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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5일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2티모 1,1-3.6-12
복 음 : 마르 12,18-27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인의 딜레마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기 위해 일하느냐, 일하기 위해서 사느냐?”
솔직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삶과 일은 이렇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은 삶과 일을 분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일도 나의 삶임을 인정하면 일 자체에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이 나의 삶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차이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헬렌과 스콧 니어링이 쓴 ‘조화로운 삶’에서
“경제적 노력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삶이다.”라고 말합니다.
일하는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심오한 믿음과 진솔한 감정들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당의 한 고등학생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제 성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학생은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회에 나가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고 또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지위를 얻는 것도 행복할 것 같고,
사제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은 채우면 더 갖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사제의 길은 세상 것을 멀리하며 대신 삶과 일 모두가 주님을 향하기에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반드시 성직자, 수도자로 살아야만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쉽게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여건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조화로운 멋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기억한다면
주님 뜻에 맞춰서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기들의 주장이 맞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만 따지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을 부정하려고 인간의 논리로 하느님 나라를 재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십니다.
앞서 조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 안에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에 맞춘 삶, 이 세상의 언어와 논리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춰서 그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무엇보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을 대표하는 그들이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유식한 무지를 행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가 봅니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사람은 결국 죽은 사람이요, 거기서 나오는 사람은 산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주제를 알고 살리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은 세월이 가도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진리이기에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는 예수님의 질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선입견, 편견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생명의 창조주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삶의 희망으로 이끄십니다.
부활을 믿는 이의 삶은 이 세상의 산고를 겪으며 기쁨과 평화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에,
현실에 타협하며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며 온갖 세상 것에 매이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늘을 인내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는 기쁨 속에 산 이들의 하느님을 만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분을 죽음까지도 극복하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12,27)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손희송).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곡된 신앙’(잘못된 신앙)이 가져온 불신,
곧 ‘잘못된 생각’에 구속되어 버린 ‘영적무지’와 믿음이 가져온 ‘신적지혜’의 자유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성경’과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밝힙니다.
‘성경’에 대해,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고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기에,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집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이를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3,6)를 인용하여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느님 능력’에 대해,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곧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고,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 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불신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지만,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다니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시고,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소서.
믿음으로 기뻐하며,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십시일반(十匙一飯),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도와주기는 쉽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쉬운 일일지라도 함께하면 더 좋다는 뜻입니다.
저는 십시일반의 현장을 보았습니다. 본당에 청년 성가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작년에 부주임 신부님이 오면서 청년들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한주는 성경 공부, 한주는 친교를 하면서 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성가대가 출범했습니다.
청년 성가대에서 ‘단복’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마침 본당에서는 한국에 성가책 300권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택배를 부치려면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말처럼 택배비용이 성가책 구매비용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10시 미사 성가 단장이 한 가지 제안했습니다.
올여름에 성가대원들 중에 한국 가는 단원들이 있는데
미국 오는 길에 한 박스씩 가져오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택배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청년 성가대 단복을 사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10박스면 부피도 크고, 무게도 150킬로로 부담되지만,
1박스는 큰 부담 없이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청년 성가대를 아껴주는 어른 성가대원들의 따뜻한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아 주시는 성가대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멀리 한국에서 일을 도와주시는 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복음서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께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지붕을 들어내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십시일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먹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이 많아서 어렵겠다고 하였습니다. 돈도 많이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먹을 것이 없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중물의 위력을 알고 있습니다.
펌프에 물 한 바가지를 넣고 힘껏 펌프를 움직이면
한 바가지의 물로 5천 바가지의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하에는 많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 다음, 보리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십시일반과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만나니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행동의 문제였습니다.
천국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지 않고,
이웃에게 음식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무것도 흘리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옥은 아주 긴 수저가 있는데 그 수저로 자기의 입에 음식을 넣으려 하니 아주 불편하였습니다.
음식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는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십시일반으로, 백지장도 서로 맞드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천국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애벌레는 땅 위를 기어다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불만도 없습니다.
하지만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나비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다니지 않습니다. 나비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한 마리의 애벌레가 하나의 천사가 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도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날개 잃어버린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의 삶으로 죽음이라는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천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참으로 존경스러운 형제들이 있습니다.
이역만리 물설고 낯선 땅으로 건너가서, 한두 해가 아니라
십 년, 이십 년, 아니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형제들입니다.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도 수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지리산이나 금강산 능선 타듯이
극복해야 할 도전들이 줄지어 기다립니다.
평생 노력해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언어 문제, 문화 차이, 식습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그저 직진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딱 그랬습니다.
