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 동무 몇과 인왕산을 올랐다. 우리집 가까운 곳에 있어서 자주 오르는 산이지만 갈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든다.
국보로 지정된 그림인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인왕산을 명산이라 생각하는데 그리 높지 않으면서도 산을 타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인왕산은 오르는 길도 정해져 있고 하산길도 일정한 편이다.
국사당에서 출발해 선바위를 보고 정상에 올라 청운동으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이거나 기차바위를 거쳐 홍제동으로 내려가는 긴 코스 중 하나다.
이날은 홍제동 개미마을로 내려갔다. 내가 가난하게 살아선지 골목이 있고 달동네 맛이 나는 이런 마을이 참 정겹게 다가온다.
호박 덩굴 아래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길고양이를 만났다. 이사를 가면서 두고 갔던지 아니면 스스로 집을 나왔는지는 몰라도 오랜 기간 야생에서 산 탓인지 잔뜩 경계를 한다.
그냥 못 지나가고 한참을 바라봤다. 한때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받았을 고양이는 지금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까.
난생 처음 겪는 한가위 폭염 아래서 산을 타고 내려왔다가 고양이를 보자 문득 오래전의 생각이 떠올랐다.
서른 아홉에 혼자가 된 울 엄니는 줄줄이 달린 자식들 다 키워서 도시로 내 보내고도 여전히 혼자였다.
엄니도 여자인데 이따금 솟는 뜨거운 욕망을 억누르며 그 긴긴 밤을 홀로 지새운 날이 몇 날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엄니의 일생이 참으로 가련하다.
이따금 고향에 내려가면 장독대 옆 꽃밭에는 엄니가 가꾼 정갈한 꽃들이 반겨 주었지만 그녀의 허전함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리라.
분꽃, 봉숭아, 나팔꽃, 맨드라미 등, 해마다 반복해서 피는 꽃은 그대로였지만 엄니는 나날이 늙어 갔다.
어느 해인가 고향 집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가끔 마당에 출몰하던 길고양이가 그냥 눌러 앉았다고 했다.
처음 보는 나를 경계하며 엄니 곁을 맴돌던 고양이가 밤이 되자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랫 동안 매일 밤 엄니와 한방에서 잤다고 한다.
고양이는 엄니 옆에 누우면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평온할 때 나오는 소리라 했다.
팔십 노인들이 모이는 마을 회관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엄니에게 고양이가 유일한 친구였을 것이다.
그 이듬해였던가. 고향에 갔더니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그해 봄 엄니는 오랜만에 큰 누이집에 가서 일주일쯤 머물다 왔는데 그 사이 고양이가 집을 나갔는지 안 보이더라고 했다. 몇 달이 지났지만 엄니는 여태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엄니는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고 했지만 고양이 입장에서는 엄니가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다음해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느 날 고향에 갔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어라? 집 나간 고양이가 돌아왔나 봐유."
"아녀, 털 색깔은 비슷헌디 발과 콧잔등의 무늬가 달러."
하긴 매일 밤 고양이를 쓰다듬었던 엄니한테는 고양이 발이 아니라 발바닥 무늬까지 손이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집을 나간 고양이 자손인지 모르지만 이 고양이도 이따금 장독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길고양이였는데 엄니가 주는 멸치에 맛을 들여 눌러 앉았다고 했다.
엄니는 예전에 나비라 불렀던 고양이처럼 이 고양이도 나비라고 했고 여전히 밤이면 엄니 옆에서 갸르릉 소리를 내면서 잠을 잤다.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나비가 경계심을 풀고 내 손등을 핥았는데 그리 싫지는 않았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오래오래 엄니와 함께하기를 바랬다.
엄니는 오래 집을 비우면 나비가 떠날까 봐서 딸네집에 갈 때면 꼭 이웃 사람에게 고양이 밥을 부탁했고 사흘을 넘기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 고양이는 한 10년 가까이 엄니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1년에 고작 한두 번 내려오는 막내 아들은 엄니에게 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밥 한 술 제대로 뜨는 둥 마는 둥 옆동네와 뒷동네로 쏘다니며 친구들 만나기에 바빴다.
나는 고양이의 행방뿐 아니라 엄니의 외로움도 몰라 주던 무심한 아들이었다.
엊그제 인왕산 아래에서 만난 고양이를 보자 떠오른 옛 생각이다. 뒤늦게 달린 이 애호박은 가을이 가기 전에 무사히 익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애호박은 저 길고양이의 응원을 받으며 무난히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없어진 고향이 그리워지게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
심송님, 저도 어머니 세상 떠난 후 고향엘 자주 가지 않게 되니 없어진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답니다.
대신 지금 사는 곳을 고향이라 여기며 살지요. 그래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옛 기억을 돌아볼 때가 행복하답니다.ㅎ
글을 어쩜 이맇게도 정갈하게 맛나게 읽는사람으로 하여금 편하게....결국엔 정독까지 하겠끔 잘 쓸까요? ㅎ
모처럼 정독하는 나 자신이 뿌듯하기까지 해부네요.
정겨운 글...엊그제 다녀 왔지만 또 엄니가...아직은 좀 고약하신 엄니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아들..며느리들만 커피숍 갈까바 째려보시는 울 엄니.
모시고 가봤자 뿌담시 왔다고 투덜거리는시는 울엄니.
