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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6일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 2티모 2,8-15
복 음 : 마르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분이 갑작스럽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 단계에 있는데, 이분의 소식을 들은 몇몇 지인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반가웠지만 그냥 빨리 집에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위로를 해준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지만, 자기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오히려 그들을 응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문안 오겠다는 분에게 오지 말라면서 나중에 다 낫고 밖에서 보자고 말했습니다.
‘이제 좀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주지 않으니 이상하게 외롭고 사람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힘들어졌습니다.
사실 병문안 자체, 즉 사람과의 만남만으로도 어렵고 힘들 때 분명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함께 사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도 말하지만, 그 누군가 때문에 살기도 하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점점 이 사회는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고독사, 즉 주위에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혼자 죽는 사람이
한 해에 4만 명 가까이 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독사 역시 2023년 한 해 동안 3,000명 넘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역시 외로움이 만연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혼밥, 혼술 등의 용어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불편함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만이 누군가 함께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완전히 자신을 낮추셨기에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낮추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위해,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을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지요.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째가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를 짓누르고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식물인간이 되어 혼수상태로 있던 사람이 열흘 만에, 어떤 사람은 2년 만에,
어떤 사람은 무려 28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누군가가 지극한 정성으로 그를 돌봤다는 사실입니다.
의식은 없지만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지극한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랑의 헌신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의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하느님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관계의 기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마음과 목숨, 힘을 다한 존재 전체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바르게 사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너그럽고 시간을 내고 관심을 쏟으며
변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바라는 것같이 이웃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3,18)하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많았습니다.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을 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두를 내어 주셨습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그 앎이 온몸에 배어서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몸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더 큰 사랑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 자체 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오늘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의 사두가이와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부활과 부활체의 특성,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교사는 그 생명의 길인 ‘계명’에 대해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그 계명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왜 중히 여겨야 하는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곧 행위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명분과 정당성을 밝혀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지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과
‘우리 주님’이시라는 의미와 동시에, 우리의 존재와 의미도 밝혀 줍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분의 소유’로 그분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나아가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차지, 소유로 삼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니 그는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그가 계명을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를 몸소 실행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아직 선포되지 않은 “새 계명”에 따라 실행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뒤에 선포하게 될 “새 계명”은 구약의 이중계명과는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요한복음>에서 선포된 “새 계명”은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15,12)로 바뀌게 됩니다.
곧 당신이 ‘먼저 베푼 사랑’을 서로 베푸는 ‘하느님 사랑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삶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혹 ‘이익을 얻는 법’, ‘손해 보지 않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가?
더구나 ‘미워하는 법’을 배워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먼저 앞세우고 있가?” 물어야 할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사랑’과 ‘하느님’을 앞세우고 있다면,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머리가 가득 차 있어
늘 하느님과 사랑에 대한 말을 할 것이고, 사랑하기 위해 고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무엇에 제일 관심이 많고,
무슨 생각을 제일 많이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느님인가? 나 자신인가? 세상인가? 재물인가”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원래는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진상(珍賞)입니다. 진상'의 유력한 어원 중 하나는 바로
'왕이나 고위층에게 진귀한 물건이나 지방의 토산품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쓰이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진상'의 어원으로 꼽힌 이유는
진상이 가지는 폐단 때문이었습니다.
말로는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예우라고 하지만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에게는 귀한 것을 마련하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고,
구하기 힘든 것을 요구해 부담이 가중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진상이 지닌 폐단이 부각 되면서 '허름하고 나쁜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었고,
현대에 와서 많이 쓰이는 '진상'은 그 부정적 의미를 차용하여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땅콩회황’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이렇습니다.
땅콩은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있기에 봉지를 드리고 먹겠다고 하면
접시에 담아 드리는 것이 매뉴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상 손님이 땅콩을 접시에 담아 주지 않고,
봉지로 주었다고 화를 내면서 비행기를 멈춰 세웠습니다.
그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후에 비행기를 출발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믿고,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혔던 ‘진상’의 한 예입니다.
