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ddest Day: 30 April 1975 (The Fall of Saigon)
사이공 함락
1973년 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협정 조인을 했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고,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까지 서명에 참여시켰다.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모두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했다. 만약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공산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휴전협정이후 자유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어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휴전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자유월남 국민들은 스스로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고 극심한 정쟁에 휘말려 더욱 혼란스러워 졌다. 군대도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휴전협정 조인후 2년후인 1975년 1월8일, 월맹군은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스스로 자유를 지킬려는 의지가 없는 자유월남은 파죽지세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월맹이 공세를 시작한지 3개월여만에 전국토가 함락당했다.
1975년 4월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 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 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대한민국도 현재 휴전선이 존재하고 남과 북이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는것을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자유월남의 패망은 우리에겐 값비싼 교훈이다.
(자료정리:월남전과 한국 vietvet.co.kr)
지금도 옛 사이공 대통령궁에 가면 지하 작전상황실에 1968년 6월29일자 전체 아군들의 병력현황이 붙어있다. 한국군(DAI HAN) 병력은 50,355명이 월남땅에 주둔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