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신신애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노랫말 그대로,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였던 것이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로 유명했던 가수 정관태씨는 독도 명예 군수가 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노처녀로 지내다가 <만남>을 부른 노사연은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가수 박길라씨는 죽음을 암시하는 노래를 발표한 후, 첫 콘서트를 미치고 타계를 하였다.
내면의 힘은 그 가사 대로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애를 쓴다. 잠재의식의 힘은 무섭다.
<0시의 이별>을 부른 가수 배호는 0시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그는 젊은 날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린 것이다.
그는 <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광석은<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나서 바로 그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낙옆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던 가수 차중락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낙옆처럼 떨어져, 저 세상에 가버렸으며,
「간다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를 열창하던 선망의 젊은 가수 김정호는 20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
노래 가사처럼 진짜로 가 버렸으며,
<떠나가 버렸네>를 불렸던 가수 김현식도 역시 우리 주위를 영영 떠나가 버렸다.
<이별>을 불렀던 대형 가수 패티김은 작가 길옥윤과 이별했으며,
고려대 법대 출신의 가수 김상희는 <멀리 있어도>를 부르면서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몇 년간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가수 조미미는 35세까지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바다가 육지라면>이 히트되면서
재일 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60년대 말,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은 (가사 내용 :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 앉고
나 홀로 재생의 길을 걸으며 쓸쓸히 살아가네) 가사처럼 자궁과 위장에 암에 걸렸고
요양을 가게 되어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는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승처럼 쓸쓸히 살았다고 한다.
<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불교 포교사로 일하고 있다.
미국의 흑인 가수 투팩 샤쿠어는 자신의 노래처럼 13일 금요일에 죽었다.
그의 노래 중에서 빌보드 차트1위에 오른 앨범의 곡들은 모두 불길한 가사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내가 오늘 죽는다면>, <길모퉁이에 다가온 죽음> 등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일부러 부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결국 그는 노랫말처럼 갱에게 충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은 <사의 찬미>를 불렀다가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인수는 <눈 감아 드리리>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41세의 한창의 나이에 '눈감아 드리오니'의 노랫말처럼 일찍 눈을 감고 말았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숨졌다.
가수 양미란은 <흑점>이란 노래를 남기고 골수 암으로 숨졌다.
몇 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신세대 가수, 그의 노래 제목은 <내 눈물 모아>였다.
(가사 내용 : 창 밖으로 하나 둘씩 별빛이 꺼질 때쯤이면 하늘에 편지를 써 워~)
가수 박경애씨는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가 부른 노래가사에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이렇다. ...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아픈 사랑에 대한 기억을 가졌던 J씨는 주로 이별의 슬픔, 배신당한 사랑에 대한 노래였다고 고백한다.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이 없는 36세의 노총각 K씨는,
(피리 부는 사나이>, <떠나가는 배>, <잡초>, <불씨>, <오늘도 난>등과 같은 노래를 즐겼다.
모두가 혼자 가는 인생살이에 대한 노래였고 혼자 사는 외로운 남자들의 노래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난 뒤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바꾸려 했고,
<청혼가>, <일상으로 초대>, <사랑2>같은 노래를 불렸다.
처음에는 이런 시도가 익숙하지 않아 노래 부르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닐테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의 레퍼도리를 바꾼 뒤,
1년이 지나지 않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울한 편지>를 부른 가수 유재하는 교통 사고로 사망했고,
장덕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 하수영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김현식은 <이별의 종착역>, <떠나가 버렸네>를 부르고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들 노래의 가사 속에는 이미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름 모를 소녀>를 부른 김정호,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른 김현식 등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대부분 일찍 타계했다는 논문도 있다.
가수의 수명, 부, 즐거움과 노래 가사와는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장수하고
고통, 이별, 죽음, 슬픔, 한탄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시인 김소월...
그는 우리 민족최고 시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사용 하였던 시어들은 대부분 죽음, 그리움, 이별, 괴로움을 이루는 말들이다.
작품은 곱고 아름다웠지만 분명 그는 인생을 밝게 보고 살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과 슬픔을 친구로 삼았다.
평소의 사고 방식이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단순하고도 무서운 진리는
민족의 위대한 시인이라 해서 비켜 가주지를 않았다.
그가 비록 우리 시문학의 위대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고,
짧은 생애 동안 괴로움에 휩싸였던 것을 실제 생활을 통해 알 수가 있다.
1902년에 태어난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죽음의 일차적 원인이 자살이든 사고이든 그는 요절을 한 셈이다.
젊은 나이에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근본적 원인은 술도 아편도, 사업 실패도 아니었다.
그 해답은 그가 남긴 작품 속에 정확히 나타나 있다.
즉 끈임 없이 부정적 인생관을 그의 잠재 의식에 심어 놓음으로써
그의 운명의 끈이 그렇게 짧게 단축되었던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즉 부정적 생각은 공포와 함께 부정적 결과를 몰고 오게 되어있다.
김소월이 그 많은 시를 지으면서 그는 단번에 시한 수를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여러 번의 손질을 거쳐서 하나의 귀한 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에게는 부단히도 인생에 대한 슬픔, 분노, 회한의 감정이
그가 모르는 사이 그의 잠재 의식에 젖어 들었을 것이다.
한번 잠재 의식에 제대로 젖어든 의식 세계의 명령은 틀림없이 정확한 결과를 가져온다.
