4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최소 1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사람들이
‘폴 포트’의 학살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명령한 사람 중에는 안경 쓴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안경을 착용한 사람들은 지식인 계급, 부르주아, 그리고 농민의 착취자라는 이유였습니다.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해 이들은 모두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안경 쓴 저도 그 당시에 캄보디아에 있었다면 사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엄청난 학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나의 이웃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렸다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 참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으며 홀로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절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너무나 많은 부분에서 내가 틀렸습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르는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겸손의 덕으로 자신을 무장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든 이가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물었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유일하게 권한을 지닌 이는 대사제밖에 없었지요.
대사제는 하느님께 권한을 받아 백성을 대표하고,
백성 앞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한을 받으셨다고 답하시면,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과 그를 대신하는 대사제를 모독하는 행위가 되고,
대사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면
이 권한은 부정한 권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은 틀렸다는 단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틀렸다는 가정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역시 ‘틀렸다’라는 단정을 너무 많이 합니다.
이런 단정 안에서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존경받는 것은 아닙니다.
옳은 말이지만,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자기의 기득권이나 권위를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존경받기보다 미움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이 뭔데 쓸데없이 나서서 나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냐?’는
마음을 지닐 때가 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수석 사제들은 ‘하늘로부터 온’ 율법에 의해
‘이 땅에서’ 합법적으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받고 그곳에서 성행하는 장사꾼들을 이용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11,1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확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바르고 옳은 말씀을 하셨지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찾았습니다(마르11,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11,28)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하고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을 참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 앞에서 그의 권위를 깡그리 부정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요한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아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진 그들은 “모르겠소” 하는 핑계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암시하면서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11,33).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에게 아무리 얘기해 봐야 엉뚱하게 받아들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과 그대로 행하려는 실천의 의지가 없으면
하느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은 대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굽으면 큰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때를 기다리시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대로 사시면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당신이 무엇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내리길 기대하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주님께서 삶의 모범으로 보여주신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깊은 침묵으로, 때로는 인내의 행동으로,
때로는 불이익과 미움을 감당하면서 믿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응답하고 그 권위를 증언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후 성전 뜰을 거닐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28)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마르 11,30)
역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저울’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나의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하고, 진실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 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봅니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자칫 제 자신이 저울질당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자신의 속셈을 들여다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르 11,28)
주님!
타인에 대한 나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타인을 저울질하기보다, 차라리 제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숨은 속셈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댈러스에 와서 뉴욕 면허증을 텍사스 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타주로 이사 가면 운전면허증을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나라이니까 그냥 바꿔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먼저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했습니다. 예약을 하는데 90일 정도 밀려있었습니다.
예약하면 이메일로 확인 서류를 보내줍니다.
서류에는 면허증 갱신 장소, 예약 번호, 준비물이 있습니다.
준비물에는 기존 면허증, 소셜 번호, 그린카드 혹은 비자, 살고 있는 곳이 표시된
페이퍼(은행 잔액 증명, 핸드폰 요금 고지서 등등), 차량 보험 서류 등이 있습니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바코드를 찍거나 예약 번호를 입력하면 대기 번호가 나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양식을 기재합니다.
인적 사항을 적고, 건강 상태에 대한 물음에 예스나 노로 표기합니다.
기존 면허증에 대한 것도 기록합니다.
유효기간, 생년월일, 키, 몸무게, 눈 색깔, 머리 색깔 등을 적습니다.
적성검사를 위한 양식도 기재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대기 번호를 부릅니다.
창구에 가면 직원이 서류를 검토하고 잘못 기재 했거나 미진한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고칠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간단히 시력 검사를 한 후에 사진을 찍으면 임시 면허증을 발급해 줍니다.
30$ 정도의 수수료를 내면 운전면허증 발급 작업이 끝납니다.
쉬운 것 같지만 처음 하면 긴장됩니다. 그런데 전 ‘사제찬스’가 있었습니다.
저의 성직자 복장을 본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자기도 신자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성당 이야기도 하고, 신앙 이야기도 하니 분위기는 편안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어도 최대한 가능한 방법을 찾아주었습니다.
제가 실수로 잘못 적은 곳도 친절하게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30분 만에 운전면허증 발급 절차가 끝났습니다.
직원은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직원 중에서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감사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하늘나라에 가면 어떻게 될까?”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사도가 신앙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사제의 직무에 성실했던 사제들도 기쁘게 맞이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세례 때 ‘인호’를 받았으니,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곳에서도 친절하게 안내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톨릭신자를 만나서 친절하게 안내받았지만,
꼭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지 못했으면
새로운 운전면허증 발급은 어려웠을 겁니다. 절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면허증, 소셜 번호, 비자나 그린카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제가 댈러스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서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신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봐줄 수 있겠지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는 서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보물을 쌓지 말고,
영원히 좀 먹지 않는 하늘의 창고에 보물을 쌓아야 한다.”
우리가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할 보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자캐오처럼 회개하고,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어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베드로 사도는 언제든지 천국 문을 활짝 열어줄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권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권한은 능력, 재력, 권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조직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재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한없이 약하고, 순결하신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겸손함과 정결함, 순수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참된 신앙의 길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한 구원자이시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이였으며,
그분의 권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또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구원자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나름 어깨 힘주는 분들 모인 한 단체에서
저를 강의에 초대하면서 엄청 꼬치꼬치 묻더군요.
신학교 외에 어느 대학, 어떤 분야를 전공했는지?
유학은 어떤 나라를 다녀왔고, 취득한 학위는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디서 가르쳤는지?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습니다.
