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위로 승승장구하던 일본 도요타자동차는 1980년대 들어 큰 고민에 빠졌다. 판매 대수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미국인들에게 '도요타=싸구려 차'라는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프리미엄 시장으로의 진출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좋은 성능으로 판매 대수는 도요타가 월등했지만 이익률은 독일 벤츠가 오히려 나았다. 도요타가 일본에서 판매하던 프리미엄급 대형 세단을 미국 시장에 선보이기도 했지만, '그 정도 돈을 주고 도요타를 사느니 벤츠나 캐딜락(GM)을 사겠다'가 당시 미국인 대다수의 반응이었다.
울분을 삼키던 도요타는 1983년 비밀리에 내부 조직을 꾸렸다. 프리미엄 시장 진입을 목표로 기존 차량의 내장재를 업그레이드하고 제품명도 다르게 달았다. 가장 고민을 했던 부분은 브랜드였다. 도요타와 다른 브랜드를 가져갈 것인지, 아니면 기존 도요타를 고수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론은 별도의 브랜드 론칭. 현재 도요타 이미지로는 영원히 미국 프리미엄 소비자를 공략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지금의 '렉서스(LEXUS)'가 탄생했고 1989년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도요타는 철저하게 브랜드를 이원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별도의 영업망과 서비스망을 구축해 렉서스 판매에 나섰다. 이중 낭비라는 내부 지적도 많았지만 도요타의 좋은 품질에 프리미엄 이미지가 붙은 렉서스는 출시와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며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고급차를 판매한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세계적 마케팅 거장인 필립 코틀러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그의 저서 'B2B 브랜드 마케팅'에서 "브랜드는 과거 경험이나 연상, 미래에 대한 기대에 기반하여 소비자들 마음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어두운 골목을 여행하며 불안감을 느끼는 여행자들도 상점 간판에 걸린 코카콜라 로고를 보면 안도감을 느낀다고 한다. PC에 부착된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로고도 제품에 신뢰감을 주는 하나의 요소다.
이처럼 브랜드가 제품의 성격을 결정짓거나 소비자에게 주는 인상은 강렬하다. LG전자가 초프리미엄 고객을 대상으로 'LG 시그니처(SIGNATURE)'라는 브랜드를 최근 선보인 것도 브랜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LG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톱5에 드는 가전업체다. TV의 경우 삼성전자에 이어 글로벌 시장점유율 2위이고 냉장고와 세탁기에서는 1위를 다툰다. 이런 LG도 고민이 있다. 초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싶은데 현재의 LG 브랜드만으로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성진 LG전자 홈앤어플라이언스(H&A) 사업본부장(사장)은 "LG 브랜드가 대중적인 이미지로 굳혀진 상황에서 초프리미엄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별도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라며 "2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생활가전 1위 브랜드로 꼽히는 미국 월풀도 키친에이드(KitchenAid)와 젠에어(Jenn-air) 같은 별도 브랜드를 두고 프리미엄 고객을 공략하고 있다. GE도 빌트인 가전 전문인 모노그램(Monogram)을 두고 있다.
프리미엄 시장은 성장세도 높다. 글로벌 가전 시장 규모는 생활가전(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오븐 등)이 약 250조원, TV가 약 100조원이다. 이 가운데 상위 5%가 초프리미엄 시장이고, 이 분야는 일반 시장 대비 성장률이 약 3배에 달한다. 특히 경기 불황 등에도 견조한 성장을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LG 시그니처는 LG전자 내 프리미엄 브랜드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러한 이미지가 LG 전 제품으로 확산되는 역할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자동차가 별도의 '제네시스(GENESIS)' 브랜드를 론칭한 것도 이러한 낙수효과를 통해 질적·양적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LG전자는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 2016'에서 LG 시그니처 브랜드와 제품을 공개했다. 이들 제품의 특징은 제품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다는 점이다. LG 시그니처 올레드 TV(모델명: 55G6, 65G6)는 본질적 요소인 화면에 철저하게 집중했다. 올레드 화면 이외의 부수적인 요소들이 보이지 않도록 얇은 베젤(TV 테두리)을 적용했다. 두께 2.57㎜의 얇은 올레드 패널 뒤에 투명한 강화유리를 적용해 고급스러운 느낌을 더했다.
LG 시그니처 세탁기는 상단의 12㎏ 드럼세탁기와 하단의 2㎏ 미니워시를 결합한 제품이다. 강화유리 재질의 도어와 터치 방식을 적용한 7인치 원형 디스플레이 조작부, 내구성이 뛰어나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의 법랑 소재 등을 적용해 기존 세탁기 디자인과는 눈에 띄게 차별화했다.
LG 시그니처 냉장고는 '냉장고 속 미니 냉장고'로 불리는 신개념 수납 공간인 '매직스페이스'를 투명하게 제작했다. LG 스마트폰의 '노크온' 기능을 접목해 매직스페이스를 두 번 두드리면 냉장고 내부 조명이 켜지면서 투명한 창을 통해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준다.
LG 시그니처 공기청정기는 건식(乾式) 청정 방식과 습식(濕式) 청정 방식을 결합한 가습 공기청정 제품이다. LG전자는 아래에서 유입된 공기가 건식 필터를 통과한 후 위에서 물을 통해 한 번 더 정화되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상단을 투명하게 제작했다.
■ 노창호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 "'시그니처' 디자인 LG다움 담았죠"
"LG다움의 디자인을 시그니처에 녹였습니다."
지난 15일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LG전자 서초 R&D센터에서 만난 노창호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은 'LG시그니처' 디자인을 한마디로 'LG다움'이라고 정의했다.
노창호 센터장은 "오래 써도 빛나는 제품,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이 LG다움의 디자인"이라며 "내구성과 사용성에 주안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TV를 볼 때 화면 이외에 다른 부수적인 것이 보이지 않아야 몰입할 수 있고 냉장고도 내부를 손쉽게 볼 수 있으면 사용이 더 편리할 것"이라며 "제품의 본질적인 기능에 더 접근하려는 것이 시그니처 디자인의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시그니처 디자인에는 내부의 '1등 디자인 위원회'도 깊이 관여했다. 2014년 만들어진 위원회는 주요 사업부문 최고경영자(CEO)와 최고기술책임자(CTO)뿐 아니라 덴마크 명품 오디오업체 뱅앤드올룹슨(B&O)의 디자이너인 톨스텐 밸루어 등이 자문위원으로 있다.
LG시그니처 브랜드를 내놓기까지 어려움은 없었을까? 노 센터장은 "TV의 테두리를 거의 없애고 냉장고에 투명창을 달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기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원래 디자인에 최대한 가깝게 제품을 구현하려는 기술진의 노력이 없었다면 시그니처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그니처 제품의 색상은 블랙과 화이트가 주종이다. 최근 컬러풀한 가전제품도 많이 나오지만 시그니처는 오래 써도 질리지 않을 색을 선택했다. 그는 "트렌드를 그때 그때 반영하는 제품이 아니라 트렌드와 무관하게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 제품을 만들려고 했다"며 "블랙과 화이트, 메탈 소재가 바로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그니처 디자인에는 다양한 제품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집약되기도 했다. 세탁기에 적용된 퀵 서클 다이얼은 스마트폰 G3에서 처음 적용된 디자인이었다. 아이콘 배치도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노 센터장은 "자동차회사인 포드가 트렁크에 발을 갖다 대면 문이 열리는 제품을 선보였는데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발로 문이 열리는 시그니처 냉장고를 기획했다"며 "단순히 좋은 기능을 넣기보다는 고객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넣는 것에 주력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