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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9. 유낙준주교.
3-3. 낭만과 선배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로마 12:15).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 하지 마십시오(로마 12:16). Be happy with those who are happy, weep with those who weep. Have the same concern for everyone. Do not be proud, but accept humble duties. Do not think of yourselves as wise.”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저는 낭만을 좋아합니다. 현실을 살면서 낭만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철이 들면 낭만에서 벗어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꼭 지켜야 하는지 잠깐 의문을 가져 봅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낭만입니다. 기뻐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무게잡고 있는 현실이 우스운 것이지 기뻐하는 것이 당연히 인간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우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우는 게 낭만입니다. 우는 사람 앞에서 계산을 하며 무게를 잡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뻐할 때 기뻐하고 울 때 우는 사람이 바로 낭만을 가진 사람이라면 저는 여전히 낭만으로 살고자 합니다. 낭만으로 만나는 선배들이 있어서 제가 살았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으로 화답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삶입니다. 기뻐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움트는 시기와 질투로 만끽할 수 있는 기쁨을 작아지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죄다 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시기와 질투로 인해 모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안에서 진짜 기쁨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기본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웃는 사람에게 진심을 담고서 자연스럽게 웃는 것은 최고의 사람만이 지닌 삶의 태도로 보입니다. 그렇게 낭만으로 제 앞길을 인도해 주신 선배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된 것입니다.
번잡스럽고 아픈 세상에서 낭만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번잡스럽고 아프고 슬픈 세상에서 괴물 인간이 되는 것이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괴물이 되는 것을 포기하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인간이 괴물보다는 인간이 되길 바라니까요. 우리에게 다가서는 모든 일들에서 인간으로 존엄을 받기 원하니까요. 인간에게 존재하는 존엄을 안전하게 안내받을 때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우리가 모든 일들에서 인간으로 존엄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비밀로 숨기는 사회에서 솔직 담백해질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번잡스러워질수록 세상은 존엄이 흐르는 낭만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싸움이 일어나고 재앙이 일어나는 세상일수록 인간의 존엄이 더 지켜지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괴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인간으로 만들어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성정을 넣어 주셨기에 우리가 괴물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존엄을 지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받아들이려면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의 온전한 기쁨으로 화답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내 안의 시기와 질투로 반응하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는 증거로 보고 남이 보이지 않는 오밤중에 자신의 등을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채찍질이라도 하여 시기와 질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보다도 훨씬 나은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런 존엄이 흐르는 낭만적인 인간으로 사는 안내를 제게 가르쳐 주고 깨우쳐 준 선배들이 낭만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강자를 중심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세상의 대다수입니다. 하지만 약한 자를 중심으로 세워지는 공동체가 세상의 흐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교회는 약한 자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세우는 곳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모인 족속을 합비루라 하였고 이들의 공동체의 연륜이 쌓여 히브리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약한 자들의 선택하여 약한 자들의 하느님, 즉 히브리인들의 공동체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강자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인 세상과는 다르게 하느님은 약한 자들의 공동체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는 그곳을 교회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존엄을 지키는 성공회는 달동네로 들어가 괴물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 나눔의집을 교회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이 인간의 자비인 작은 손바닥 안으로 모든 사람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작은 자의 자비심에 큰 자신의 삶을 맞추는 것이 예수이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구세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를 본받는 삶이 성공회 나눔의집이라고 자신을 소박하게 표현하며 청년들이 달동네로 들어가 살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청소년들을 만나고 학생들과 함께 먹고 함께 걸으면서 함께 세상을 만나고자 한 것이 나눔의집의 길위학교입니다.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더 많은 달동네에서 기쁨의 공동체로의 성공회 나눔의집은 약한 자의 기쁨을 기쁨으로 맞이한 것입니다. 물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은 늘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자동네는 자연사로 죽겠지만 달동네는 사고로 죽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달동네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북받쳐 흐르게 됩니다. 서러운 눈물의 공동체가 실제적인 나눔의집의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러운 눈물로 기도를 바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지잘났다고 지자랑하는 교회는 부자동네에 있는 교회서 벌어질 일들입니다. 너무 서러워서 이름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라는 글로 써서 액자에 걸어 놓은 나눔의집이었습니다. 지금도 너무 서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나 하느님의 도우심이 가장 필요한 곳입니다.