마을회관 소재거리로 따라 나선줄 뻔히 알지만.....언젠가는 우리끼리만 가고 싶어하는 나.
애호박돼지찌게를 특별하게 잘 끓이시는 엄니가 생각나는 글 잘보고 갑니다.
아하~ 어머니를 생각하는 미스타김님의 효성을 느낄 수 있는 댓글입니다. 저도 생전의 어머니와는 자주 의견 충돌이 있었고 청개구리처럼 속을 많이 썩힌 아들이었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니한테 잘 해드린 것보다 못 해준 것만 자꾸 떠오르니 속죄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울 엄니도 조갯살 넣고 끓인 애호박 된장찌개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호박을 밑에 깔고 풋고추 넉넉히 넣고 만든 엄니의 칼칼한 갈치조림도 잊을 수가 없답니다. 갈수록 이런 추억을 돌아보며 나이 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싶네요.ㅎ
2년 반 전까지만 해도 인왕산로1가 에 살았던
칼라풀 입니다
삼각산을 못갈땐 가끔씩 동네 뒷산인 인왕산을
다니기도 했지만 야간산행으로 가기에도
안성맞춤인 산이지요
정들었던 인왕산 그리고 뒷길에 핀 이름모를 풀들..
출퇴근이 피곤해서 회사근처로 이사오는 바람에
이제는 자주 접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네요
추석지나 인왕산 나의길 이었던 곳을 함 가보려
했으나 동대문에서 일보고 피곤해서 집으로
바로 와 버렸네요,,ㅎ
그리워라~~
그곳 그길들~~~
어머니의 푸릇한 물이 뚜욱뚝 떨어졌던
그 젊은시절이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명절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 입니다
늘 건행하십시요..
칼라풀님이 인왕산 바로 아래 사셨기에 누구보다 인왕산을 잘 아시는 분이라 반가움이 앞섭니다. 님의 말씀처럼 야경을 보기에도 인왕산만한 곳이 없습니다. 이 답글에 제가 찍은 야경을 올리려고 했더니 그 사진을 찾을 수가 없네요.ㅎ
저도 삼각산을 못갈 때는 인왕산을 자주 오르고 좀 아쉬울 때는 내처 북악산까지 올랐다가 삼청동으로 내려가거나 안산과 연계해서 봉원사로 내려오기도 하지요.
제가 인왕산을 백 번은 안 되지만 지금까지 오십 번은 족히 넘게 오른 것 같네요. 운동뿐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머리 식히는 데는 등산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제 글로 칼라풀님이 인왕산 추억을 떠올리셨다니 다행이네요. 인왕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니 훗날 찾아가도 반겨줄 겁니다. 참으로 건전하고 멋지게 사시는 칼라풀님 내내 평온한 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유현덕 전에 글 댓글에
소극장 산울림도
같은 맥락이라
그래도 통하는 부분이
있네요
반깁니다
@칼라풀 ㅎ 기억하네요. 서로 통하는 점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어릴 적에는 산에 가면 야호를 외쳐서 대답하는 산울림을 듣기도 했는데 이것도 아득한 추억입니다.
내리는 밤비가 가을 오는 소리처럼 들려 참 좋습니다. 고운밤 되세요.
호박은 애 호박 적에도 맛있고 늙어 푹 익어도 맛있는
어느 채소보다 먹을게 알뜰하지요 부인 병에 약재로도 쓰이는 호박
어머니들은 어쩜 호박처럼 줄기마다 열매를 달고 평생을 쏟아지는
불볕 더위를 머리에 인 듯 살아 오시지 않았을까요
호박은 씨만 넣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억척 식물이지요
운선님 말씀처럼 호박의 쓰임새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저 어릴 때도 텃밭은 물론 변소 지붕까지 호박이 열려 가을이면 마루 한쪽에는 노랗게 익은 맷돌호박이 쌓여 있기도 했지요.
엊그제 봤던 호박은 빈집 앞이었는데 주민이 관상용을 겸해서 심은 것 같았습니다. 못 생긴 꽃을 호박꽃이라 한다지만 제 눈에는 호박꽃도 참 예쁘답니다.
비가 내리는 주말 밤이네요. 항상 건강하시길요.ㅎ
우리 시골에 인심 이 똑 같아요. 글 씨가 나날이 발전하는 좋은 소식이 있어요
ㅎ 그렇군요.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사시는 자연님이 좋게 읽어주시니 저도 좋습니다.
엄마와 고양이의 추억 감명싶게 잘 읽었습니다.
고양이에 대한 글이라 더욱 정감이 갑니다,
우리집에도 고양이 9마리 있어요.
방안에 5마리,외출냥이 4마리,
이름은,야옹이,떼오,플린,복실이,스티븐,순이,이쁜이,노랭이, 까미,입니다.
ㅎ 케빈님 제 글을 뒤늦게 읽으셨네요. 고양이를 아홉 마리나 돌보신다니 대단한 케빈님이십니다.
제 지인 중에도 동네 체육공원을 다니며 고양이 먹이를 주는 길고양이 엄마가 있어서 본문에 언급했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서 지웠더랩니다.
고양이 이름도 영어 한글 다양하고 하나하나 기억하시는 케빈님의 고양이 사랑에 박수 보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