주교님의 어록을 묵상하다 보니, 세상 모든 선교사들의 이정표요 모델이 따로 없습니다.
“비록 흔들리는 배인 우리 교회이지만,
그 안에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승선하고 진두지휘하시니 우리 교회는 안전합니다.
비록 전후좌우로 쉼 없이 흔들리지만
굳건한 안전장치인 주님의 현존에 힘입어 부단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꾸준히 전합시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는 구원의 문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교도들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외쳤습니다.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우상숭배를 버리지 않던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던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우리나라로 치면 당산(堂山) 나무처럼 여기는 그들의 참나무 신목(神木)을 과감하게 베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로 소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가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의 목숨 걸고 선교활동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선교 사업이 언제나 탄탄대로만을 걸은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때로 혹독한 실패도 맛보았고 눈물을 머금고 철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포기란 없었습니다.
일단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고, 지난 상황을 복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또 다시 선교활동의 성공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었습니다.
효과적인 전략을 세운 후, 또 다시 시도하고, 그래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보니파시오 주교님도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평생토록 수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존경받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기도하면서 편안히 노후를 보내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사랑과 구원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교도들의 영혼이
늘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연로한 몸을 추스르고 고단한 선교 여행을 떠나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앙심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전도 여행 중에 머리에 칼을 맞고 땅에 쓰러졌습니다.
보니파시오 주교님께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언제나 한결같이 지니고 계셨던
영혼 구원을 향한 활화산 같은 열정이
오늘 우리 마음 안에서도 솟아나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짖지 못하는 개가 되거나 말 못 하는 양치기가 되지 맙시다.
늑대가 가까이 올 때 도망쳐 버리는 삯꾼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키는 충실한 목자가 됩시다.”
“고통과 고뇌의 날들이 우리에게 닥쳐온 이때,
주님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굳건한 자세로 전투에 임합시다.
우리 선조들과 함께 영원한 유산을 나누어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거룩한 법을 수호하기 위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까지 불사합시다.”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
조욱현 토마 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질문은 신명 25,5 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우리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닌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12,25)
대중음악의 영향력은 우리 같은 신분의 사람들은
때론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일들이 예전과 달리 표출되고 있습니다.
‘송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임영웅’에게서 트로트의 인기는 그 절정에 도달한 듯합니다.
그런데 ‘김연자’가 불러 메가 히트를 한 「아모르파티」의 노래 가사 중에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노랫말의 영향력은 사뭇 심각합니다.
이 노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아모르 파티 아모르파티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고 노래하는 가운데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이라는 노랫말은
이 노래 이전부터 일기 시작한 새로운 결혼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전통적 결혼관에 익숙했던 흐름이 사회 경제 문화적 요인과 결부되면서
결혼관에 엄청난 영향을 가져다주었고, 이런 사조에 잘 알려진 미혼 셀렙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잖아요.
헌신과 포기를 미덕으로 여겼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각자 자기의 행복에 집중하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특히 소신 있는 배우 김혜수는
"누군가의 여자 말고 내 이름 석자를 빛내면서 멋있게 사는 게 좋다." 하고,
영원한 쓰앵님 김서형은 "이미 일과 결혼했다. 결혼엔 관심 없다."
원조 국민 여동생 문근영은
"어디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하고
자신들의 결혼관, 곧 ‘비혼’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구약의 신명기에 근거해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후사, 대代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엉뚱한 근거를 들어 질문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는 곧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12,24)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를 포함해서 남녀 수도자와 사제들은
하늘나라를 위해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 이전에 하느님의 이끄심과
이런 삶을 살도록 허락하시고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허락된 이들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들이 바로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이다.”(마태 19,10.~12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이미 예수님은 허락된 이들에게만 주어진 하느님의 섭리이며,
세상에서 독신, 동정이 바로 하늘나라에서 천사적 삶의 예표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물론 사두가이들은 무지했고 아전인수식으로 성경을 해석한 오류를 범했고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상상하는 것조차 불편합니다.
만일! 제 형들이나 동생이 자식 없이 죽었다면,
.... 상상하기만 해도 불편한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예수님은
이런 극단적인 강변을 일축하고 새로운 길과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그 까닭은, 첫째로 하늘나라에서, 부활한 삶은 세상에서처럼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천사들처럼 영적인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12,25참조)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12,27) 라는 명백한 증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화석과 같은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더 굳건히 함으로써
우리의 잘못과 오류의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하늘나라에서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누군가가 아니라 모든 이의 한 사람이 될 것임을 믿습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