내 중심으로 살면서 드러난 나의 괴물은 진짜 괴물입니다. 어두운 광기가 나를 지배하면 충혈된 붉은 눈으로 변합니다. 그리하여 어둠 속을 헤쳐다니면서 불확실과 불균형의 가시나무들이 내 온몸을 찔러 핏발이 선 핏줄에서 피가 솟구치기도 합니다. 폐허 한복판에서 괴물로 복잡하게 얽힌 삶을 풀어가는 나눔의집은 드러난 세상에서 미확인 인종을 만나는 곳입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울면서 확인된 인종으로 함께 살아 이 세상에 드러난 사람으로 살게 하는 성공회입니다. 나눔의집 식구가 되는 것이 곧 성공회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으로 낭만사회는 만들게 된 것입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더 큰 지평을 여는 하느님과의 여행을 가는 사람도 보여 더 기쁘게 되었습니다. 권력형의 사람들은 늘 성공회를 이용하고 활용하다가 버리는데 익숙한 사람들임을 늘 알면서도 도와달라고 하면 늘 함께 하는 성공회입니다. 성공회는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 나라를 꿈을 꾸는 교회이기 때문에 정직한 사랑의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다시 시작합니다. 인간의 차별을 확고하게 하는 사회 속에서 정열적인 확고한 크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서 움직이는 성공회 나눔의집입니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마태 20:26)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27).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If one of you wants to be great, you must be the servant of the rest; and if one of you wants to be first, you must be the slave of the others – like the Son of Man, who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to redeem many people.” 악마에 빼앗긴 많은 사람들을 도로 찾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아 미확인 인종인 버려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고자 달동네로 들어가 성공회 나눔의집입니다. 예수의 삶이 멋있고 예수의 삶이 좋아서 예수를 본받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성공회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것이 배재고등학교 설립말씀이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네 가지의 길을 제시한 것이 눈이 들어왔습니다. 예배 Leitourgia, 섬김 Diakonia, 교육 Didache, 친교 Koinonia입니다. 미국 뉴욕교구의 신알랜주교의 할아버지가 배재고보의 교장선생님이셨고 김성수주교가 그 당시의 그 학교 학생이었다 합니다. 이 학교의 네 가지의 길이 성공회 나눔의집의 사목활동인 기도와 섬김, 배움과 성사와 같습니다. 나눔의집 사제와 활성가들은 교만한 마음을 품을 수가 없고, 비천한 사람들을 차별없이 만나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아야 달동네서 살수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너무 젊어서 이상주의자가 되어 황홀경에 빠져 헤매기도 했지만 성공회 사제가 갖는 균형감각을 가지고 하느님을 매일 경험하는 가난한 나눔의집 사제로 산 경험은 영적으로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송경용레오나르도신부, 김홍일암브로스신부 등 좋은 동료사제를 하느님이 제게 보내 주셔서 길잡이가 있어서 더 고생할 것을 그들보다 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목활동 중에 떼기장 쓰는 사람을 만나면 꼼싹달싹을 하지 못하는 저를 움직이게 만들어 주신 선배입니다. 나눔의집 사목활동을 먼저 경험하셨기에 처음부터 하나씩 점검해주고 알려주고 저를 제워주시고 먹이고 돌보아주고 양육시켜주신 선배신부이십니다. 나눔의집의 사목활동을 하시면서 인간적인 고뇌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진일보 하신 선경험으로 이수상신부, 이재복신부의 영적인 삶은 제게 빛이었습니다. 제 손가락으로 남을 지적하면서 올라간 제 손가락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감아서 서서히 제 무릎 위로 내려놓게 하시고 아무 말을 하지 않으신 이재복신부이십니다. 사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숙고하게 하여 제게 늘 자극제로 사신 선배이십니다. 지방서 서울가면 딸이 쓰는 방을 제게 내주었는데 그 딸만 생각하면 눈물이 저절로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온 우리가 이미 이민자라며 이민자에 대한 깊은 이해로 널리 보편적인 인간의 존엄을 위해 달리신 이정호신부는 제 허물을 잘 덮어주신 분이십니다. 달동네에서만 지낸 제가 주교가 되니 교회사목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주교직을 수행하는 마지막 끝까지 교회사목에 대해 도움을 주시고 제 문제를 덮고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신 하느님이 제게 보내주신 전재식신부는 좋은 선배사제이십니다. 너무 커서 말씀을 드리기가 송구한 선배사제가 계십니다. 큰 스승이신 우덕기마가신부, 김장호요나단신부, 이재정요한신부, 박경조프란시스주교는 저를 하느님을 향하도록 빛이 되신 선배이십니다. 김성수주교, 정철범주교, 김근상주교의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제게 보여주셔서 제 길을 잘 찾게 해주셨습니다. 윤환주교, 신현삼주교, 권희연주교는 어려운 교구살림에도 하느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내는 삶을 보여주셔서 교구의 비젼을 세우는데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원로사제, 동무사제, 후배사제가 하느님의 길을 안내해주는 선배입니다. 성공회 신앙인인 신도들이 성공회의 대지로 하느님이 보내신 보석들이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빛으로 세상에 비치고 게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I am the light of the world. Whoever follows me will have the light of life and will never walk in darkness.” 가난한 시골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하시는 성공회의 젊은 사제들을 통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들이 제게 힘을 주신 분들이십니다. 돈도 명예도 다 아니고, 사랑은 영혼에 기대어 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공회 사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신앙의 선배 덕분에 아직도 낭만에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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