이런 진상의 이야기는 곧잘 언론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인데 그 의미가 퇴색된 단어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의 원래 의미는 ‘분리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바리사이는 죽은 이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바리사이는 이정표와 같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따르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사이는 특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진상’ 행위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하는 말은 지키고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마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지고 가야 할 짐을 남에게 맡겼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하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의 조문을 외우지만, 율법과 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릇의 겉만 닦고 속은 닦지 않는 것처럼,
바리사이는 겉은 화려하게 꾸미지만 속마음은 탐욕과 거짓으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얄팍한 지식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모든 바리사이가 진상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코데모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습니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인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진상 신자, 진상 성직자와 수도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첫째가는 계명
조욱현 토마 신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두 가지 큰 계명을 들어 그것을 하나로 만들어 대답하신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유대교 교리의 진수와 신앙의 기초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라는 말씀을 하시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유일한 증명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행함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말로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겸손하게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위엄을 가장 잘 찬미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마음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조그마한 갈라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찮은 것에 사랑을 쏟아붓는다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그 사랑이 그만큼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정이라는 말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갈림 없는 사랑의 삶이라고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1절)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이웃을 모른 체 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여 자비를 보여준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확증은
바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는 일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율법 학자는 그 대답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덧붙여 말한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33절).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고 축복해 주셨다.
나는 어떻게 이 계명을 살아가고 있는가?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12,28ㄱㄷ-34)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요즘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는
‘답장너 loaded question'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현문현답賢問賢答의 전형적인 실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예전 학창 시절을 떠오르면
부끄러움이 많은 학생이었기에, 선뜻 질문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르는 것,
혹 불확실한 것을 명백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얻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인생의 과정입니다.
일찍이 ’테야르 드 샤르댕‘은 생명에게는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면서
가능한 모든 길을 찾아보려는 방향성이 있으며,
이것이 진화를 부채질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둠은 빛의 부재뿐만 아니라 모름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둠은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무명無明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찾아 열심히 더듬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고 있으며
어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아무튼 율법 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 사이의 토론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들은 까닭은 바로 그의 내적 호기심의 발로이며,
무려 613개 조항의 계명 가운데 도대체 으뜸가는 계명은 어떤 계명일까, 하고 물어왔기에,
이 토론을 지켜보면서 이분이시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고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12,28)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 율법 학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이 갖고 있던 오래고 묵은 질문이었지만,
아무도 감히 질문하지 못한 것은 저처럼 부끄러움이 많거나, 호기심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율법 학자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알고 싶었던
으뜸 계명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질문을 받고서 예수님은 비로소,
구약과 신약을 집약하고 요약해서 단 두 가지로(=사랑의 이중 계명) 총괄합니다.
즉,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30.31)
하느님 사랑이 첫째이며 이웃 사랑이 둘째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두 사랑은, 특별히 마태오 25장의 최후 심판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발로라고 밝힘에서 그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고
전제하고서 계명을 말씀하셨고, 이 가르침을 듣고 난 다음에 율법 학자 역시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12,32)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이 표현의 의미를 새겨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하냐고!, 라는 표현처럼
본말이 전도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순서와 가치 서열을 파악하기 이전에,
그리스도인 존재의 실천 원리로서 계명을 논하기 이전에,
이 계명의 기원과 왜 이 계명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와 기원은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 모두 다 그분의 자녀이고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과 목숨, 정신과 힘을 다해 이를 깨우쳐 깨달을 때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리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론이 아닌 실재이며, 계명이 아닌 존재 이유이고 보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율법 학자가 이런 대답을 하기 이전부터
그렇게 노력하면서 살아 온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 34)하고
칭찬과 함께 그런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독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슬기롭게 대답한 율법 학자처럼
슬기롭게 대답할 뿐만 아니라 실천하면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그 빛으로, 그 진리로 오늘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최정훈 바오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합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
이 두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본성과도 같아 이겨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를 사랑할 때도 그 사랑 안에는 언제나 자신을 향하는 사랑이 섞여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조차도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는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애(自己愛)와,
그로 말미암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원죄’로 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전부일 수 없게 하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바로 원죄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 47-48면 참조).
자기애를 이겨 내려면 끊임없이 하느님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느님과 이웃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거나 배제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에 두었을 때 그 누구도 결코 도구화되거나 소외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 번째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계명이 자연스럽게 실현됩니다.
이러한 삶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참되게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는 인간은,
순수하고 참된 사랑을 할 때 본모습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잘 돌보려면 이기주의적인 자기애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시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애를 버리고 하느님을 향할 때,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