그 사례가 바로 김소월 자신의 삶이었다.
한 번 밖에 부여되지 않은 귀한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민족의 대표적 시인이 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소월은 우리에게 큰 스승이었다. 자신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에.
가수 송대관...
<쨍하고 해뜰 날 돌아 온단다>를 불렸던 가수 송대관은 한동안 주춤했다가
어느 날, 다시 가수로 복귀하여 인기를 점점 얻더니,
지금은 노랫말대로 진짜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오게 된 것이다.
가수 생활 10년이 넘도록 빛을 보지 못했다가 지금은 쨍하고 빛을 보게 되었다.
송대관은 그의 첫 히트곡이 <세월이 약이겠지요>였다.
이 노래 제목처럼 진짜로 세월이 약이 된 것이다.
무명 가수의 서러움을 딛고서 송대관이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조금 알린 계기가 된 노래였다.
이때가 1970년대 초반, 그리고 그 후 그의 노래 내용 그대로 세월을 기다린 끝에 "해 뜰 날"을 선 보였다.
(해 뜰 날;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모두 버려라.
안 되는 일 없단다 노력하면은,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이 노래 한 곡으로 그는 일약 한국 최고의 가수가 되고, 한 동안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가요계와 결별을 하고 미국 이민을 떠난다.
이때가 1980년 노래와 전연 상관이 없이 흔히 미국 교포들이 시작하는 막노동을 시작으로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슈퍼 마켓과 쇼핑 몰 사업을 노력 끝에 성공으로 일구었다.
거기서도 그는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사업의 성공 덕에 안정을 찾게 되자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친구 가수들이 뉴욕이나 워싱턴에 공연 차 와서 며칠 밤을 같이 보내고는
더욱 노래와 고향이 그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 것인가?
1988년 그는 다시 가요계로 돌아왔다. 오랜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가요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송 대관의 경우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해 뜰 날"이 흐르고 있으므로 노래를 하든 사업을 하든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역시 새 노래를 히트 시키기 위하여 작곡한 사람과 함께 수도 없이 되풀이하여 연습을 하였을 것이다.
노래의 맛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감정이 듬뿍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노래 부르는 사람이 그 노래 말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의식의 세계에서 노래 말을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다 보면 그것은 자연히 잠재의식으로 연결 되어 버린다.
이를 명령 받은 잠재의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훗날 현실의 세계에 정확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말이 씨가 되듯이 미국 인디언 속담에도 간절한 꿈을 만 번만 정성을 들여 되풀이하여 말하면
그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송 대관의 인생이 이를 증명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아직도 이 "해 뜰 날"을 자신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고마운 노래로 생각하고 있다.
최근의 히트 곡 "네 박자"와 함께....
그 또한 가수들의 징크스, 즉 곡에 따라 가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급적 부정적 노래는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그도 한때, '혼자랍니다.'를 무심코 불렀다가 실제로 6년 간이나 히트곡 없이 지낸 적이 있다.
또 이 시기에는 비록 자녀들 교육 때문이었지만 가족들과도 헤어져 지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으로만 생각되는가?
이제 그는 그의 표현대로 가사 내용이 적당하지 않은 '껄적지근한' 노래는 스스로 밝게 바꾸어 부른다.
그는 인생의 성공 비결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 역시 우리에게 큰 스승이다.
살아갈 길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에. 이제 우리는 어떤 마음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김 소월의 한 맺힌 절규인가, 송 대관의"해 뜰 날"인가?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취입하기 위해 같은 노래를 보통 2,000~3,000번이나 부른다고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그와 똑같은 일이 생겨난다고 한다.
가수가 처음 노래를 연습할 때 작곡가에게 얼마나 많은 핀잔을 들었겠나. 좀더 감정을 넣으라고.
감정을 있는 대로 넣어 부른 노래들은 자기 자신이 그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감정을 제대로 넣어 부른 노래가 히트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히트 한 노래를 수백, 수천 번을 불렀을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가사 내용이 잠재의식에 덜컥 연결되어 버린 것이다.
가사의 내용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린 잠재의식은 나중에 현실의 세계에다 그 노래 내용을 정확히 투영한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우리 국민들의 새벽을 여는 소리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였다.
새벽을 깨우며 어김없이 청소차로부터 울려 나왔던 이 노래는 시간에 맞춰 관공서, 학교 등지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고, 아울러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와 함께
우리 국민들은 새마을을 만들기 위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며 푸른 동산 알뜰살뜰 가꾸었다.
그 노래 덕분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선진국 대열의 문턱에서 그 노랫말처럼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 중 하나는 매일 아침 전국에 동시에 울렸던 새마을 노래였을 것이다.
"잘 살아보세~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힘찬 음성과 울려 퍼진 이 가사는 어떤 정책과 투자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 분명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듯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지난 시절에 불렸던 노래 가운데 <팔도 강산>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노래 가사에 "잘 살고 못사는 것
마음 먹기에 달렸더라"는 소절이 있어서 가난했던 시절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노래였다.
이 노래 가사 대로 우리 국민은 마음먹고 노력한 결과 오늘의 경제 부국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받은글]
-곽규석이 소개하는 최희준의 ‘팔도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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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제작] 당대 최고 스타들의 위문공연 '즐거운 위문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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