몸도 좋지 않아 성적도 언제나 바닥이었으며, 유학이라고 몇 년 다녀왔지만,
배운 바가 거의 없는, 정말이지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초대 계획을 취소하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취득한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리로 몰려가는 군중,
당대 유다 세력가들을 너무나도 당연히 경계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뒤를 캐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가문 출신인가?
어디 율법학교를 졸업했는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교수 자격증은 취득했는가?
알아봤더니, 웬걸, 예수란 인물은 깡촌 중의 깡촌 나자렛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무학력자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는 율법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때 예수님은 기가 막힌 역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로 그들의 말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명망과 인기와 인지도는 전 국민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 하늘로부터 온 하느님의 전령이자
구약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예언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백성들의 불신과 공분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늘에게서 온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진정성이 없었으며 다분히 계산적이었습니다.
질문다운 질문이 아니고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정치적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답(無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당시 영적으로 무지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라는 사실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언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것이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권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온 권한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권한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권한은 사람들을 내리누르기 위한 권한,
코너로 몰아붙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사람을 격려하는 권한입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살리는 권한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조욱현 토마 신부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28절)
이런 일이란 성전 정화 사건이지만,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그리스도교계의 주장에 대해
유다교의 지도자들이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즉 합법적인 근거의 제시를 요구하여 그 답변에 따라 예수님을 반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그들을 당황케 하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30절).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에게 허점을 찌른 질문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군중들의 돌팔매질이 두렵기도 했지만, 진실을 인정하기가 더 두려웠던 그들은
진리이신 분께 거짓말로 대답했다.
“모르겠소.”(33절) 아는 것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그들 스스로 문을 닫았기에,
주님께서도 두드리지 않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도 그들의 위선적 태도에 대해 ‘대화의 단절’을 선언하신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33절).
자기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여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 앞에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소경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진정한 신앙보다 자신들의 우월감과 홀로 잘살고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예수께서는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확실히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유다인들처럼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이 명하신 계명과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분을 닮기 위하여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또한 모든 이를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과 같이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지혜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실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혜롭게 답하시면서 유다인들을 당황케 하시는 것은
당신 안에 항상 성령과 함께하시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령과 함께하는 삶이란,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맺으신 ‘관계’ 안에 사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관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성령 안에 머무는 것이다.
즉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인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지혜 자체이신 분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과 진정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도 그러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지혜는 하느님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도 드러낼 수 있다.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11,28)
오늘 복음에 보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하는 것이오?”(11,28) 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던진 그들처럼 오늘을 깨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결은 다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 권위가 도전받고 참 권위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따르면,
사람들은 누군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느끼게 되어 복종하게 되는데,
이같이 어떤 지시가 복종 될 가능성을 지배domination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배의 핵심적인 원천이 권한(권위) authority인데,
이러한 권한은 보편적인 가치 체계를 지닌 그것의 사용을 합법적으로 허락할 때 발생하게 됩니다.
첫째, 전통적 권한 Traditional Authority (=영원한 어제의 권위)으로,
현재의 사회질서가 신성하고, 그 질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 는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지위, 계급, 전통, 관습이나 문화적 유산에서 비롯합니다.
둘째, 법적, 합리적 권한 Legal-Rational authority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법, 제도, 계약 등 공시적 규범의 신성성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권한으로,
법률이나 규정에 따라 권한이 부여되며, 선거 등으로
뽑힌 사람이나 조직의 공식적 직위를 부여받은 책임자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 카리스마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비범하고 개인적인 은총)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개인의 비범하고 초인적인 힘이나 영웅적인 힘에 대한 애착에 기초한 권한으로,
여기서 카리스마는 기적을 행하거나 미래의 사건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이
‘하늘이 내려 주신 재능’이라고 정의합니다.
막스 베버는 권한(권위) 이론에서 전통적, 법적 합리적 권한을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성, 그리고 감성 등을 억제하는 주 원천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항하는 다른 형태의 권한으로 카리스마적 권한을 제시하였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권한은 당대 사람들에게나 현대인에게
베버가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살면서 깨닫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 보이는 기미를
전조前兆 현상이라고 표현하듯이,
유다 지도자들과 권한 논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오늘의 전조였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권한과 권위에 위협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블랙리스트의 제거 1순위에 오른 분이셨잖아요.
그런 그분이 자신들의 텃밭에서, 나오바리(=마당)에서 난데없이 공개적으로 성전에 나타나셔서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시고,
너희는 기도의 집인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1,15.17참조)라고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곧 율법에 근거해서 합법적으로 ‘성전세’를 포함해서
성전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던 그들에게는
성전에 관한 확고한 기득권과 권위에 심각한 도전과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다,는 표현처럼 그들은 선제공격의 차원에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11,28)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한 밑바닥에는 상실한 권위에 대한 자기방어 차원과 함께,
예수님의 권위를 묵살하려는 의도에서 어떻게라도
예수님의 답변에서 시비와 꼬투리를 잡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사악한 질문 의도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선문답하시듯, 그들의 허를 찌르듯,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11,30)라고,
오히려 대답을 대신해서 난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참으로 장군에 멍군으로 응수한 절묘한 한 수, 기발한 묘수이지 않나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처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 고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고도 말할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
즉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자신들의 믿음이나 신념, 진리보다는
대중의 시선 곧 백성의 민심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습니다.”(11,33)
그들의 대답에 대응하여 예수님 또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11,33) 하고 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누누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5,17,19)라고 말씀하셨지만,
마음이 닫히고 굽은 이들에게 牛耳讀經(=쇠귀에 경 읽기)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태 13,9)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